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구원을 위한 자기희생
영화〈희생〉(1986)은 1932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86년 12월 망명지 파리에서 54년의 생을 마감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생애 동안 고작 영화 7편밖에 만들지 않았지만 영상으로 사유하는 철학자의 면모로 세계영화사에 우뚝한 봉우리를 만들고 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철학적이며 사변적이며 신과 인간의 문제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심오함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뚜렷한 서사 전략을 위한 빠른 템포의 상업영화와는 달리 호흡이 긴 롱 테이크의 기법으로 유장한 리듬을 형성하고 있어 한 편의 철학적인 에세이를 읽는 듯한 엄숙함이 있다.
영화〈희생〉의 첫 장면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전직 대학교수이며 연극 배우였던 알렉산더(어렌드 조세프슨 분)가 그의 생일 날 아침에 어린 아들 고센과 함께 강가의 들판에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으로 이 영화는 시작된다. 그의 아들 고센은 실어증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한다. 이는 세계와 타인을 향한 창문을 닫고 있다는 뜻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신과의 관계를 끊은 현대 물질문명 속의 인간과의 소통 부재를 상징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아들 고센에게 중세의 한 수도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수도승이 산 위에 있는 죽은 나무에게 하루도 쉬지 않고 3년 동안 물을 꾸준하게 주었더니 다시 살아나 꽃이 만발하였다는 내용이다. 즉, 헌신적인 자기희생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으로, 여기서의 죽은 나무는 신이 사라진 현대 물질문명을 상징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생일 축하 전보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 오토가 “희망은 존재하지 않지만 진정 믿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전직 중학교 역사교사였던 오토는 생일 선물로 17세기 후반의 유럽 지도를 가져와 알렉산더에게 주면서 모든 선물에는 희생정신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18세의 아들과 미망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고 역설하다 갑자기 거실 바닥에 쓰러진다. 그는 일어나면서 유령이 지나가면서 친 것 같다는 느낌을 들려주는데, 이는 잠시 후에 있을 제3차 세계대전 발발 방송에 대한 불길한 악몽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곧이어 탁자 위의 와인 잔이 흔들리고 우윳병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3차 세계대전 발발을 알리는 방송이 들린다. 이성이 마비된 혼란한 행동의 무질서를 자제해 줄 것을 바라며 군 당국의 지시에 따라줄 것을 요구하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가족들은 정물처럼 굳어있는 무표정으로 절망을 내재화한다. 알렉산더의 아내는 아들 고센을 깨우지 말라고 부탁하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고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울부짖는다. 주치의인 빅터는 알렉산더의 아내와 딸 줄리아에게 진정제 주사를 놓는다. 그들은 진정제 주사를 맞으며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지만, 알렉산더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며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인류 구원을 위한 자기희생의 기도
알렉산더는 절절한 내면 독백의 형식으로 신을 향한 기도를 한다.
“신이여, 저의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벙어리로 살겠습니다.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으니 모든 것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주시고, 저의 두려움을 없애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이런 소망을 들어주신다면 약속한 모든 것을 지키겠습니다.”
우편배달부 오토는 그런 그에게 엉뚱한 해결책을 제의한다. 그의 하녀인 마리아만이 최후의 희망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재앙과 절망의 극복은 마리아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알렉산더로 하여금 바닷가 저편 농장인 마리아의 집으로 가서 그녀와 동침하라고 한다. 그녀와 동침하면서 소원을 빌면 이 악몽을 끝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진실이며 그녀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특별한 여자라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가족들 몰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집을 빠져 나온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마리아의 집으로 향한다. 마리아는 깨끗한 물로 그의 더러운 손을 정갈하게 씻어주는데, 이러한 행위는 하나의 의식처럼 엄숙하게 진행이 된다. 그의 손은 신을 몰랐던 손이며, 그의 손은 현대 과학의 물질문명에 익숙한 손이었기에 깨끗하게 정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어렸을 때 연주하던 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하며 유년의 기억을 들려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살던 옛집을 고치고 뜰을 손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창을 통해 바라본 바깥 풍경은 인공미로 가득하여 마치 폭격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황폐하게 보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의 ‘인공미’는 현대 과학의 물질문명을 상징하고 있다. 자신이 고치고 손을 본 집의 뜰은 바로 과학의 만능만을 맹신한 채 자연(신)을 멀리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황폐함과 현대인의 불모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마리아에게 동침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만 집으로 가라며 이를 거절한다. 알렉산더는 가지고 간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며 절절한 목소리로 동침을 요구한다. 갑자기 가구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알렉산더의 옷을 벗겨주고 동침을 하기에 이른다. 두 사람의 포옹한 모습이 침대 위의 허공에 뜨기 시작한다. 공중에 뜬 두 사람의 포옹 장면에 뒤이어 핵전쟁으로 황폐해진 거리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노크롬 화면으로 펼쳐진다. 마리아가 목수였던 인간 요셉과의 관계가 아닌 신의 은총으로 예수를 잉태했듯이, 이 영화에서의 마리아와의 동침 장면은 알렉산더의 신성을 의미하고 있다. 마리아가 신의 은총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된 예수를 낳았듯이, 알렉산더의 몸에 신성이 깃들게 함으로써 인류의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문득 알렉산더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여느 때처럼 집안의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잡지사의 편집장에게 원고에 관해 통화를 하기도 한다. 평온한 침실, 그리고 가족들 역시 뜰에서 명랑한 낯빛으로 담소를 하는 등 예전처럼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제3차 세계대전의 핵전쟁의 악몽은 백일몽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알렉산더는 기도를 통한 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려고 한다. 가족들이 산책을 나간 사이에 가구들을 한군데 모아 놓고 불을 붙인다. 이 영화에서 화염에 휩싸여 활활 타는 집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신을 향한 알렉산더의 약속이며, 또한 평온과 안락함을 의미한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을 불태운다는 것은 개인적인 행복과 이기심을 버리는 자기희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알렉산더는 가족들 의 강압에 의해 강제로 병원차에 실려 가게 된다. 그의 뒤를 자전거로 쫓는 것은 하녀 마리아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영화〈희생〉의 엔딩 시퀀스 역시 첫 장면처럼 의미심장하다. 실어증을 극복하고 이제 말을 하게 된 알렉산더의 어린 아들 고센이 죽은 나무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 고센은 마치 3년 동안 하루 동안 쉬지 않고 산 위의 죽은 나무에 물을 주어 꽃이 만발하게 했던 중세의 한 수도승처럼 성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들 고센은 나무 밑에 드러누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이게 무슨 뜻이죠?”하고 독백조의 형식으로 묻는다. 태초에 말씀으로 신의 존재를 현현했듯이 알렉산더는 자기희생의 신성한 행위를 통해 신의 존재를 현현한 것이리라.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카메라가 나무의 밑 둥에서부터 천천히 틸트업 되면 나무 가지 사이 저 너머로 눈부신 강물이 반짝이고 있다. 배경 음악으로〈마태수난곡〉중 제47곡인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희망과 확신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듭니다.’와 ‘나의 아들 앤드류사에게’라는 안드레이 타르코프키의 헌사가 자막으로 떠오른다.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여정의 마지막 작품으로, 현대 과학 물질문명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신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처절한 진혼곡이다. 세계적 촬영 감독인 스벤 닉비스트의 유려하고 장중한 화면은 타르코프스키의 경건한 종교적 탐구의 철학과 어우러져 한 편의 철학적 우화를 완성하고 있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1983년에 발표한〈노스탤지어〉(1983)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도메니코가 로마 광장에서 인류의 정신적 깨달음과 각성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가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현실의 안락함과 행복을 상징하는 집을 불태우는 장면과 종교적 탐구에 대한 메시지가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화면은 유장한 시적 리듬을 지니고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화들을 감상하고 있는 것처럼 회화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또 다른 영화〈스토커〉(1979)역시 신을 잃은 채 과학적 맹신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묵시록적인 예언을 담고 있어 이 영화와 역시 맥이 닿아 있다.
첫댓글 영화를 보고 이 글을 읽어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