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기업·대학원 출신, 최저시급 알바생
안유정
저녁 설거지 중이었다. 딸이 “엄마, 대표님 전화 왔어.” 하며 핸드폰을 들고 왔다. ‘C 대표님’. 밤늦게 무슨 일인지, 고무장갑을 벗고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주방 바닥에 大 자로 누워 목 놓아 울었다. 그동안 쌓인 울분이 터졌다. 각 방에 있던 가족들이 우르르 나와 나를 내려봤다. 남편은 무슨 일이냐고 했고, 나는 울음으로 답했다. 그는 “안 되겠다. 알바 그만둬야겠다.”라고 했다. 월급에는 스트레스 비용이 포함된다지만, 최저시급에 감정 노동 값까지 포함되는 건 벅찼다. 방금까지 집에서 대장인 ‘엄마’였는데, 통화 후 대표의 구겨진 기분을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했다.
그날 오후, 회사에서 매장 계산원 업무를 처음 맡았다.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 한터라, 몇백 원 오차를 발생시켰다. 퇴근 후 이 건을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의 연이은 하교와 하원 그리고 식사 준비까지 하느라 저녁 9시가 넘어 카톡으로 보고했다. 상부에 보고된 매출액에 틀어진 걸 알게 된 대표는 기분이 틀어졌고, 즉시 내게 전화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몇백 원에 내 고막은 고충을 겪었고, 고요했던 밤 가족들의 고심도 깊어졌다.
알바를 시작한 건 일주일 전, 전화 한 통을 받고서였다. 그날 오전 ‘C 차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출산 전까지 다녔던 회사의 같은 팀 상사였다. 그는 다짜고짜 “지금 뭐 해?”라고 물었다. 요가 마치고 마트에 장보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자, “팔자 좋네.”라고 했다. 그가 쉽게 뱉은 ‘팔자’라는 말에는 길고 긴- 등교와 등원의 여정이 있었다는 걸 노총각인 그는 모를 터였다. 그때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 씨가 겪었을 듯한 감정을 느꼈다.
김지영 씨가 딸을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는 장면이었다. 유모차에서 잠든 딸을 데리고 그냥 집에 가긴 아까워 바람도 쐴 겸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옆 벤치엔 서른 전후반의 남자 직원들이 같은 카페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회사원인 게 부러워 한참 쳐다보는데 그들의 말이 들렸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손등에 쏟아가며 급히 공원을 빠져나온다. 허한 마음에 허기도 못 느끼고, 끼니를 거르며 밤늦도록 집안일을 한다. 자정 넘어 퇴근한 남편이 무슨 일 있었냐고 묻자 그제야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하고 털어놓는다.
C 차장이 보기에도 내가 맘충으로 보였나 보다. 그는 요가 갈 시간에 본인이 창업한 회사에서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옛 후배였던 내게 일자리를 주고 싶다며 선심을 썼다. 급여를 묻자 “인터넷에 최저시급 쳐봐.”라고 했다. 검색해 보니 언론에서 자주 듣던 8,800원보다 높은 10,030원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네.”라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 연락처에 ‘C 차장님’이었던 그를 ‘C 대표님’으로 수정했다.
내가 망설임 없이 답한 이유는, 곪은 게 터진 거였다. 그동안 하루 25,000원에 맞춰 장을 보는 것도 질렸고, 하늘의 별 따기 같은 구청 기간제 일자리에 떨어지는 것도 지쳤다. 핸드폰 광고를 보며 건당 몇십 원씩 돈을 버는 앱테크는 소탐대실, 집안일이 마비됐다. 또, 워킹맘 친구를 만날 때마다 시골 쥐가 서울 쥐 만난 듯한 기분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하루 3시간, 돈가스집에서 서빙을 하며 활력을 되찾은 이웃 엄마들처럼 월 80만 원이라도 벌고 싶었다. 최저시급을 떠나 아이들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려면 나의 경제활동이 시급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날이 밝았다. 13년 전 내 자부심이었던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한 손엔 서류 파일을 들고, 테헤란로를 런웨이 삼아 또각또각 걷던 D그룹 안대리의 모습은 아니었다. 대신 유치원 가방을 메고, 이미 도착해 있는 노란 버스를 향해, 딸의 손을 잡아 끌어당기며, 에베레스트 정상에 기를 꽂으러 가는 사람처럼 뚜벅뚜벅 언덕을 올라갔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기진맥진 곧 쓰러질 듯한 몰골이었다. 직장인이었던 리즈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현실 출근은 집으로 리턴하고 싶었다.
반면, 건너편에서 내려오는 이웃 엄마는 여유로워 보였다. 한 손엔 아이스라테를 들고, 핸드폰을 보면서 왔다. 4월에 냉커피를 든 손이 시려 보였지만, 두 남매의 등교와 등원 전쟁을 치르며 열불 난 속을 식혀주기엔 냉커피가 제격일 터. 누가 보면 맘충이라고 할지언정 나는 그녀가 곧 닥칠 제2라운드 육아를 위해 재충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전날까지 워킹맘을 우러러봤지만, 내가 워킹맘이 되고부터는 전업맘인 그녀가 세상 부러웠다.
딸에게 온갖 손 하트를 날리며 유치원 버스를 떠나보내고,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내달렸다. 그곳에서 또 아는 엄마를 만났다. 아이 참고서를 사러 광화문 교보문고에 간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빠르게 문제집을 사서, 후다닥 초3 외아들을 하교시킨 뒤, 바쁘게 학원들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며 빠듯한 하루를 보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근데도 속으로는 이런 말이 나왔다. ‘팔자 좋네.’ 두 대의 다른 버스가 도착했고 우리는 각자의 삶에 올라탔다.
다행히 창가 자리에 앉았다.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고단했지만, 태양이 손바닥을 붉게 덥히니 에너지도 받고 출근을 실감했다. 그리곤 바로 레드썬! 곯아떨어졌다. 예전에 워킹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아침에 5살 딸을 시댁에 맡기기까지 하루 체력의 70%를 쓴다고. 나는 옷 투정, 반찬 투정하는 VVIP 갑질 고객 세 명을 상전처럼 대하고 출근했으니 거의 방전상태였다.
눈을 떠보니 독립문을 지나고 있었다. 세 정거장 전이었다. 정릉동에서 연남동까지 한 시간이 걸려 회사에 도착하니 10시 반이었다. “쥴리아?” 대표가 나를 불렀다. 수평적 구조를 위해 영어 이름을 부르는 문화였다. 나를 ‘제조실’로 안내했다. 테이블에 올려진 작업복을 주섬주섬 입었다. 이른 아침부터 공들인 헤어와 메이크업은 헤어 캡과 마스크에 덮여 무너지고, 전날 다려놓은 블라우스는 앞치마와 토시 속에 구겨졌다. 결혼반지와 오랜만에 찬 예물 시계는 실리콘 장갑에 씌어져 윤곽만 드러냈다. 담금주 키트 제조를 위한 준비 복장을 마쳤다.
눈만 드러낸 네 명의 여자가 둘씩 마주 보고 앉아 빈 병에 건조된 과일 조각들을 넣었다. 그중 내게 인수인계 할 사람이 두 손바닥을 모아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연세 많은 주부가 오셔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제가 경단녀를 뽑아도 좋을 것 같다고 대표님께 추천했어요.” ‘연세?’ 경로 대우를 해줬다. 내 앞에 앉은 직원이 “어머, 연세라니요,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라고 거들어 주길 바라며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하던 일만 하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하긴 44세면 내가 회사 다니던 20대 때, 2:8 가르마에 잠자리 안경을 쓰고, 배바지를 입은 꼰대 차장급 나이였다. 그녀들과 대화하고부터 세대 차이를 실감했다. 그중 이틀 전에 입사했다는 직원이 99년생이라고 나이를 밝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이 “젠지네!”라고 했다. ‘젠지?’ 나는 눈웃음을 지었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영어 듣기 평가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와 다음 문제들에 집중을 못 하는 것처럼 그들의 다음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한 직원이 제조실로 들어왔다. 우리에게 뭐하냐고 물었고, 한 명이 웃으며 “월급루팡 중이야!”라고 했다. 다른 한 명은 계속 “격공”이라는 말로 맞장구를 쳤다. 그 격공이 대화에 끼지 못하는 내게 말을 걸어줬다. “두쫀쿠 드셔보셨어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그게 뭐예요?” 그녀의 반달눈이 보름달로 바뀌더니 “두바이 쫀득 쿠키요.”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쫀득하게 늘어지던 그녀들의 대화를 내가 끊어버렸다. 고무줄 끊고 도망치는 남자아이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가자마자 ‘젠지, 월급루팡, 격공, 두쫀쿠’부터 검색했다. 평상시 남편은 내게, 인터넷 기사의 제목만이라도 읽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 셋을 돌보느라 하루를 쪼개 쓰는 와중에 TV도 인터넷 기사도 볼 틈이 없었다. 젠지 세대들 틈에서 살아나려면 틈틈이 신조어도 공부해야 했다. 그렇게 눈치코치를 보며 업무를 배우던 중 점심시간이 됐다. 남이 해주는 밥과 혼자 산책하며 마신 믹스커피 한 잔은 꿀맛이었다.
꿀 빤 꿀벌처럼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쥴리아.” 대표가 찾았다. 인수인계에 속도 좀 내라고 했다. 그러자 내 옆에 서 있던 아침부터 인수인계를 해주던 직원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다시 설명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말귀’ 얼굴이 뜨거워졌다. 점심의 꿀맛은 잠시, 사회의 쓴맛이 시작됐다. “쥴리아!” 한 직원이 제조실에서 나오며 불렀다. 내가 만든 제품이 잘 못 됐다며 나를 몰아세웠다. 그녀는 양쪽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생각 좀 하고 일하세요!”라고 했다. 속이 끓었다. 꾹 참고 세척실로 갔다. 본의 아니게 세척실 문을 쾅! 닫았다.
전업맘일 땐 맘충, 워킹맘이 되고는 생각 없는 무뇌충이 됐다. 경력만 단절되지 않았어도 나를 올려보지 못할 까마득한 후배들인데, 10살 20살 어린 직원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으니 서러웠다. 서러운 마음은 백 개 넘는 공병을 세척 하며 함께 씻었다. 퐁퐁 터지는 거품을 보니 출산으로 물거품 된 내 경력과 대학원 졸업장이 떠올랐다. 경력단절녀의 재취업은 경력 리셋(Reset)이었다. 경력 리플레이(Replay)가 될 수 있게 전 직장, 내 업무 그대로, 경단녀를 위한 하루 4시간 일자리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옛 직장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회사라는 지붕 아래에 일과 육아의 양립은 어려웠다. 그 당시 더 큰 꿈을 위해 강남에서 신촌까지 대학원을 다니며 주경야독도 했다. 마침 졸업을 코앞에 두고 논문을 써야 할 때에 만삭이었다. 퇴근 후 남산만 한 배를 내밀고 학교에 가는데 나를 본 옆 팀 팀장이 “안대리! 그러다 애가 분(분필) 물고 나오겠어!”라고 외쳤다. 그래도 승진을 위해 졸업장을 따야 했다. 그러던 중 2013년 9월, 추석 연휴 하루 전 출산휴가를 냈고 3개월 뒤 복직을 약속했다.
하지만 백일도 안 된 복덩이 같은 아가는 복직 앞에서 복병이었다. 아이가 분필을 물고 나올 것 같다는 건 영리하다는 뜻인가. 아들은 영악(?)하게도 분유 병 아닌 모유만 찾았다. 나는 곧 아기의 밥줄이 됐고, 엄마 껌딱지 아들에게 모성애라는 끈으로 발목이 꽁꽁 묶였다. 결국 육아휴직 1년까지 다 쓰고, 7전 8기로 입사한 회사를 퇴사했다. 그 후 둘째 아들, 셋째딸의 출산으로 대학원 졸업장은 겨우 따내며 가방끈만 긴 전업주부가 됐다. 육아와 집안일은 보상도, 퇴근도 없이 반복됐지만 어느 설문조사의 문항처럼 사회는 전업주부를 ‘무직’이라고 표시했다.
무궁무진한 가정일을 하던 무직이 회사까지 다니니 집안과 체력이 서서히 무너졌다. 퇴근 후 집으로 다시 출근한 뒤, 밀린 집안일과 육아 퇴근을 하고 나면 자정이 넘었다. 천근 만근한 몸으로 출근하니 배달 음식비에 내 한약값, 아이들 학원비로 월급이 다 나갔다. 물론 남편 입에서 알바 그만두라는 말이 쏙 들어갈 정도로 살림에 조금 보탬이 되긴 했다. 그래도 평생 맞벌이로 살던 친정엄마가 “애나 잘 봐. 그게 돈 버는 일이야.”라고 해준 말이 그제야 이해됐다.
저축은 되지 않고 몸만 축났어도 성취감만큼은 쌓였다. 급여라는 보상, 동료들과 나누던 세상사도 일을 놓지 못한 이유였다. 그러던 중 겨울 방학이 닥쳤다. 아이들이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받아 온 ‘지역 아동 돌보미 센터’에 수소문했지만, 이미 기초생활수급자, 한부모가정이 선점해 자리도 없었다. 방학은 엄마들의 재앙이었지만 오히려 지친 심신을 재생시키라는 구원 같았다. 결국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던 알바는 8개월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회사의 동네북 ‘쥴리아’는 다시 삼 남매의 하나뿐인, 집에서 대장인 ‘엄마’로 돌아갔다. <끝> 원고지 29.5매
|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몇가지 알바를 틈틈히 했던 제게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요. 물론 안작가님과 제가 약간의 시간 차가 있지만요..저두 세아이를 키웠어야 했고..많은걸 포기해야했죠..
주방바닥에 대자로 누워 목놓아 울었다고 했을때의 그 심정을 어느정도 이해하니 같이 울고 싶었네요.. ..작가님 힘드셨겠습니다....
시원한 아아라도 한잔 같이 하고. 실겻 같이 욕이라도 할까요.?
아하하하 홍진 작가님도 세 아이를 키우셨어요? 그런데 어쩜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우세요~ 저도 본받아야겠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도 땅바닥을 박박 기어 다니던 현역 그것도 눈물나는
이등병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제대하고 보니 그때가 잼난 때도 있었다
국방부 시계는 멈추지 않고 가는 법
제대하고 예비군 되면 알게 될걸세
아 ㅎㅎㅎ 네네 맞아요. 그래도 아이들 겨울방학 덕분에 알바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동앗줄 같은지 ㅎㅎ 예비군 되면 그때가 좋았다고 하겠죠? ㅎㅎ 감사합니다~
저라면
아픔 서러움보다도
전 직장 차장님이 대표가 되어
일명 나를 스카웃을 했음인데
그만두라..그것도 작은 실수 하나로..?
이건 그 못된 대표의 자질을
만천하에 고하는 내용으로 글을 썼을 거 같습니다.
세상은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참으로 많은 게 사실입니다
저도 현재 어둡고 긴 답답한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끝이 어딘지, 지금이 어디쯤인지..
작가님의 글을 읽는 내내
그래도 작가님은 언제나 밝은 미소로
세상을 대한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되었습니다
청승이면 어떻고, 늘어진 팔자면
어떻습니까,
니들이 나를 알어? 하면서
제 길을 갈뿐이지요.
힘내시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이 하루 하루 나아졌으면
하는 바램의 말을 전해봅니다.
당당하셔요
작가님은 아무에게나 없는
성공의 원천, 밝은 미소가 있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어머나 작가님 큰 힘이되는 답글 잘 읽었어요! 저도 뉴스보면서 들었다 놨다 롤러코스터같이 변하는 작가님 회사 소식을 보면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아 미소 잃지 않으며 전진할게요! 작가님의 터널 끝에 반짝이는 빛이 얼른 보이길 기도합니다.
수필을 읽는 내내 지난날 세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살았을 아내가 더 고맙게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길을 믿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작가님에겐 작가로서도 어떤 힘이 느껴집니다
삶을 순응하며 작가로서 예쁘게 살아가시는 그 모습 응원합니다
어머나 작가님도 세자녀의 아버지시군요~ 정말 든든하시겠어여! 건강이 최고더라구여. 오늘은 기적이고 행운이구요 ㅎㅎ 제 글로나마 사모님께 고마운 마음이 일으셨다니 아주 큰 기쁨입니다.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현대사회의 실상이 반영된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출산, 육아, 휴직 그리고 경력단절...
그래서 결혼을 미루는 사람들도 많고, 비혼주의자도 많은 듯 합니다.
삼남매 육아 하시는 작가님 대단하십니다.
화이팅!
역시 작가님! 제 속을 꿰뚫어보셨군요! ㅎㅎ 글은 소리가 없죠. 그래서 이 글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에여~ ㅎㅎ 아이는 낳을수록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란 생각이 들 수 있도록 발전해야할텐데, 이 글이 일말의 작은 힘이라도 보탬이 됐음 좋겠어서 썼어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작가님의 ‘벼락처럼 살다’를 아주아주 잘 읽고 되새기고 있습니다. 로얄제리 액기스같은 시조에여!!
어메 어메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아요.
아하하하 맞아요! 그래서 이제 그 알바 안해요. 월수금 재택으로 두세시간만 해주고 있어요. 출퇴근 오고가고 가서 꼭두각시처럼 불려다니고 집에오면 이틀이 힘들어서요 ㅎㅎ 다 때가 있다는걸 절감해요~^^
세상이 돌고 돌고
사람도 돌고 돌고
물레방아 인생이라고 했는데.
세상이 사람보다 빨리 도나 봐요. 사람이 따라갈 수 없으니. 이렇게 글로 승화 하시고.
어린이가 그린 저 그림이 또 심상치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