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음 주말이면 84년부터 문을 열었던 중앙의대 용산병원 인공신장실이 흑석동 의료원으로 축소 이전,
즉 인공신장기가 16대에서 8대로, 하게 된다.
그러니까 28년 만이다. 그동안 호주 멜본의 일년 연수를 제외하고는 계속 보스노릇을 하였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처음 Cobe 인공신장기 4대로 시작을 하여 Gambro 16대(On-line HDF 2대 포함)로 끝내었으니
양적인 성장은 이루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질적인 성장은 최근 급성 신부전환자 유입의 격감, 그리고 파주, 의정부, 안양이나 인천의 환자까지 오다가 끊기었고,
월간 투석횟수가 700건까지에서 500건까지, 환자가 60여명에서 50명 이하로 준것을 보면 이제는 양적인 성장도 아니다.
내가 처음 80년에 필동병원에 왔을 때
지금은 시장에서 없어진 Drake Willock 인공신장기가 한대 있었고
정수시설로는 20마이크론 필터와 100마이크론 필터가 전부.
한동안 쓰지 않아서 수리만 하다 시간을 보내었고.
나중 폐품처리가 되었다.
우리가 처음 투석을 시작하였을 때의 인공신장기는 Cobe의 Century 2.
뒷 뚜껑만 열면 얼개가 환히 보이고 투석액의 conductivity도
직접 측정을 하였고 acetate투석용액을 사용하여
투석이 끝날 때쯤이면 환자의 1/3이상이 저혈압으로 고생을 하였다.
물론 그 뒤에는 bicarbonate투석용액으로 환자들의 이런 합병증은 줄어 들었지만.
환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투석비용이나 약제값까지도 신경을 써 왔지요.
호주 멜본에 가니까 신장팀의 주임교수회진에는 신장전문의, 신장간호사,
이보다 격이 높은 신장 technician. 심지어 social worker까지 따라 다니던데.
우린 이걸 겨우 의사와 간호사가 모두 하였으니.
나는 아직도 80년대 중반의 환자들은 송 영돈, 이 미자, 최 상자, 조 중신, 최 형규, 김 북돌, 민 정기, 김 용식, 민 찬오 등
환자들의 이름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급성 신부전환자 중 일산화탄소중독으로 회복이 거의 되었는데 구토로 질식사한 환자,
가출하였다 돌아와서 빙초산 음독으로 투석 중 토혈로 사망한 환자도.
투석 중 부적합 수혈도 경헙하였고 투석 불균형 증후군이나 first use 증후군까지도.
48시간 단수로 환자들의 스케쥴을 조정하느라 고생도 했었고
한 겨울 정수실의 배수 라인이 얼어 바로 아래층의 정신과에 물벼락을 내린 것도 한 두차례.
정신과 환자들 정신차리라고 물을 퍼부었다고 말하였지만.
예고없는 정전에 모든 기계가 알람을 울리면 인공신장실 앞의 중앙공급실 직원들이 매뉴얼로 펌프를 돌리기도 하였다.
인공신장실을 거쳐간 많은 전공의 중에는 현 우리병원 신장내과 교수까지 있을 정도이니까
인공신장실의 역사를 말한다.
그때는 인공신장실 식구들도 젊고 나 역시 젊을 때라 자주 회식을 다녔지요.
늦게 끝난 스탭이 그레이스 신촌점과 동숭동 점을 혼동하여 엉뚱한데서 기다리질 않나.
처음 온 간호사를 위하여 고기집 한라산에서 회식하다가 쓰러진 경우도 보았고
간호사들이 Burn out하여 그만 둔 경우도 종종있었습니다.
신장실을 새로 확충하였을 때 돼지머리놓고 고사를 드리려 하였으니
병원 목사님의 기도로 가름을 하고 간단한 파티도 열었지요.
급, 만성신부전환자를 도우려 많은 노력을 기우렸으나
다소간 미흡한 점도 피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환자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고 원칙대로 치료하여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고 20년이 넘는 환자가 있을 정도이니 그렇게 성적이 나쁘지만은 않으나
하여튼 우리 신장실을 거쳐간 많은 환자들, 이식이나 타병원 전원,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에게 차제에 고맙다고 전한다.
서운한 마음에 마지막 회식을 갖기로 하고 병원 부근의 "갯마을"로 집합.
사실 이 동네에서 거의 30년을 보낸 나인지라 단골집에 몇군데 있었으나 재개발로 이마저 없어지고.
우선 고픈 배에 맥주를 마시며 빈대떡에 전으로.
전은 생선, 새우와 오징어전, 그리고 다른 접시에는 고추고기전, 표고 및 호박전으로 배를 채우고.
내가 가져 온 발렌타인 21년산 한잔씩 마시며 그동안의 소회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었다.
물론 나부터 시작하였고,
우 혜주 수간호사가 가난한 사람들은 1주일에 한번씩 투석, 2주에 3번 스케쥴의 어려움을.
이 은휘 수간호사는 인공신장실에서 이루어진 모든 걸 감사한다며.
김 인영 간호사는 마이즈루에 가서 음식이 늦게 나오는 걸 보고 다음에 무엇이든지 늦으면 "마이즈루 같다."
김 미라 간호사의 국제빌딩 앞 맥주집에서 화장실사건.
천 아영 간호사는 벌써 술이 좀 올랐네.
부드러운 수육을 안주로 술이 술술 넘어간다.
정 수회는 아무 말도 없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는 말인가?
김 승희 간호사의 말은 무엇이더라.
한 민지선생은 무엇이 신기한지.
김 옥진 간호사는 어두워서 잘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킨 김치찌게와
만두전골로 마감을 하며
벌써 술이 오른 얼굴, 내 옆에는 인공신장실의 제일 막내이나 애기 둘의 엄마이다.
아직 결혼 안한(?), 못한(?) 아가씨들은 이 참에 반성을 하여야 한다.
오른쪽이 수간호사노릇을 오래하였고, 왼쪽도 한동안 수간호사였지요.
나의 회식 모토인 "한점의 안주도 한방울의 술도 남김없이" 일차를 마치고
건너편의 도너츠와 커피집으로 옮겼다.
각자 취향대로 차를 마시며 맛있는 도너츠까지 시켜서 먹었다.
여러분들 그동안 정말 애를 많이 썼어요.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며.
첫댓글 중앙대 용산병원 인공신장실이 막을 내리게 되었군요... 혼자 이끌어 가느라고 수고 많이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