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61
1월5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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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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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vNM85a_s80 (박원재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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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와서 보시오.”
<우리 안에 천상 예루살렘의 건설>
가끔 수도성소를 찾는 젊은이들로부터 성소문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친절하게 전화를 받으면 대체로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습니다. “거긴 어떤 수도회인가요? 어떤 일을 하죠? 창립자는 누구인가요? 입회 자격이나 입회 시 연령 제한은 몇 살까지인가요? 사제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우리 교회의 명맥을 유지해나갈 보물 같은 성소자들이기에 차근차근 상세히 가르쳐줍니다. 저희 수도회는 돈보스코 성인께서 가난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창립하신 교육 수도회입니다. 저희는 주로 청소년 관련 사목터에서 일합니다. 학교나 직업학교, 청소년 센터, 청소년 교정시설, 청소년복지시설, 본당…. 그리고 고졸 이상의 건강한 사람으로 만 29살까지 지원할 수 있습니다.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희는 절대 거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한 마디 덧붙입니다. 전화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언제 시간 있으시면 일단 우리 수도원을 찾아오시면 좋겠습니다. 오셔서 저희 사는 모습을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하루나 이틀, 일주일 저희와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필립보 사도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때로 장황한 말이나 설명보다는 직접 와서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보는 것이 효과적이고 실질적입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직접 와서 보면, 며칠 살아보면 모든 것을 파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소자들이 저희의 “와서 보시오.”라는 초대를 받고 저희 공동체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합니다. 한 형제로 똘똘 뭉쳐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기쁘게 투신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시종일관 웃고 떠들며 행복하게 지내는 수도자들의 모습에서 천상 예루살렘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이라면 나도 한번 도전해봐야겠다며 마음을 굳힙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타나엘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저 필립보 사도의 말을 통해 그분에 대해 여러 차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약했던가 봅니다. 제대로 공부한 똑똑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던 나타나엘이었기에 최초의 반응이 영 시원찮습니다. 필립보의 초대에 꽤나 시큰둥한 태도를 보입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마침내 필립보는 최후의 수단을 씁니다.
“와서 보시오.”
드디어 나타나엘은 와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그분의 실체를, 그분의 삶과 행적을, 그분 안에 담겨있는 하늘나라를, 그분이 건네시는 구원을….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분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빨리 예수님께 대한 장엄한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 공동체에, 우리 본당에 필요한 노력 역시 “와서 보시오.”라고 세상에 외치는 초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신자들이, 예비신자들이 거리낌 없이 우리 공동체를 찾아올 수 있도록 자신을 활짝 여는 개방성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여기야말로 살만한 곳이로구나, 여기야말로 지상천국이구나, 이런 곳이라면 내 인생을 걸어도 될 만한 곳이로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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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94x27z57c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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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지 않으면 기도해도 은총을 못 받는 두 가지 이유>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위로 성령께서 내리시는 것을 보고 믿었고 증언하였습니다. 성령께서 내리는 이를 보는 것이 곧 성령을 받음입니다. 성령께서 내리는 이가 표징이 되고 표징을 보고 믿는 이가 또 표징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아무리 표징을 보아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로 ‘거짓’이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진실했기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라고 하십니다. 거짓이 없는 이는 더 큰 표징도 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여기서 천사들은 성령, 혹은 성령을 담은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거짓이 없는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실까요? 두 가지 이유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거짓말하는 자는 성령의 은총을 오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서 ‘오늘부터 지각 변명은 이렇게’라는 동영상을 보십시오. 학생이 강의에 20분 늦은 것을 변명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변명합니다. 버스에 테러리스트가 탔다거나 코끼리가 나타났다거나 아버지가 좀비가 되었다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웃기자고 만든 동영상이지만, 교수 처지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 학생에게 진심이 담긴 강의가 가능할까요? 왜냐하면 나에게서 배우는 사람은 또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은총은 진리와 하나이기 때문에 거짓이 있는 자에게는 내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은총의 열매는 맞지만, 진리와 하나라서 거짓이 있는 이에게는 은총도 내리지 않아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논문 표절이 예상되는 이를 가르치겠다고 말하는 교수는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이에게 은총이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은총을 오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거짓말하는 자는 성령의 은총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과 비슷한 또 다른 형태의 거짓말이 있는데 ‘모른다’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원하는 게 명확해지면 행동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기 싫어서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원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 혹은 방향을 모른다는 말도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그는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본능이 이끌리는 대로 사는 것을 합리화합니다.
영화 ‘앱솔루틀리 애니씽’(2015)은 신적 존재들 덕분에 신의 능력을 갖추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세상에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워 죽겠는 자기가 가르치는 반 아이들을 죽게도 만듭니다. 하지만 다시 살려냅니다. 자기를 싫어하는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대통령이 되어보기도 합니다. 또 아래층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의 방을 훔쳐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능력으로 자기를 좋아하게 만든 여자에게 실연당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능력을 개에게 줘버립니다. 그 능력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용기를 내어 여자에게 식사나 한번 하자고 말합니다.
솔직히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는 게 은총을 받기 위한 시작입니다. 솔직하지 않으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은총을 남용합니다. 거짓말은 은총을 오용하게 만들고 남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은총의 가장 큰 첫 번째 적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벌거벗음과 같습니다. 벌거벗는 장소가 있습니다. 목욕탕이 그렇습니다. 이런 곳에 옷을 입고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벌거벗어야 다른 이의 벌거벗은 몸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지 않았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벌거벗음, 곧 가죽옷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가죽옷을 입으면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죽옷을 입혀 주셨다는 뜻은 미래에 그렇게 될 예언이고, 실제로는 그들이 무화과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 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표징이 있습니다. 그 표징 속에서 성령의 내리심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벌거벗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주님 앞에 서야 주님께서도 솔직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이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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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고부간의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아서 힘들다고 합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줄 돈인데 몇 달씩 미루다가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시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약속을 정했는데 기다리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항상 일찍 도착하는 편이라 짜증이 났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그렇고, 자라온 환경이 그래서인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남을 바꿀 수 없다면 그러려니 하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돌아보면 저 역시 타인과 소통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조급한 성격에 정해진 일을 몇 번씩 확인하곤 합니다. 상대방은 저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짜증이 날 때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함께 여행을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 불을 키곤 했습니다. 상대방은 여행 와서도 일찍 일어난다고, 잠을 자는데 깨운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배려심이 부족한 편입니다. 2023년 새해에는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소통의 강으로 이해의 배가 하느님께로 갈 것 같습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었습니다. 천사 미카엘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알몸으로 교회 옆에 떨어진 미카엘은 자신을 돌봐준 가난한 구두 수선공과 그의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만하고 교만한 부자가 통가죽을 가져와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미카엘은 죽은 다음에 신기는 슬리퍼를 만들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깜짝 놀라서 장화를 만들지 않는 미카엘에게 왜 슬리퍼를 만드는지 물었습니다. 슬리퍼를 다 만들었을 때 부자의 시종이 와서 장화는 필요 없고 슬리퍼를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미카엘은 미리 만들어 둔 슬리퍼를 주었습니다. 부자의 옆에 죽음의 사신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앞날을 모른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미카엘은 쌍둥이 자매를 위해서 신발을 사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인은 고아가 된 쌍둥이를 돌보았습니다. 한 아이는 다리를 절었지만, 그 아이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미카엘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23년에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일로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주어진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톨스토이가 이야기하기 전에 성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극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톨스토이는 3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과거 때문에 상처받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2023년에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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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3-51: 필립보와 나타나엘과의 만남
예수님은 필립보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43절) 하고 부르신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주님께 인도하면서 그에게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45절) 분을 만났다고 한다. 나타나엘 역시 성경 연구에 열중하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찾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필립보는 다른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유다인들이 말하듯이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하고 말하였다(45절). 나타나엘은 즉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46절). 이 역설적인 질문에는 메시아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지방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데 의혹이 있다고 한다. 필립보는 그에게 “와서 보시오.”라며 권한다.(46절)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아직 인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47절) 하신다. 이 말에 깜짝 놀라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48절) 하셨을 때, 그는 완전히 믿게 되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을 연구하기 위한 것으로 아마 나타나엘은 메시아 대망에 관계되는 성경을 읽었을 것이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49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또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5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51절)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의 장소이고, 하늘이 열리는 것은 천사들이 먼저 내려오는 것 그리고 올라가는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사람의 아들로부터 천사들이 기도와 청원을 가지고 하느님께로 오르고, 그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시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굳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제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을 약속받았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이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분을 직접 체험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체험으로 만나는 그분은 우리에게 더 큰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며 깊은 신앙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살아가면서 그분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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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를 부르십니다. 그 뒤에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만납니다. 나타나엘은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지만 많은 사람이 나타나엘을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생각합니다.(마르 3,18 참조) 필립보는 증언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은 예수님의 새로운 호칭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모세의 율법서(오경)와 예언서 전체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독창적인 시각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엘을 초대합니다. “와서 보시오.” 이렇게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 표현도 나타나엘의 신앙고백이면서 증언입니다.
증언을 강조하는 요한복음 1장은 복음서의 시작에서 예수님의 다양한 호칭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합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메시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이스라엘의 임금님. 우리에게 익숙하든 익숙하지 않든 이 모두는 예수님에 대한 심오한 묵상을 담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잘 정리된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은 다양한 인물들의 사건을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미리 알려 줍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이처럼 고백하며 다른 이들에게 증언할 수 있는 우리의 결단과 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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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예언자로 알아본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자신의 체험을 전했을 때, 나타나엘은 편견의 늪에 갇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반문합니다. 필립보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던 모습을 눈여겨보셨고 그의 흠 없는 인품을 알아보십니다. 자신의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스러움을 가졌지만,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한 사람의 참모습을 알려면 내 안에 편견과 선입견이 없어야 합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상대방과 공감할 수 없도록 벽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아벨과 비교당한 속상함을 넘어,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자기 편견에 사로잡혀 미움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 미움과 분노가 커지면, 상상으로나 말이나 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며 살게 되는지 되돌아보면 압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내 형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혹시 지금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음의 고통 속에서 용서와 자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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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주영길 토마스 신부님]
<이미 나를 아시는 분>
창세기가 전하는 창조 이야기 가운데 으뜸은 ‘인간 창조’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당신 모상을 따라 흙으로 사람을 빚어 코에 당신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창세 1,26; 2,7 참조)
그래서 고대인들은 인간의 들숨 날숨이 하느님과 보이지 않는 끈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하느님과 연결된 우리의 숨결은 불가분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알고 계시며 이끌어 주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첫 만남을 전하고 있다. 처음에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증언을 듣고 비아냥거린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1,46) 곧 나자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의 됨됨이를 알고 계셨다. 복음사가는 나타나엘에 대한 선견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듯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잘 아신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신다.(2,25 참조)
예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신다.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심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동의어다. 한때 유행가처럼 번지던 복음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있다.
모 방송에서 지체장애를 가진 이들이 그 노래를 합창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어떤 형태의 삶이나 인생도 주님은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하신다. 하느님 앞에 무의미한 인생, 쓸모없는 생명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어렵게 세례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자매님이 있었다. 자식을 못 낳아 소박을 맞은 이후 외롭게 살아온 분이었다.
세례식이 끝난 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한 그분의 말씀이 가슴 뭉클했다. 늦게야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다시는 바랄 것이 없다는 고백이리라.
우리도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기에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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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와 또 다른 요한의 제자에게 이미 했던 말입니다.(요한 1,39-40 참조)
필립보는 같은 고향 출신인 안드레아로부터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필립보는 이 기쁜 소식을 또다시 나타나엘에게 전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당신의 예지 능력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필립보와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라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성경 공부에 전념하곤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나타나엘 역시 성경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 곧 메시아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더 신비로운 계시를 해 주십니다. 창세기 28장 12절에 나오는 야곱의 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야곱과 하느님 사이를 오가면서 축복을 전해 주는 예표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 기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축복을 체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 기쁨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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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을 따르는 사람>
요한 1,43-51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부르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닮는 사람입니다
그분을
닮는 사람은
그분을
만나지 못하여
그분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
그분을
만나게 함으로써
그분을
따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을
따르게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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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기다리시고 찾아 오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중에는 본받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은 벳사이다인데 필립보도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벳사이다 지명의 뜻은 ‘어부의 집’, 혹은 ‘고기의 집’입니다. 지명을 미루어 생각하면 그들이 어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나를 따라라’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나타나엘에게 전하였습니다. 나타나엘은 히브리 이름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미가 5,1) 많은 유다인은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야 하며 다윗 후손이어야 한다(요한 7,41-42)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결국,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필립보는 예수님을 만나 삶이 달라져서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입니다. 마침내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권고에 의해 발길을 옮길 때 먼저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씀은 ‘그대가 공부하는 랍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율사들은 올리브나무나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서를 공부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놀라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믿음에 바탕을 두고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1,51)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복음은 창세기 28장12절 이하의 ‘야곱의 꿈 이야기’와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베텔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하나의 하느님의 현존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계시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며 하느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쿤둥한 반응을 보인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끝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또 ‘와서 보시오’ 하고 확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믿음을! 귀한 분을 만났으니 이웃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텔의 꿈을 상기해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참말 야훼께서 여기에 계셨는데도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여기가 바로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 문이로구나”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자던 돌을 그곳에 세워 석상으로 삼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는 그곳을 베텔이라고 불렀습니다.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곳에, 하느님의 뜻을 사는 곳에 있습니다.
묵시록 21장 2절 이하를 보면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그는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밖에서 찾지 말고 지금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집으로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달프고 힘든 이 집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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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행복은 전염된다고 합니다. 이는 실제로 많은 학자의 연구 조사로 밝혀진 결과입니다. 이 행복은 반드시 접촉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행복이 있으면 전파되어 행복 지수를 높여줍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자신이 행복하면 내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5%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가 행복하면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10%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질 가능성은 어떻게 될까요? 0%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6%나 증가한다고 합니다. 결국 나의 행복을 나와 직접적인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도 전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가까운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더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맞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며 예수님과 만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자기 생각을 이렇게 쉽게 바꿀 수 있을까요?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요?
예수님과 만남,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곧바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성(神性)이 전달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막고,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타나엘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 역시 변화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집중한다면 분명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변화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 행복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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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친구 따라 강남? 친구 따라 주님>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오늘 복음은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얘기입니다. 성탄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와서 보는 제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고, 이제 곧 공현 축일을 지낼 터인데 주님께서 점차 공적으로 드러나시는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필립보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하는데 나자렛 출신임을 이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나엘이 부정하자 그래도 “와서 보라”고 권유하고 나타나엘은 마지못해 그 권유를 받아들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 안 좋은 말로 쓰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친구 따라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친구 따라 주님께 간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이때 친구는 주님께로 가는 징검다리 또는 사다리입니다.
필립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소개했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고 친구라고 해도 껄렁껄렁한 친구였다면 도무지 갈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진실한 친구였고 사랑하기에 주님을 소개했다고 생각하고 믿었을 것이고, 이때까지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은 믿을 수 없어도 친구는 믿을 수 있었고 친구의 사랑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들을 본보기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필립보처럼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어야 하고, 나타나엘처럼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가서 보고는 같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길을 같이 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역사 안에는 이런 관계가 참으로 많습니다. 서로 인도자와 동반자가 되는 경우요, 홀로 성인이 되지 않고 같이 성인이 되는 경우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아를 비롯한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도 성인과 스콜라라스티카 성녀, 이냐시오 성인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 클라라 성녀와 같이 수도자가 되고 성인이 된 그의 동생들이 그러했지요.
이런 관계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관계가 부러우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저의 형제들은 이런 관계인지, 저의 공동체는 이런 관계로 형성된 공동체인지, 수도 공동체뿐 아니라 지금 제가 하는 일을 통해서 만난 분들도, 그저 일의 동업자일 뿐인지 주님께 함께 가는 동반자들인지 성찰할 때 저는 필립보와 나타나엘을 닮지 못해도 한참 닮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닮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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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형제애의 실천>
-주님께 인도하는 사랑-
“주님은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주님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 100,5)
예전 10대 말, 고등학교 시절 바둑을 좋아할 때 말 그대로 침식(寢食)을 잊을 때가 많았습니다. 음식을 좋아하는 이를 미식가(美食家)라 한다면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를 미독가(美讀家)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저는 미식가는 전혀 아니지만 미독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전주 이씨, 세종대왕의 후손답게 침식을 잊을 정도의 독서 애호가이기 때문입니다. 흡사 책읽을 때는 배고팠을 때 게걸린 듯 밥을 먹듯이 좋은 책을 읽을 때는 지금도 역시 배고팠을 때 음식을 먹듯 책들도 여러 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전투하듯이 읽습니다.
지금도 좋은 책만 보면 행복해지고 침식을 잊을 정도이지만 기도와 미사, 강론보다 엄중한 것은 없기에 절대로 독서나 그 무엇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바둑은 수도생활과 시간상 너무 아니기에 끊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좋아하여 때로 애기가(愛棋家)로서 명국(名局)은 틈틈이 감상하곤 합니다. 아마 저의 기력은 아마 5단은 될 것입니다.
요즘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매력적인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진리의 협력자이기 때문입니다. 87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무수한 강론 글들을 보며 절절히 깨닫습니다. 어제도 미구에 있을 베네딕도 16세 교황에 대한 이탈리아판 출간 소식을 듣고 원장에게 영문으로 출간되면 주문해달라 부탁했고 흔쾌히 약속했습니다.
미리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문판 서문을 읽었는데 정말 핵심을 꿰뚫는 명쾌한 내용의 명문이었습니다. 얼마나 베네딕도 교황의 신학에 정통한 프란치스코 교황인지! 그분의 엄청난 기억력과 총명함에 감탄했습니다. 95세로 선종하기까지 베네딕도 교황의 의식도 매우 명료하고 투명했다 합니다.
곧 출간될 책 베네딕도 교황의 전기 영문판 제목부터 마음 설레게 합니다. “God is Always New”(하느님은 언제나 지금이시다), 얼마나 멋집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문은 구구절절 감동의 명문이지만 몇 구절만 인용하여 나눕니다.
“베네딕도 16세는 무릎을 꿇고 기도중에 신학을 한 분이시다(Benedict did theology on his knees in prayer)”
“하느님은 사랑의 한 사건이다(God is an event of love)”
“지상에서 사랑아닌 그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What on earth could save us if not love?)”
“성서와 교회 교부들에 바탕한 요셉 라칭거 사고의 깊이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여전히 도움이 된다(The depth of Joseph Razinger’s thought, based on Holy Scripture and Church Fathers is still helpful us today)”
“온교회가 그분께 영원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The whole Church will be forever grateful to him)”
“우리에게 베네딕도16세 교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하자(Let us thank God for having given us Pope Benedict)”
내용이 너무 감동스러워 독수리 타법으로 조각하듯 영문을 병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통해 우리를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니 이게 진정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최고의 형제애는 형제자매들을 더욱 예수님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사랑입니다. 어제 저는 자매들의 격려 글을 받고 감사했습니다. 과찬의 메시지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대로 인용합니다.
“베네딕도 교황님의 영적유언을 보면서 신부님 생각이 났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사랑으로 저희를 감싸주시는 신부님 역시 교황님에 손색이 없으시니 존경하고 기도합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신부님, 저희에겐 신부님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축복이지요! 신부님께서도 지금까지의 삶은 예수님의 얼굴을 찾으셨지요! 신부님 사랑합니다.”
새삼 형제자매들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으로 이끄는 것이 진짜 형제애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이런 하느님 사랑의 갈망이, 염원이 잠재해 있습니다. 참평화, 참기쁨, 참행복도 이런 하느님 사랑에 있기 때문이요, 이런 행복은 사람 누구나의 근원적 소망입니다. 정말 하느님 사랑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요한 사도의 말씀 역시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대로 죽음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이처럼 구체적 실천의 동사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요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 사랑에서 나옵니다. 정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형제 사랑에 투신하게 됩니다. 성인들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할 일은 형제들을 주님께로 안내하는, 인도하는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요한 세례자는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를 예수님께, 또 안드레아는 자기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을 직접 부르셨지만 필립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나타나엘 역시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녹녹치 않습니다. 전개되는 대화를 보십시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타나엘은 물론 그 누구도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편견에서 벗어나기는 참 힘들 것입니다.
“와서 보시오.”
‘와서’란 말을 보니, 제 강론집 제본소 “와서”란 이름이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착안했다면 참 기막힌 발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직접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필립이요, 아, 바로 이게 진정 형제애입니다. 이에 본격적 참사람들간의 운명적 만남이 펼쳐집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을 것입니다. 나타나엘보다 더 나타나엘을 잘 아시는 주님이듯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세상에 예수님 CCTV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눈길을 피해 숨을 곳은 어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참자기를 발견함으로 경악한, 또 감격한 나타나엘의 예수님 고백입니다. 참사람과 참사람의 참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타나엘의 고백을 통해 자기 신원을 새롭게 확인한 예수님 역시 감격하여 나타나엘에게 놀라운 축복을 예고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삼 우리의 영적 여정은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관계도 날로 깊어졌을 것이며, 우리 또한 날로 예수님과 깊어지는 관계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발광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성인들처럼 우리는 더욱 주님을 반사하는 반사체로 살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선교도, 이웃 형제애의 실천도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충실한 주님의 반사체로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온 세상에,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시편 100,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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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와서 보시오."(요한1,46)
<증언의 삶!>
오늘 복음(요한 1,43-51)도 어제 복음에 이어 '복음화와 선교의 참모습인 증언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신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 따라나선 필립보가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타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나타나엘은 예수님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필립보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난 나타나엘이 이렇게 변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고 말했던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이스라엘의 임금님으로 받아들입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엄청난 변화와 기적이 지금 여기에서 나를 통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희망 안에서, 날마다 아니 매 순간 나를 부르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나를 따라라."(요한 1,43)
이 부르심과 초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를 부르시는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주님을 만나 변화되는 기적을 만들어 내고, 너를 주님께로 인도합시다!
"와서 보시오."(요한 1,46)
오늘 독서(1요한 3,11-21)는 '예수님을 만난 증언의 삶이 곧 사랑'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입니다. 이 권고를 한번 곰곰이 되새겨 봅시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11)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3,16) ……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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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LyA_jYcXy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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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 48)
우리를
먼저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여정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은
한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하느님을 뜨겁게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방향을 틀어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 또한
마음을 정해야 하는
마음의 길입니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거짓을 이기는
빛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감출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곳과 저곳이
이것과 저것이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목말라하는
나타나엘에게
먼저 마음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삶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비로소
여기까지 왔어야
알게 되는
사랑입니다.
하늘의 사랑은
우리 삶의
출구와 입구를
비추어 줍니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
맑은 복음입니다.
사랑이
함께 하심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기쁜 새날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진실로
믿습니다.
우리를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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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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