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공동체는 교회 안의 약자(弱者)들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자칫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과부와 고아, 어린아이 등 연약한 자들을 잘 돌봐주라고 많이 강조하십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의 약자로 여겨지는 연로(年老)하신 분들과 과부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절과 2절에서는 늙은이, 늙은 여자에게 아버지, 어머니에게 하듯 하고, 젊은 남자, 젊은 여자에게는 형제와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의 성도들을 가족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이지만 교회 안의 지체들을 대할 때 어르신 분들은 부모님처럼 대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1절에 꾸짖는다는 말은 아마 어르신 분들이 뭔가 잘못하고 있을 때 목회자로서 가르치고 나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르신 분들에게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하듯 부드럽게 잘 권면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영적 지도자라고 해서 무례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젊은 여자에게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을 새번역 성경이나 공동번역 성경은 “순결한 마음”으로 충고, 권면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의도를 가지지 말고 순수한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공동체에서 한 가족으로 여기고 대하며 권면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3절부터 16절의 말씀은 교회 안의 과부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즘 시대에는 남녀의 차별이 많이 사라졌고, 여자들도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지고 생업(生業)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기에 과부라고 해도 스스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는 것이 비교적 어렵지 않지만, 바울의 시대만 해도 과부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아와 더불어 과부들은 사회적 약자(弱者)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과부를 적극적으로 돕는 일은 매우 필요했었습니다. 3절에서는 “참 과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정말 누구에게도 의지할 데가 없는 처지에 놓인 과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4절과 16절을 보면 과부가 된 어머니나 할머니를 돌볼 수 있는 자녀나 손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과부가 된 어머니, 혹은 할머니를 돌봐야 하며, 친척이 있다면 그들이 먼저 과부가 된 여인을 잘 돌보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돌볼 수 있는 자녀나 친척이 있는데 교회에만 돌봐달라고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16절). 우선적으로 가족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것이 옳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가족과 친족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족과 친족을 돌보지 않으면서 교회공동체에만 도움을 요청하게 한다면, 그것은 역시 교회의 구성원인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기에 마치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다고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과부를 돌보되 과부들도 믿음 안에서 정결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5절~7절). 남편이 없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자는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다고 말씀하면서(6절) 외롭고 힘들기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하고(5절), 다른 이들에게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7절). 남편이 없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향락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교회공동체는 과부의 명단을 작성하여 관리하게 했는데, 60세 이상의 과부여야 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여야 한다며 그 기준을 말씀합니다(9절). 그 당시에 나이가 든 연로자의 기준을 60세로 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러 번 결혼한 자가 아니라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만 교회에서 돌볼 과부로 인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품에 있어서, 그리고 도적적 삶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보는 태도에 있어서 온전한 믿음의 삶의 모습을 보였던 자들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10절). 단순히 과부라는 것만으로 돌볼 대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을 교회공동체에서 그 명단을 작성하여 잘 돌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60세 이상이라는 기준을 9절에 말씀하고 있지만, 젊은 과부는 교회에서 돌볼 과부의 명단에 올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11절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젊은 과부는 정욕으로 인해 주님을 배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11절).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라는 11절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약간 어려울 수 있는데, 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젊은 과부는 명단에 올리는 것을 거절하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슬러 정욕에 이끌리면 결혼을 하고 싶어할 것이고”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경도 새번역 성경과 비슷하게 번역했습니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다시 시집가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욕 때문에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래서 처음 믿을 때의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게 되어 정죄를 받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교회에서 돌볼 과부의 명단에 올리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한 과부가 되어 남편이 없다 보니 시간적으로 자유로워져서 게을러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험담과 잡담을 늘어놓으며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이간질하기도 하니(13절), 이러한 젊은 과부들은 오히려 다시 시집가서 온전한 가정을 다시 꾸려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권면합니다(14절). 아마 그 당시에 그러한 과부들 중에는 이미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15절). 그래서 이러한 과부들은 새로운 가정을 꾸려서 안정감을 누리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합니다.
교회는 교회 안의 약자들을 배려하고 돌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돌봄의 사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기준을 만들어 정말 도움과 돌봄이 필요한 자들이 도움과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공동체는 더욱 든든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몸의 한 부분이 연약하여 무너져 내린다면 몸 전체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 돌봐야 할 사람들이 누군인가를 부지런히 살펴서 체계적으로 잘 돌보는 사역이 이뤄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서 돌봄이 필요한 지체가 누구인지 살펴 나부터 그러한 지체들을 돌보고 섬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