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2020년 3월, 나는 학생신분으로 제주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전 국민을 분노에 떨게 한 충격적인 범죄행각이 전파를 탔다. 바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사건이다. 그때, 정확히는 2020년 3월 20일 내가 개인 SNS를 통해 짤막하게 게시했던 해당 사건에 대한 소감은 정확히 이러했다. ‘종신형보다 큰 고통을 유발하는 법정 최고형이 필요하다.’ 나는 사형 반대론자이기에 사형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 여론은 피고인을 사형시켜야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기에 나 또한 이들이 응보적 정의에 따라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길 바랐다. 결국 사건의 주범들 중 죄질이 특히 불량한 조주빈은 42년 4개월의 징역형, 문형욱은 3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있지만 당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형량이 너무 적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사례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점은 우리나라에서 일반 시민들이 가지는 법 감정과 한국의 판사가 헌법에 의거해 내리는 판결에 매우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의 저작 중 ‘감시와 처벌’ 에서 1757년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미수로 그친 범죄자 다미앵에게 내려진 유죄판결문 중 일부를 발췌하여 당시의 재판과 그에 따른 처벌의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해주고 있다. 죄인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끌고 와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전신을 고문하다 국왕을 살해하려한 단도를 오른손에 쥐게 한 채 유황불로 태우고 쇠집게로 지진 곳에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등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시키며 이러한 처형의 과정은 시민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죄인을 처벌하는 장면이 일반 시민들에게 스펙타클로서 제공되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로마 콜로세움에서 이루어진 검투사들의 죄인 공개처형 또한 로마시민들에게는 주된 유희거리 중 하나였다. 그런 야만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지만, 요즈음 현대사회의 죄인은 인터넷이라는 콜로세움에서 관객들에게 스펙타클로 제공되곤 한다. 인터넷 속 시민들은 외친다. “음주 운전자에게도 사형을, 성범죄자에게도 사형을!” 이들은 자신이 절대 범죄를 저지를 리 없다는 확신과 스스로의 고결함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죄인에게 돌을 던지는 스펙타클을 원하는 걸까? 민중의 이런 강경함의 이유를 우리가 정확히 분석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위의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였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의 태도가 공자가 말한 덕치(德治)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점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백성들을 정치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을 면하고도 부끄러워함이 없다.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워 할 줄도 알고 또한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 이 말은 형벌만능주의보다는 백성들의 윤리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공자식 계몽주의의 핵심을 담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의 법체계는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륙법계에 포함되는데, 이 대륙법계 국가들의 형법은 엄벌주의보다는 범죄자들의 교화를 중점으로 두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보았을 때 대륙법계는 공자의 사상에, 영미법계는 한비자의 사상에 가깝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한국의 법체계 또한 공자의 입장을 비교적 많이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조사기관 세계인구리뷰에 따르면, 한국의 범죄지수는 136개국 중 116위로, 최하위권에 속한다. 이렇게 낮은 범죄지수 순위와 세계최고수준의 범죄 검거율을 종합해서 따져보면 범죄자에 대한 한국식 교정주의가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법 감정은 한국에서 범죄자가 실제로 받는 형벌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사건에서도 형량이 너무 적다는 의견이 많았고, 인터넷사이트에서 보이는 강력범죄에 대한 기사의 댓글창도 형량에 대한 불만이 담긴 댓글들이 수두룩하다. 심지어는 형법과 판례에 따라 양형을 하는 판사에 대한 욕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양형기준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일까? 형량을 늘리면 한국의 범죄지수가 더 낮아질까? 사실 대륙법계에 속한 국가들 중에서 한국의 형벌은 가장 무거운 축에 속한다. 특히 서유럽의 판례와 비교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엄벌주의 계통에 속하는 영미법을 따르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인 미국의 범죄지수가 56위이고 영국 또한 범죄지수가 한국의 2배 수준인걸 감안하면 한국의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주장은 객관성이 떨어져 보인다. 앞서 말했듯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형량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를 정확하게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공자의 입장에서 위의 현상은 덕의 부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공자가 살던 당시의 시대상은 반사회성 성격장애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나 범죄를 예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현대적 관점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자가 현실성을 완전히 외면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덕치를 한다고 해도 나라의 모든 계층의 모든 사람이 인(仁)한 사람이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공자같은 성인 또한 인이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할 정도니 이 기준에 천승지국(千乘之國), 만승지국(萬乘之國)의 모든 백성들이 도달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도 모를 리 없다. 다만 적어도 방향성만이라도 바로잡는 것,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는지 알고라도 있는 것이 덕치의 첫걸음인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의 덕이 부족한가?’일 것이다. 군자로서 미워해야할 것에는 미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효(孝)를 확장시켜 범죄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는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 우리는 정말로 조두순, 조주빈에 대한 관용을 가질 수 있을까? 애초에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는 하는 걸까? 푸코가 말한 스펙타클로서의 형벌은, 사법의 수장이자 군사의 수장인 군주가 그의 권력에 반기를 든 범죄자와 벌이는 싸움, 그리고 군주의 승리를 나타내는 내용을 담은 일련의 연극으로서 처형장면을 보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작용을 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신체형은 국왕의 대리인역할을 하는 집행인이 죄인의 목을 자르고 시체를 태우는 일련의 승리 과시의 의식을 통해 완성되었으며 민중들은 입회자의 신분으로 그러한 스펙터클을 경험했다. 그러나 스펙타클은 본래 쇼를 의미하는 라틴어 스펙타쿨룸(spectaculum)에서 온 프랑스어로, 민중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연극뿐만이 아니라 위에 언급된 로마 콜로세움에서의 쇼처럼 유희거리로서의 역할 또한 수행하기도 한다. 민중들은 스펙타클을 즐긴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들이 접하는 인터넷뉴스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스펙타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인터넷뉴스 댓글창에서, 유튜브에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을 욕하는 것을 즐긴다. 우리의 기준에 불만족스러운 판결을 내린 판사를 욕하는 일, 범죄자들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외치는 일 등은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공자의 정치철학에 대해, 덕치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인지하고 있어도 마음속 깊은 속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공공연하게도, 덕치를 부정한다. 현대사회의 대중들은 덕치를 원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스펙타클을 원하고, 죄수들에게 돌을 던지며 얻는 즐거움을 원한다. 우리는 사형을 원하고, 엄벌주의를 좋아한다. 현대사회에 횡행하는 스펙타클을 향한 갈망을 공자가 목격한다면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다시 공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공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덕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덕과 인은 그 사전적 정의를 아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교수자를 통해 듣는 학(學)의 과정, 행하면서 습득되는 습(習)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무언가를 ‘익혔다’고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자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자입장에서 진정한 앎이 아니고, 그에 따라 위의 문장은 의미 없는 주장이 된다. 인과 덕을 아는 선비는 자기 행동을 반성하여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돌팔매질하기 전에 나의 태도는, 나의 행동에는 그릇된 점이 없는지 우선적으로 성찰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인식은 나에 대한 인식이 있고 난 다음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타자를 볼 때는 ‘타자를 인식하는 나’라는 개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개념 또한 ‘타자를 인식하는 나’이다. 모든 국가에서 범죄가 상수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보다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한가?’라는 실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의 형법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더 나은 세계를 원한다면 멀리 있는 제도를 탓하는 것 보다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는 것이 훨씬 빠르고 실효성 있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부끄러워 할 줄 알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줄 안다면, 그것이 시민의식의 진보로 이어지게 된다. 군자로서 스스로 바로서면 그러지 못한 주변사람들이 바로선자들에 기댈 수 있고, 더불어 인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정의는 개인이 바로서는 것에서 시작되며, 제도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시민이 가진 법 감정과 실제 형벌의 간극을 좁히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공자의 입장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위의 방법을 통해 우리의 의식이 계몽된다면 그것이 곧 한국에서의 공동선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를 통해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몇몇 양형 사례들에 대한 불만이 나의 불인함과 부덕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본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야만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근대의 야만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적 정신이 새롭게 감시와 통제의 체제를 만들어낸 것을 목격한 푸코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던 뒤에 숨어 있는 제국주의 망령, 곧 국가권력에 대한 푸코의 사회학적 비판은 오늘날 좀 더 정교해지고 복잡한 권력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것이 일종의 여론 재판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플라톤 시대에도 그러했지만, 모두가 객관적이고 타당한 철학적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대중은 쉽게 휩쓸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론을 조작하거나, 왜곡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합니다. 예컨대 민주주의의 위기로 종종 활용되는 비토크라시가 그렇습니다. 각 진영과 가치에 따라서 우리는 '내로남불'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야만적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강력범죄자에게 분노하는 이유는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 때는 그런 이유를 찾아내서 변명합니다. 그러므로 공자와 맹자 시대 때부터 이야기되어 온 대로,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 객관 타당하게 돌아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