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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살아 날 수 없다니! 뭐 그럼 이 사진 속의 있는 사람이 저를 죽이기라도 할 거란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의 분노가 섞인 외침에도 그가 눈 한번 깜빡 거리지 않는다.
"유감이지만 아마도……."
지독한 장난 같은 말이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뭐? 어쩐다고? 제기랄, 입에 담기도 싫다. 어쨌든 그럼으로써 그가 얻은 게 무엇이길래, 플린에게 장난 같은 말 그만 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의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이 내 입을 주저하게 만든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일까, 두려움 보다는 짜증이 일었다.
"이제 자네에게 경고를 했으니 에이미의 아비로써 충고를 해 주겠네."
나의 시선이 플린의 시선과 공중에서 부딪혔다.
"자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네."
잠시 뜸을 들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촉하는 듯이 한 질문에 그가 눈매를 좁혔다.
"더 이상 에이미를 만나지 말게, 그것만이 자네가 살 수 있는 길이네. 자네가 그렇게 한다면 내 맹세코 휴고가 자네에게 위협을 가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네."
"!?"
플린의 말에 가슴이 철렁 했다.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말라니 이건 예상치도,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나의 멍한 표정에 플린이 일침을 한 번 더 가한다.
"아님 그녀를 계속 만나려면 자네가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걸세. 이게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충고라네."
말문이 순간 막혀버렸다. 제기랄, 이게 무슨 지랄 맞은 상황극도 아니고 내가 무슨 비련의 주인공 로미오냐 죽음이냐 사랑을 놓고 갈등하게…….란 생각도 잠시 무심코 마주친 플린의 가라앉은 눈빛과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아우라가 말 해준다. 진심이다. 더 없는 진심으로 날 위해서 말해주는 거라고,
"도대체 왜! 왜 그가 날 죽이려 한다는 겁니까?! 그로써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이기에?!"
나의 외침에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자네가 목숨 걸고 라도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한다면 내 말해주지, 하지만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금 여기서 그만두게. 이런 말 그렇지만, 자네에게 있어서는 에이미는 그냥 이제 불과 몇 번 정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지 않은가?"
탁자 밑으로 꽉 쥐어진 손에 식은땀이 베어난다. 난 평범한 인생을 살던 그냥 평범한 남자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내 인생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바뀌게 되어버린 걸까. 일주일전엔 내 인생에서 한번 만나 보기 힘든 절세 미모의 여자가 대뜸 사귀자고 하지 않나, 그런 여자가 뭐라고? 미래를 본다는 피콜로 더듬이 쪽쪽 빨아 대는 이상한 소리만 씨불여 놓지 않나, 또 뭐 알고 보니 어릴 적 잠깐 만난 나를 운명의 사람인 듯이 생각한다고 하더니……. 참 나, 내 평범하고 정상적인 이성으론 납득할 수 있는 게 하나 없었다. 그래 좋다. 다 좋다 이거야! 내가 잃을게 무엇이 있겠냐 싶어 그녀의 말대로 그리 시작했다. 그런대 이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그녀를 만나는 것의 담보로 목숨을 내 놓으라고? 이게 말이 되냐고?! 말이!
"……."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두 번 생각 할 필요도 없다. 이젠 이런 정신 빠진 장난 그만 하련다. 솔직한 말로 장난도 장난이지만, 지금 나한테는 당연히 내 목숨이 그녀를 만나는 것 보다 훨씨이인 더 소중하다. 그나마 더 늦기 전 이렇게 일찍 찾아와 이 모든 사실을 알려준 플린이 고마워지기 까지 한다. 뭐 조금 아쉽기야 하겠지만 난 목숨을 담보로 연애 할 수 있는 그런 커다란 배짱을 가진 남자가 저어어어얼대 아니고, 솔직한 말로 목숨 까지 걸어가면서까지 그런 부담스런 만남은 하기도 싫다. 난 평범하기에 고로 평범함을 지향한다. 그러니 부끄러움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는 거다. 그리고 또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처음부터 그녀를 만난 이 후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철저하게 나의 의지와 의견은 들어볼 값어치도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묵살 되어 왔었고, 그녀가 하자는 데로 난 끌려 다니기만 했다. 그러니 죄의식을 가질 이유도, 미안해 할 필요도 없다. 그래 그냥 여기서 그만두자란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결정을 하고 플린에게 그의 말대로 그만 두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내 마음속 깊은 곳 어디서인가에서 들려오는 것이 나를 주춤하게 했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일주일 전 아한이의 차 앞에서 그녀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들려왔던 목소리다. 그 때의 그녀가 해주었던 말이 왜 지금 다시금 떠오르는 것일까, 플린이 모든 사실을 다 이야기 해 주었기 때문에, 그 말의 대한 뜻을 이젠 이해할 수 있기에? 아님 그녀를 그렇게 보 낼 수 없다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그녀의 대한 나의 애정이 마지막 발악을 하며, 그때의 그 말을 기억하게 한 걸까? 뭐 그랬다면 재고를 하게 만든 건 성공한 것 같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가 너무 살아남으려는 방향으로 내 이성을 집요하게 관철 시킨 것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두 눈을 감고 그 때의 그녀를 떠 올려 본다.
‘십육 년 동안의 그리 오랜 기다림이었기에 그 정도로 아련한 목소리를 내 품 안에서 만들었던 것이었니? 도대체 나 같은 남자가 무엇이 좋다고 넌 그런 오랜 시간 동안 날 기다린 것이니. 내가 너를 잊고 지낸 그 시간 동안 넌 하루도 빠짐없이 날 그렇게 동경하며 그리워했던 것이야? 이런 별 볼일 없는 내가, 그 정도의 분수 넘치는 너의 애정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겠니.’
제길, 제길! 제기이이이랄! 마음이 약해진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성적인 외침이 더욱 크다. 그래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난 오늘까지 딱 세 번, 어렸을 때는 기억도 나지 않으니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 만난 게 전부다. 이런 생각은 다행이도 나만의 것이 아니다. 아까 전 플린 역시 딱 몇 번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나에 대해 그동안 그런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 왔어야 했던 것에 대한 건, 고맙고 안쓰럽기도 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의 목숨보다는 중요하지 않잖니, 그러니 나도 힘들지만 너를 잊을게, 그래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러니 나 같은 사람 좋아하지 말고 너와 어울리는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아 가렴, 널 위해 축복을 빌어 줄게, 그러니 더 이상 정들기 전에 우리 여기서 이만 헤어지자. 그나마 세 번 밖에 만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더 정이 들었음 서로 너무 힘들잖아.’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말이 마치 대화 하듯 마음속에 또다시 메아리친다. 바로 오늘 시포트에서 검붉은 허드슨 강을 보며 애처롭게 내 뱉은 그녀의 말.
[난 몇 년을 기다려 왔는데…….]
“!”
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바닥을 때굴때굴 구르고 싶었다.
‘그냥 난 평범한 사람이잖아! 넌 특별한 여자이고, 그러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너와 어울리지 않잖아! 너 정도면 너와 어울릴 수 있는 특별한 남자를 찾아!’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친절하게도 나에게 또박 또박 말해준다.
[넌 나에게 특별 한 남자이니까...]
이것 역시 처음 만난 날, 내가 그녀에게 왜 날 선택했냐? 물었을 때 그녀가 답해 준 것이다. 희한한 경험이다. 내 자신 스스로 헤어져야 한다는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 시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언젠가 그녀가 나에게 해 주었던 말들이 기억이 되어 답변 하듯 돌아 왔다. 헌데 순간이었다.
“!”
또 다시 무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 정수리를 내리꽂았다.
[우리는 앞으로 일 년 동안만 만나게 될 거야]
잠까아아아안만! 엥? 이건 언제가 들었던 소린데, 그때 분명히 아한이는 처음 만난 날 나보고 우리는 일 년 동안만 사귄다 했었는데,
‘이...이건 생각의 정리가 더 필요하다. 분명이 그녀는 나에게 일 년이란 시간동안 우리가 함께 한다고 했었다. 그...그럼 난 지금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되는 건가? 아님 내가 여기서 싫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다시 또 그녀와 만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플린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예지한 미래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정확하다고 했다. 그럼 난 지금 처음부터 할 필요도 없었던 아주우우웅 쓸데없는 고민을 한 것인가?!‘
문득 왜인지 등 뒤로 아한이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표정 관리가 안 된다. 아마도 지금 내 표정은 메주인줄 알고 찍어 먹었는데 알고 보니 똥이었네?! 란 표정일 것이다. 아니다 다를까,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플린의 얼굴이 휴지 구기듯 구겨졌다.
“자네 괜찮나?”
플린의 물음에 그를 마주 보았다.
"뭐...정말 설마 죽이기야 할까요?"
"끄덕 끄덕."
"그래도 사람인데, 인정사정 눈물도 없을까요?"
"끄덕 끄덕."
좆 됐다! 난 이제 죽은 목숨이다. 제기랄! 여자와 잠자리도 몇 번 가져보질 못했는데! 제기랄! 제기라아아아아알! 암흑이다. 엄청난 두려움의 덩어리가 나를 집어 삼키려고 아가미를 벌리고 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하나 없다. 몸도 의지도 어떠한 큰 힘에 의하여 결박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미천한 존재일 뿐이다. 곧이어 그 덩어리가 실실 웃으며 날 그 암흑 속으로 집어 삼켜 버린다.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그냥 살고 싶은 것뿐이라고!
[미스터 한! 남자의 인생은 일생일사야!]
순간 매번 회식 자리에서 술만 처마시면 마치 구호처럼 외쳐대던 이 부장님의 말이 뇌리 속에 번쩍였다.
‘일생일사!’
그 단순한 말은 암흑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에게 하나의 빛이 되어 내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다. 그 빛이 나에게 오라고 손짓 하며 유혹한다. 혹여나 다른 빛은 없나 둘러보아도 제기랄, 오직 그 빛뿐이다. 그래 선택한다. 네가 비춰주는 길이 잘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지같은 암흑보다야 낫겠지, 그래 따라 가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마음을 굳게 먹으니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번쩍였다.
‘그래 제길, 남자 한번 태어나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플린은 침묵으로 일관 하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 심각한 나를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한다. 어쨌든 더 이상 시간을 끌이면 안 될 것 같기에 그에게 대답을 해주야 했다. 그래 어디까지 가나 함 보자! 이왕 헤어질 수 없는 거라면...
"죄송합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그럼 말씀드립니다. 제 결정은 불가! 즉 제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비겁하게 도망치기는 싫습니다. 그녀를 당당히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를 그 싸이코 오빠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것 입니다!“
나의 당당하고 시원한 대답에 플린이 눈살을 찌푸린다.
“자네 지금 말하고 표정하고 완전 다른 거 아나?”
“제...제 표정이 왜 어때서요?”
“하하. 아니 아니야. 알았네. 알았어. 자네 생각 보단 꽤 강단이 있는 친구 구만 어허, 내가 아는 자네는 여기서 그만 둘 줄 알았는데 말이야.”
도대체 플린은 날 어떻게 생각 했었기에 란 생각도 잠시 만약 마지막에 들려온 아한이의 말이 없었다면 아마도 플린의 예상은 적중 했을 것이란 것을 알기에 씁쓸해 졌다.
“어쨌든 이제 제 결정을 말씀 드렸으니, 왜 에이미의 오빠 되는 사람이 일면식도 없는 저의 목숨을 위협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플린이 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뭐 좋네. 자네 결심이 그리 강건하니, 내 그럼 조금 더 시간을 내서 그 이유를 애기해 줌세. 그 대신 지금 하려는 애기는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될 것이야. 물론 에이미에게도 하면 더더욱 안 되겠지. 약속 할 수 있겠나?"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또한 무슨 당부이신지 명심하겠습니다."
나의 다짐을 끝으로 플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푸른 그의 두 눈이 무섭게 가라앉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는 건지, 아님 망설이는 건지 도통 닫힌 그의 입술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심각한 애기겠지, 그만큼 어렵고 복잡한 애기겠지. 괜스레 모든 집중이 그의 입술로 향한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의 입이 열리고 난 하나 놓칠 세라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곤 곧이어 들려온 플린의 말에 하마터면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갈 뻔했다.
"저...저기, 미...미안한데 혹시 자네 담배 있으면...좀 험.."
필히 이 작자는 그 아한이의 오빠의 이야기 때문에 망설인 게 아니라 나한테 담배 좀 달라고 하는 것이 멋쩍었기에 이리 뜸을 들인 것이다. 그만 좀 작작 펴대세요 란 외침이 목구멍까지 넘어 온 것을 다시 삼키며 책상 서랍 안에 넣어 두었던 말보로 라이틀 꺼내 플린 앞으로 내 밀어 주었다.
"여기..."
여담이지만 뉴욕 그것도 맨하탄에는 담배가 아주 비싸다. 평균 한 갑에 십사 달러 가까이 하니 웬만한 식당에서 먹는 저녁 한 끼 보다 비싼 것이다. 이게 다 뉴욕 시장인 블룸버그가 담배를 피우는 시민에게 돈 없으면 담배를 끊으라는 식으로 거의 약탈과 같은 엄청난 세금을 물리게 된 결과물이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많은 애연가들이 담배를 끊었지만 담뱃값을 올린 덕 분에 오히려 담배로 인해 걷어 들이는 소득은 더욱 극대화 됐다. 윗사람들에게는 명분과 실리를 찾은 아주 좋은 정책일지 몰라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며 한가치 담배로 인생의 고난을 잊어가는 우리 서민들에게는 아주 엿 같은 정책이다. 물론 그런 담배가 아까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무슨 심각한 말을 기대한 내가 잘못이겠지. 어쨌든 플린의 이런 장난스러운 행동 때문에 긴장감이 조금은 회석 되는 기분이다.
"라이트는 약한데!"
"!"
흘겨 뜬 내 두 눈에서 쏘아대는 레이저를 받아주기가 민망했는지 서둘러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인 후 담배 연기를 길게 내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뭐 사실 휴고가 자네를 위협하려는 이유는 자네가 그를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가 않네, 단지 자네가 에이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네."
“네?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렇다고요?”
“뭐 쉽게 애기하자면 그러네.”
점입가경이다. 내가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날 죽인다고? 그럼 이 세상에 오빠 있는 여자 친구 사귀게 되면 살아남을 사람 하나 없겠군. 마치 플린이 독심술을 써서 이런 나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그가 입을 열었다.
"휴고에게 있어서 에이미는 평범한 여동생이 아니네, 그에게 있어서 에이미는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고, 그녀가 있기에 자신이 존재 한다고 믿는 그런 환상으로 이루어진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휴고 본인만이 에이미를 보살 필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의 말과 함께 뽀얀 담배 연기가 허공에 뿌려진다.
"그가 열여덟 되는 해에 우리 연구소에서 탈출...아니 탈출이라면 좀 그런가? 아니 뭐 그래도 휴고 입장에선 충분이 그럴 수 있겠지, 그 녀석은 언제나 연구소가 감옥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곳이라 생각 했으니 말이네."
플린의 입가에 뜻 모를 비소가 만들어 졌다. 그리움일까 아님 안쓰러움일까 지금 그의 얼굴에서 묻어나오는 그 슬픈 미소의 발로는...
"뭐 어쨌든, 그가 그렇게 연구소를 나간 뒤 우리는 백방으로 노력해서 그의 종적을 찾았지만 거의 헛수고이었네, 워낙 머리도 좋고 또한....그랬으니."
무언가 말을 하다 머뭇거리고는 삼켜 버린다. 아마도 말하기 껄끄러운 무언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의 말을 끊기 싫었기에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근데 우린 그가 다시 언젠가 연구실로 돌아 올 줄 알았네, 왜냐하면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 연구소에 있었으니까, 솔직히 돌아 올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휴고가 에이미를 데리러 왔네. 아마도 그만큼 에이미를 하루 빨리 데려가고 싶었던 게지.“
이번엔 그냥 지나치기엔 호기심이 너무 짙었다.
"그 사람이 올 줄 알았다면 뭐 가드나 경찰이 지키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당연히 연구소 내 자체 시큐리티가드도 있었고 NSA(National Security Agency)에서 파견 나온 요원들도 대거 있었네, 하지만 휴고는...용케도 들어왔지, 아니 솔직히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뭐, 웬만한 인원이 있지 않은 이상 못 들어 올 리야 없지, 단지 시기적으로 그렇게나 빨리 그가 돌아 올 줄 예측하지 못한 실수가 컸었네, 대부분의 요원들이 휴고를 찾아 연구실 밖 그가 있을 법한 도시에서 그의 모습을 찾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어쩜 휴고는 그것을 노린 것이겠지만 말일세, 어쨌든 사실 그나마 살생이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는 그리 어렵지 않게 에이미에게 접근 한 후, 그녀를 데리고 연구소를 나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완강하게 거절했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나의 물음에 플린이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자네 때문에 못 간다고 했지. 자네를 만나야 한다고, 평생 도망 다니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 자기는 오빠와 함께 갈 수 없다고 말일세."
"!"
그런 사연이 있었던가, 어떻게 그녀는 매번 그녀의 대해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이토록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있는가.
"그랬기에 휴고는 당황했었네, NSA에서 지원군이 오기 전 에이미와 함께 연구소를 탈출해야 했는데, 에이미는 울며불며 절대 함께 갈 수 없다고 했었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너무도 화가 난 휴고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 건지 아님 정말 그렇게 믿은 건지, 에이미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 휴고 밖에 없다면서, 네가 기다리는 그 남자를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린 후 다시 데리러 돌아온다고 하고 떠났네. 그게 벌써 구년 전이네."
플린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는 말인데도 등골이 오싹하다. 순간 지금이라도, 사실 거짓말 했어요. 그냥 그만둘게요. 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말 여기서 그만 둔다고 하면 아마도 플린에게 먼저 맞아 죽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어찌 보면 휴고도 참 불쌍한 사람이지..."
"불쌍한 사람이...그녀가 소중이 생각하는 사람을 죽인 답니까? 그건 동생에 대한 지나친 애정 정도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싸이코패스 일 뿐입니다. 도저히 저의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습니다."
플린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만들어졌다.
"자네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휴고 역시 어릴 적부터 내가 그를 보와 왔기에...난 어느 정도 그의 동생에 대한 지독한 집착성에 이해심을 가질 수 있다네."
"도대체 경찰들 아니, CIA 나 NSA는 뭘 하는 겁니까? 그런 위험한 싸이코패스 하나 잡지 않고 그렇게 방치를 하다니 말입니다!"
짜증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말이 거칠었다. 하지만 의붓딸의 오빠인 사람에게 대하는 말치고는 과격한 나의 태도에도 플린은 별 개의치 않은 듯하다.
"잡지 않은 게 아니라 못 잡은 것이라네, 구 년 전 휴고가 우리 연구실에서 도망친 후 로컬 폴리스는 물론 FBI 나 CIA 그리고 NSA 까지 모든 내로라는 범죄 단속 기관에서 휴고를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네. 사실 잡을 필요는 없네, 벌써 CIA에서 휴고의 케이스를 맡은 전담반에 킬 온 사이트(kill on sight) 오더가 내려져 있으니까 말일세."
"!"
킬 온 사이트란 보이는 즉시 사살?! 제기랄, 서늘한 그의 말에 모골이 송연해지며 입가에 침이 마른다.
"그 사람이 그...그렇게 위험한 사람입니까?"
"아까 전에도 애기 했다시피 그의 무서움은 가히 핵폭탄에 견줄 만하다네."
플린이 무언가 머리에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한 가지 자네에게 물어 봄세. 자네가 이곳 뉴욕에 이민 온 건 구 년 전 칠학년 때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건지..."
플린의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파이며 보조개가 만들어졌다.
"그럼 자네는 궁굼하지 않나? 자네가 칠학년 때 이곳으로 왔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에이미가 있었거늘 자네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에이미가 왜 자네를 진작 찾아오지 않고 이제야 찾아 왔는지 말이야?"
그의 물음에 나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가 미국으로 온지 대략 구년이나 지났다. 그동안 찾아오려면 쉽사리 찾아 와도 진작 그녀가 날 찾아 올수 있었다. 내가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 것도 질색하는 그녀다. 그런 그녀가 내가 고등학생 때 지현이 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니 신기할 정도다.
”설마... 에이미가 나를 찾아오지 못한 이유는....“
"하하. 그래 맞네. 이 느린 친구야... 에이미는 그녀의 오빠, 휴고 때문에 그리 하지 못했네. 자네를 만나면 자네가 위험 해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는 울분을 삼키면서도 자네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 기다렸던 것이야."
"그...그런...“
고개가 푹 숙여져 버렸다. 또 다시 언젠가 처음 카페에서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된다.
[내가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건 여기 너 뿐이야]
아한이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모두들 다 알고 있었지만 바로 나 혼자만 바보 같이 모르고 있었다. 시기적절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동네 미친년이라 생각했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지며 그녀에게 미안하다.
"공교롭게도 자네가 미국에 바로 오기 전이 휴고가 에이미에게 다짐을 하고 연구소를 뛰쳐나간 시기네. 그 후로 그의 종적이 꾸준히는 아니더라도 간혹 보고가 되었다네. 물론 우리 입장에서도 에이미가 자네를 만나러 밖으로 내 보내는 것도 그랬지만, 그녀 스스로 자넬 만나길 거부 했다네. 그녀가 한 열여덟 살 정도 되었을 때, 뭐 한차래 자네를 만나서 말려야 된다는 큰 소동이 있었지만 내가 잘 타일러서 마무리가 되었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안 봐도 1080P 화질의 블루레이 플레이어다. 그녀가 열여덟이면 바로 내가 그 지현이란 아이와 그렇고 그런 일이 있을 때다.
"혹시, 플..플린께서도 알고 계시는 가요?“
“뭐? 자네가 그 여자아이하고 잔거?”
“헉!”
입이 쩍 벌어졌다. 내 소중한 첫 경험의 기억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애기 하는 플린의 모습 때문이 절대 아니었다.
“자네 솔직히 그날 그 여자 술을 너무 먹였더구먼.....쿨럭! 뭐 그건 반 강제...”
“뜨아악! 아..아닙니다! 제발 잊어 주세요! 네?!”
그래, 이게 두려웠다. 내가 그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게 두려웠다는 게 아니라 그 잠자리까지의 과정도 알고 있나 하는 게 두려웠다는 것이다. 그렇다 내 인생은 아주 오래전부터 하루하루 누구 덕분에 아주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공개적으로 까발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나만 몰랐다. 잠시 장난스러운 눈으로 날 흘겨보던 플린이 헛기침을 내 뱉은 후 말을 이어 갔다.
“뭐..하하 그건 다 누구나 소실 적 그런 경험은 한두 번 있지 않나.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나.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계속 애기 함세.”
“네...”
제기랄! 도대체 이 작자는 어디까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쨌든 개인 프라이버시에 대한 고찰 보다 더욱 시급한 게 그의 말대로 다음 이야기다.
“헌데 일 년 전쯤에 일어난 큰 사건 이후 더 이상 휴고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의 시체가 발견 되었다기에, 뭐 시체가 사실 불에 지독하게 타버려서 유전자 감식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모든 정황이 너무나도 휴고가 죽은 게 확실 했기에, 우린 감쪽같이 그가 죽은 것으로 판정 했었지...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에 일 년이란 시간을 더 두고 보자 했는데도 결국 그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네, 그러고 난 다음이야, 내가 허락해서 에이미가 오랜 기다림 끝에 자네 앞에 나타난 걸세."
무언가 이치에 맞질 않는다. 곧이어 머릿속을 맴돌던 의구심은 나의 입으로 튀어 나왔다.
"한 가지 납득하기가 힘이 듭니다. 에이미가 간단하게 뭐 그녀의 오빠의 소재에 대해 비쥬얼라이즈를 하며는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닙니까?"
나의 물음에 플린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에이미는 휴고의 대한 비쥬얼라이즈를 할 수 없네. 다른 말로 그녀는 휴고의 미래는 볼 수 없네.”
“네? 왜 그렇죠?”
나의 물음에 플린이 난감한 표정을 만든다. 아마도 쉽게 말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보다.
“미안하지만...그 이유는 말해 줄 수가 없네.”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꼭 비밀 지키겠습니다.”
“어허...이 친구 막무가내로 구만...그래도 그건 해 줄 수가 없네.”
요지부동이다. 그로써 나의 호기심은 증폭 되어간다.
“제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서 자네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하게.”
“정말 말씀 안 해주시면 더 이상 담배는 못 드립니다.”
장난 반 농담 반 꺼낸 말이었다.
“그..그런! 이..사람 치사하게...끙! 끙! 아..알겠네. 내...내 애기 해줌세.”
“......”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응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다. 뭐 어쨌든 좋았다. 뭐랄까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플린은 딱 부러지며 매사에 철두철미 하지만, 그와 애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며 엉뚱한 모습으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대부분 이런 분류의 사람들은 대표적인 외강내유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직업을 통해 영업으로 많은 사람들을 접대하며 밥을 먹고 사는 나는 잘 알 수 있다.
"이건 에이미하고는 또 차원이 다른 극비라네....그러니 이 애기는 절대로, 절대로 그 누구에게라도 하면 안 될 것이야. 자네 말대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몇 번의 신신당부 끝에 플린이 입을 열었다.
“사실 에이미라고 해서 모든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네, 차원이 겹쳐질 때는 아무리 에이미라고 해도 그 미래는 볼 수 없네. 아까 전에도 말했다시피 이건 극비지만, 휴고가 가진 능력은 바로 인위적으로 여러 차원을 겹치게 하여 자신의 시공간을 왜곡하는 것, 그럼으로써 차원의 개입으로 인해 휴고의 미래는 비쥬얼라이즈를 할 수 없다네."
이건 내 귀로 듣고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나에게 말을 해도 난 도통 무슨 말인지도 모르기에 굳이 극비라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그 말씀은 아둔한! 제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둔함을 강조한 내 숨은 뜻을 헤아렸는지 그가 헛기침을 해대면서 말을 이어 갔다.
"미안하네,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 주겠네. 쉽게 말해 영(제로)차원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점일세, 그리고 일차원은 선이 되겠고, 그리고 이차원은 도형이라고 하고, 바로 삼차원은 입체 즉 공간일세.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차원은 쉬운 말로 말해 시간이네. 그런데...“
“말씀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고등학교 물리학 시간에서 배웠을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은 삼차원이라 했는데 말입니다.”
플린의 말이 나의 돌발 질문에 의하여 멈추어 졌다. 그리곤 싱긋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마치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듯 말이다.
“뭐.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때문이지, 사실 삼차원은 시간을 배제 한 공간 자체를 의미하는 데,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우린 시간과 공간을 따로 취급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섭리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 이론에 의거해 그렇게 말들을 하는 것이라네, 하지만 우리가 그 공간에 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나? 삼차원이 공간이듯 사차원은 시간이란 개념이야, 즉 공간 플러스 시간은 바로 시공간이란 공식으로 나올 수 있지 그렇기 때문에 사실 적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시공간이 존재하는 사차원이 되어야 맞은 말이 되는 것이네.”
그런가? 뭐 그렇지 않아도 그렇다고 해야겠다. 머리가 또 지근지근 아파 오려고 한다. 어차피 중요한 애기는 이게 아닐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렇담 다행이군, 사실 차원물리학이론이 내 전공이 아니기에 나도 내가 아는 선에서만 애기 해 줌세. 가장 진보적인 차원물리학 과학자들의 차원M이론에 따르면 이 우주엔 열한 게의 차원이 있다고 하네,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차원의 한계는 사차원이 전부지, 사차원 이상의 차원은 이론으로만 대충 추리할 뿐 그 추리 역시 대부분 불확실 한 추론이라네, 어쨌든 나도 차원이론에 대한 건 휴고 때문에 약간의 연구를 해봤기에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지만, 이게 사실 이 모든 차원의 대한 여러 가설과 이론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하나의 이론을 뒷 받침해주는 이론을 그리고 또 그 이론을 이해해야 이해 할 수 있는 이론을...계속 이런 식으로 상당히 골치가 아픈 학문이네. 어쨌든 자네가 쉽게 이해하게끔 애기를 한다면 휴고는 뇌의 특이 활동을 통해 정해진 시간동안 사차원 이상의 차원 즉 오차원이나 육차원 등 말로는 설명조차 불가능 한 것들을 그의 의지에 의하여 우리의 시공간인 사차원에다가 끼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있네."
알쏭달쏭 하다.
"아님 그럼 그가 차원을 인위적으로 끼울 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 입니까?"
"뭐 여러 가지 불가사이한 일들이 일어나지, 지금은 얼마나 더 발전 했을지 몰라도 우리 연구소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능력은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중 가장 놀라웠던 능력은 뇌의 무한 영역을 사용해 사차원 즉 시공간에 오차원의 어떠한 물리적인 힘을 끌어와 사차원에 겹치게 하는 왜곡 장(distortion field)을 만들어, 사차원의 시간의 흐름을 불안정하게 조절 할 수 있었다네. 물론 한시적으로만 가능하지만 말일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간을 조절 하다니?"
"다른 말로 말해, 그러니까 우린 느끼지 못하지만 휴고는 자신의 시간을 더디게 가게끔 만들 수 있네. 열여덟 살 때 일초를 약 거의 두 배 즉 이초의 시간으로 늘리는 게 가능했었지만 아마 지금 그 능력이 더 발전했다면, 아마도 더 느리게도 가능할 걸세. 그 당시에도 그의 이런 능력이 계속 발전단계에 있었거든.”
쉽사리 이해가 안 된다. 시간을 늘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시간을 늘리는 게 그의 능력이라는 게 도대체 그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 겁니까?”
플린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그를 마주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 졌는지 이맛살을 구겼다.
“그럼 예를 들어 주지, 백 미터 달리기를 한다고 했을 때, 보통 때의 휴고의 기록이 십 사초 대라고 한다면 그의 능력을 한시적으로 발휘할 땐 칠초로 단축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네. 이제 이해가 좀 되겠는가?”
“헉?!”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말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입이 쩍 벌어졌다.
“어쨌든 휴고의 그런 보통 사람보다 몇 배는 놀라운 특이 능력 때문에 웬만한 인원이 있지 않은 이상 휴고를 잡기는커녕 사살하기도 힘들다네. 그런데 자네 괜찮은가 얼굴이 왜 그렇게...."
또다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그 휴고란 사람이 나를 죽이러 백 미터를 칠초에 주파하며 달려드는 상상을 하니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어 버렸다.
"마....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런 능력을...?"
"알고 보면 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불가사이 한 일까지 포함해서, 해변에 모래알처럼 많네. 예를 들어 인간이 지구 주변의 행성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 토성의 고리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 까란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지, 그걸 토대로 긴 시간 동안 연구 한 결과 그 물질은 행성 주위로 공전하는 먼지와 입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란 답을 얻었지...지금 휴고나 에이미는 바로 토성의 고리인 것이네. 즉 에이미와 휴고 그들이 가진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이유와 답은 있다네, 다만 아직 우리가 그것을 찾고 있지 못할 뿐인 것이지, 그러기에 우리 같은 사람이 휴고나 에이미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란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자 역시 휴고란 사람은 아한이 오빠가 맞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왠지 그녀의 아버지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녀의 어머니는 투명 인간 이고 그녀의 동생은 벽을 그냥 뚫고 지나 갈 것이라고 해도 난 별로 놀랍지도 않을 것이다. 플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사실 휴고도 휴고지만 에이미가 가진 능력이 오히려 휴고보다 더 대단한 거지. 휴고의 능력은 자신에게만 국한될 뿐 사실 연구 재료로서만 훌륭할 뿐이네, 에이미 처럼 나라에 큰 도움이 안 되니 말일세. 아니 사실 도움은커녕 그 녀석을 잡으려고 엄청난 인원과 천문학적인 돈이 들고 있는 실정이니....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녀석을 만들...?!”
플린이 넋두리 같이 내 뱉은 자신의 말에 흠칫하며 말을 멈추었다. 아마도 이건 플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 인 듯 했다.
“그..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네. 내 말이..내 말..이 잘못 나 온 게야.”
당황한 플린이 화제를 급하게 돌리는 티를 역역히 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마도 나의 질문이 쏟아지기 전 자리를 피할 셈이다.
“이젠 많이 늦었구먼. 가봐야겠네...어쨌든 자네가 궁금한 건 이제 다 알았으리라 보네... 부디 아까 전 약속 했다시피 오늘 여기 내가 자내를 만난 것과 모든 이야기는 에이미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주게나, 그럼 나중에 또 만나자고.”
긴 시간 이야기 한 것 치고는 너무나 빨리 정리하고 떠나려 한다. 아마도 그만큼 그가 당황한 듯 했다. 플린이 말을 끝내곤 등을 돌려 정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들려온 내 목소리에 의해 그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혹시 에이미도 자기 오빠가 죽지 않고 나타난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네. 정말 공교롭게도 자네를 만나고 온 날 밤 그 보고가 올라 왔다네, 그래서 나도 힘들었지만 애길 해 주었네, 지금 자네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이것도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아닌가, 만약 하루만 일찍 그 보고가 올라 왔어도, 그녀가 자네 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겠지...새우군 이거 하나 명심하게, 난 연구소 소장으로는 절대 에이미를 연구소 밖으로 내 보낼 수 없네. 하지만 하루하루를 너무나 힘들게 살아온 것을 곁에서 지켜본 그녀의 아비로써, 자네를 만나고 너무나 행복해 하는 그녀를 보게 되니, 그녀가 자네를 만나려고 하는 것을 말릴 생각이 싹 사라졌다네, 또한 지금 자네와 쭉 애기 해보니, 왠지 모르게 자네는 믿을 수 있을 것 같네, 그러니 부디 내 결정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내게 보여주게, 이건 에이미의 아비로써 부탁하는 것이네. 새우군! 아마도, 이것 또한 어찌 보면 [큰 수의 법칙] 아니겠는가? 허허.”
이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아한이가 그 오일동안 나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그 이유를 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 오일동안 힘들게 정말 아주 힘들게 나와 계속 만나야 할까? 라는 시련의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괜스레 오일동안 연락 없었던 그녀의 대해 욕지거리를 퍼 부었었던 내 자신이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부끄러워 졌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정말 말씀해주신 모든 것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그녀를 위해..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의 대답에 만족한 듯 플린의 보조개가 더욱 짙어졌다.
“아참. 내 한 가지 말해줌세. 이건 에이미도 그렇지만 나 역시 매일 같이 자네의 소식을 들어서 그런지 자네도 내 자식 같이 느껴져서 말이야.”
이 플린이란 사람, 편안함 그 이상의 무엇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말속엔 언제나 상대를 베려 하는 그런 따듯함이 엿보인다.
“보고에 의하면 휴고는 당분간 뉴욕 쪽으로는 안 올 것 같네, 시카고에서 아마도 엄청난 일을 준비 하는 것 같으니 말일세...그러니 당분간은 그녀를 만나는 것에 휴고를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네, 혹여 라도 그가 뉴욕에 왔다는 정보가 올라오게 되면 내 제일 먼저 알려 주겠네, 그리고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에이미를 만날 때 쉐도우가 있어도 개의치 말게.”
“쉐도우요?”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플린에게 나오기 전 문득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오늘 그녀와 함께 시포트에서 보게 된 그 간담 서늘하게 하는 두 명의 검은 슈트를 입은 백인 남자. 아니다 다를까,
“혹... 에이미 곁에 있던 그 보디가드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았나 보구먼, 그렇다네. 그 들은 에이미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지, 자네들의 사랑싸움에 끼어들지는 않을 게야. 그들이 눈앞에 나타났을 땐 에이미가 육체적으로 위험에 처 했을 때뿐이니까 말일세.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젠 더 이상 자네 사생활에 대한 침해는 없을 것이네. 이젠 에이미가 더 이상 원치 않거든...그동안 자네의 프라이버시에 대해 침해한 것은 내 미안하네.”
역시 플린은 노련하고 철두철미한 남자다. 혹여나 내가 나중에 나의 프라이버시를 침해에 대한 것을 무기로 삼아 플린을 난처하게 하지 못하려는 것을 지금의 말로서 크게 덮어 버린 것이다.
“네...알겠습니다."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자 플린이 싱긋 웃으며 한손을 들어 흔든다.
“그럼 다시 보자고. 새우군 오늘 즐거웠네.”
“쿵.”
플린이 말과 함께 문을 열고 아파트 밖으로 나섰지만 난 한참동안 멍하니 그 곳에 갈 곳을 잃은 듯 서 있었다.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깍지 낀 다음 움켜쥐었다.
“아...아한아...정말 넌 평범한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구나...”
이제 조금 엉켜진 실타래가 풀어졌다 싶더니 이젠 눈앞에 그 보다 더욱 설키고 엉켜진 커다란 실타래를 가져다 놓으며 이것도 한번 풀어 보라는 듯 비웃음마저 들리는 듯하다.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걸음을 뗀 후 발코니로 통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시원하기 보다는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그어놓고 지나간다. 한숨을 내쉬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승달의 빼쭉한 끝자락이 시커먼 구름을 뚫은 것 마냥 나와 있다. 플린 덕 뿐에 이제 몇 까치 남아 있지 않은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휴....”
니코틴이 페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시선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무엇을 깊게 생각하는지 눈에는 초점을 찾을 수가 없다. 담배가 거의 필터까지 태워졌을 무렵 나의 입에서 나지막한 말이 새어 나왔다.
“아한아...보고싶다.”
* * *
“큰 수의 법칙이란, 경험적 확률과 수학적 확률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정리(定理)라....”
내 두 눈은 빠르게 앞의 나타난 검색결과를 읽고 있었다. 처음 언젠가의 아한이와 아까 전 플린이 언급한 [큰 수의 법칙]에 대한 말에,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 정말로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수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n개의 사건 중에서 성질 A를 가지는 것이 r개 있으면, r/n는 A가 일어나는 비율로 생각할 수 있는데, 관찰하는 횟수 n을 크게 함에 따라 r/n는 일정한 값 P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이것이 큰수의 법칙이며......(중략) 실제로 나타난 개개의 현상은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일이 많으며, 관찰한 몇 개의 현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번 관측하고 전체적인 경향을 살펴보면, 거기에서 어떤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개인의 수명은 서로 달라 누가 몇 살에 죽을지는 전적으로 불분명하나, 많은 사람에 대해서 장기간에 걸친 통계를 살펴보면 인간의 평균수명, 각 연령층에서의 사망자의 비율이 거의 일정한 값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뜻에서 통계는 모두 어떤 종류의 큰수의 법칙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
백과사전이 뜻하는 [큰 수의 법칙]이란 예상과는 달리 뭐 오묘한 뜻이 숨겨진 것은 아니었다.
“뭐 그러니까, 굳이 나에게 이 말을 적용시키려면, 하나의 사건에는 처음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즉 우연이라고 생각 했던 것이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고 보면 우연이 아닌 것이다?! 뭐 이렇게 해석해야 되는 건가?”
랩탑을 덮었다. 그리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문득 아한이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오늘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지나간다. 한 참의 기억 끝에 내 입에서 탄식이 흘러 나왔다.
“흠...그러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네.”
시선을 들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새벽 두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도 모를 사이에 책상 모퉁이에 오른 블루노트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언젠가 아한이가 나에게 건네주었던 바로 그 평범한 푸른 노트다.
“......”
서랍에서 펜을 꺼내었다. 그리곤 블루 노트를 내 앞으로 가지고 온 다음 글을 쓸 수 있도록 펼쳤다. 이 많은 하얀 여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아니 이미 무엇을 쓸지는 생각해 두었고 이젠 시작만 하면 된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너와의 이야기를 쓸 거야.”
정말 그럴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혹여나 내가 만일 그녀의 오빠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최소한 이 블루 노트는 말해 줄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의 진실을 말이다. 결심을 마친 후 책상전등의 LED라이트만 제외한 후 집안의 모든 불을 꺼 버렸다. 블루 노트가 마치 뮤지컬의 주인공인 듯이 LED 라이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묘한 기분을 느끼게끔 분위기를 만든다. 책상에 앉은 후 잠시 생각의 정리를 한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한 시위 안에 펜을 움켜쥐고는 마치 소중한 연인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럽게 첫 페이지 위에다 한자 한자 또박 또박 제목을 써 넣었다.
[우아한 큰 수의 법칙]
내가 써 놓고는 꽤나 글 제목이 만족스럽다는 듯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만들어 졌다. 이제 시작이다. 일주일 전에 시작되었지만 그 시작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던, 그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고, 들어도 쉽사리 믿지 못할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이 노트에 담을 것이다. 그래 이 믿지 못할 이야기는 나 세우와 아한이의 실제 이야기다.
[난 평범하다. 그래 난 정말 평범한 남자다. 내 자신이 너무 평범한 게 아닌가 하고 가끔 자신의 평범함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할 때도 있는 너무나 흔하디흔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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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제 지루했던 글에 대한 설정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젠 앞으로 에피소드만 아마도 조금 더 연재 속도에 스피드가 붙지 않을까 하는 우하하하! 각설하고 앞으로 펼쳐질 세우와 아한이의 이야기 계속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되시길 기원 합니다.
*핑크님 댓글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곳엔 연재 중지를 하지 않고 올리게 되는 커다란 이유이시기도 합니다. 아참! 핑크님의 글 괜히 인기가 많은 건 아니네요! 저도 계속 짬짬히 읽고 있답니다.
첫댓글 우아한 큰 수의 법칙이 아한이가 준 노트의 제목이 되는군용 ㅎㅎ 상당히 생각해가며 읽어야 하긴하지만 그래도 재밌어요 ^^ 휴고는 엄청 무서운 능력을 가졌네용. 휴고 그러면.. 자꾸 휴고 위빙 생각이 나면서...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 이미지가 겹쳐요! ㅜ0ㅜ 어쨌든.. 휴고가 가진 능력이 제게도 있었다면.. 중학교때 우리 반 달리기 꼴찌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ㅎㅎ 세우가 일년이 지나도 꼭 살아남아 아한이랑 햄볶아졌으면 좋겠어요 ^^
휴고 위빙이 누구일까 하고 검색해 보니;; 메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의 영화배우 이름 이군요 -,,-;; 이건 정말 검색결과를 보고 소름이 돋아내염;; 뭐 능력도 비슷하고 성격도....음...각설하고, 사실 휴고란 이름은 소실적 읽었던 만화책 북두신권에서 나오는 인상깊은 캐릭터의 이름에서 따온건데 하하 정말 재밌군요. 핑크 님 때문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