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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일체향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템플스테이원장 일감 스님의 ‘금강경 강좌’ <1> |
제주불교거사림(회장 오영호)과 제주도불교청소년연합회(회장 김영보)가 주최하고 제주마하보리회(회장 김애자)가 주관한 일감 스님(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템플스테이원장) 초청, ‘금강경 강좌’가 지난 1월 27일~29일까지 제주시 삼도1동 시민포교원에서 개최됐다. 금강경 강좌는 성도재일을 맞아 진행됐는데 강좌 내용을 5차례에 걸쳐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주> "깨달음 얻어 '열린 사람' 되는 게 공부 목적' 불교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불자들은 그 이유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에 가면 좋은 이유가 다 있는데 대부분의 불자들은 ‘그냥’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같은 대답으로는 논리 정연한 아이들에게 절에 같이 가자고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 법’이라는 말을 합니다. 수행하는 것이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것이지만 그 법이 어떤 것인지,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는 스님도, 책도 드문 게 사실입니다. 불법(佛法)을 우리나라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법’, 그리고 인도에서는 ‘다르마(일체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삶 속에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연 사물 가운데 물(水)의 원리와 같은 것을 ‘법(法)’이라 했습니다. 물은 상대에 따라 모양을 갖춥니다. 동그란 그릇을 만나면 동그라미를 만들고, 날씨가 추우면 얼게 되며,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는 등 자기의 고집을 가지지 않고 주변 환경에 따라 자신을 맞추는데 중국 사람들은 이것을 ‘법’이라 했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같은 물의 성질은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원리나 법칙, 이것을 중국에서는 ‘법’이라 했고, 한국에서는 ‘깨달음’이라 표현했습니다. 법은 어리석은 생각을 깨면 지혜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깨달음이고, 그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있는데 ‘나’만 옳다는 생각을 고집하면 지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리 수 있고, 접을 수 있으면 지혜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남의 탓’인 줄 알았던 잘못이 ‘내 탓’인 것을 알게 되면서 번뇌는 사라지게 됩니다. 법과 깨달음은 본래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리석은 생각에서 깨어날 때, 나의 본래 지혜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깨달음이란 마음이 열린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공부 목적은 ‘열린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늘 불안에 살며, 짜증이 곁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불행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열린 사람이 되고 싶으면 그것을 내려놔 보십시오. 자기가 세워놓은 기준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열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법, 깨달음, 다르마 등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본래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본래 우리 속에 있는 것인데 한 쪽으로 마음을 쓰다 보니 우리가 힘들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런 것입니다.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같지 않은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일례로 ‘요즘 종교는 다 같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부 다릅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도와준다는 자비심의 차원에서 같다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불법에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 가운데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매 맞는데 아프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진리는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진리는 남자․여자, 중생․깨달은 자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미소를 지어야 돈을 잘 벌겠습니까, 찡그린 얼굴이 벌겠습니까? 부지런한 사람이 돈을 잘 벌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이 돈을 잘 벌겠습니까? 부지런하고 친절해야 돈을 잘 버는 것이 진리인데 내 고집대로 밀고 나가야 되겠습니까? 불자들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내 마음을 살핀다는 것인데 남의 마음만 봐야 되겠습니까, 내 마음도 봐야 되겠습니까? 수행하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에게 절을 하지만 이는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고, 수행을 통해 자기 마음을 보면서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을 때 그 기준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열리면서 지혜가 생겨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손에 딱 잡을 수 없지만 제대로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적용됩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합니까. 실제로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싶은데 내려놓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까. 마음 내려놓기가 쉽기도 하지만 어렵기도 합니다. 길거리를 가다 동창생을 만났는데 동창의 가방은 명품인데 내 가방이 일반제품이라면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까짓 가방 때문에 질투가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법당에 와서 절을 해 보십시오.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자기 스스로 마음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명품 가방이 마음에 드느냐. 불법을 공부한 내가 가방 때문에 허물어져서는 안 된다. 명품 가방도 1년이 지나면 헌 가방이 된다’는 등으로 마음이 정화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마음이 바뀌어서 진리를 한번 더 생각하고 명품을 수천 개 산 것보다 더 값진 선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의식에는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이 있습니다. 잠재의식은 깊이 박혀 있어 수행으로도 잘 풀리지 않습니다. 현재의식의 경우 1시간 동안 기도를 하면 온갖 생각이 납니다. 기도한 지 1시간이 경과되면 갖가지 생각은 반으로 줄고, 2시간 되면 3분의 1로 줄어들게 되며, 그 뒤로는 생각조차 잘 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수행삼매에 빠지면 현재의식은 생각나지 않는 반면 불현듯 과거에 상처받은 것이 생각나게 됩니다. 꿈속에서도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는 잠재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잠재의식의 경우 슬픔이 있으면 슬픔이, 분노가 있으면 분노가 그대로 일어납니다. 무의식 저 깊은 속에 있는 이것은 쉽게 잘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현재의 삶에 치여 별 생각 없이 살고 있지만 나이가 들고 의식이 점점 떨어지게 되면 잠재의식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 배고팠지만 아버지의 눈치 때문에 못 먹었다면 나중에 늙어 치매에 들면 밥을 갖다 주었는데도 배고프다고만 합니다. 무의식에 저장된 것은 의식이 떨어질 때 나타나고, 죽어서도 나타납니다. 우리들은 정신력이 있을 때, 수행할 수 있을 때 내 잠재의식 속의 그 무엇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수행을 통해 풀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도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가야할지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쌓아놓은 업력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건강할 때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나는 어떤 것도 한스러운 것이 없고, 화나는 일이 없을 때, 그런 온갖 마음들이 다 사라져 버렸을 때 우리는 ‘열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2010-03-04 오전 9:35:41 | ||
/이병철 기자 |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