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Rabbi, where are you staying?’
Jesus said, ‘Come and see’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에게 속한 사람은 분명히 구분된다. 죄를 짓는 이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이며, 하느님에게서 나온 이는 죄를 짓지 않으며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제1독서).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들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그분께 머문다. 이렇게 인격 깊이 예수님을 체험한 둘 가운데 하나인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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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구분하고 판단하는 행위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릅니다. 신중함을 미덕으로 배운 우리는 되도록 중립적 위치에 오래 머물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한 가지를 선택함으로써 다른 한 가지를 잃는 것이 싫은 마음은 인지상정이어서 우리는 자주 결단보다는 미련을 가지고 삽니다. 어쩌면 선과 악을 쉽게 구분하려 하지 않고 판단을 멈춘 채 ‘괄호 치는’ 태도야말로 원숙한 삶의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섣불리 내린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또한 큰마음 먹고 내린 정의로운 판단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보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중하고 서두르지 않는 덕목은 분명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중함이 그저 처세술이나 갈등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무책임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요한 1서의 말씀은 모든 ‘삶의 기술’의 밑바탕에는 의로움을 향한 근본적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러 줍니다. 우아하고 능숙하게 인생의 항해를 하고 있다고 마냥 자랑할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형제를 사랑하겠다는 확고하고 단호한 결심이 결여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미지근한 타협의 일상에 안주하지 않고 삶의 근본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원천은,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 체험입니다. 그러한 체험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다지는 사랑의 결단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지혜일 것입니다.
<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
-전삼용신부-
‘연탄길 2’에 ‘아버지의 훈장’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민호라는 아이는 엄마의 울을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술을 드시고 들어온 아빠 때문에 엄마는 자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엄마를 울리는 아빠를 민호는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민호가 장남이기 때문에 민호는 아버지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민호 아빠는 민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6.25 때 이야기를 자주 해 주시곤 했습니다. 민호는 자신이 아빠를 진정시켜 주어야 엄마가 속 썩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아빠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잘 들어 주었습니다.
“아빠가 전쟁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거든...”
민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어머니를 보기 위해 내려가면 그때마다 아버지가 안아주었는데, 민호는 아버지에게 풍기는 지독한 술 냄새가 너무 싫었습니다.
민호가 서울에 돌아가는 날이면 아빠는 같이 서울에 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토하듯 아픔을 뱉어 내는 아빠의 얼굴은 슬퍼보였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해 발음까지 이상한 아빠와 같이 타면 너무 창피했습니다. 기차 안에서 아빠는 안주도 없는 술을 마시며 민호에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습니다.
“민호야, 아빠가 매일 술만 마셔서 너도 속상하지? 어른이 되면 민호 너도 알게 될 거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속상한 일이 생기거든. 아빠는 속상해서 술을 마시는 거야. 아빠는 말이야, 우리 민호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빠 얼굴은 슬퍼 보였습니다. 하지만 민호는 아빠의 말소리를 외면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민호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 때문에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슬픈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주말이면 내려갔습니다.
민호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사대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됩니다. 선생님이 된 민호는 학생들과 전쟁영화를 보았습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민호는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용감히 싸웠습니다. 많은 적들을 죽인 공로로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신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적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민호는 영화를 보고 나서,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술을 마셔야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총 끝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간 얼굴들을 잊기 위해 오랜 세월 술을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때가 되면 이해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두 번씩이나 말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처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례자 요한은 알아보는데 우리는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례자 요한보다 그분을 더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알려고 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분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지금 알지 못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도 알지 못하면 더 이상은 핑계가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당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간호견 그레델이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하는 주인의 반려견이자 간호견으로 주인을 섬겨온 그레델이 나이가 다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눈 뜰 힘도 없이 누워있는 그레델이 무언가 주인에게 말하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도 도저히 그 끙끙거리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이를 해석하기 위해 동물의 말을 통역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부릅니다. 그녀는 반려견이 죽어가면서도 주인을 걱정하며 지켜주려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는 시력이 보이지 않는 그레델은 후각으로 낯선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으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신음소리라도 냈던 것입니다. 이는 누가 보면 웃을 일이지만 동물의 말을 통역해주는 사람까지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레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누워있는 걸인이 “목마르다!”라고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요한은 “나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말이 ‘처음에는 나도 너와 똑 같이 그분을 알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 그분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너는 얼마나 그분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니?’라고 들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알고 싶어 하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더 드러내십니다. 그분을 더 알아야 그분을 더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리의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뭇잎이 모두 사라진 앙상한 나뭇가지만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요즘의 겨울나무. 그런데 지금 이렇게 앙상한 나뭇가지만 있다고 해서 나무가 성장을 완전히 멈춘 것일까요? 성장을 멈춘 것 같지만 아주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신학교에서 보았던 작은 묘목이 어느 날 신부되어 가보니 커다란 나무가 되어 있더군요. 그 당시에는 이 자그마한 나무가 언제 클까 싶었지요. 그러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씩 성장해서 이렇게 큰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어느 순간 훌쩍 커버린 이 나무를 바라보며 감탄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데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했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고 있는 나무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우리 역시 전혀 성장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 역시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때 저는 체중이 잘 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항상 똑같은 체중에, ‘나는 원래 먹어도 안찌는 체질이야.’라고 말하곤 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체중이 불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사람들로부터 ‘살 좀 빼라.’는 소리를 듣는 상태까지 왔습니다. 언제 이렇게 체중이 늘었을까요?
나도 모르게 커버린 키와 늘어난 체중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들 모르게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긴 어떤 것을 배우다가 한 달 혹은 1, 2년 동안 쉬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래도 다시 배우기 시작하면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능력이 쉬기 전보다 많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쉬고 있는 동안에도 새로운 것에 눈을 떠 능력이 향상된 것이지요.
계속해서 우리를 성장시켜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을 보고 이 주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행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나를 성장시켜주시는 분을 보지 않으니, 항상 불평불만만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두 제자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따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주님을 직접 보고 깨닫는 것이 먼저였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묵으면서 보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주님께 다가와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모두 버리고 왜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만을 내세워 불평불만을 던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를 쉼 없이 성장시켜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간절히 할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갖고 삶을 시작하라.(에밀리 반스)
감동은 나누는 것
-김귀웅 신부-
취미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제주도 곳곳이 아름답다 보니 제 실력과는 상관없는 아름다운 사진을 많이 찍게 됩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관광객들은 다니지 않는 특별한 곳도 많이 찾아다닙니다. 이른 새벽이나 어스름 저녁에 그런 예쁘고 멋지고 아름다운 곳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러 갈 때는 혼자 다닙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똑같이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인데, 혼자서 볼 때와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의 느낌이 왜 다른 것일까? 사실 혼자보다는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우와, 멋지다!”라고 감탄하며 맞장구칠 사람이 있을 때, “어머, 얘 저것 좀 봐!” 하며 옆 사람 어깨를 토닥토닥거릴 때 훨씬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누군가와 나누어야만 더 좋은 것, 더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안드레아가 메시아를 만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형 시몬을 찾아가 이야기하고,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이 있다 면 누군가에게 우리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고, 누군가를 예수님 곁에 데리고 옴이 당연한 것이겠지요.
류해욱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원래 요한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는 두 사람과의 첫 만남에 대한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장면 설정으로 햇살이 강물 위로 반짝이는 강둑길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세 사람이 길에서 나누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말없이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이 돌아서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물음 안에 예수님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지닌 마음의 갈증을 아시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당신을 따르는 행위로 바뀌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시오. 복음 묵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물음에 또 다른 물음으로 답하는 두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보십시오. 이 물음 안에는 함께 머물면서 당신을 깊이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는 말씀으로 당신과 함께 묵으면서 당신을 만나보라고 초대하십니다. 두 사람은 따라가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보고 거기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함께 머물면서 내밀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선문답처럼 이루어지는 이 대화 안에 깊이 머무르십시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복음사가가 전해 줍니다. 때는 단순히 시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이 이루어진 시간, 은총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시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의 첫 해후가 이루어진 시간이기에 깊이 마음에 새겨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묵상을 통해 각자 예수님과의 특별한 만남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만남을 되새기십시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과 함께 머무르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십시오.
정신 좀 차려라!
-김찬선신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은 너무 놀랍기도 하고 다른 한 편 의구심도 듭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세례로 다시 태어났는데도 밥 먹듯이 죄를 짓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저는 해병대 출신도 아니고 그래서 어떤 때는 우습게 들리기도 하지만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는 말이 멋있게 들립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해병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겠다는 의지의 표시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해병대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 정도의 자부심과 이 정도의 정체 의식과 정신을 가지고 산다면 틀림없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죄를 짓지 않을 것이고, 틀림없이 천당에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독서에서 얘기하는 하느님의 씨가 정신 또는 성령이라고 생각하고, 그 씨가 그 사람 안에 머문다는 말은 그 정신이 골수까지 철저히 박혔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정신은 빠져나갈 수도 있기에 거듭 다시 차려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얼빠진 놈 또는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하고,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정신은 빠져나가기도 하고 다시 차리기도 하는 것임을 뜻합니다.
맞습니다. 하느님의 씨, 곧 하느님의 정신 또는 성령은 한 번 들어오면 계속 눌러 있는 게 아니라 들락날락하기에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신 차리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저희 돌아가신 수사님 중 한 분은 이런 면에서 저에게 아주 소중한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수도원에 들어와 오랫동안 짐을 풀지 않고 사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처럼 파스카의 정신과 삶을 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기 위해 허리에는 띠를 두르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누룩 없는 빵을 그것도 서서 서둘러 먹었습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정신입니다.
아무튼 우리 수사님은 당신의 그 짐 보따리를 볼 때마다 정신을 다시 무장하고 수도생활을 매번 새롭게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수도자이지만 매번 다시 수도자로 태어났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썩어빠진 정신을 몰아내었습니다.
썩어빠진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모든 짓은 죄가 되고, 하느님의 씨, 곧 성령을 지니면 어제 보았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의로움이 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마리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듯 성령이 내 안에서 예수와 예수의 행실을 낳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탄은 1년에 한 번 또는 일생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내 안에서 거듭돼야 하고 나도 매일, 매 순간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그리는 열망
-이중섭 신부-
오늘 복음에는 ‘따라가다’라는 동사와 ‘묵는다’라는 동사가 각각 세 번씩이나 등장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과 같이 머무는 것이 제자됨의 징표요 제자의 생활양식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따라오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발설하신 최초의 말씀입니다. 그 물음에 두 사람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매섭고 심원한 질문에 대한 대답치고는 소박하다 못해 서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묵으시는지 알아야 함께 묵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지적이고 사변적인 인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머물겠다’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 이날은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만 앞으로는 예수님 친히 제자들 안에 머무르실 것입니다. 외적으로 그분 가까이 있는 친근함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 주시는 생명 안에서 내적이고 영적인 친밀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의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서 절대적인 것, 초월자를 향한 열망, 흠숭드리고 싶은 욕망, 한마디로 하느님을 그리는 열망이 얼마나 큰 힘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C.M.마르티니, <요한 복음> 중에서).
함께 묵는다는 것
-주영길 신부-
몇 해 전 지인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 3학년 아들이 진로를 선택하지 못하고 자꾸 방황한다는 내용이었다. 죄송스럽지만 사제관으로 아들을 보내 며칠 묵게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좋을 대로 하라며 청을 받아들였다. 시골 본당 사제관 생활은 뻔하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며칠 동안 함께 밥해 먹고 산책도 하며 미사도 했다. 성당 생활이 지루했는지 아니면 깨달은 것이 있는지 일주일도 안 되어 돌아간다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첫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으로 묘사한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고 그분과 함께 하룻밤을 묵는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묵는 동안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도 그분과 하룻밤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 밤이 지났을 때 안드레아는 자기의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고백한다. 예수님과 묵는 동안 제자들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가끔 동창 신부들과 휴가를 맞춰 떠난다. 속속들이 서로 안다고 자부하는 사이인데도 여행하다 보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식사에 앞서 메뉴를 정하는 것부터 여행 계획, 숙소도 서로 뜻을 맞추어야 한다. 여행의 피로가 몰려와 지칠 때는 서로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묵는 것이 어찌 편하기만 하겠는가?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면 ‘다음 여행은 홀가분하게 혼자 떠나리라.’고 다짐하지만 휴가 때만 되면 다시 동창 신부들을 찾게 된다. ‘함께 묵는다.’는 것은 삶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격적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결국 서로의 삶 안에 온전히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머물기를 바라신다. 번잡한 일상과 걱정을 뒤로한 채 세상일에서 눈과 귀를 닫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하루 가운데 주님과 머무는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자.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맞이한다면 우리도 안드레아처럼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곁에 머물면서
-구요비 신부(가톨릭대학교)-
우리나라의 해외 여행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방학 동안 배낭여행을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로 되었고, 신혼여행도 많은 경우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국내 자산이 외국으로 유출되기에 우려하는 소리도 높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손실만을 문제삼는 것보다 우리가 외국의 문물과 생활을 대하면서 얻게 되고 배워오는 부과효과도 크다고 보야야 하겠다. 고사성어 중에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종교의 영역에도 해당되니, 무릇 모든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절대자인 신을 만나뵙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뒤를 따라오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을 애타게 찾는 갈망을 심어놓으셨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주여, 당신의 품안에 쉬기까지 내 영혼은 이렇게 불안하나이다!” 하고 기도했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 향수와 목마름에 대해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 하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무엇을 보고 어떤 체험을 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메시아를 만났다는(41절) 제자들의 고백이다.
"와서 보아라!" -권우영 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 화두로 삼아 묵상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와서 보아라.'(요한1,39)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누군가를 집에 초대할 때는 뭔가 보여줄 만한 것이 있을 때입니다. 집이 넓다든지, 잘 꾸며놓았다든지, 아니면 음식을 잘 마련하였다든지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우도 집이 있고 참새도 둥지가 있지만 나에게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께는 이렇다할 거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가구가 있어서 자랑을 하겠습니까, 번쩍이는 차가 있겠습니까? 음식을 잘 하셨겠습니까? 옛말에 홀아비는 이가 서말이라고 했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무슨 음식을 잘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한 순간에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무엇을 보았기에 이렇게 순식간에 판단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한 1년 전 경남 진동 근처에 있는 봉쇄 수도인 수정 트라피스트 수도회에서 부제품 피정을 위해 한 달간을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에서 24시간 침묵으로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회였습니다. 이 수도원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24시간 침묵하며 기도하고 노동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수면은 여덟 시, 아홉 시에 하고 새벽 두시 반, 세시 경쯤 일어나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새벽 시간을 오롯이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 때 한 주간을 지내면서 얻은 기억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건물도 아니고 그 곳 분위기도 아니고 딱 한 사람, 바로 저희들을 위해 피정지도를 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회의 어느 외국인 수사님 한 분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저 면담시간을 제외하고는 한 달 동안 한 마디 말도 나누어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 시간이 되어 기도를 하거나, 산책을 갔다가 마주치기만 하면 그 분에게서만 빛이 나는 겁니다. 그 분에게서는 얼굴 표정, 기도하는 목소리에서 권위가 풍겨 나왔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과 함께 사는 모습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말을 안 해도, 스쳐만 지나가도 그 힘이 느껴집니다.
아마 안드레아가 바로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예수님은 수도원의 수사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니 더 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한 순간에 매료되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얼른 자기 형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소개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단번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합니다. 예수님 또한 즉시 베드로를 알아보고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1,42) 하시며 제자로 받아들이시지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확신과 기쁨으로 모든 것을 봉헌하고 투신할 수 있다는 것은 참 행복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요한1,39)고 말씀하셨고 또 두 제자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즉시 묻게 됩니다.
왜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수십 년 간 성당에 다니고,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매일 평일 미사까지 다녔는데도 왜 우리는 이런 확신에 찬 삶을 살지 못하는가? 이것은 우리 모두의 화두입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느끼는 갈증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재미있는 사람이 둘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죽 함께 다녔고 같은 성당에서 신앙생활도 꼭 같이 했습니다. 서로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한 사람은 순탄한 인생 길을 걸었습니다. 가정도 평탄하고 사업도 잘 되고 신앙도 성숙되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점점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반면에 또 한 친구는 그렇게 순탄치가 못했습니다. 가정도, 사업도, 그리고 신앙도 별반 성장하지 못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성공한 친구는 모두가 좋아할 정도로 매사가 긍정적이었습니다. 매사에 희망적이고 겸손했지요. 그에 비해 다른 친구는 눈에 띄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으며 교만했습니다. 성당에 나와서 강론을 들어도 부정적인 성향이 강해서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이고 함께 하려고 애를 쓴 친구와는 수십 년이 지나면서 하늘과 땅 차이의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요한1,39)고 초대하셨을 때 와서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순응하는 사람은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하지만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순응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봐도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안드레아나 베드로만이 아니라 열심히 준비하고 참여하며 실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안드레아와 베드로를 초대하셨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1,39)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의 준비된 마음과 열정이 주님을 바로 알아보게 했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느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우선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내가 튀어나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가슴에 담아 실천해 보십시오. 수십 년 간 만나지 못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십니다.............◆
알고 깨달아 행하자. -이태영 신부-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제자들의 모범을 통해 신앙 성숙을 위한 세 가지를 배웠으면 합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계시는 곳을 알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즉 '주님을 알고 싶다'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그 당시 메시야 대망사상에 젖어 있던 사람들과 같이 제자들의 첫째 바램도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지혜서 9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깊이 아는 것이 슬기다”...이 내용에서 보듯이 신앙의 첫걸음은 이렇게 주님을 알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행히 많은 본당들에서 주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쓰는 운동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하여 찾기 시작하는 이에게 주님은 당신을 보여 주시며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앎이 주님께 대한 깨달음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밤’이라는 여정이 필요하다고 영성가들은 이야기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사막을 40년간 떠돌아다녔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시기에는 배고프고 무미건조하여 하느님이 안 계시는 듯한, 나의 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듯한 체험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야말로 자신의 영적인 그릇을 키워 하느님을 만날 시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자신을 보여준 사람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습니다(요한 20,11-18 참조).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 때 흘렸던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은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임을 애타게 찾는 이의 눈물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목말라하는 이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고 깨달음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밤’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어려워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바로 하느님을 더 크게 만날 시기임을 기억하고 인내 속에서 더욱 애타게 주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깨달은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듯이 깨달은 자는 자신 안에서 머물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 8). 사랑이신 하느님을 깨달은 자는 자연히 그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러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를 축복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그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잘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창세기 12장부터 성서 안에서 축복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새로이 밝아온 2008년,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는 자신인지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소명의 발전과정
-이중섭 신부-
요한 복음 1장에서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소명의 발전과정을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적합니다(요한 세례자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 다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질문이 던져집니다(“무엇을 찾느냐?” 이 질문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첫 말씀입니다). 그 다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합니다(“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그 다음 투신에 대한 서약을 요구받습니다(“와서 보아라”). 그 다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소명과 관계를 수용합니다(“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끝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데 이릅니다(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응답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제자들의 대답은 주님과 친밀하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바라는 우리의 열망을 대변합니다. 이런 열망이 있어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도 체험하는 것 아닐까요?
존재의 이유
-이찬홍 야고보 신부 -
10여 년 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존재의 이유”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김종환 이란 가수보다도… 멜로디보다도… 노랫말이 좋아서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노래를 자주 부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김종환- 존재의 이유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내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있을 뿐이지
언젠간 다시 만날 테니까
그리 오래 헤어지지 않아
너에게 나는 돌아 갈 거야
모든 걸 포기하고
네게 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네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 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이유는 ‘네가 있다는 것이…’ 곧,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노랫말처럼만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 참 쉽고 편하게 살겠구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돌이켜 본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 역시 거창하지 않고 평범할 수 있습니다.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가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 아내, 가족을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이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소박하면서도 당연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우리 삶이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 존재 이유 역시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면서 소박하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 복음을 대하며 예수님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곧,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살아가는 이유요, 존재 방식입니다.
오늘 영성체후 묵상 글에 이런 내용이 소개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양들이 질병이나 우환을 피하기 위해… 삶의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의 어린양을 정하고, 그 어린양에게 모든 우환과 불행을 뒤집어 씌워 재물로 봉헌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양들을 위해.… 다른 양들의 불행과 우환, 질병을 대신 짊어지고 죽어가는 어린양을 오늘 요한은 예수님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우리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시는 분입니다.
다시금 우리의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의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데 있어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가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존재의 이유를 사랑하는 것에서만 그쳐버려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고와 짐을 좀 덜어주고, 그들의 죄와 고통과 아픔을 대신 짊어질 수 있게 된다면, 이는 우리의 존재 이유를 예수님의 존재 이유와 같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덜 아프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물을 덜 흘리게 하는 것을 우리의 존재 이유, 방식으로 삼는 것을 올 한해의 계획으로 세웠으면 어떨까 합니다. 아멘.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이회진신부-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창세 3,9에 나타납니다.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하느님께서 먹지도 건드리지도 말하고 하신 말씀을 거역하여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은 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에게 “너 어디 있느냐?”며 찾게 되었죠.
죄가 들어와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자,
하느님은 그 순간부터 우리를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우리를 완전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안드레아가 그의 형 시몬에게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보았어.”라고 말하며
기쁨에 겨워 자신들이 일생동안 찾던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드레아가 비록 메시아를 발견했다며 기뻐하긴 하지만
그의 기쁨은 그가 예수님께 자신의 형 시몬을 데려가 소개할 때까지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세 3,9의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주님을 발견한 사람이 안드레아
혹은 안드레아와 동행한 다른 사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언제나 우리를 찾고 계시기 때문이죠.
죄가 우리가 당신과 사이에 장막을 치고 둘러선 이래로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미 우리를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성탄 시기는 이런 하느님의 자기 현시를 찾는 시기입니다.
목동들이 천사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아기를 찾았고,
동방박사가 유다인의 새로운 왕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찾았고,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말한 “나보다 더 큰 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안드레아와 다른 사도가 메시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찾아간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시몬이 그리고 안드레아나 다른 사도가 혹은 우리 중의 누군가가 하느님을 찾아간다해도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누구아니냐?”
하느님은 이미 시몬을 알고 있었고, 안드레아와 다른 사도를 알고 있었으며
우리를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며 당신과 멀리 떨어져 숨어 있을 때도
이미 당신을 우리를 찾고 있었고, 이미 찾아서 알고 계셨던 것이죠.
안드레아나 시몬이 하느님을 발견했다고 기뻐했지만
실상은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발견하고 아시면서 기뻐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을 찾는 우리는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아버지, 당신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당신의 환한 미소가 보고 싶은 하루입니다. 아멘.”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들>
-양승국신부-
잘 나가던 전성기 시절,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를 통해 요한은 범국민적인 쇄신운동, 회개 운동을 전개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요한이 주도한 자정운동에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후에는 예수님조차도 요한을 찾아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드디어 예수님의 때가 도래합니다. 예수님께서 서서히 구원사 무대의 전면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되었던 사람들의 이목은 이제 예수님께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조금씩 쇠락해가는 스승의 기운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은근히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다들 예수님께로 몰려가고 있는 반면, 그 동안 스승 요한을 향해 구름처럼 몰려오던 사람들의 수효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시기심을 잠재울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스승 요한은 미동도 꼼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나마 남아있던 요한의 두 핵심 제자마저 자신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단에 편입됩니다.
제자들이 떠났다기보다 오히려 요한이 제자들을 떠나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따라가게 놔둡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동안 잘 양성시킨 제자들, 떠나보내자니 아쉬움도 컸겠습니다. 섭섭함도 많았겠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얼마나 배포가 큰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그릇이 큰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이 언제까지나 자신에게 종속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스승인 자신을 뛰어넘도록, 스승인 자신을 딛고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배려합니다. 자신보다 더 큰 스승이 나타나자 제자들을 향해 저분을 따라가라고 지시합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참 스승, 큰 스승의 면모를 봅니다.
한 명 한 명 떠나가는 제자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순간에 등을 돌리고 마는 군중들, 급격히 쇠락하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던 세례자 요한의 심정은 꽤 쓸쓸하고 허전했겠습니다.
한때 잘 나가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핵심제자들마저 속속 예수님의 제자단으로 편입됩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의가 급격히 쇠락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속수무책인 스승의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향해 따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냥 보고만 계실 것입니까?”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그간 자신이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자신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무대가 열렸다. 새로운 무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 나날이 성장하도록 매일 저는 죽어갑니다.”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라면, 이 내 한 몸 어떻게 되어도 좋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1,35-42)
-유 광수신부-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랍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번역하며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두 제자를 보시고"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셨다. 인생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고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게 찾는 것이 없다면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은 인간만이 찾지 않는다. 찾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고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찾고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은 사랑해줄 사람을 찾는다. 인간은 찾고, 찾은 것을 얻고, 기뻐하고 또 싫증을 느끼고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다른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있다. 언제 인간의 이 방황이 멈추게 되는가? 인간의 영원한 욕망을 채워줄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이다. 왜 그렇게 하느님을 찾는가? 하느님을 찾았을 때 비로소 인간이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가? 인간은 하느님한테 왔기 때문이다. 마치 연어가 죽을 때에는 자기가 태어났던 곳을 다시 찾아가듯이 하느님한테서 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이것을 귀소본능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걸어가야할 여정이 영성생활이다. 일단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더 이상 찾아 나서지 않고 안식과 기쁨 충만함을 느끼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즉 찾아 헤메는 방황이 멈추어지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라고 한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럼, 어디에서 찾아야 이런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며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의 불행은 그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를 모르고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는 데에서 절망과 방황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와서 보아라"고. 즉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와서 즉 당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신다. 우리가 찾아야할 곳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오늘 우리에게서 예수님은 말씀이다. 즉 우리가 찾아야할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에서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라고 말한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행복을 찾으려하지 않고, 하느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찾고자 하는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여기 저기 다니고 무엇을 보라 가고, 누구를 만나려 가고, 이리 저리 찾아 헤맨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해답을 찾느냐고 얼마나 많은 시간, 돈, 정력 등을 소모하는가? 그래서 지치고 피곤하고 시간에 쫓기고 늘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사람은 무엇을 찾느냐에 따라 찾아지는 것도 달라진다. 늘 돈을 찾는 사람은 결국 돈은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차지 못한다. 권력을 찾는 사람은 마침내 어떻게 해서라도 권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얻지 못한다.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그럼 신앙인은 이 세상의 것을 전혀 찾지 말라는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것들도 필요하다. 다만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데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또는 하느님을 찾는데 하나의 수단이지 목표는 아니다. 수단과 목표를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것을 찾기 위해서 하느님을 포기해서도 안되고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고 해서 이 세상의 것을 전혀 도외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 일할 수도 있다. 다만 하느님을 찾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오로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영원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고 거기에만 매달리거나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영성생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더 나은 것을 지향해야하고 더 나은 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위 것을 얻기 위해 상위 것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100원을 벌기 위해서 1000원을 버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듯이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주는 하느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또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으려면 "와서 보아라"고 하셨듯이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로 가서 보아야 한다. 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예수님께로 간다는 것은 말씀에로 간다는 것이요, "와서 보아라"는 것은 그 말씀을 통하여 보여 주는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보다"라는 말은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면 영화관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요, 감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이 있고, 깨달은 것이 있고, 감동이 전달된다. 이처럼 "보다"는 말은 말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이요 그 안에서 하느님이 펼쳐보여 주시는 세계를, 가치를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두 제자가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라고 예수님과 함께 묵으면서 느꼈던 감동의 순간을 "오후 네 시쯤"이라고 기억하였듯이 우리도 보고 느끼고 감동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다"는 것은 그사람의 마음 속까지를 들여다 보고 그 사람의 마음상태까지를 아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다"라는 것은 단순히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무한한 세계를 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요, 복음을 통해서 보고 깨닫고 느낀 그런 눈으로 보고, 그런 느낌으로 느끼고,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이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본다"는 것은 똑같은 사건이나 세상과 사람을 보더라도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보고 다른 가치관으로 보고 다른 감동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매 순간은 똑같은 순간이 아니라 늘 새로운 순간이며 새 하늘 새 땅으로 다가 올 곳이다. 그래서 더 이상 행복을 찾아 헤매지 않고 하느님이 펼쳐 보여 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감상하고 즐기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삶을 살 것이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