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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펠릭스 수사(5.31/(6.2))◀
1. 가톨릭 굿 뉴-스 성인록 ▷
성인명: 펠릭스(Felix)
축일: 5월 31일(Cap.OFM: 6월 2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수사
활동지역: 니코시아(Nicosia)
활동연도: 1715-1787년
같은이름: 펠리체
♧♧♧♧ T ♧♧♧♧ T ♧♧♧♧
성인설명 :
·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는 1715년 11월 5일 시칠리아(Sicilia) 섬의 니코시아에서 아버지 필리포 아모로소(Filippo Amoroso)와 어머니 카르멜라 피로(Carmela Pirro)의 아들로 태어나 그날로 바로 필리푸스 야고보(Philippus Jacobu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던 제화공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인 10월 12일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은 비록 가난했지만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 어린 소년 시절에 펠릭스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조반니 카바렐리(Giovanni Cavarelli)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종종 수도원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얻어 수도원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섬의 소년들처럼 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펠릭스는 더 많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수도자들의 생활, 즉 그들의 자발적인 엄격함과 자유로운 가난, 참회와 기도, 애덕과 선교 정신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 20살 때 그는 니코시아 수도원의 원장에게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도록 메시나(Messina)의 관구장 신부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문맹이었던 그는 성직자가 될 수는 없었지만 평수사로서의 성소는 그의 겸손하고 단순한 천성에 비추어 더 적합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8년 동안 계속해서 입회를 요청했지만 매번 돌아온 것은 거절의 답변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의 성소를 더욱 굳건히 키워갔다.
이렇듯 그는 충분한 숙고의 기회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잘 준비한 성소자였다.
그토록 많은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비슷한 수도회에 입회할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람과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하나이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 1743년 메시나의 관구장 신부가 니코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펠릭스는 그를 만나 오랫동안 간직해온 자신의 소망을 설명하고자 청했고, 마침내 관구장 신부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고 미스트레타(Mistretta)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1743년 10월 10일 수련기에 들어가면서 그는 펠릭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련기는 많은 덕행들을 실천하며 지낸 특별한 해였다.
그의 전기를 쓴 모든 작가들은 펠릭스 수사야말로 순명과 순결, 금욕에 대한 사랑과 천사적 인내에 있어서 그 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런 덕행들을 간직한 채 그는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1744년 10월 10일 첫 서원을 발했다.
· 첫 서원 후 미스트레타의 수도원장은 평소 관례와는 달리 펠릭스 수사를 고향인 니코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다.
사실 젊은 수도자가 고향 마을로 파견되는 것은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이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초연한 펠릭스 수사라면 그곳에서도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펠릭스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금언대로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니코시아 수도원에서 구호금 모금의 소임을 받는 그는 매일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탁발에 나섰다.
그는 부자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부유함을 나누도록 초대했고,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대문을 두드리면서는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하는 구호품을 제공하였다.
거리에서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그는 늘 평온함과 신중함을 간직했다.
그는 어떤 것을 받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으며, 심지어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라고 응답하였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어 교리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지만 마음으로 배우고 삶으로 풀어가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갔다.
그는 수도원 식탁에서 들려주는 교훈적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온몸으로 느끼고자 노력했고, 니코시아 성당에서 강론을 들을 기회 또한 놓치지 않았다.
·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3월의 매 금요일에는 단단히 굳은 빵과 물만 먹으며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무릎 꿇은 상태로 십자고상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는 또한 성체성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기에 매일의 고된 일들을 마친 후에도 감실 앞에서 몇 시간씩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다.
엄격한 참회와 금욕 생활의 결과로 육체적으로 병약해져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펠릭스 수사는 수도원의 병실에 머물면서도 늘 다른 병든 수사들을 위해 어떠한 봉사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집중과 기쁨 그리고 단순한 순명의 정신은 더욱 더 강해졌다.
· 1787년 5월 말경 정원에서 일하던 펠릭스 수사에게 갑작스런 고열이 찾아왔다.
마카리오(Macario) 원장 신부는 그에게 순명의 자세로 누워서 쉬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그는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소용없다고 말하고, 5월 31일 새벽 2시에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유해는 1891년에 니코시아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 성 펠릭스 수사는 일생 동안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써 큰 덕을 쌓았으며 이웃에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다.
또한 그에게는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까지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늘 하느님께 간구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일생을 순명하며 살았던 그는 1888년 2월 12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6월 2일에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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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6월2일 니코시아의 성펠릭스(1회)>
...... 안젤라 | 2010.05.30 Ud.)
▷ 축일:6월2일(6월1일)
<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 수도자 >
- San Felice da Nicosia Religioso Cappuccino
- Nicosia, 5 novembre 1715 - Nicosia, 31 maggio 1787
- Beatified:papa Leone XIII, 12 febbraio 1888.
- Canonized:Papa Benedetto XVI, 23 ottobre 2005
- Felice = contento, dal latino
• 키프로스(Cyprus) 섬 니코시아에서 태어난 시칠리아(Sicilia) 사람인 그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었다.
20세 때 카푸친회의 입회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고행하며 지내다가,
그 후 7년 뒤에야 미스트레타 수도원에 들어가서 펠릭스란 이름을 받았다.
· 그는 주로 엄격한 고행과 탁발에서 큰 덕을 쌓았고, 이웃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였다.
또한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을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그에게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다.
60세가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간구하고 병자를 치료하였으며 노동을 계속하였다.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순종하면서 살다가 72세의 일기로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그는 1888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 성 펠릭스는 (생애 72년 동안) 수련기 1년을 제외하곤 이태리 시실리에 있는
지리학 센터 부근의 Demone 계곡에 위치한 니코시아의 고향 마을에서 살았다.
1715년 11월 5일에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에게서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기에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나 가지 못하고
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구두를 잘 만들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장인에게 어린 견습공으로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가 능숙한 구두 수선공이 되어 명성을 얻고 고객들을 확보함으로써
가족의 생계가 잘 보장되길 바랬다.
그의 가족은 매일 기도와 전례에 참석했다.
가족들은 고된 일과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가족을 위해 묵주기도를 했다.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일요일은 기념할 만한 특별한 날이었다.
가족들은 카푸친 작은 형제들에 의해 지도되는 Cappuccinelli로 알려진 성체회의 회원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내적 고요에 머무는 것을 습득했고,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를 자주 반복하는 기도와 포기하고 수긍하는 태도를 계발시켰다.
성당의 저녁 종이 울릴 때, 그는 그의 동료들을 기도로 이끌곤 했다.
그가 그의 직업을 그만두었을 때 그가 쓰던 구두 수선 탁자는
“야고보가 일하던 장소”로서 존경받을 만큼 그는 높은 존경심을 받았다.
[다음에 계속]-카푸친카페에서
*카푸친작은형제회 성인들 Capuchin Franciscans:
·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
(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
(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
(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
(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 성 요셉 레오네사
(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
(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
(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 성 세라피노
(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
(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
(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
(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
(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 니코시아의 성펠릭스 수도자
(축일:6월2일.게시판17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 카푸친은 기도의 교사로서 플라비오 로베르또 형제
(o.f.m.cap. 전 총봉사자)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고, 기도의 교사이기도 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기도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
(2 첼라노 95)고 이야기해준다.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가 그 기도 안에서 찾게 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현시를 봄으로써 그분의 영혼이 녹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상처들이 항상 그 눈앞에 있게되는
그 만큼 그리스도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로 긴밀하게 그 분의 마음에 되새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가 그 숨은 보물 , 그 값진 밝은 진주를 찾아냈다고 느끼게 되었다......."(대 전기 1.4)
프란치스코의 둘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하는 불은 기도의 결과인 그 불이었다: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 불은 그들을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기도의 선생님으로 삼아 그에게 찾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타인과 그 개인 경험을 나눌 수 있기 전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발전하여 성숙해져야 했다.
고상 앞에서 바쳤던 그의 첫 기도에서 우리는 건전한 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이 초기 때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1 첼라노 115)
’주의 기도 풀이’에 이르렀을 때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에 대한 근심은 타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
모든 이를 당신은 사랑하도록 저희이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어...
저희 몸과 같이 저희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그 기도의 사회적 일면은 더욱 더 깊게 된다.
맨 처음으로 서방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자연의 요소들은 "형제 자매" 라는 친밀한 용어로 묘사되는 존경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온 누리(우주)를 초대한다.
같은 주제는 1221년의 회칙 23장에 영향을 끼친다.
형제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기쁨은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와 그 첫째 형제들은 교회에 새롭고 놀라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들은 수도승원에서만 찾게 되었던 그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그 경험을 장터에 가져 나갔다.
프란치스칸 샘들에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은둔을 찾았다가 그 은둔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주었느냐는 여러 개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기도는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새 교훈을 세상 만민에게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남겨 준 가르침의 초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완전히 점령되도록 우리는 은둔의 분위기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제1회칙 7장, 인준 받은 회칙 5장과 8장,2 첼라노 96)
2. 기도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일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제 1회칙 7장)
3. 정신적 기도와 관상은 길러질 일이다.(보나벤뚜라 대 전기 4장3절)
4. 형제들의 첫째로 가는 성소는 기도하는 것이다.
일과 학문은, 이들이 "거룩한 기도와 거룩한 신심의 영을 끄지 않을 그 만큼만"
(인준 받은 회칙5장, 안또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허가 되어있다.
5. 기도는 인간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 또는 선물이다.(제 1 회칙 17장)
6.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의향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깊어질 조건이다.(인준 받은 회칙 5장,제1회칙 22장)
프란치스코는 이 교훈들을 형제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말로써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을 가장 많이 입증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기도 자체였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은둔에 집중한 바로 그것은 16세기의 카푸친 개혁의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것이었다.
첫 카푸친 형제들이 알바치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콰렐라라의 성지에서 1529년에 모였을 때에
그들은 기도와 관상과 관련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은둔 생활 양식의 더욱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공동체를 도전하며 정신적기도에 4시간을 지내게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성무일도는 노래와 장식없이 바쳐야 했고, 과도한 음성기도는 피해졌다.
형제들은 외딴곳에 살아야 했으며 개인기도와 신비적 관상은 개혁의 중심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포쏨브로네의 루도비꼬의 개인적인 인격과 가말돌리회의 은둔 수사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로마에 있는 성 에우페미아 수도원에서 1645년 11월에 형제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관상과 봉사의 조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기도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우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가 형제들의 영적인 교사이므로 ,그리고 신심의 영이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지근하고 미온적인 이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2시간의 기도를 제정하는데
과연 참으로 영적인 형제들은 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1535년 회헌 41조)
알바치나 문서에서 보게 되는 4시간의 묵상을 의무적인 2시간으로 줄였으며
은둔-관상의 일면을 수도회의 사도적 부르심과 균형에 두려는 노력이 있었다.
관상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이들로,
신적인 친밀감에 성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될 능력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주의에 대한 조심은 언제까지나 카푸친회 은사의 특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음의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푸친 전통의 일부로 재확인 될 것이다.
카푸친은 자기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교사가 될 줄을 배운다.
1536년의 문맥의 대부분은 아직도 우리 현 회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되신 예수님 친히 그들로 하여금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실행으로,
사랑의 충만에서부터 말하게 자극시키실 수 있도록 설교자들은 그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그분께 평화로운 점유권을 드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카푸친들이 반종교 개혁의 운동에 이바지한 초점은 영적 쇄신을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관상의 교실에서 배웠던 그 교훈들을 말과 모범으로서 설교하고 가르쳐 주었다.
21세기의 카푸친들도 그 똑 같은 초점을 현대 세상에 전해 주기를 계속해서 소원하고 있다.
이것은 1973년에 떼제에서 확인 되었는데 거기서 제3차 수도회 전체 공의회는 다음의 구절들을 긍정했다.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기도는 인간 마음의 지극한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랑의 호흡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6조)
"형제들은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와 특히 우리 형제회들과 온 프란치스칸 가족에서 일하게 될
특별히 수련을 받은 기도 및 영성 생활 고무자들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24)
1982/1990년의 회헌은 이 모든 점을 모으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기도 , 특히 내적인 기도의 영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극진히 기릅시다"(56조 6항)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초대하여 평화와 참회를 전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닙시다"(46조 7항)
현대 세상은 카푸친이 품는 다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짐에 준비된 상태로 있다:
즉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할 줄도 가르치려는 그런 소망 말이다
ㅡ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www.capuchin.or.kr) ㅡ
♬Brother Sun and Sister Moon
①재속프란치스코회 75주년 (인천지구율동): 태양의 찬가
https://youtu.be/NbU3wD60zb0
② 영화: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OST)
https://youtu.be/2CIiTzfgGNw
ㅡㅡEnd.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