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빠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도서관에서 한껏 고취된 마음으로 재미있을 책을 골라 집에 왔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나자 도무지 그 책들을 왜 빌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책장에서 책을 꺼낸 뒤 침대까지 걸어오는 사이에 관심이 휘발되진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고로 흔적도 없이 없어질 읽기의 맥락을 일기 쓰듯 써볼까 한다.
가끔 나 자신을 너무 뻔히 알아서 자신의 관점이 지겨울 때가 있다. 마치 입출력이 결정된 기계처럼, 어떤 주제를 넣으면 어떤 명제를 내뱉을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사람이 뻔하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는 건 싫다. 아직 돈 없이 늙는 것보단 재미없이 늙는게 더 두려우니 열심히 내적 사고의 일탈을 시도해야 한다.
최근 읽은 책이 그랬다. [번역전쟁]이라는 책인데,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주장을 중심으로 다룬다. 한마디로 말해서 좋은 독재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을 들으면 일단 방어적이 된다. 독재는 무조건 나쁘고, 그 치들은 많은 이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 어쩌고. 이 책의 저자는 아프리카와 남미의 몇몇 독재자들이 사실 그렇게 나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나라를 독립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여러 가지 경제 문제를 잘 해결하려고 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또 생각한다. 이 사람은 흔한 음모론자고, 한국에서도 독재 시절을 경제 발전에 불가피한 일이라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부류인가. 하지만 찾아보니 몇몇 가지는 사실로 밝혀진다. 심지어 저자는 독재자 자체가 아닌 그 국가에 살고 있는 개개인들 자체를 끔찍이 아끼는 사람인 듯하다. 대략적인 맥락은 이렇다. 독재가 아닌 국가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금벌(재벌이란 말을 싫어하는듯)이나 외국 자본에 간이나 허파 떼서 다 넘겨주고 은행이 부실할 때도 혈세를 들여 결국 국민 개개인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식이다. 멀쩡하게 번역과 관련된 책들을 쭉 내던 사람이 이런 책을 쓰곤 그다음 책은 아예 [국가 부도 경제학]이라는 책을 냈다. 저 책은 별로 홍보가 안 되었는지 책 파는 사이트들에서 검색도 잘 안된다.
아마 살아가면서 저런 주장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완전무결하게 파악할 일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그 명제를 믿고 싶은지, 그리고 알게 된 사실들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고 가져다 쓰고 싶은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뻔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음, 독재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군 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게 있기는 있군? 유잼 인간이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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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참 20세기 전반기의 동아시아를 끊임없이 구체화하고 있다. 일단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쓴 수기가 있다. [남양 섬에서 살다]와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가 그런 책이다.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던 양쪽 이야기도 읽어본다. [태평양 전쟁](팔릴레우 오키나와),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이 그런 책이다. 개인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예전에는 이론과 통계, 개념적인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책들도 좋아서 많이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잘 읽히지 않는다. 한동안 구술사나 채록을 읽었는데 그것도 한계가 느껴져서 (대부분 두 세번 만나서 이야기 듣고 적은 게 다이다.) 이제는 서로 대화하는 식의 책을 찾게 된다. 아니면 아예 자기가 자기 이야기하는 게 더 명확하다. 어디 밖에서 말할 수 없는 내밀한 속사정 같은걸 읽거나 듣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마음으로 [누가 도시를 통치하는가](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뤘다!)와 [어떤 동사의 멸종](여러 가지 일을 하고 에세이를 쓰는 작가인데,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되나 싶은 것까지 쓰는 좀 눈치가 없는 작가이다!)을 빌렸는데 과연 그 욕망을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당장은 그런 속내가 담긴 이야기들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다 그 내부의 작동 원리를 무엇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인의 관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의전의 민낯]이란 책에서 지방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 행사 맨 앞자리에 누구를 몇 번째로 앉혀야 하는지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1번, 2번, 3번은 명확(?)한데 4번과 5번이 불명확해서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나중에 대충 정리가 되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 그네들의 마음이 그런 식으로 서로의 위아래를 정립하는구나 이해하게 된다.
최근 인터뷰 모음집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 보통 일과 관련된 책들인데, 특정 테마를 가지고 다양한 직종에 있는 사람들 인터뷰를 따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책 만들기 쉬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알고 싶었던 개인들의 목소리이긴 한데, 구술사처럼 뭔가 좀 부족한 맛이 있다. 한국사가 왕권 중심으로 서술되어 평범한 개인을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많은 큰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 개개인으로서의 관점이 생략되니 새로운 걸 구하게 되는데 아직은 이거다 싶은 걸 찾지는 못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래서 르포를 슬슬 찾아보게 된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를 빌렸는데 펼쳐볼 때마다 너무 이입되어 화들짝 놀라 닫아 놓고 안 읽기를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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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나니 읽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아직 요건에 딱 맞는 책을 구하진 못했지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책들을 읽다보면 어떤 흐름을 보기도 하죠. 요즘은 과학적 사고와 독서에 관한 주제로 책사이 선정도서를 모으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면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독서에 대한 책은 함께 꽤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과학적 사고가 중요한 포인트일까요. 기대가 됩니다.
아, 나도 읽고싶은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ㅎㅎ
ㅋㅋ 그레이애쉬 님은 그럼 무슨 마음으로 읽으시나요.
@서정 찾아 읽기 보다는 보이는 것을 읽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주제로 읽기는 잘 못하기도 안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즉 내공이 부족하고 게으름이 지배하는 삶을 살죠ㅎ
보통 어디서 보고 읽으시나요 ㅋㅋ. 책이 나오는 매체를 저는 거의 안 봐서. 책에서 나오는 책을 물고 물고 보네요.
얼마나 더 유잼인간이 되실려구~ ㅎㅎ 요건에 맞는 책을 찾으신다면 카페에 소개도 해주세요^^
[내가 낸 세금, 다 어디로 갔을까?]를 최근 다 읽었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까발림은 그간 읽었던 책 중에서는 최고조였네요. 아무래도 광주 전남 이야기인지라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