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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화요일. - 달릴 길.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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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달릴 길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원로들과 헤어지며
자신이 어떻게 해왔는지 회고한 다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내다봅니다.
제자들을 떠나시며 주님께서 고별사를 하시는 것처럼, 그도 고별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 “달릴 길”을 다 달리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데
디모테오 후서에서도 이 “달릴 길”을 다 달리는 것에 대해 얘기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달릴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오로의 달릴 길과 저의 달릴 길은 다를까요? 아니면 같을까요?
나는 나의 달릴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지금까지 달려왔을까?
나의 달릴 길이 뭔지 생각지 않고 무작정 달려온 것은 아닐까?
성찰해보니 나의 달릴 길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인생의 목표를 고민한 바가 있고,
그 고민 끝에 행복이 내 인생의 목표인 줄 깨달았으며,
그 행복의 길을 향해 줄곧 달려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츰 이 세상에서의 행복의 길을 넘어 저세상에 이르기까지의
구원의 길을 줄곧 생각하고 그 길을 달려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왠지 제 말에 힘이 없습니다.
적어도 바오로 사도만큼의 확신이 없습니다.
“달릴 길”이 아니라 “나의 길”을 많이 달렸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말에 자신이 없는 것은
나의 길을 달린 측면과 열심히 달리지 않은 두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달릴 길을 달리다가 옆길이랄까 샛길이랄까
이런 나의 길을 달리다가 다시 돌아와 달릴 길을 달리곤 했습니다.
제가 달릴 길은 바오로 사도가 달린 것처럼
주님의 길을 달려야 하고, 주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을 달려야 하는데
저는 제 행복의 길, 아니 제가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한 길을 달리곤 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서 또는 성령께서 일러주셔서 길을 가고,
그렇게 간 길은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이요.
그러기에 대부분이 투옥과 환난이 기다리는 그런 길이었는데
저는 흉내는 냈지만, 대부분 행복의 길, 꽃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 평생의 열등감이요 패배감입니다.
성령께 사로잡히지 못한 자의 인생이고,
그렇게 인생길을 갔기에 열심치 못했고
혹 열심히 달렸어도 달릴 길을 다 달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애는 애대로 썼으면서도,
크게 잘못된 길을 간 것 같지 않으면서도.
나는 과연 성령께 사로잡힌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바오로 사도를 보며 나를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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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오늘부터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사에 이어지는 고별기도를 듣게 됩니다. 흔히 이를 “대사제의 기도”라 부릅니다. 비록 이 기도에서 ‘예수님이 천상성소의 대사제이자 희생제물자체가 되셨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디 사제의 임무가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중재라 할 때,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고 있기 때문에 ‘대사제의 기도’라 부를 수 있습니다. 특히 17장 19절의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이를 드러내줍니다.
이 기도는 앞의 고별사의 중심 주제였던 ‘사랑’과 ‘영광’이 기도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청원을 담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을 위한 청원’(17,1-5)과 ‘제자들을 위한 청원’(17,6-19)과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청원’(17,20-26)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1-5절)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아들의 영광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앞의 13장 31-35절의 내용과 상통합니다. 오늘은 앞부분인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7,1-5)만 보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포함되는 뒷부분(6-11절)은 내일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먼저, “때”를 알립니다.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의 시작인 1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한편, 사막에서 사탄이 “세상의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할 때 거부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시기를” 간청하십니다. 이제 당신의 “영광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란, <성경>에서 하느님의 존엄함과 거룩함의 광채가 현재적으로 나타나는 위업과 현현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간청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렇게 영광이 드러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공생활을 통해서 이미 아버지를 드러내셨고, 또한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아들로 드러내셨지만, 이제 그 절정의 때가 왔으니, 아들의 실체가 드러날 때, 아버지의 실체도 함께 드러내시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분과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그 “때”가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때”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영광”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권한인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이에게 주심으로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올 것입니다. 곧 “홀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와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곧 사랑과 실천을 포함하는 앎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그 실현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 곧 영광이 드러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기를 간청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겨주신 근본적인 소명의 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을 드러내시되, 굴욕 받음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굴욕을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썩는 것을 썩지 않는 것으로 바꾸셨습니다.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당신을 알게 하소서.
그 어떤 굴욕과 수난에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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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이루는 일치
많은 분들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9일 기도, 15기도, 자비의 기도, 십자가의 길 등등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가끔 “9 일기도를 하면 소망을 꼭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만큼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나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기도문만 외운다고 그렇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횟수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대로 삶의 쇄신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 놓은 기도문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물론 함축된 그 기도문을 통해서 주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내가 스스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 기도는 기도회나 특별한 경우에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파견한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당신 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는데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은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당신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박병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당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청하신 것은 십자가의 길을 잘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있어서 기본핵심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이들, 바로 우리와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기에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과(요한6,32이하). 생명의 물(요한4,10이하).을 주시며 우리를 풍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결국 통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 현존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로 일치하여 더불어 한 몸이 된다면 “오늘이 영원입니다”(캠플로).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관철하는 것이라기보다 사랑하면서 사랑의 친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업시간에는 일로써, 기도 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를 말, 생각, 장소, 시간에 국한 시키지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시는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부디 삶이 기도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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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중에 묵주기도를 하고, 강의를 듣는 것은 제게는 작은 기쁨입니다. 걸으니 건강에 좋아서 좋고, 기도를 할 수 있으니 감사할 일이고, 강의를 들으니 배움이 깊어져 좋습니다. 오늘은 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에서 들었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조서환 선생님은 불행이 깊어지면 행복도 그만큼 깊어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장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소위로 근무를 하는 중에 수류탄이 터지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온 몸에 파편이 박히는 사고였고, 안타깝게도 오른 손목은 절단해야 했습니다. 온 몸을 붕대로 감고 있는 그에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인에게 자신의 사고를 알릴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사고로 손목을 절단한 자신을 여전히 사랑 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연인을 병실로 불렀습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런 나를 아직도 사랑합니까?” 연인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어제까지는 절망 중에 있었는데 사랑하는 연인이 곁에 있겠다는 말을 들으면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근심은 용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오른 손은 없지만 연인을 위해서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왼손으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였고,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영어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장인어른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고, 아이를 둘이나 얻었습니다. 국가유공자로 여러 곳에 입사지원을 하였지만 오른 손이 없는 사람을 채용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의수를 한 사실을 숨기고 애경 그룹에 입사지원을 하였습니다. 면접을 보는 중에 면접관은 오른 손이 의수라는 것을 알고 불합격을 통보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살을 생각도 했지만 너무도 억울해서 다시 면접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손이 두 개 있지만 누구나 글은 한 손으로 쓰지 않습니까? 저는 비록 한 손 밖에 없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 손이 없는 것은 조국을 위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면접관 중에 한 명이 지긋한 눈빛으로 그들 바라보면서 “당신이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영어’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면접관은 “지금 한 이야기를 영어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하느님께서 ‘너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영어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면접관들은 잘 못 알아들을 것 같았습니다. 당당하게 영어로 그간의 경위를 이야기하였고, 그는 다음날 전보로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다른 입사 동료들은 퇴근 후에 술을 마시거나 노래방을 가는 동안 그는 야간 대학원에 입학해서 ‘마케팅’을 공부하였습니다. 외국인들이 주는 명함에 ‘마케팅’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혁신적인 마케팅 전략과 광고 카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외국 회사에 입사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 손이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약점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강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여러분의 약점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번에는 다시 눈을 감고 여러분의 강점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약점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여러분의 강점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강연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우유부단함도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세심하였고, 말을 잘 못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 교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결정적인 순간에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성서의 거인들은 자신들의 강점을 살려서 신앙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하니 제게도 약점이 많았습니다. 그 약점들이 제 발목을 잡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강점이 있습니다. 저도 저의 강점을 살려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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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열여덟 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1위에 해당하는 금메달과 두 개의 특별상(청중상, 신작 최고 연주상)을 수상한 임윤찬 피아니스트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지도교수인 손민수 교수를 향해 ‘위대한 선생님’, ‘손민수 선생님은 종교다’라는 말로써,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보였습니다. 스승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았고, 이로써 인생의 목적과 방향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이신 손민수 교수 또한 제자를 향해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보낸 것입니다. 자신 역시 제자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면서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한쪽만 의미를 상대에게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더 높은 가치가 이 안에서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나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먼저 상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요? 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나에게도 의미를 전달해주기도 하고, 그 의미가 세상 전체로 그 가치가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범을 따라야 한다면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모범을 받아 우리 역시 사랑의 모범을 따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에게 온 하느님 나라가 조금씩 완성되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영광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 이들이 아버지께 보호받도록 청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거부하는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일까요? 우리도 그분의 영광을 들어 높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의미를 받은 제1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사도 바오로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의미 있는 모범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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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파괴될 수 있어도 패배할 수 없다(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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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떠남의 여정
-‘오늘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진리는 반복해도 늘 새롭습니다. 저에게는 ‘여정’이란 말마디가 그러합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누구도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한곳에서 오래 정주하다 보니,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가 뚜렷한 자연환경의 수도원이고 보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합니다. 특히 휴가를 떠나 귀원하는 형제들을 보면 시간도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인생 휴가 끝나고 아버지의 집으로 귀원할 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수도원 초창기 풋풋한 젊음의 40대 전후의 도반들도 이젠 70을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수도원 사진첩을 보면 더욱 실감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 30년 지나면서 사라질 분도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병고를 안고 더불어 여정중인 형제들에 대해 저절로 연민의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가 참 아름답습니다. 요한복음 제17장은 전통적으로 ‘대사제의 기도’라 칭하지만 예수님께서 수난에 앞서 세상을 떠나기전 ‘고별기도’라 함이 적절합니다. 17장은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에페소를 떠나면서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남긴 고별인사입니다. 두분의 떠남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떠남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떠남의 여정-오늘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하다-”입니다. “떠남의 여정” 역시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많이 반복하여 사용했던 주제입니다. 어쨌든 가장 많이 강론 주제로 등장하는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성서의 위인들이나 교회 성인들의 삶의 여정을 보면 대부분 참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벗이라 불렸던 아브라함, 모세는 물론이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바오로, 그리고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마지막 임종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떠남의 여정과 관련하여 제가 피정자들에게 자주 강조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강론중에도 자주 반복하여 예를 들지만 저에게는 늘 절실하게 와닿는 내용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할 때, 즉 오전 6시로 시작하여 해가 지는 죽음을 상징하는 오후6시의 하루로 압축할 때, 과연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느냐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일년사계, ‘봄-여름-가을-겨울’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다들 진지한 얼굴이 됩니다. 저로 말하면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위치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확인이 삶의 환상이나 허영, 거품을 거둬내고 겸손히, 성실히 하루하루 하느님 주신 선물 같은 날,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 흥미로운 것이 피정 오는 형제자매들 대부분이 가을 나이에 걸친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신록의 빛나는 5월의 봄철 나이에 속한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래도 믿는 이들의 영혼은 신록의 젊음이라며 5월 단체 피정자들은 격려하는 차원에서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도록 합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들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피정의날’ 우리들 세상”
싱글벙글 웃으며 하느님의 어린이들이 되어 신나게 부를때는 모두가 신록으로 빛나는 영혼들같이 참 아름답습니다. 역시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주님 사랑의 열정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납니다. 잘 떠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떠나온 삶은 지난 것이고 오늘부터,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늘 새로운 떠남이 중요합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 때도 가장 기쁨으로 설렜던 시간은 새벽길 떠날 때 였습니다. ‘떠남의 훈련’같은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과연 하루하루 기쁨으로 설레는 떠남의 여정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과 바오로의 떠남이 흡사 죽음을 앞둔 떠남처럼 느껴지고 사실이 그러합니다. 정말 마지막 죽음보다 더 중요한 떠남은 없습니다. 떠남 역시 훈련입니다. 하루하루 잘 떠나야 마지막 떠남인 죽음도 참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신을 위한 고별기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한마디도 생략하기가 아깝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이제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잘 살다가 잘 떠나기 위해서는, 하루하루 날마다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떠남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입니다. 떠남에 앞서 사도의 아름다운 삶에 감동하게 됩니다. 구구절절 감동이지만 일부만 인용합니다.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정말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한 진인사대천명의 삶이요, 주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은 바오로의 치열한, 가열찬 감동의 삶이었기에 아름다운 떠남의 죽음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부터,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떠남의 삶이 중요합니다. 이런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평생 도반이신 주님과의 사랑이요 우정입니다. 주님을 절친으로 삼아 날로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이할 때 "주님 만날 기쁨"에 설레는 떠남의 여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바로 어제 바친, 매주 화요일 3시경 찬미가 2절이 좋아 나눕니다.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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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빌어보셨습니까? 나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빌어보셨습니까? 무속신앙이지만 우리나라 선조들이 많이 하던 비는 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달밤에 물을 떠 놓고 달님에게 비는 것입니다. 또 밥상에 집 떠난 자녀의 밥을 떠 놓고 식사 시간마다 비는 것도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 빈다는 것은 마음뿐만 아니라 행위도 함께 한다는 것을 또한 내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선조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비는 장면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선,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빌었고, 마리아와 마르타가 오빠 라자로를 위해 빌었습니다. 또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위해 빌었고, 아들이 죽어가는 어미도 부스러기를 먹는 개라도 되겠다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빎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이 바랐던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님, 당신만 있으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이 저를 구하실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이 나의 자녀와 형제와 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뜻만을 기다립니다.’
이러한 기도의 중심은 내가 아닙니다. 주님이 중심입니다. 그분의 뜻이 중심이고 그분의 자비가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의 형식은 예수님도 똑같이 취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의 중심은 하느님입니다. 한시도 그분의 삶에서 그분이 중심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죽는 그 순간에도 말입니다.
의로운 사람
성경에는 의로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를 보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대에 내가 보니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다.’
요셉 성인을 표현하면서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성경에서의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일까요?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일까요?
의로운 사람에 관하여 에제키엘서 18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법규를 따르고 나의 법규를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성경에서 의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내 생각과 의지를 중심에 두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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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3. 부활 제7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오직 하느님께 빕니다
오직 하느님께 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요
하느님께 대한 희망고백이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고백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기에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품어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고백이기에
정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가 돌보아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고백이기에
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가 살려야 할
사람을 위해서 하느님께 빕니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오직 하느님께 비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을 믿고
하느님의 사람을 바라고
하느님의 사람을 사랑하기에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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