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동네 미용실>/구연식
동네 미용실은 가격이 저렴하고 문턱이 높지 않아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으로 친근하고 오순도순한 쉼터를 떠올리게 한다. 아낙들은 머리 손질을 위해 모여들어 자식 자랑을 시작으로 남편 푸념 등 부아 풀이로 때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여인들의 호소와 동정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 옛날 마을 빨래터 문화가 동네 미용실로 옮겨 놓은 듯 추측해 본다.
이 나이 될 때까지 미용실 옆은 많이 지나갔어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다. 남자 이발소에서만 이발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2층 서예실 아래 아파트 정문 부근에는 일곱 군데나 되는 미용실이 한 집 걸러 한 곳씩 있다. 속으로 작은 소도시에서 생계가 유지되나 공연히 걱정된다.
서예실에 올 때면 가끔은 일곱 군데 미용실을 일부러 둘러보면서 손님 여부를 체크해 보기도 한다. 모두 다 언제나 손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놀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둘러볼 때 주의해야 할 몸짓이 있다. 미용실 출입구 부근에서는 시선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야 한다. 조금이라도 멈칫거리면 주인은 상투적으로 손님의 이발 시기의 머리를 보고 덥수룩한 머리에는 미소를 보이며 어서 오라는 눈빛으로 대한다. 그래서 출입구 쪽에서는 몸짓이나 표정은 금물이다.
하필이면 서예실 내가 붓글씨를 쓰는 책상 아래 골목길 건너편에는 미용실 내부와 나의 시선이 일직선이어서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서 서예실에서 미용실이 잘 보일 때가 있고, 미용실에서 서예실이 잘 보일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미용실 내부를 하도 많이 보아서 미용실은 들어가 보지는 안 했지만 여러 가지를 알 것 같다.
어느 날 이소헌서예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새로운 미용실이 입점해 왔다. 서예실 입구에 들어가려니 어느 아주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번도 가까이 본 적은 없어도 한 분은 직감으로 서예실 책상 아래 창 너머 대각선으로 보이는 미용실 주인이다. 아마도 그 아주머니는 자기 미용실과 새로 입점해 온 경쟁이 되는 미용실의 운영상태를 친구와 이야기하는척하면서 살피는 눈치였다. 그리고 미용실 앞을 숱하게 지나다니며 서예실과 미용실이 위아래로 눈빛으로 마주쳤을 텐데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서운한 눈빛을 나에게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 생활 르포 프로그램을 보면 동네 미용실에서 나이 드신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머리 손질을 한다. 파마를 하고 완성될 시간을 기다리는지 큰 수건이나 바구니 같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기다리면서 각자 집에서 가져온 주전부리를 내놓아 나누어 먹기도 한다. 점심때가 되면 주인아주머니는 점심을 챙겨드리는 장면을 여러 군데에서 보도된 것을 보았다. 손님 아주머니들은 미용실 내 청소를 도와주거나 설거지는 도맡아 하는 경우를 보았다. 참으로 흐뭇하고 인정미 넘치는 사랑방 같은 동네 미용실이다. 남자들의 이발소도 그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과 신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움의 상징은 언제나 여자였다. 여자 미의 포인트는 머리모양에 중점을 두었다. 여자의 머리 파마는 인류 4대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의 나일강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반 여성들은 알칼리성 진흙을 머리에 발라서 막대기에 감고 햇빛에 말리면서 웨이브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군주 지성과 교양을 갖춘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는 그 당시에도 뭇 사내들의 시선을 제압하는 머리 손질 파마에 몰두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신체와(身體) 터럭(髮), 피부(膚)는, 부모에게서(父母) 받았다(受之). 감히(敢) 훼손하지(毁傷) 않는(不) 것이, 효의(孝之) 시작이다(始也). 하여 평소에 남자는 상투를 여자는 낭자머리를 하여 머리카락 한 올도 귀중히 여겨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때 서야 자손들은 머리를 풀고 곡(哭)을 하며 불효를 고했다. 1895년(고종 32) 11월에 내린 단발령(斷髮令)에 백성들은 살아 있는 신체에 가해지는 심각한 박해로 받아들였고, 정부에 대한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여자들의 곱슬곱슬 수북한 커트 머리 파마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吳葉舟)가 1937년에 종로 화신백화점에 미장원을 개업하여 첫 파마를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미장원의 발생과 확산으로 당시의 이른바 신여성들이 1930년대 중반에 들어 젊은 여성들 사이에 단발이 유행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 파마머리가 유행하자 미장원의 숫자는 급증하게 되었다. 광복 후 여성들의 머리모양은 유행의 물결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듭하였고, 미장원도 전국 방방곡곡에 들어서게 되었다.
1980년대 초 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 시내에서는 ‘미장원에서 남자 머리를 못 깎고, 이발소에서는 여자 파마를 못 하게’ 했던 보건 행정 예규를 정하여 위반하면 15일간 영업정지를 처분했던 시대도 있었다. 무려 50여 년 사이에 미장원 풍속도는 상전벽해가 되었다. 그뿐이랴 이제는 이름도 서양식의 “beauty salon” 등으로 귀부인들의 만남과 사교의 장으로 변해가는 느낌이 든다.
문화의 발전은 문명의 발전에 곱 비례하여 앞서가고 있다. 身體髮膚(신체발부) 受之父母(수지부모)~ 효도도 박물관에 보관된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오순도순한 동네 미장원은 시설도 분위기도 신세대 손님에 맞춰 점점 바꿔가고 있다. 다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에 익혔던 내 생각과 행동이 그 옛날에 사로잡혀 불편할 뿐이다. 그래도 서예실 아래 미용실의 삼색 나선형 회전등은 오늘도 변함없이 돌고 있다. (2023.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