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희망으로 빛나리라
이사야 9:1-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셋째 주일이며, 설날이다. 설날을 맞아 가정마다 행복(幸福)하고, 다복(多福)하고, 만복(萬福)이 깃들기를 바란다.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다. 여성 진행자는 설날을 맞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남을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을 따듯하게 뎁히도록 권유한다. 자신을 따듯하게 무장하면 상처받을 일이 없다고 강조한다. 아하! 설맞이에도 무거운 부담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구나.
설날에는 세배 돈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들은 대체로 5만 원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어른들 중 40%는 1만 원 정도가 적당하다게 여긴다고 한다. 그 어마어마한 간극을 어찌 메울 것인지 궁금해진다.
설날의 즐거움은 마음껏 덕담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미래의 소망을 말하는데, 원래 덕담은 이미 복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덕담을 하는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
“새해에 건강한 손주를 보셨다지요.”
“새해 사업이 큰 성취를 이루셨다지요.”
그래서 새해 덕담은 현재완료형이 옳다. 성경에서 이미 모범을 본다.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보면 그 시선이 현실에 정지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보다 앞서 나갔다. 예언자들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예언형 문장을 완료형으로 썼던 것이다. 축복이든 희망이든 가볍지 않다. 역사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1)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는 구원의 소식은 먼저 고통받는 자와 멸시받던 자를 향한다. 마침내 희망으로 빛나리라고 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2).
선지자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과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희망의 빛이 임할 것을 예언한다. 그들은 소망이 전혀 없는, 눈앞이 캄캄하던 백성들이다.
마태복음은 메시야 소식을 전하면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인 9장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5-16)
예수님은 그 땅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기대밖에 그런 갈릴리 지역과 주변부 인생을 통해 복음 전파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활동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마 4:13-14).
구체적으로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지역으로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렸다. 또 해변 길은 옛부터 남쪽 애굽과 북서부 메소보다미아를 이어주던 길이다. 요단에서 볼 때 이편이 아닌 저편의 땅이다.
갈릴리 지역은 이방 지역으로 불렸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잦은 침략 때문에 종종 남의 나라 땅에 속하였다. 한때 앗수르의 셋째 지방 영토로 포함된 곳이다. 그래서 이방인처럼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가장 천대받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이 그 땅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장차 이 땅이 이방 통치와 강제 노동의 멍에에서 해방될 것이다. 하나님은 종살이하던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것처럼 빛을 비추실 것이다. 그들은 마치 추수와 탈취물을 얻듯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놀라운 비유가 이사야 5절에 계속된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5).
피묻은 군화와 군복은 다시 쓰지 않고 불태워 버릴 것이다. 진정한 평화가 오리라는 메시지이다.
이렇듯 성경의 예언자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말하고 있다. 마침내 희망으로 빛날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마치 완성된 것처럼 말한다.
2)
본문에서 선지자는 어두웠던 과거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상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군사력을 의지한 결과 역사의 길, 평화의 길을 잃어버린 당시 임금과 지배권력의 잘못과 불의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주전 734년 경, 북방의 신흥 강대국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는 팽창정책을 펼치며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위협을 느낀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영향권 속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규합하여 반앗수르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남 유다왕 아하스는 이 연합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는 유다를 공격하였다(왕하 15:37). 이럴 때 남 유다 왕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아하스 왕은 자기 동포와 힘을 합치기보다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자신을 도와줄 것을 간청하였다.
침략자 앗수르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유다를 구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침략하였다. 앗수르는 아람의 수도 다메섹을 점령하고, 르신 왕을 죽였다. 북 이스라엘도 침략을 당해 갈릴리와 납달리 땅을 빼앗기고 그곳의 주민들은 앗수르로 강제 이주 당하였다.
앗수르의 침략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 두 나라만의 비극에 머물지 않았다. 앗수르를 섬기게 된 유다 왕국에는 앗수르의 우상들과 종교관습이 유입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게 되었다. 당시 남 유다 왕 아하스가 선지자 이사야의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권면을 듣지 않은 까닭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납달리와 스불론 땅 주민들이 겪은 고통은 임금의 불순종과 판단의 실패의 역사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강대국에 의존한 아하스 왕의 실패 때문에 긴 어둠의 시대를 겪었다. 대대로 살던 그 땅에서 쫓겨나고, 남의 나라 백성들이 들어와서 살았다. 본래 갈릴리는 비옥한 땅이었다.
이제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 어둠과 그늘진 땅에 새로운 빛을 비추신다는 것이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1).
전쟁이 끊이지 않은 이 땅에서 추수하는 노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한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3).
마치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 사람들을 이겼을 때처럼, 하나님이 이 땅에 개입하셔서 구원하실 것이다.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실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비전인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희망이다. 희망은 이런 절망의 땅, 흑암의 땅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다. 그 배경에는 전쟁의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간절한 평화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
본문에는 바로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간절히 목말라하는 종전의 뉴스를 담고 있다. 이미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종전선언이 감감한 채 서로 갈등하고 있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평화 염원도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9장에는 계속하여 평화의 임금이 오신다는 예언이 이어진다. 마태복음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구체적으로 인용한 이유가 있다. 바로 궁극적 희망인 메시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결과였다.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전쟁판을 뒤엎으실 것이다. 흑암 가운데 신음하던 백성들이 큰 희망의 빛을 보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살던 사람들을 향해 은총의 빛이 비칠 것이다.
예언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우리 현실 속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은 예언의 능력이다. 모두가 절망하고 눈앞이 캄캄하다고 좌절하는 가운데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용기이다.
3)
올해는 계묘년(癸卯年), 토끼의 해이다. 12간지(干支)에서 네 번째 해이고, 육십갑자(甲子)로는 사십 번째다. 사실 달력 속 열두 동물은 모두 영물처럼 여겨져, 저마다 꿈과 희망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달력에 얽힌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희망을 부추긴다. 이를테면 “토끼띠는 천성이 착하고 겸손하면서도 지혜롭다. 감수성이 뛰어나 예술성이 강하다. 반면 생각이 앞서 재능만 믿고 게으르며 수동적인 게 흠이다”(명리학자 전형일) 따위다.
그럼에도 모든 달력은 일상의 곳곳에 길일을 숨겨두면서 다양한 희망 만들기를 농축해 놓았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민담에 따르면 민중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그 속에 저마다 다양한 희망 체험을 담아 두었다.
그 이유는 옛날이야기는 언제나 ‘내일’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민족의 처지를 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에 익숙하고 길들여졌다. 자주 좌절하고 넘어진 경험을 가진 약소 민족이어서 그만큼 희망 만들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우리 말 고유한 단어 가운데 ‘내일’을 표현하는 낱말이 없다. ‘내일’, ‘명일’, ‘익일’ 모두 한자어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날새’나 ‘앞제’처럼 우리말로 바뀐 외국어는 있을지언정, 그 안에 희망을 품은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품지는 못하였다.
일제시대에 활동한 전재선 목사는 내일(來日)이란 말에 담긴 ‘올 래(來)’ 자를 이렇게 풀었다.
“‘올 래(來)’ 자는 ‘열 십(十)’ 자와 ‘사람 인(人)’ 셋으로 이루어졌다. 열 십자는 십자가(十)요, 한 사람(人)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두 사람(人人)은 죄우 편의 강도들이다.”
마침내 강도의 처형대인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영원을 향한 희망의 표식이 되었다. ‘내일’은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고난을 뛰어넘으려는 결기와 진리를 선택함으로서 가능한 법이다.
시간과 희망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러기에 새해는 만사를 포기한 이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행여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잃은 이들이라도 희망의 시간은 끝내 붙잡아야 할 동아줄과 같을 것이다.
희망은 덕담처럼 쉽게 말하지만, 겨울의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지난한 과정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을 가리켜 “깨어있는 자의 꿈”이라고 했다. 괴테는 “희망은 제2의 영혼이다”라고 말하였다.
선지자 호세아는 “너희는 하나님께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새번역, 호 12:6)고 하였다. 즉 희망이란 하나님을 바라는 것, 하나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두어 치우고, 역사를 마감하는 분이 아니라 새날을 여시고, 새 일을 행하시고 복을 내리시는 분이다. 희망의 사람은 나쁜 환경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소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내일’에 참여하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희망적이다. 믿음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시고, 알아주시고, 인도하심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내 인생의 가사를 바꿔볼 이유가 있다. 흑암에서 광명으로, 그늘에서 밝음으로, 그리하여 빛의 사람,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치 노래 가사를 바꾸듯, 인생의 가사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올해 나는 어떻게 하나님께 장단을 맞출까? 어떤 가사로 내 인생을 노래하고, 내 인생의 가사에 어떤 희망의 가사를 담아낼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율에 따라 생생한 내 삶의 고백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아 인생의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다.
하나님께서 설날을 맞아 소원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길 빈다. 인생의 선물이 필요한 이들의 정직한 소망마다 응답하시길 빈다. 그런 은총의 새날과 내일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