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
- 신성한 진리와 선을 거절함 -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2장 2~14절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천국
천국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 속에 있는 사랑과 지혜, 그리고 유용함의 나라이다.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현존은 인간 안에서 천국을 만든다. ‘임금’이란 여호와, 신성한 아버지, ‘왕 중의 왕’이시고, ‘아들’이란 신성한 인성이다.
• 혼인 잔치
신성한 존재, 한 분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 또는 신성한 선과 진리의 결혼이 있다. 그리하여 진정한 결혼은 주님이 인간 안에 존재하는데, 각 사람의 거듭나는 수준에 따라서 된다. 그리고 주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존재하되 각 사람이 완전해진 정도만큼, 다시 말해서 각자의 심정 속에 있는 사랑과 지성 속에 있는 진리의 완전한 하나 됨, 또는 그 둘이 결혼된 수준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결혼은 주님과 교회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주님은 ‘신랑’ 또는 ‘남편’, 교회는 ‘신부’ 또는 ‘아내’라 부른다.
신성한 선과 진리의 완전한 결혼은 아주 미미한 부분, 즉 말단의 것들에서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인성의 영화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신성한 결혼은 타락한 인간이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영적 결혼의 상태가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인간 안에서의 선과 진리의 결혼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국적인 상태의 인격이 되게 해주듯, 천국도 이런 결혼에 비유된다. 그 이유는 천국은 그런 결혼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어떤 사람이라 해도 영적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는 정신적으로 천국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결혼은 인간 마음의 두 부분인 의지와 이해성의 연합인 것이고, 이 연합에 하나님이 함께 연합되신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는 상태라면 그의 의지와 이해성은 쪼개지고 있는 것이다.
• 말씀 속의 결혼
영적 결혼은 주님의 말씀의 문자 속에서 그 문자가 이중으로 표현되는 데서 암시해 준다. 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하나는 의지 속의 애정과 다른 하나는 이해성 속의 생각과 관계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는 구절에서, 굶주린다는 것은 선을 갈망함에, 목마르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함에 관계된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은 인간 안에 영적인 결혼이 창출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 문자 그대로의 그림
이 비유는 위의 사항들을 표징으로 그려서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한 임금이 혼인 잔치를 마련하고 있다. 혼인 잔치 날 이전 적당한 때에 종들이 손님들을 초청하기 위해 파견된다. 때로 혼인 잔치의 정확한 날과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먼저 혼인 잔치가 있게 될 것을 예고하러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혼인 잔치 준비가 마무리될 때 두 번째 초청을 위해 종들이 파견된다. 처음 초청 때에 초대에 응하겠다고 한 손님은 혼인 잔치 집 주인이 오라고 할 때에 참석할 것이라는 약속을 한 셈이다. 따라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거절하는 것은 약속을 위반한 것이 되고, 그 임금을 우습게 여긴 것이 되고 만다.
• 역사적 의미
위와 같이 이스라엘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예고하셨다. 비록 오시는 그 시간은 확실히 알려 주시지 않았다 해도, 이미 이스라엘인들은 초대 받은 상태로서, 주님의 오심을 위해, 또 영적 결혼 잔치를 위해 그들 스스로 준비하도록 미리 예고된 상태이다. 그래서 주님은 오실 때가 되시자, 그의 종 세례 요한을 앞서 보내시어 오심을 알리면서 회개를 통해 혼인 잔치에 참석 가능한 준비를 인간이 마무리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신성한 임금은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마련하셨던 것이다. 그 이유가 신성한 진리는 아들 또는 신성한 사랑은 말씀이 육신 안에 거하여 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영적 의미
개인적으로 우리 각자는 이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고 부름 받고 있다. 우리를 오라고 보낸 ‘종들’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담긴 진리들이다. 모든 진리는 우리로 사랑과 지혜, 또는 선과 진리 속에서 있게 되는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져 있는 것으로 이는 인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선과 진리가 하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오기를 싫어하였다. 그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인간들은 육적 애정 속에 있는 감각적 상태에만 머물고 있어서 영적 마음의 상태 안으로 진입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문제의 발단은 인간의 의지 부분이었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지닌 자유의지를 남용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회개시키고 개혁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영적 마음을 소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역사적 응용
역사적으로, 거룩한 말씀의 초대장을 받아 쥐고도 영적인 혼인 잔치에 가지 않았던 자들이란 말씀의 문자를 쥐고 있었으나, 그 말씀의 예언이 성취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그 분을 거절한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잔치에 이미 초대되어져 있었고 자기들도 그 초대를 수락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려 왔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오셔서 본문에서 종을 파견했듯이 그의 사도들을 파견하시어 유대인들을 잔치에 오라고 부르신 것인데, 이 초대는 그들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선포한 잔치 따위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란 잔치는 자신들의 육적인 악들을 위한 잔치였으며, 그 잔치란 자신들이 천국을 지배하고 싶은 잔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나라라는 것, 그 나라에 들어가 즐기려면 자아를 부인하는 회개와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그들이 배우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 가르침을 지독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부르시는데 회개와 개혁을 하지 않은 자들, 오로지 가진 것이라고는 육적 수준의 마음뿐인 자들은 인격 측면에서 위의 유대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은 육적 마음,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것만 찾는 마음, 선함에 정 반대되는 악에 속한 자들일 뿐이다.
• 두 번째 부르심
임금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셨다. 즉 초대가 반복되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첫 초대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있어왔다. 역사적 인물을 떠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자신에 관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을 가르치심에 의해 진리의 훈육이 각 사람의 이해성에서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주님이 가르치신 사항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훈육을 각 사람이 가지게 되었을 때, 두 번째 초대가 있게 되는데, 이는 각 사람 안에 있는 영적인 애정을 일깨우심으로 그들의 의지에서 만들어진다.
이리하여, 각자가 결혼이라는 정점에 진정 도달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인간의 정신적 본성의 두 부분인 의지와 이해성이 부름 받는다. 그래서 각 사람은 자기의 의지와 이해성이 결혼하도록, 다시 말해 영적인 결합으로 두 부분이 하나 되도록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먼저 진리를 수단으로 주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속성을 가지셨는지, 우리의 속성은 무엇인지, 그리하여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가르치신다. 그 다음, 두 번째 초대로서 주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연합하시겠다고,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시되 사랑을 수단으로 기회를 제공하신다. 주님은 모든 우리의 애정들을 순수한 생명, 천국의 생명으로 채우시겠다고 우리에게 제의하신다.
• 잔치
초대 받는 저녁 식사나 파티는 상대방과의 유대를 돈독하게 하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랑과 지혜, 그리고 선용 속에서 주님을 친구로서 여기고 주님과 하나가 되고자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셈이 된다. 우리가 주님의 법을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여겨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을 친구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셨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셨고, 그리고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하셨다.
주님은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주님의 영적 잔치를 준비해 놓으신다. 주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시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기쁘게 사랑하는 만큼에서 진리의 사랑을 채워 주신다. 우리가 영적 결혼에 진입하는 정도만큼에서 주님은 우리의 지식과 애정, 진리와 선과 결혼하신다. 이와 같은 잔치가 교회에 있는 성만찬이요, 이 만찬에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진리의 포도주와 사랑의 떡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만찬은 영적 결합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신실한 사람의 심정은 주님께 더 가까워지고, 주님에게서 흘러나와 유입되는 생명으로 그의 심정을 더 활짝 여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사람들은 서로 서로 더 사랑하는 연합으로 더 친밀해지도록 해준다. 우리가 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사랑이 더 증가되듯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이 배가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잔치에 부르시되 우리 인간의 모든 부분, 즉 의지와 이해성, 그리고 행동 측면이라는 모든 부분에 걸쳐 부르고 계신다. 영적 결혼은 ‘믿음만으로’도 안 되며, 사랑만으로도 안 되고, 선한 일만으로도 완성되지 않는다. 영적 결혼은 선한 일속에서 믿음과 사랑이 하나 될 때에만 결혼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영적 결혼은 인간 삶에 있는 즐거움을 부정하는 금욕적 생활 속에 있지 않고, 삶의 모든 부분에 주님을 사랑하는 영이 고루 퍼짐으로서 순수해지고 고결해지는 삶의 충만함 속에 존재한다. 주님이 계신 마음은 기쁨이 있고, 주님의 오른손에는 언제나 즐거움이 존재한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에게 있는 즐거움이다.
• 짐승과 천사
인간은 동물과 천사의 속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을 짐승 같이 만드는 것은 인간이 가진 육적인 것이나 육적인 생명이 아니라 자기가 지닌 본성을 남용하는 데서, 육적 삶을 이혼시키는 데서, 인간 속의 두 본성 사이에 꼭 있어야 할 결혼이라는 원칙을 실제에서 부정해버리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애정들이 질서가 있다면, 그것들은 수준 여하를 막론하고 제 위치에서 그것 나름대로 정상적인 것이다. 이 모든 애정들의 품질의 좋고 나쁨은 각 애정에 있는 내향적인 생명에 의존된다. 만일 우리가 이기적인 탐욕을 위해서 그 애정들이 사용되게 몰아친다면, 게다가 타인 속의 선한 어떤 것을 경외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의 애정은 이기적이고 악한 애정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그 애정들을 사용한다면, 주님이 삶의 더 좋은 품질로 채우시기를 바란다면, 우리 속의 육적인 애정이라 해도 영적인 것들과 질서 있게 연결을 맺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의 신체가 그 속에 내재하는 영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먹고 마시는 감각적인 삶을 즐기되 그것을 순수한 차원에서 즐기도록 설비되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살기 위해 먹는다’고 한다면, 그는 먹는다는 것을 즐기는 것일는지 모른다. 그 이유는 먹는 것이 그에게 유용하기 때문이고 먹는다는 목적이 실제의 먹는 것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만일 그가 ‘먹기 위해 산다’고 한다면 그는 그의 목적을 감각적 즐거움이나 이기적인 즐거움에 두게 되어 결국 그 사람 전체는 이기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행동들을 본인의 인격의 품질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기 때문이다.
• 준비
주인은 다시 종들을 보내며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다. ‘짐승’이란 우리 속의 다양한 애정들을 표현한다. 주님께서는 원리 중에서 순진이라는 원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어린 양이라 불렀다. 짐승 중에서 ‘소’는 육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
이 애정은 우리가 매일 틀림없이 실제로 해가는 애정, 즉 일하는 애정인 것이다. 따라서 소는 삶 중에 있게 되는 실제적인 애정, 일하는 애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는 삶에 있게 되는 선함 중에서 외적인 선을 표현한다. 그러나 ‘살진 짐승’은 어리거나 조금 성장한 경우까지 포함해서, 이 짐승은 우리의 두 번째 출생, 즉 거듭남 속에 존재하는 영적인 애정들을 표현한다.
따라서 이 짐승들은 영적인 선을 표현해 준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의 충만한 삶에는 소와 살진 짐승이 음식으로 준비되어 있다. 즉 육적인 애정과 영적인 애정이 선하다는 말이고 두 가지 모두가 거듭나는 사람을 위한 양식이라는 말이다. 타락하는 사람은 안으로나 바깥으로나 모두 무질서한 상태인 반면, 거듭나는 사람은 안과 밖 모두가 질서 속에 있고 자유롭고 충만함 속에 산다.
주님은 사람들을 부르시되 각자가 충만하게 한 삶에서 잔치에 부르신다. 그 이유는 각자가 노력해서 채워진 충만한 삶이란 순수해진 상태의 모든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충만하고 유용한 삶을 위해 “모든 것을 갖추는 것이다.” 주님은 거듭나는 사람의 기쁨 안에서 주님 자신을 인간과 하나가 되도록 추구하신다.
• 사람들의 응답
위와 같은 주님의 초대에 사람들은 어떤 일반적인 응답을 할까? 필시 모든 사람들의 경우, 자기는 진리를 사랑한다고, 자기는 선을 행하려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테스트가 자기 앞에 실제로 놓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나는 삶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쾌락을 선호하는 때가 허다하다.
•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김
손님들이 잔치에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는 잔치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거나, 그 잔치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했다는 말이다. 선과 진리의 천국적인 결혼에 이기적인 마음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 마음은 결혼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회개나 전환 같은 자신의 변화를 생각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마음에 천국의 삶은 지상적 쾌락을 위해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듯 여겨진다. 그래서 악한 마음은 천국 삶을 뒤집어서 지상적 삶을 그 위에, 천국 삶은 아래에 처박아 놓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의 구원의 바위를 경솔히 평가한다.
• 길
초대 받은 자들은 각각 제 길을 갔다.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 그들의 길이란, 정신적인 길,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표현한다. 좋은 의미로 볼 때, 길은 선을 달성하는 방법인 진리를 표현한다.
본문의 경우 나쁜 의미에서인바, 길은 악인이 행하는 방법인 거짓 원리들이다. 이 길은 주님과는 거리가 멀고 자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놓인 길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주님과 분리시키며, 선과 진리의 천국 결혼에서도 자신을 분리시킨다.
• 밭과 장사
‘자기 밭’이란 그 사람의 의지 또는 심정, 그 사람에게 특유한 애정에 있는 원리들에 관계된다. 그 이유는 밭이란 작물이 자라 오르는 땅이요, 물이 진리를 표현하는데 비해 땅은 선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밭과 대조가 되는 ‘장사’란 정신적으로 사고파는 것인 이해성에 있는 생각들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천국적인 애정과 생각들을 사양하고, 대신 자신의 삶의 종류인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들, 지옥적인 결혼에 이르는 것을 선호한다.
인간이 거듭나는 삶에 있게 되는 천국 잔치에 참석하라는 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얼른 생각하면 믿어지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역사는 이러한 거절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예증해주고 있다. 만약 정상적인 임금이 자신을 초대하거나, 권력자가 자기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경우, 그 초대를 우습게 여기거나, 그 초대를 경멸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천국 임금이 초대하는 것에는 경멸을 보여 주는 것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러나 감각적인 인간이 영적인 선과 진리의 삶에 하등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실 밭이라든가 장사한다는 것은 그 본연의 모습으로는 매우 좋은 것이다. 한마디로 필요한 것이며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심정, 그리고 육체까지에 이르러 온통 관심사를 독점할 경우, 그것들은 우리로 덫에 걸리게 하고 만다. 따라서 자신이 쏟는 외적 삶이나 일에 대한 관심의 양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심의 품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그가 영적인 목적이나 선용을 위해 관심을 쏟는다면, 그 일은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외적인 것들에만 정신을 쏟다 보면, 주님의 진리가 주는 모든 선한 영향력을 그들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 종들
사람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 마음에 주님이 아껴 두신 선하고 신성한 상태들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주님이 아껴 두신 것들이 주님의 종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게 되면, 그들은 금방 진리에 반대하는 흥분을 갖게 된다. 이 흥분의 결과를 본문은 말하기를,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고 하였다.
첫 초대는 가르침을 통해 하였다. 두 번째 초대는 주님이 ‘준비한 것’을 통해 의지에 전달되었다. 악한 자가 이러한 주님의 종들을 붙잡았다는 것은 그들이 말씀 속의 진리를 광폭(狂暴)한 의지로 반대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종들을 모욕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이해성이 진리들을 반대했다는 것으로 종합해서 말하면 그들은 주님의 진리를 조롱하며 경멸했다는 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종들을 죽였다. 이는 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진리에 반대되게 살아서 그 진리 속의 생명을 그들 스스로 파괴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예언자들을 얼마나 자주 죽였는가? 아예 신성한 예언자, 예언자 중에서 가장 큰 예언자이신 예수님까지 죽였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마 23:37-38)
• 심판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라 하신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어떻게 되어 갈지를 주님은 알고 계신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의 만행을 전해 들으셨다는 것은, 이는 주님이 들으셨다는 사실을 인간이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즉 임금이신 진리가 인간에게 각자의 상태를 까발려 줄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심판을 말하고 있는바, 이는 인간이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결과이고,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에 마땅히 있는 선한 직책의 수행을 인간이 거절한 탓에서 비롯되는 심판이다. 인간이 신성한 진리의 실용적인 사용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확증을 자신 스스로 가질 때, 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 그러나 그 진리를 경멸하고 남용하고 있으면, 그 진리는 그들을 심판에 가져다 놓아 준다.
이 진리들은 영적 삶의 법칙들이다. 그래서 그 진리들은 당사자가 되고 싶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들 속에 남아 있도록 판결해 준다. 이리하여 인간이 자기 인격 속에 채워져야 할 용량을 채우게 되었을 때, 그는 필시 심판에 서게 된다. 심판이란 자기 인격의 결과, 또는 그 인격이 만들어낸 바깥쪽의 것들이다. 자기 인격이 고정될 때, 그 심판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기억 속에 진리를 가지고 있고, 심정 속에 선한 나머지들을 저장해 놓고 있다 하자, 그런데도 그가 주님의 종들인 내향적 진리에 반대되게 자신을 끌고 가려 한다면, 그는 그만큼 더 자신이 사랑하여 살고 싶은 악의 형체가 되도록 스스로를 판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성한 말씀 속의 진리들은 군대가 되어 심판을 집행한다. 사실 주님이시든, 진리이든, 거기에는 어떤 분노도, 복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란 악인 속에 존재하며, 단지 그 분노가 주님에게 있는 듯 여겨지는 것뿐이다. 그렇게 여겨지는 이유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각 개인의 사상은 당사자들의 인격으로 색칠되기 때문이다.
신성한 진리는 설사 인간이 악하다 해도 그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진리를 보내실 때, 악인은 그 진리를 뒤집고, 그것을 자신의 지성 속에서 왜곡시켜 거짓으로 만들어버린다. 진리를 잡고 있는 마음을 파괴시키는 것은 이와 같이 진리가 왜곡되어 만들어진 거짓이다. 본문에서의 ‘군대들’이란 악인의 이해성 속에 들어앉은 거짓들이다. 주님이 화를 내신다고 간주하는 사람의 경우, 실제의 분노는 그 사람의 의지 안에 든 악인 것이다. 마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주님에게서 더욱 멀어져 갈 때 이 악에 든 거짓 원리가 선과 진리의 살인자를 오히려 파괴해 준다.
• 동네를 불사름
살인자의 동네는 불살라졌다. 즉 거짓 원리들은 인간 마음에 있는 진리에 관한 모든 교리들까지 파괴한다는 말이다. ‘동네’란 마음에 있는 질서정연한 교리이다. 이 교리는 영을 보호하면서 영의 손과 발이 되어준다.
불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나 뒤집어진 사랑, 악한 사랑은 탐욕이다. 이와 같은 사랑은 악하다. 이 악은 타락하는 마음속에서 그나마 남은 교리라는 동네를 불사른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21) 악은 인간 자신들 안에 존재한다.
악은 태워 없애버리는 불이기 때문에 지옥에 있는 악인들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있다고 한 것이다. 사실 그 불은 악인들 속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더 악한 데로 빠지게 하면 할수록, 그들은 스스로 선하고 진정한 모든 원리들을, 모든 천국 결혼을, 주님의 현존과 영향력에 속한 모든 것을 더욱 더 파괴시키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 속에 있던 이런 악한 사랑, 악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만들었고, 스스로 심판하게 했던 것이다. 주님의 혼인 잔치에 오지 않겠다는 자들은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자들이며, 일상생활에서 신성한 선을 사랑하지도 않고, 채용하지도 않겠다는 자들이다.
• 두 번째 집단이 초대됨
이제 임금은 초대의 형태를 바꾸어 또 다른 손님 집단을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 있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하였다.
인간은 그가 영적 삶의 가치를 이해하여 음미할 때, 거듭나는 속에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을 무엇보다 먼저 사랑할 때, 인간다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값어치가 있음, 또는 인간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전적인 육적 품질이나 그의 주변 환경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나는 상태에 달려 있다. 한마디로 천국적인 결혼에 진입하는 정도만큼에서 인간은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속의 신성한 진리, 비록 그 진리가 가르쳐진 사람에게 거절되기는 했지만, 그 진리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 즉 무지로 말미암아 거짓 속에 처박혀 있던 마음에서 그 거처를 발견한다. 그들을 가르치심으로 주님은 그들과 하나를 이루게 된다.
• 거리
성경을 보면 가난한 자들이 잔치 자리를 채우기 위해 거리나 길에서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정신적인 길이란 마음이 그 나름대로의 목적을 향해 움직여가는 방향 또는 길을 말한다. 인간의 정신적인 길이 어떠한 지는 그 사람 속에서 통치해가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네거리 길’이란 마음의 중요한 길이다. 길, 진리, 또는 교리, 이것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은 그의 통치하는 목적을 향해 여행한다. 본문의 네거리 길이라는 단어를 보다 더 직역한다면, ‘큰 도로가 갈라지는 곳’, 즉 교차로(네거리)라고 볼 수 있다. 천국으로 가는 네거리 길이란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이다. 그러나 네거리 길이란 마음속의 간접적인 길, 덜 명확하게 보이는 길, 그래서 잘못하면 평탄하지 못한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곳이 교차로일 것이다.
성경 말씀을 가지지 못했던 이방인들은 천국으로 가는 직선 도로를 알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거짓 교리나 잘못된 견해라는 교차로에서 배회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이야말로 ‘어둠 속에서 길을 걷던 백성들’이었다. 교회라는 측면에서의 유대인들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새 교회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 그들은 무지했던 가운데 일부는 마음이 선하기도 했고, 또 일부는 악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이방인의 상태와 유대인의 상태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은 정신적 삶의 네거리 길인 그의 직접적인 진리를 수단으로 우리로 자신들의 악에서 되돌아서게 하실 수 없을 때, 주님은 종들인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들을 우리 마음속의 이방인 상태인 육적 마음속에 남은 선의적인 상태에 호소해보도록 파견하신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는 종종 주님이 보여 주시는 명백한 길로 여행하기를 거절하는 바, 결국 주님은 우리를 정신적 삶의 교차로에서 만나신다. 이 지점은 주님이 우리를 간접적으로 만나시는 방법, 아마도 훈련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와 만날 수 있게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이리하여 천국 가는 길은 각자의 상태에 알맞은 처방에 의해 결국 당사자에게 매력적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것이 네가 걸을 길이다.’고 우리 뒷전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 손님을 데려옴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한지라.” 우리의 감각적인 마음에 의해 경시되고 있던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들은 우리 생각과 느낌의 교차로, 옆길인 간접적 방법까지 동원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진리들은 마음속의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육적 마음속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려고 애쓴다. 그 이유가 주님의 말씀은 모든 것에 보내져서, 가능만 하다면 모든 것이 거듭나지도록 추구하기 때문이며, 천국과 영적인 혼인 잔치는 인류에서 온 손님들로 메워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성한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고 있고 신성한 섭리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한다. 특정한 누군가가 지옥에 가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 신성하게 의도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다. 영의 혼인 잔치는 모두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그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자, 또는 잔치하는 동안 남아 있지 못하는 자는 신성한 사랑과 지혜가 베푸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자신 속의 이기적이고 악한 삶을 기꺼이 떨구지 못하는 자들이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잔치를 준비하고, 손님들이 다 모이면 주인은 그들을 보고 말을 건네면서 인사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습이다. ‘임금’이란 주님이시다. 주님이 손님을 둘러보신다. 인간의 마음 안에 더 많은 신성한 영이 흘러들면 인간에게 심판이 산출된다. 만일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 악을 더 많이 꺼내서 치워버릴 것이나,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자기가 아는 선과 진리마저 더욱 거부할 것이다. 예복을 안 입은 사람도 친구의 차원에서 말을 건네고 있다. 보다 더 직언하면 이 친구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안면은 있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란 진리를 알므로 해서 주님을 알고 있는 자,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 예복
임금이 손님을 보러 들어오셨을 때, 그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때와 장소에 알맞은 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대목을 문자대로 읽고 요즈음의 상식까지 동원해서 생각한다면 예식장에 적합한 옷차림을 하지 않는데 대한 처벌로는 너무 매정하고 불공적한 처사일 듯 보일는지 모른다. 사실 그 사람은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초청 받은 상태이니 어쩌면 집에 돌아가 잘 차려 입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예식장에 왔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시대의 고관대작들의 상설된 연회장에는 언제나 여유 있는 예복을 비치해서 손님이 사용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잔치에 오는 손님들의 편의를 보아주었다. 만일 그런 편의마저 마다하고 예복을 입지 않으면 이는 주님을 우습게 여긴 격이 되고 만다. 따라서 연회장의 규칙을 위반한 자는 그 집에서 쫓겨나야 할 것은 지당한 것이다.
이 본문을 영적 의미에서 보면, 이 사람은 불법을 저질러 영적 혼인 잔치에서 자신을 축출시킨 것이다. 신성한 성경 내의 여러 곳에서 사람이나 천사의 의복, 주님의 의복을 언급해 주고 있다. 일례를 들면, 예수님의 변모하심에서, 주님의 외모 변화는 겉옷까지도 변화시키게 해주었다. 겉옷 또는 의복은 진리들을 표현하는데, 마음을 옷 입히고 있는 것이 진리이다. 모든 애정들은 그 애정에 부응되는 진리로 입혀지고 표현하여 그 애정을 드러낸다. 활기 있는 강력한 애정들은 그 자체를 박력 있는 생각과 언어로 옷 입히고 있다. 그러나 냉담하고 꿈같은 느낌은 쉽고 온전한 생각과 말들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 예증
시편 104편 2절에서,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빛은 진리의 상징이고, 진리는 마음의 빛이다. 주님은 진리를 가지고 옷을 입으신다. 주님의 겉옷은 신성한 진리이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전하는 주님의 말씀은, “시온이여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사 52:1) 하였다. 정신적인 결혼이 선과 진리의 하나 됨 또는 사랑과 지혜의 하나 됨이듯, 예복을 차려 입음은 사랑되어 실제에 쓰인 진리, 즉 사랑과 결합한 진리이다. 예를 들면, ‘믿음만으로’ 붙잡고 있는 진리는 결혼 예복을 입은 상태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진리가 애정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준비해 놓은 옷으로 치장하지도 않고 혼인 잔치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란, 천국의 진리로 자기 마음을 옷 입히는 노력도 없이, 선과 진리의 천국 사랑과 영적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선관 진리가 실제로 사용되어 확증하지도 않은 채, ‘믿음만’에 의해 거듭나는 삶의 천국 기쁨을 달성하여 즐겨 보겠다는 사람, 그야말로 손도 안 대고 코풀겠다는 항간의 말들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 속의 진리는 인간으로 잔치에 오라고 부르고 있지만, 부름을 받은 각 사람은 주님의 초대를 위해 준비해 두신 임금의 옷장인 신성한 성경으로 자신들의 행동 지침을 삼아야 할 것이다. 즉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걸맞은 예복으로 자신을 옷 입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 예복을 입지 않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란, 신성한 말씀의 부름에서 천국적인 삶을 영위해 보려고 시도하고, 주님과 절친한 교제를 해보겠다고 작정하면서도 진리를 사랑해서 진리대로 살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 회개와 개혁은 자기에겐 필수 사항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한 척 하는 사람을 말한다. 천국적인 원리를 자신 스스로 받아 쥐되 인간 쪽에 할당된 의무를 도외시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천국을 허락하실 수 없으시다. 천국의 원리를 받아 쥔다는 말은 그 원리로 자기 삶을 꾸려서 자기 삶이 진리임을 확증해 보여 자기 속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주님의 나무람을 우리는 상고해 보아야 한다.
주님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셨다’는 것은, 신성한 진리의 현존은 그 인간의 진짜 인격을 그 사람에게 까발려 주신다는 뜻이다.
• 최상의 의미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인성 속에 있는 진리이다. 그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한 분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서 결혼되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넘치는 사랑으로 받는 신실한 마음은 주님에 관해서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영적으로 합리적으로 이해되도록 마음의 안쪽이 열리어진다. 그래서 사랑과 지혜의 잔치인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과 상호 교통을 가진다.
이래서 주님은 모든 사람, 이방인들까지도 포함된 모든 사람이 주님의 거룩한 말씀 속에 든 선하고 참된 것을 즐기도록 부르시고 있다.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 잔치를 즐기도록 홍보하시되, 참석자는 반드시 자신들을 정신적으로 옷 입혀야 한다는 것, 즉 삶의 계명인 말씀의 문자 속의 진리로 그들의 정신을 옷 입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진리를 실생활에 사용하지도 않는다면, 그가 지닌 진리에 대한 이론뿐인 지식은 천국적인 잔치를 위해 자기 마음을 잘 치장하지 못할 것이다. 심판 속에서 그는 진리의 삶도 없이 존재하는 인간으로 보일 것인바, 그는 기껏 소유한 진리의 지식마저 잃게 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저 세상까지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 실습해 쌓아 놓은 삶에 속한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되 진리를 사랑하지도, 사용하려 들지도 않은 자들은 그가 지닌 이론적인 것까지 모조리 저 세상에서는 거절당한다. 만일 그들이 천국에서 자기들이 지녔다고 하는 믿음을 근거로 진리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즉각 천국의 밝은 빛이 그들 마음에 비쳐질 것이고, 그 빛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진짜 인격이 어떤 모습인지, 천국의 진정한 속성은 그들 속성과는 전연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해준다.
• 아무 말도 못함
위와 같은 사람들은 비유 속의 사람과 같이 ‘아무 말도 못한다.’ 즉 그들은 천국적인 삶을 위해 자신이 부적당함을 확인하게 되어 어떤 변명도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언어란 생각의 표현이다. 아무 말도 못한 것은 자신의 방어를 위해 말할 자료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고, 표현할 생각도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이를 영적으로 보면, 그는 천국적인 삶에 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그가 천국적인 진리로 정신적인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손발을 묶음
악이 애정과 은밀한 생각까지 지배하도록 되었을 때, 악은 그 인간으로 죄의 노예가 되게 묶는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하였다. 그렇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든지 죄의 종이다.
이리하여 임금은 예복을 차려 입지 않은 사람에 관해 그의 사환들에게 말하기를,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하였다. 손발을 묶는다는 것은 마음의 외면과 내면에 있는 능력과 자신을 묶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손은 위쪽에서의 말단이고 발은 아래쪽에서의 말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과 발 모두는 우리의 능력을 표현하는 바, 손은 일을, 발은 걷는 것으로 제 능력을 발휘한다.
이러므로 악은 죄에다 인간 전체를 묶는다. 그래서 악인이 타인에게 악을 행하는 데서 저지당할 때, 그 악인은 주님이 그들을 묶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이 자신의 악으로 자신을 묶는 것이다. 실제로 주님은 이 악인들에게 다가가신다 해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사 61:1) 그들을 억류해 놓은 옥을 열어 자유를 주시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짐
악들은 인간을 내면의 빛이신 주님으로부터 바깥의 어두운 데로 내쫓는다. 멀어진 인간의 인격은 주님을 더욱 더 적대시하여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계 21:17)이라는 표준에서 더욱 멀어져 간다. 그는 천국 결혼에서 자신을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바깥 어두운 데, 즉 거짓에 자신을 던지고 만다. 거짓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지 또는 가르침의 결핍으로 인한 거짓인데, 이는 변명할 수 있는 거짓도 된다. 또 하나는 악의 거짓, 이는 내심에서 오는 의도적인 거짓이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후자는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진리를 사랑하지도, 행하지도 않는 마음이요, 이 마음이 있을 곳은 바로 바깥(지독하게) 어두운 곳이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3)
어둠의 두 종류가 이사야 60장 2절에서 거론되고 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 인간이 가진 빛이 크면 클수록, 그가 그 빛을 거절할 때 있게 되는 그의 어둠은 더욱 더 짙어진다. 태양이 병든 눈을 거절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듯, 인간이 거절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그 인간의 병든 마음인 것이다.
• 슬피 울며 이를 갊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슬피 운다는 것은 의지의 불행한 상태를 암시한다. 그 이유는 그 인간은 악으로 말미암아 필시 불행을 자초하고, 자기 욕구를 채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갊, 또는 가슴을 침’이란 지성이 불안한 상태이다. 이 지성은 진리와의 격렬한 충돌 속에 있을 것이고 진리의 빛이 그 지성을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 청함 받음과 택함 입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문자대로 보면, 이 말은 히브리 군인들과 관계가 있다.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부름 받아 등록된 뒤 전쟁이 일어나면, 이 남자들은 열병을 거쳐 그 전투에 적절한 숫자만 뽑혀졌다. 그래서 히브리 군인들은 ‘바후림(젊은이의 마을)’이라 불렸는데, 그 뜻은 ‘뽑힘’이다.
영적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란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들은 자들이다. ‘택함’ 받은 사람이란 진리를 듣고, 들은 진리를 사랑하여 행동에 옮긴 사람들이다. 즉 주님의 진리를 실제 삶의 원리로 택한 사람들이다. 인간의 구원은 진정한 교리를 아는 지식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교리에 따라 살아간 정도에서 구원된다. 그렇게 산만큼 그는 자기 지식과 그의 사랑이 영적으로 결혼한 것이고, 자기와 주님과 하나가 된 자이다. 그래서 주님과 결혼한 사람은 부름을 받고 택함을 입은 사람인 것이다.
• 많음과 적음
영적으로 숫자는 양을 표현하지 않고 질을 표현한다. ‘택함을 입은 자’란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종이라는 선한 삶에 필수적인 원리들을 잘 배양해 간 사람들이다. ‘부름 받은 많은 자’란 악한 사람 속에 있는 수많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다. 주님은 선함의 혼인 잔치에 만인을 초대하신다. 이런 주님의 은총 있는 초대는 제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제각기 다른 영접과 취급을 당한다. 주님은 자신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만인을 위해 준비해 두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다.”(사 5:3-5)
• 차이점
본문 비유는 앞의 비유 ‘포도원 농부’와 매우 유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앞의 비유는 이해성의 상태에 관계되는 진리를 거절하는 것이고, 본 비유는 의지의 상태에 관련되는 선을 거절함이다.
• 예증
선과 진리의 천국 혼인에 진입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습은 오늘 날 사회에서의 혼인 관념이 매우 흐트러진 상태에서 쉽게 예증된다. 사실 어떤 한 쌍이 결혼했을 경우, 그들의 결혼 상태는 대체로 그들이 살아가는 주위 공동체의 영적 상태와 관련이 깊다. 얼마나 그 공동체가 결혼의 천국 근원을 암시해 주고 잘 준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공동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속적이며 감각적이냐에 따라 그 안에서 결혼한 부부의 상태도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악 영향으로 많은 남녀들이 오로지 세상적인 동기만을 가지는데 급급하여 결국 결혼의 거룩한 용도를 뒤엎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교인은 자기 나름대로 수행할 어떤 의무를 가진다. 사실 우리는 주위 공동체,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조절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경우만큼은 자신에 의해 조절이 가능하리라 본다. 우리는 내적 결혼과 외적 결혼 사이의 관계를 가르치고, 그 본을 보여 줄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자녀만큼은 사회에서 우세해져가는 결혼에 관한 참담한 거짓들에 빠지는 것에서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예방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신실한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원인에서 결혼하는 남녀들, 또는 결혼 관계를 우습게 여겨 그 본성을 쉽게 변질시키는 남녀들은 영적 파멸을 향한 긴 스텝을 밟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직시하여 이를 합리적으로 자녀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내적이든, 외적이든 결혼을 우습게 여겨버리는 이들에게는 화가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영적 파멸이 바야흐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말씀 속의 진리 안에서 복을 내리시는 주님은 천국 삶의 혼인 잔치에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영적 결혼을 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는 진지하고 순수한 외적 결혼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마지막 약속의 때가되어… 성령님꼐서 천사들과 함꼐... 하나님 아버지꼐 올라가시게됨을 전하노라!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성취가 보이고...들리는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책에 녹명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은자는 기뻐하라 !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 주님꼐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의때가 이르렀음을 전하노라 ! 이제… 우리주님꼐서 두증인을 보내셨음을 전하노라 ! 보이고...들리는자는 기뻐하라 !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 주님꼐 모든 영광과 찬송을 소리높여 부르자 ! 아멘 ! 온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꼐서 약속의 증표로 주신... 오직...성경말씀만을 기억하고...두려워하며 ! 순종하라 ! 이제...사단...마귀...악마의 시대가 너희곁에 다가와있음을... 전하노라 ! 하나님 아버지 말씀 이외 어떤것에도 유혹과 미혹 되지말라 ! 놀라거나...두려워하지말라 ! 오직... 성경말씀만을 붙들고... 너희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성령만을... 따르고... 순종하여! 너희집과 형제자매들을... 굳건히 지키라 !
보라 ! 들으라 ! 하나님 말씀의 언약과 성취의 마지막때가 되었음...! 전하노라 ! 우리가..죽기전에...잠깐은... 한번쯤...생각해보고...가자 ! 2000년이 넘고넘어....그리도...기다리는 사랑이...있는지를....! 창조주앞에...까불지말라 ! 너희가...영원히...죽을까하노라 ! 너희가...별을...따랴 ! 너희가...달을...만들것이냐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개나 소,돼지에게 성경책을 주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짐승들에게 먹을것을 주면 짐승들은 주인을 좋아라한다 ! 너희가....짐승이냐 ? 이제...너희와 약속된...용서의... 기다림의 시간이 다가왔음이라 ! 창조주앞에.... 바짝...업드려... 두려움을...생각하고...참회하라 ! 그리고..지금도 기다리시는... 주님꼐...돌아오라 ! 어찌하여 말벌의 침과 전갈의 독침은 두려워하면서 너의 영혼을 잡아 먹는 사탄은 두려워하지 않느냐 ! 너의 눈은 멀었으며 너의 귀는 어두워졌으며 너의 마음의 빛은 꺼져 사탄의 어둠에 갖혀있음이라 ! 인간의 썪어질...육체는... 인간의 삶의 ...목표도...목적도...전부...아니다 인간이 어찌하여... 개나...돼지나...닭이나..소처럼.... 저차원의 동물로 남아...사단과 악마의 자식으로..살려하는가! 숨어 살아있는....영원한...다음세상이 있음을...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로 가라 ! 죽은후에는...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사후에는 잠든 너의 영을 깨울수도 없으며 너의 영은 거듭날수도 없다 ! 잠들어 있는....너의 영을...깨워서...깨달으라....! 죽기전에...어서...깨달아...구원의 길로 가라 ! 영원한 생명의 빛의길 영생의 길로 가라 ! 그길로 가는 법은...오직한길... 창조주 하나님이...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성경 말씀...뿐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너희가 사탄의 자식이되어 영원히 죽을까 하노라 ! 창조주... 하나님은 반드시 계신다 ! 어리석은 자들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혜어보라 ! 그...끝도없이...많은 별들을... 만드신이는 석가도...마호메트도...교황도...목사도...신부도 성황당 고목나무도...돌부처도...돌아가신...내부모도... 하느님도..하늘님도 아니며...하날님도 아니라 ! 모두 ..아니다 !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 사람의 말을 믿는자는 영원한 사망의 길로 감이다 !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만을 믿고 빛의 영원한 생명길로 나아가라 ! 어린아이처럼...계속..말장난하며...까불지말라 ! 창조주는..오직...한분! 하나님 이라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그들도...모두..우리와 같은 피조물이며, 죄인이다 ! 못 알아 듣는자는....짐승이다 ! 숨쉬는...우상(사탄)을 섬기지말라 ! 신은 오직 한분...창조주...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참사랑으로 돌아오라 ! 어찌하여.... 보아도...보지못하며 들어도... 듣지못하고... 살다가 죽어가는 자야 ! 너의영은 사단의 영에 매인자요 ! 사단에 잡혀 먹힌자 이니라 ! 너의 육이 죽은후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뿐이다 ! 너는 사단의 자식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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