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선술집에 얼음을 공급하러 오는 얼음차들이 도착하기도 전 아바나에서 이른 아침에 동네의 건달들이 건물 무너진 벽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당신들은 잘 알 겁니다. 글쎄요. 우리는 커피 한 잔을 하러 부두에서 ‘산 프란시스코의 진주’라는 카페로 가기 위해 광장을 가로질렀는데, 거기에는 거지 한 사람만이 광장의 분수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힘들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Ernest Hemingway, To have and have not, 1937) 중에서
갑자기 시작된 감기 때문에 무거운 두통을 안고 인천공항을 떠나 도착한 쿠바의 아바나는 여기저기 전설처럼 들리는 소문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머리의 열기와 카리브 해의 태양은 혼란에서 나아가 환각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바나 행은 사실 낭만을 찾으러 간 것도 아니었지만그렇다고 무질서를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여느 출장지와는 달리 머리보다는 가슴을, 현실적인 실무보다는 생각을 요구했다. 카리브 해의 파도에 젖으며 아바나 젊은이들이 하루 종일 앉아서 어슬렁거리는 말레콘(Malecon), 야자수와 끔찍하게 부드러운 모래로 둘러싸인 특급 호텔의 외국인 대상 휴양지인 에스테(Playa del Este)의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국 관광객들로 미어지는 헤밍웨이 순례지 플로리디타(Bar Floridita) 바의 천박한 흥겨움과 내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공 식당 앞에서 보이는 본능적인 즐거움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까? 자세히 보니, 쿠바의 중심 아바나는 상반된 두 가지의 우주가 함께 위태하게 공존하는 도시였다. 헤밍웨이가 처음 묵었던 호텔 이름이 ‘두 개의 세상’, 즉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인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쨌든 나에게 쿠바가 보여주는 두 가지 세상은 문화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생각과 지금 쿠바의 현실을 상상하게 한다. 더 나아가 행복, 삶에 대한 세상의 두 가지 방향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쿠바에서 본 문화 현장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혁명 이후 수행해온 문화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바탕색 아래 소비에트연방이나 동구권에서 과거 중요시한 문화, 특히 예술의 수월성을 위한 교육과 개발, 그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문화를 이용한 경제적 활용이라는, 이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익숙한 모습들을 띠고 있다. 물론 이들의 수위나 정도의 차이는 매우 크다. 아직도 쿠바 지역문화의 중심은 지역 단위마다 있는 문화의 집(Casa de Cultura)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바나의 경우 국립발레단, 국립관현악단, 특수 전문학교 등에서 엘리트 예술인재 양성과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과거 쿠바의 국민적 콘텐츠를 활용한 음악 산업은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데, 특히 내부 최고의 인력들과 문화적 환경 그리고 전통 등을 바탕으로 성장한 쿠바 음악은 댄스, 민속음악에서 이제는 ‘쿠반 재즈(Cuban Jazz)’라는 새로운 분야로 이어지면서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황금기 거쳐 침체, 내실화, 그리고 또 다른 난관 이러한 다양하고 상반된 쿠바의 문화적 환경을 살펴보기 위해서 나는 두 군데를 방문하였다. 첫 번째는 쿠바영화의 황금기(Decada de Oro)를 연 세계적 문화연구기관 ICAIC( Instituto Cubano del Arte y la Industria Cinematograficos: 영화산업과 예술연구소, 이하 이카익)과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세상에 태어나게(스튜디오에서 녹음) 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영 음반사 에그램(Egrem)이었다. 이카익은 1959년 3월 혁명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제정된 문화법을 근거로 설립된 국가 기관으로 예술, 영화, 문화에 대한 연구와 제작 지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카익이 설립된 직후 10년을 쿠바 영화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특히 움베르토 솔라스(Humberto Solas)와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Tomas Gutierrez Alea) 같은 감독들이 주역이었다. 특히 알레아 감독은 후안 카를로스 타비오 감독과 함께 오스카상 후보로 지명된 쿠바 최초의 감독이면서 동시에 세계적 영화인 <딸기와 초콜릿(Fresa y Chocolate)>을 만들어 기관의 명성을 높였다. 지금도 이카익의 학생 카페 이름은 ‘딸기와 초콜릿’으로 붙여져 있을 정도이다. 영화 외에도 잘 알려진 분야는 다큐멘터리다. 세계 최초로 비디오 클립을 만들었다고 하는 산티아고 알바레즈(Santiago Alvarez) 감독을 비롯한 쟁쟁한 감독들이 활동했다고 한다. 알바레즈의 자취는 내년에 10회를 맞는 산티아고 알바레즈 국제다큐영화제(Festival internacional de Documentales Santiago Alvarez in Memoriam)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영화제는 매년 3월 6일에서 10일 개최되는데, 100여 작품들이 상영된다고 한다. 특히 현재 고 산티아고 알바레즈 감독의 부인이며 영화제 총감독인 락사라 헤레라 곤잘레스는 필자에게 한국 젊은 영화인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쿠바의 영화산업은 지금 아주 어려운 상황이다. 영화 황금기에는 매년 20여 편의 장편영화가 제작되었고, 15년 전만 하더라도 12~13편은 제작되었는데, 지금은 고작 연간 1~2편만이 제작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장비들을 지원해주던 공산국가들의 도움이 사라지고, 미국의 경제 금수가 지속되면서 가장 먼저 영화 및 문화가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다행히 스페인, 멕시코, 프랑스 등과 공동제작을 활성화하여, 황금기만은 못하지만 좀 나아지는 상황이다. 특히 2005년 칠레와 공동으로 만든 말베르티 감독의 <비바 쿠바(Viva Cuba)> 같은 독립영화는 우리나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인기를 모으는 등 세계 각처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카익에서 만난 홍보담당자 가리도(Jorge Garrido Alvarez)나 언론인 에스트라다(Isidro Estrada)에 따르면 지금 쿠바 영화는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막 벗어난 상황이라고 한다. 과거 쿠바 전역에 약 150여 개가 있던 상영 극장이 지금은 50개 정도만 남아 있을 정도로 인민들의 삶은 영화를 찾기에는 어려운 현실이다. 하지만 이카익에서 만든 쿠바 영화들은 행정구역마다 하나씩 있는 문화의 집, 비디오의 집(Casa de Video) 같은 공공시설에서 상영을 하면서 시민들과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다. 많은 경우, 실제 감독 혹은 영화평론가의 설명과 해설이 함께하는 상영회를 가진다고 한다. 그렇지만 해적판으로 돌아다니는 할리우드 액션영화들이 사람들을 흥미 위주의 영화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혁명과 함께 시작된 쿠바 영화산업은 지금 이처럼 힘든 고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내실화, 그리고 새로운 위기가 함께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영 회사가 쿠바 음악 세계화에 앞장서
그러면 음악은 어떠한가? 쿠바 음악은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과거의 룸바, 맘보, 살사에 이어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성공 이후 월드뮤직의 붐과 쿠반 재즈는 이제 세계의 음악이 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역사가 40년이 넘는 쿠바 국영회사이며 세계적인 음반제작사인 에그램이 중심에 있었다. 에그램은 쿠바 혁명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진 1964년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전통음악 팀바, 손(Son)에서 시작해서, 남미의 누에바 칸시온, 혹은 우리의 운동가와 비슷한 쿠바의 유명한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에그램은 쿠바의 다양한 재능을 담는 유일한 음악 스튜디오로서의 역할을 통해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구성원들이 세계에 알려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요사이는 댄스 음악에서 재즈 그리고 남미와 중남미의 다양한 음악적 교류를 이끄는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에그램을 알게 된 것은 어렵게 구한, 순수해보였던 누에바 트로바 작품들을 통해서였다. 그래서 최근 매우 활발해진 활동으로 인해 서구의 버진 레코드사 같은 모양으로 변신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다. 이에 대해 에그램의 음악감독인 엘시다 곤잘레스 포르탈(Elsida Gonzalez Portal)은 “누에바 트로바는 아직 쿠바에서 사라지지 않고 힘차게 살고 있어요. 얼마 전 전국 행정구역당 1명의 젊은이를 뽑아서 15인의 누에바 합창단을 구성해서 아바나 국립대학에서 공연했는데, 대학 야외공연장이 꽉 찰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립음반사 에그램은 공공성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쿠바의 음악적 역량을 세계에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살아 꿈틀대는 쿠바 미술의 현장 쿠바의 문화와 관광이 만나는 최첨병 역할은 아바나의 박물관들이 수행하고 있는 듯했다. 아바나 시내의 박물관들은 베트남 호치민 시, 중국 상하이 혹은 프랑스 파리나 마찬가지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혁명을 이룬 뒤 과거 세력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 박물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문화라는 상징성의 구현이 아닌가. 아바나 구시가지의 대통령궁, 정부청사, 총독관저, 플랜테이션 지주의 저택은 모두 근사한 박물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바나의 중요한 박물관으로는 혁명박물관, 고풍 창연한 시립역사박물관, 그 맞은편의 자연사박물관, 장식박물관, 그리고 현란한 클래식 자동차들을 보여주는 자동차박물관 등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훌륭했던 곳은 쿠바 국립미술관이었다. 국립미술관은 서로 가까운 거리에 두 개의 건물로 나뉘어 있다. 아바나의 중심인 카피톨리오(Capitolio) 옆에는 스페인과 서반어권의 정수가 모여 있는 ‘Museo de Bellas Artes Universal’가 있고, 역시 시내 중심인 혁명박물관 바로 뒤에는 쿠바 작품 위주로 전시를 하는 ‘Museo de Bellas Artes Cuba’가 있다. 20세기 초에 건립된 세계 미술관이라는 점도 대단하지만, 1954년 건립된 7,600㎡의 웅장한 건물에서는 쿠바의 다양하고 매우 수준 높은 미술 수준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마리아노 로드리게츠(Mariano Rodriguez), 보테로를 연상시키는 호르헤 아르케(Jorge Arche), 이중섭과 너무 흡사한 에이리즈(Antonia Eiriz), 스케치와 만화로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카베라(Enrique Garcia Carbera) 등의 작품은 음악뿐만 아니라 살아 꿈틀대며 선혈을 뿌리는 쿠바 미술의 현장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또 건축물 자체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아바나의 헤진 듯한 독특한 매력을 보여주는 옛 거리와 함께 흐르듯이 지나가는 시민들, 그리고 옛날 자동차들과 함께 자리 잡은 미술관은 혹 호르헤스의 환상적인 어구에 들어온 듯한 환영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헤밍웨이를 만나다 아바나와 쿠바의 마지막 인상은 역시 헤밍웨이다. 나는 그동안 우연찮게 축제를 따라다니던 유학 시절에 헤밍웨이가 젊은 작가지망생이었을 무렵의 파리 체류 시절의 자취,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스페인 팜플로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이탈리아의 북부 자취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번에는 <노인과 바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쿠바 속 헤밍웨이를 제대로 만나게 된 것이다. 헤밍웨이의 쿠바 체류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헤밍웨이는 서구인들 관광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가 처음 묵었던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시작해서 자주 들렀던 플로리디타 바, 그리고 1939년에서 1960년까지 살았던 핀카 비히아(Finca Vigia)의 현재 헤밍웨이 박물관, 그리고 <노인과 바다>를 쓰면서 카리브 해를 바라보았던 코히마(Cojimar)와 라 테라자(La Terraza) 카페는 가장 중요한 패키지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다. 이제는 진위성이나 문학의 향취와 상관없는 할리우드 스타처럼 소비되고 있는, 마치 헤밍웨이 클럽 단체관광지로 전락해버린 듯했다. 나는 코히마의 바닷가에 일부러 카페가 문 열기 전에 도착해서 헤밍웨이가 “쿠바는 시원한 공기 때문에 아침에 글쓰기 가장 좋은 나라”라고 했던 말을 충분히 즐겼다. 고즈넉하게 노인이 갈라노(상어)에게 뜯긴 청새치를 끌고 들어왔을 부두를 바라볼 수 있었다. 쿠바 인으로서가 아니라 소설 마지막에 등장한 관광객처럼 카페의 창문에서 바라보는 걸프 만의 바닷가는 관광과 삶이 서로 교차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혹은 도와주는 복잡한 쿠바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어부의 물질과 갈매기의 휴식과 더불어 차분했다. 사실 쿠바에서 동화되기를 바랐던 헤밍웨이와는 달리, 이제는 관광객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해변이 따로 있을 만큼 쿠바는 관광에 목말라 있는 나라가 되었다. 캐나다에서 오는 전세 비행기가 도착하는 전용 공항들, 특급 호텔들 그리고 카리브 해 크루즈가 도착하는 아바나 항구는 이제 새로운 관광과 삶이 도전하고 조화해야 하는 쿠바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그들이 상어인지 청새치인지는 두고 봐야 할 듯하다.
1959년 혁명의 시작 이후 인민을 위한 문화와 삶을 위한 예술, 수월성을 위한 수준 높은 예술행정들에서 이제는 관광으로 도시를 창조하려고 하는 쿠바는 여러 생각을 요구한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말레콘과 퇴락한 건물들 그리고 순수한 카리브 해의 파도들에 얽혀왔고, 다시 변화할 정치와 경제, 문화의 모습을 그리고 가능성을 바라보았다. 쿠바에서 발견한 도전과 변화는 우리도 계속 있어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문화를 통한 사회복지와 교육, 정체성을 가꾸는 역할, 문화를 가지고 경제적 자원으로 활용하는 문제, 전문적인 문화예술 인력 양성……. 디젤 냄새 심하지만 멋들어지게 도로를 가로지르는 1950년대 클래식 미제 차량들과 1980년대 소련제 라다 승용차 사이에 흐르듯이 미끄러지는 현대와 기아의 차량들은 새로운 쿠바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 아니면 시작되는 추락을 예고하는 것인지. 비행기가 아바나 혁명광장과 델모로 성채 사이의 해협을 지나 플로리다로 향할 때, 한국을 떠날 때 시작되었던 두통이 다시 급습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