아아 그리운 정규복 선생님,
대학교에 계열별로 입학하였는데, 나는 신입생 시절부터 국문학과장이시던 교수연구실을 내방처럼 드나들었다.
“국어사전은 어느 것으로 살까요?” 하는 햇병아리 질문부터 강의시간표를 짜면서 담당교수들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학과생이나 논문 지도학생들보다 더 많은 대화를 이어갔다.
수업시간에는 구운몽을 열강하시는 교수님 입에서 쉴 새 없이 튀기는 침세례 속에서도 맨 앞자리 앉아 열심히 경청했다. 그런 내가 대견하셨던 것일까. 수강신청만 하면 어김없이 A학점을 주셨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근규 군은 조지훈 선생님의 대를 이을 것이야...”라고 칭찬하며 응원해주셨다. 실제로 내 꿈은 대학교수였으니, 언감생심 조동탁 선생님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최고의 격려가 아닐 수 없었다.
1979년 10.26, 12.12, 80년 서울의 봄, 광주5.18...
당시의 우리는 혼돈과 격동의 시대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국문학과 총회 동의를 거쳐 선비에서 운동권 총학생회장이 된 나는 1년 임기 내내 피해 다니느라 학교 수업은 물론 시험시간에 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출결사항과 시험불참에 따른 내 상황으로는 학점이 0.00이 분명했다. 그리되면 학사경고가 아니므로 다음 학기에 충분한 학점을 따서 졸업학점인 140학점을 채울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성적표를 받아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다른 과목은 모두 예상대로 0.00점이었는데, 정규복 교수님께서는 A학점을 주신 것이었다. 교수님께 성적을 0.00으로 고쳐달라고 부탁할 요량으로 홍제동 자택으로 쳐들어갔다. 저녁상을 차려주는 따님은 77학번 정경진 과선배였는데, 화사하게 웃으며 뭔 일로 왔는지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나는 점수를 없애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말문을 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레 어리광처럼 여쭈었다. “교수님, 어떻게 제가 A학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헛헛헛... 그게 고마워서 집까지 찾아왔군. 이 사람아, 내가 명색이 선생인데 자네의 세세한 사정을 모를 리가 있나. 이근규 군은 평소에 책도 많이 읽고, 강의도 열심히 듣고 더구나 국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지 않은가.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알고 말고...“
그래서 수업도 한 번 들어오지 못하고 시험조차 못 본 나에게 교수님 재량으로 A학점을 주셨다는 말씀이었다. 그런 선생님께 차마 학점취소를 요청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과일상을 봐온 따님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자 ‘학점을 없애려면 교수님은 시말서를 써야한다’고 내게만 살짝 귀띔까지 하였으니...
결국 선생님과 밤늦도록 구운몽 이야기만 나누며 사제지간의 정만 두둑히 쌓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길을 걸으며 곰곰 생각해 보니 나를 진정으로 높이 평가해주신 선생님의 소신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1985년 3월 30일로 결혼식 날짜로 잡고, 불문곡직하고 예비신부 손을 끌고 정규복 교수님 연구실을 찾아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주례를 맡아주셔야 한다는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일정을 짚어보시더니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 하셨다.
곧 프랑스 파리로 출발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환교수로 떠나게 되어 새 학기가 시작되기 몇 주일쯤 일찍 도착해 짐도 정리하고 거리도 익히고 학교 오리엔테이션도 받기로 해, 비행기까지 예약했다는 말씀이셨다.
나로서는 너무도 아쉬웠다. 진심으로 주례 선생님으로 모시고 싶었는데...
이런 나를 보시더니, 선생님께서는 껄껄껄 웃으시면서 선생님의 수필집 ‘인생송가(人生頌歌)’를 꺼내 ‘이근규 군 정규복’, '김향미 양 정규복'이라고 쓰시더니 낙관까지 꾹 찍어주셨다. 그 책표지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발자취, 아마도 다른 친구들이 인생의 장엄한 대양을 건널 때 외롭게 파선을 당한 형제들이 이를 보고 다시 용기를 얻으리라.
그러면 전진하세, 어느 운명에도 굴함이 없이 더욱 성취하면서, 더욱 추구하면서 노동을 하고 기다림을 배우라.“
교수님 연구실을 나서서 예비신부와 함께 홍일식 고려대학교 총장님을 찾아뵙고 주례약속을 받았다. 물론 정규복 교수님을 만나고 온 이야기도 말씀드렸다.
그런데 결혼식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정규복 교수님께서 전화를 해오셨다.
“이군, 잘되었네. 아무래도 내가 자네 주례를 서야할 것 같아서 프랑스 대학교에 연락을 해서 조금만 일정을 늦춰달라고 요청했었네. 조금 전에 승낙한다는 답이 왔어. 아무래도 자네 주례야 내가 꼭 서야지... 암..” 기쁨에 넘친 음색이었다.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 이 형편없는 제자 놈을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그런데 어쩌나 이미 대학교 총장님께 주례약속을 받아놓았으니...
어쨌든 백배 사죄하면서 사실을 말씀드리고 교수님의 양해를 구했다.
결혼식날 선생님은 아주 오래된 가죽가방을 들고 주례보다 일찍 예식장에 오셨다. 그리고 학교 교실에서 내가 그랬듯 선생님께서는 맨 앞줄에 앉아 계셨다.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어깨를 흔들며 보듬어 주셨다.
“야아~ 내가 프랑스 가는 걸 미루고, 이군 장가가는 걸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잘 되었어 정말..”
부끄럽게도, 이렇게 내게 진심을 다해 주신 선생님을 나는 제대로 못 모셨다. 프랑스 교환교수로 떠나는 것도, 마치고 오시는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뿐 아니다. 선생님께서 영면의 길을 떠나시는 마지막 날에 배웅조차도 못해드렸으니, 참으로 나는 참 한심한 인간이 아닌가.
스승의 날이 되어도 목소리마저 들을 수 없으니 그보다 허망한 일이 또 있으랴. 다만 선생님께서 남기신 글로나마 텅빈 가슴을 달래려 한다.
“글은 곧 사람이란 말이 있는 바와 같이 부끄러워도 나요, 거짓이 있어도 나요, 자랑이 있어도 이는 결국 나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니, 그저 나의 실상을 세상에 내어 놓는 것으로 자족하고 싶다.(人生頌歌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