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영 李頀榮(1885 ~ 미상)】
"이석영을 도와 신흥학교 재무, 밀정 김달하 처단"
서울 저동(苧洞)에서 아버지 이유승(李裕昇)과 어머니 동래 정씨(東萊 鄭氏) 사이에서 6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1885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은경(殷卿), 이명은 이옥산(李玉山)·이호영(李湖榮·李浩榮·李護榮·李皓榮)이다. 아버지 이유승은 이조판서와 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위로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始榮)의 다섯 형이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0세손이며, 집안은 조선조에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할 정도로 명가 중의 명가였다.
1910년 말 이회영의 건의에 따라 일가족 40여 명이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였다. 이때 둘째 형 이석영이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들어가 물려받은 만석지기의 땅을 팔면서 망명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1911년 봄 추가가(鄒家街)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였는데, 경학사란 명칭은 농사하며 공부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군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신흥학교로 개편되고 이석영이 교장을 맡았다. 이 무렵 이석영을 도와 신흥학교 재무를 맡았다. 이후 신흥학교는 1919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고, 3,500여 명의 독립군을 길러냈다.
그 뒤 베이징(北京)으로 무대를 옮겨, 1924년에는 베이징에서 조직한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에 참가하였다. 이 단체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베이징 지역의 한국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기존의 북경한교구락부를 발전적으로 개편한 것이었다. 창립 당시 북경한교동지회의 집행위원은 신숙(申肅)·서왈보(徐曰甫)·한흥교(韓興敎, 일명 韓震山)·조남승(趙南升)·원세훈(元世勳) 등 5인이었고, 강령은 “친목호조를 종(宗)으로 하고 지식을 천발(闡發)하고 의(義)에 복(伏)하고 간격(奸隔)을 ○함”이라 하여, 표면상 동포 친목을 내세우면서도 회원 자격은 “조국광복의 사상이 철저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연령이 18세 이상인 한인”으로 규정해 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북경한교동지회에 참가하는 한편 의열단체인 다물단(多勿團)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다물단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1923년 가을 조카 이규준(李圭駿)·이규학(李圭鶴) 등이 젊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밀정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이회영이 배후에서 이 단체를 지도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다물단이 행동을 구체적으로 옮긴 것은 1925년 3월 30일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베이징에서 처단한 일이다. 김달하는 10여 년간 베이징에서 조선총독부의 밀정으로 암약하며 베이징 한인사회의 유지로 자처하던 인물이었다.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김달하는 베이징 한인사회에 침투해 혼란과 분란을 야기하였고, 그것에 분노한 의열단원 유자명(柳子明)과 다물단 청년들이 거사를 결행한 것이었다.
한편, 김달하는 1913년 베이징으로 온 이후 중국 군벌 출신의 친일파 돤치루이(段祺瑞)의 부관(副官)이라 일컬어질 만큼 북경정부와 가까웠으며, 한인 유력자로 대접을 받았다. 또 국내에서는 이승훈(李昇勳)·안창호(安昌浩) 등과 가까이 지내며 ‘관서의 인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조선총독부의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았고, 1924년 김창숙(金昌淑)에게 접근하면서 밀정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달하 처단은 이규준이 김달하의 딸 김유옥(金幽玉)과 친한 이규숙(李圭淑)을 통해 집안 사정을 파악한 뒤 동지들과 함께 결행한 거사였다. 이 일로 이규숙이 중국 공안국에 연행될 때 김달하 처단에 연루되어 함께 붙잡혔다.
1925년 말에는 중국 국민군 제1군장(軍長) 악유준(岳維峻)이 신익희(申翼熙)의 중개로 한인 장교 모집을 의뢰하자, 러시아·만주·중국 등지에서 한인들을 모집해 악유준의 국민군에 입대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대가로 받은 5천여 원과 폭탄을 다물단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때 병고에 시달리는 둘째 형 이석영을 모시고 국내에 들어 왔다가 다시 나간 일이 있으나,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한민(韓民)』(1936)에 거주지가 ‘재북방(在北方)’으로 명기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무렵까지 생존한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