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치가 박순의 업적과 유적지(上)
뛰어난 시인으로, 높은 수준의 학자로, 탁월한 정치가로 모두에게서 칭송을 받았던 조선의 영의정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89)을 요즘 기억하는 사람은 너무 적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의 역사적 평가는 어떠했고, 그가 높은 수준의 학자나 정치가들에게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살펴보자. 우선 조선 500년의 정사(正史)인 왕조실록부터 읽어보자. 선조수정실록 1589년 음력 7월21일의 기록이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옥병서원. 사진작가/황헌만
“전 의정부 영의정 박순이 세상을 떠났다. 박순의 자(字)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사암(思菴)이다. 순은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화평스러워 모난 점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부터 화담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웠고 퇴계 이황과도 교류했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다보면 한 가닥의 맑은 얼음을 대한 것 같이 정신이 상쾌해짐을 깨닫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다. 명종 임금이 친히 과거시험을 보인다기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임금은 그를 큰 인물로 여기고 아주 중요하게 대접하였다. 그래서 박순이 관각(館閣)에 근무하면서 권신(權臣)들의 의견을 거슬러서 중벌에 처하려는 논의가 있었을 때 파면으로 그칠 수 있었다. 뒷날에 다시 발탁되어 두 사람의 권신(윤원형·이량)을 탄핵하여 쫓아내고나서야 선비들의 주장이 펼칠 수 있었고, 조정이 숙청되어 박순은 착한 무리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14년 동안 정승의 지위에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에게 무거운 신망을 얻고 있었지만 임금에게 건의하여 밝혀낸 것이 많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박순은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에는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면서 전적으로 어진 이를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힘껏 추천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합해 나라를 구하려 했다. 동서분당에 이르러 박순이 이이와 성혼의 편을 든다고 무거운 탄핵을 받으며 간사한 사람이라고 지목받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세 사람은 얼굴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임금은 ‘착한 부류끼리 상종함이 도(道)에 무슨 손상이 있겠느냐’라고 무시해 버렸다. 박순은 이미 은퇴했으나 임금은 다시 등용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자 나이 겨우 67세였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박순은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한(漢)이나 당(唐)나라의 격과 법도를 따르려 하였으며, 더욱이 시에 뛰어나 한 시대의 시인 종주(宗主)가 되었다. 이른바 3당 시인이라 칭찬받던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은 모두 그의 문인이었으니, 이때로부터 문체가 크게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암집(思菴集)’이 세상에 나와 있다.
이런 긴 기록이 사암 박순의 졸기(卒記)로 왕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조목조목 분석해보면 사암의 일생과 그의 업적의 대강은 모두 열거된 셈이다. 명종(明宗)의 친시(親試)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글 잘한다는 문명이 나서 세상에 이름이 크게 났고,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의 지위에 올라, 당대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논했기에 퇴계로부터 ‘맑은 얼음(淸氷)’과 같은 인품이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윤원형·이량을 퇴출시킨 곧은 신하
중종 때부터 시작된 사화(士禍). 뛰어난 선비들이 무참히 죽어갔고 귀양으로 내쳐진 사화. 정암 조광조 등의 대학자들이 무참히 죽어간 기묘사화는 그 대표적인 참극이다. 인종이 재위 8개월에 세상을 뜨고 어린 명종이 등극하자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패악한 정치가 모든 백성들의 눈물만 흐르게 하였다. 이른바 인종의 외척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척 윤원형(尹元衡)을 대윤과 소윤으로 부르며 이들이 싸우다가 모든 권력이 문정왕후의 친정 형제이던 윤원형에 넘어가면서 권력의 독재로 세상은 패악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암 박순의 신도비.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사진 위)
사암 박순과 부인 고씨의 묘소. (아래)
명종은 자신의 외숙인 윤원형의 횡포를 막아보려고 왕비 심씨의 외숙인 이량(李樑)을 등용하였으나 이량은 윤원형보다 더욱 심한 학정을 베풀어 세상은 더 비참해졌다. 당년 43세의 사암 박순은 대사간(大司諫)의 지위에 오르자 당대의 직신(直臣)이자 대사헌(大司憲)의 지위에 있던 이탁(李鐸:1509~76)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양사(兩司)합동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을 찌르던 윤원형의 권력에 맞서 그를 탄핵한 사암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직위에 죽겠다(挽回世道者 吾責也 死職耳)”라는 대담한 각오 없이는 감행하기 어려운 엄혹한 시기가 그때였다. 한 번의 상소로 되지 않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첫번째의 상소는 을축년(1565년) 음력 8월3일이었는데 두번째 상소는 8월14일이었으니 11일 만이다. 다시 상세하게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낱낱이 열거하여 밝히니 윤원형의 생질인 명종도 어찌할 수 없게 되어 끝내 그를 퇴출시킬 수 있었다. 이량도 그런 방법으로 쫓아내고 마침내 윤원형에게 빌붙어 온갖 비리를 감행하던 정승 심통원(沈通源)까지 퇴출시키자 비로소 정부가 숙청되고 선비들이 사기가 앙양되어 조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남에서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에게 벼슬이 다시 내려지고 대곡 성대운, 고봉 기대승이나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이 발탁되면서 착한 선비들이 조정으로 들어오자 사암 박순은 마침내 착한 무리(善類)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승 14년
14년 동안 정승의 지위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대사간·대사헌, 이른바 간쟁기관(諫諍機關)의 장으로 있을 때에는 그처럼 당당하던 사암도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는 자신이 인정했던 대로 경국제세의 통치능력은 부족했던 때문인지 큰 정책의 건의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했던 바와 같이 ‘어진 이를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함(薦賢讓能)’에는 뛰어나 율곡이나 우계 같은 대학자들이 나라에 봉사할 기회를 주었고, 당대의 어진 신하들이 사암의 추천으로 나라를 위해서 일할 기회를 가졌다.
▲대제학의 지위를 퇴계에게 양보
선조수정실록 원년(1568) 음력 8월 초하루의 기록을 보면 퇴계 이황이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야말로 사암 박순이 어떤 인물인가를 그냥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이황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라는 기사에 이어 “이때에 박순이 대제학이 되자 이황은 제학(提學)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높은 나이의 대석학이 다음 자리의 벼슬에 있고 제가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한 사람으로 감히 윗자리에 있음은 합당하지 않으니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런 임명이 있었다. 이황도 다시 힘껏 사양하여 다시 교체되어 사암이 대제학이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참으로 아름다운 역사의 하나가 바로 그 사건이다. 지위야 정승의 아래이지만 만인이 선호하는 벼슬이 대제학이 아닌가. 그런 벼슬을 흔쾌히 선배 학자에게 양보할 줄 알았던 사람은 분명히 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선비임에 분명했다.
▲공정하게 조정하려다 당인으로 몰리다
선조 8년에 일어난 동인과 서인의 분당은 조선을 당쟁국가로 비난받을 소지를 제공하였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추천하고 권장하여 나라를 건지게 하려 했던 사암은 율곡의 친구인 송강 정철과 함께 싸잡아 서인(西人)으로 몰려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고, 우계가 귀향하자 사암은 조정에서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동인(東人)의 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 등은 사암만 조정에서 나가면 권력을 손에 쥔다고 여기고 온갖 방법으로 사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지친 사암은 마침내 세상에서 물러나 은거하기를 결행했으니 외동딸이 사는 경기도 포천의 백운계곡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14년의 정승 생활도 마지막 겸하던 병조판서까지 모두 버리고 사위 이희간(李希幹:뒤에 군수 역임)이 살던 곳으로 찾아간다. 세상을 뜨기 4년 전인 63세 때의 일이다.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라는 곳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산수가 아름답기로 세상에 이름난 곳이다. 창옥병(蒼玉屛)이라는 절벽이 백운계곡을 휘감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백운계곡의 물은 바위를 돌고 돌며 세상의 근심을 잊게 해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당대의 시인 봉래 양사언(楊士彦) 형제들이 시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당대 명필 석봉 한호가 찾아오는 곳이어서 절벽에 많은 글씨를 써서 새기고 세상을 관조하며 사암은 말년을 보냈다.
바로 자신이 마련한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에서 거처하면서 그 곁에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우들이 모여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적자가 없는 사암은 서자가 있었으나 그를 믿지 않고(뒷날 서자 박응서는 ‘칠서의 난’에 희생된다) 외동딸과 사위에게 의지하면서 포천에서 살았다. 거기에 묘소가 있고, 옥병서원(玉屛書院)을 후학들이 세워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도 우뚝 서서 그의 일생을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