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 주파수
주말 아침, 까치들의 요란한 수다가 주중에 밀린 잠을 단숨에 깨운다. 예전 같으면 반가운 손님이라도 오려나 싶어 귀를 세웠을 소리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소리는 그저 소음으로만 들린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담보하는 도심이라지만, 이따금 이곳이 정서적 사막처럼 느껴지는 건 반가움이 사라진 그 자리 때문일 것이다. 빌딩 숲에 갇힌 회색빛 하늘은 이제 서정적인 멜로디 대신 소음 섞인 불협화음으로 가득하다.
문득 지나온 날의 배경음악이었던 그 수많은 음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초등학교 시절, 하교 후의 집은 고요했다. 나를 반겨줄 어머니는 늘 들에 계셨다. 부뚜막에 홀로 앉아 둥근 양은쟁반에 조촐한 밥상을 차려 먹을라치면, 서늘한 적막을 뚫고 산비둘기 울음이 들려왔다. '구구, 구구구.' 낮고 서늘하게 깔리는 그 음률이 울리면 나는 들던 수저를 멈추었다. 갓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던, 먼 동네 한 남자아이가 떠오른 탓이다.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이름조차 가물가물했건만, 산비둘기의 처량한 곡(哭) 같은 울음은 꼭 그 아이의 넋 같았다. 어린 마음에 산비둘기가 그 여린 숨을 거두어 저 먼 세계로 데려간 것이 아닐까, 혼자 밥을 삼키며 죽음이라는 미지의 두려움을 처음으로 대면하곤 했다.
그 두려움은 오래지 않아 다른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시골집 마당에는 늙은 돌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서너 명이 둘러서야 겨우 허리둘레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아름드리나무였다. 여름밤이면 그 거대한 지붕 위로 소쩍새들이 찾아왔다. '소쩍, 소쩍.' 어머니가 끓여준 칼국수를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리던 밤에도, 나는 돌배나무 밑 어두운 화장실로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솥이 적어 밥을 짓지 못했다며 밤새워 우는 새의 비가(悲歌) 앞에서, 내 안의 포만감이 못내 부끄럽고 미안했던 까닭이다. 죽음 앞의 두려움이 타인의 결핍 앞의 부끄러움으로 옮아가던 그 밤, 어둠과 새의 원망 섞인 소리는 어린 생명이 감당하기에 생경하고도 숭고한 경외감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지나며 나는 조금씩 무언가를 배웠던 것 같다. 지금도 시골 언니네 밭에 가면 나른한 봄볕을 닮은 종달새 지저귐과 여름의 길목을 알리는 뻐꾸기 울음이 명징하게 살아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생의 가장 순수한 유산들이다. 반면 내가 터를 잡고 사는 도시의 하늘은 온통 까치와 까마귀의 차지다. 반가운 손님을 전한다던 까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소음이 되었고, 퇴근길에 마주하는 산자락은 까마귀들의 거친 집회 장소가 된 지 오래다. 그 서슬 퍼런 위세에 밀려 참새들의 보드라운 숨소리마저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이따금 까치 소리 사이로 옛 반가움의 잔상이 스칠 때가 있다.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뜻일까.
이제는 산비둘기가 울어도 목이 메지 않고, 소쩍새가 처연하게 울어도 밤길을 주저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세상의 속도가 빨라지고 숲이 깎여나가는 동안, 내 귀를 채우던 서정의 주파수들도 함께 지워진 것일까. 아니면 도시의 소음 속 어딘가에 여전히 낮게 깔려, 내가 듣는 법을 잊었을 뿐인 걸까.
기억 속으로 아득히 사라져간 소리들. 유년의 빈집을 채우던 고독, 타인의 애환과 죽음을 상상하게 하던 문,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미안함을 갖게 하던 마음—그 모든 것이 실은 하나의 가느다란 주파수였다. 지금 나를 문학의 언저리에 붙들어 두는 것도 어쩌면 그 옛 주파수의 여운일지 모른다.
효용성에 밀려 가만히 사라져가는 그 시절의 온기들을 향해, 눈을 감고 마음의 작은 송가(頌歌)를 보낸다. 언젠가 다시, 그 낮은 음률이 도시의 소음을 뚫고 들려오기를 바라며.
첫댓글 멋진 울림을 주는 수필 잘 읽었습니다. '주파수'라는 제목에 눈이 꽂혀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고주파 전파의 주파수를 다루는 사람이고,
이미숙 작가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생의 가장 순수한 유산들인 까치, 산비둘기,
소쩍새, 까마귀, 참새들의 울음소리를 주파수로 읽는 분이셨군요.
매끄러운 문체와 주제가 어우러져 공명의 주파수를 만들어 내는 작품입니다.
작가님의 정성스러운 댓글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파수를 다루시는 분께서 제 글을 '공명의 주파수'로 읽어주시니 수필에 담긴 소리들이 한층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글을 통해 마주한 이 따뜻한 울림을 오래 간직하겠습니다.
구구 거리며 부르는 송가가 다시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
‘구구’ 하고 울어주던 그 유년의 송가를 함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글 속에 묻어둔 마음을 이토록 시적으로 받아안아 주시니 더없이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아득한 주파수가 작가님의 계절에도 따스한 울림으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아 . 문장 깔끔하다. 저도 감성여행 하는 마음으로 감상했어요.
이비 작가님, 글과 함께 유년의 시간 속으로 감성여행을 떠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문장에 마음을 동행해 주시고, '깔끔하다'는 따뜻한 칭찬까지 건네주시니 작가로서 큰 보람과 힘을 느낍니다.
쉼터 같은 여정이 되셨기를 바라며, 늘 마음 포근한 일들만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소설도 계속 써주세요. ㅋ.ㅋ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정말 자유로울 수 있을가요?
작가님의 말씀에 간절한 소망 하나가 생겼습니다.
더욱 정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이미숙 자유는 어렵겠지요.
저도 시가 안 써져서 늘 고민인걸요.
작가님은 소설 잘 쓰실거예요. 화이팅!
@신이비(신상현) 작가님 진심어린 응원 감사합니다
산비둘기 울음소리는 조금 구슬프게 들리기는 하지요.
산골에 살 때는 어둠이 내릴 무렵과 밤중에 우는 새 울음소리가 그렇게 무서웠지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울음소리라서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산새들이 보고 싶고 그 울음소리도 듣고 싶은 때입니다.
작가님!
두려움이 그리움으로 깊어지는 그 마음을 함께 나눠주셔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지나간 날의 아련한 산새 소리가 작가님의 마음에 포근한 위로로 머물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중학교 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던 친구 생각이 나네요.
저도 작가님의 신작 소설에 한 표~!!
작가님, 가슴속에 묻어두셨던 중학 시절 친구분의 이야기를 가만히 꺼내어 놓아주셔서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몰입해서 읽어주시고 소중한 '한 표'까지 보태어 주시니 작가로서 큰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6권의 소설을 집필하신 작가님의 따뜻한 응원 가슴에 품고 작은 소망을 품어보겠습니다
최근 라디오에 이런 광고가 있더군요
AI가 발달해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면서
들려주는 소리가
바로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
환경의 중요성은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변한다 하여도
최고의 가치라는 메세지입니다
(서정의 주파수)를 읽으며
제 아무리 AI가 날고 뛰어도 우리의 마음에 불변의 소리는 그 어떤 것도 대체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네요
소리로 전해오는 인간의 정서가 달리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수필 한 편이 다가오는 소리,
이것이야말로 진짜의 소리지요.
함께 나서봅시다
(서정의 주파수)가 터지는 그 현장으로~~~
박인주 작가님!
제 글을 '마음을 울리는 진짜의 소리'로 깊이 알아봐 주시고, 다정하게 동행을 청해주셔서
작가로서 더없는 보람과 큰 용기를 얻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우리 시골 아침이 그렇습니다. 비둘기인지 모르겠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럴 수 없어서" 라고 들리기도 하여 늘 궁금한 새입니다. 훗날 저에게도 그 주파수가 그리울 테지요.
새소리를 가만히 들어 '그럴 수 없어서'라고 읽어내신 그 감수성에 마음이 쿵 하고 울립니다.
시인님다운 정말 한 편의 시 같은 다정한 발견이네요.
서정적 수필 즐감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귀한 시간내어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정진하려 합니다
편안한 오후 되세요
어린날 서정의 주파수가
아직 살아있어서 글도 써지는 거겠죠.
지금도 시골길에서는 주파수가 되살아나니 놀랍습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을 가만히 짚어주신 듯하여 가슴이 젖어듭니다.
따뜻한 격려, 감사합니다
저도 까마귀가 누군가의 뒤통수를 쪼아서 머리를 몇 바늘 꿰맸다는 뉴스를 봤어요. 이제는 까마귀가 가로등 위에 앉아 있어서 일부러 눈 안 마주치고 지나가기도 해요. 옛날엔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는 것쯤은 알았는데, 제비도 없네요. ㅎㅎ 새 소리를 주파수에 비유하며 풀어내신 수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