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長老, Elder)는 헬라어로 “프레스뷔테로스”(πρεσβύτερος)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나이가 든 원로(元老)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를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는 종종 감독(監督), 목사라는 단어와 혼용될 때가 많습니다. 사도(使徒)인 베드로나 요한도 장로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서서 3장 앞부분에서 감독의 직분을 이야기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장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교회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인 장로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데, 3장에서는 감독(혹은 장로, 목사)의 직분을 맡을 자격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장로(감독, 목사)에게 교회공동체는 어떤 태도를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로(목사, 감독)를 존경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말씀하면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지도자들을 더욱 존경하라고 말씀합니다(5:17).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가르침을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위해 섬기는 지도자들에게 생활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비용을 지출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5:18). 요즘 섬기는 교회의 형편상 생활비를 다 받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생업(生業)을 구하여 일하는 목회자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교회공동체의 형편이 부득불 어렵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는 가능하다면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마음 편안하게 주어진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넉넉하게 지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현대 교회에는 부목사나 전도사 등의 사역자들도 많이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역자들에게도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여 그들의 물질적 필요에 궁핍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혹시 장로(목사, 감독)에 대한 고발이 있을 경우에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5:19). 이것은 장로(목사)를 무작정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Rumor) 등으로 인하여 교회공동체가 혼란에 빠지고, 갈등에 휩싸여서 피폐(疲弊)해 지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굳이 극도의 혼란으로 치닫지 않아도 될 일이 더 크게 확대되어 오히려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서로의 신뢰가 깨지고, 공동체가 약화되어 무너지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세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확실한 근거가 있지 않으면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하여 갈등을 조장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범죄한 것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그것을 꾸짖고 바로잡아야 합니다(5:20). 확인되지 않은 말들로 인해 불필요한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지는 말고, 만약 분명한 범죄가 드러나거든, 그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도 대충 눈감고 넘어가는 것 역시 교회공동체를 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 불공평해서는 안 됩니다(5:21). 사실은 두세 증인이 있어야 되는 것은 장로나 목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리고 분명한 잘못이 있다면 모든 성도들에게도 그러해야 하고,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동일하게 그 잘못에 대해서는 치리(治理)하여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어떤 직분을 맡기기 위해 어떤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5:22). 그래서 섣불리 안수를 주어 직분을 맡김으로 인해 그 사람의 죄로 인해 함께 엮이지 말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5:22).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안수 주어 직분을 맡기게 되면 결국 그를 안수한 것으로 인해 그 사람이 지은 죄에 엮이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 선별하여 하나님의 일꾼을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23의 말씀은 뜬금없이 끼어든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위장의 질병이 자주 발생하는 디모데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물만 마시기보다는 포도주를 조금씩 사용하여 잘 치료하도록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의 물은 지금처럼 제대로 잘 정화(淨化)되지 못했기 때문에 위장의 질병에는 물보다는 포도주가 더 나을 수도 있고, 그 당시의 포도주는 종종 약으로도 사용되었기에 잘 사용하여 육신의 연약함도 잘 돌보라고 권면합니다. 영적으로도 정결해지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에서도 잘 나을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덧붙인 것으로 보입니다.
죄악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제가 행하지도 않은 일을 행했다는 루머가 돌면서 사람들이 저에 대해 오해하여 얼굴을 돌리는 이들이 생길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그 일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방어하고 해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결국은 무엇이 사실인가는 분명히 드러날 때가 올 것이고, 선과 악은 분명히 드러날 때가 올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참고 기다렸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자 저절로 사실관계가 드러나서 문제가 해결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에 많은 상처들은 있었지만, 결국은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죄가 먼저 드러나서 심판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중에 그 죄가 드러나지만(5:24), 선행도 그렇게 결국에 밝히 드러나고 숨겨지지 않기에 경솔하지 않게 차근차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리고 바울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종이나 자유인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되는 복음(갈 3:28)으로 인해 종종 주인과 종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때로 종들 중에는 자기의 상전(上典)에게 같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상전(주인)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보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는 주인과 종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대였기에 자칫 사회적 문제로 발전되고 오히려 종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도 있을 수 있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이라고 하더라도 상전을 범사에 늘 존경하고, 잘 섬기라고 권면합니다(6:1, 2). 그래야 다른 이들로부터도 하나님의 이름이나 교회공동체가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교회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유익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장로(목사)들은 존중받도록 하고, 종들도 상전에게 공경하는 태도를 갖도록 권면하면서, 분명한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책망하고 치리하여 교회공동체가 질서 안에서 정결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가 무질서해져서는 안 됩니다. 건강하고 든든한 교회공동체는 참 자유 안에 있되,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정결한 공동체로 든든히 세워져 갈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땅히 존경할 자들을 존경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을 수 있는 질서가 바로 세워질 수 있길 소망합니다.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