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학광산동굴은 갱도의 총연장이 7.8km, 깊이가 275m다. 그중 1km가량이 40년 만에 일반에 공개됐다. 동굴 초입은 옛 광산을 묘사한 그림과 탄광열차, 광산의 역사를 알려주는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광산동굴은 단순히 갱도의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다. 동굴의 초기 역사는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산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01년 전인 1912년이다. 시흥동 광산으로 운영되며 1972년까지 금, 은, 동, 아연을 채굴했다. 60여 년간 전성기를 누렸는데, 종업원이 500여 명에 이르고 채굴량이 하루 250톤이 넘었던 수도권 최대의 금속 광산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부로 근무하면 징용이 면제됐던 서민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곳에 삶터를 마련했다. 가학산 일대는 안산, 소래 지역에서 소금을 팔기 위해 서울로 넘어가던 관문이자 물자를 운반하던 도고내고개가 있었다. 광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떠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다. 폐광이 된 이후 오랜 기간 닫혀 있다가 최근 5년간은 소래포구의 젓갈을 보관하는 지하저장고로 사용됐다. 젓갈 보관소에서 동굴관광지로의 변신은 꽤 이례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