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규의 「지혈」 평설 / 이성혁
지혈
신철규 베인 손가락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아직 아리지는 않고 무덤덤합니다 온몸을 돌고 있던 피가 갑자기 한쪽으로만 몰려드는 것 같습니다 물구나무를 서면 피는 머리 쪽으로 쏠리고 갇힌 피 때문에 얼굴은 벌게지고 손끝이 두근거린다 나는 성장하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꽉 주었다 모든 것을 경직시키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네모난 수박처럼 베인 자리의 살은 겹겹의 층을 이루고 있고 몸의 끝으로 갈수록 혈관은 좁아지고 갈래는 더 많아진다 잔뿌리 같은 혈맥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상처를 가만히 누르면 피가 멈춘다 여기는 피가 나올 곳이 아니니 원래 가던 길로 가세요 헝겊으로 손가락을 감싸 쥐고 바닥에 눕는다 등 밑으로 우툴두툴한 선로가 가로놓여 있다 피가 굳어서 딱지가 되거나 벌려졌던 살이 미세하게 접합되어 가면 출구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터널은 동굴처럼 느껴진다 바늘귀를 찾는 실 끝처럼 멀리서 기차가 천천히 터널을 향해 다가온다
《백조白潮》 2024년 가을호 ........................................................................................................................................................
우리는 가끔 살이 베여 얼른 ‘지혈’하는 일을 겪곤 한다. 시인은 이 지혈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살이 베이면 피가 쏠리고, 피는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이 ‘피’의 상징적 의미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따라 위의 시의 독해는 달라질 것이다. 필자는 이 피를 마음에 숨겨놓은 기억, 또는 트라우마에 연관된 무의식적 기억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본다. 상처는 그 내면 깊숙이 흐르던 기억이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이끄는 사건이다. 상처를 향해 기억이 쏠리고 ‘손끝’의 상처는 ‘두근’거린다. 이에 지혈은 그 기억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막는 일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 기억은 “얼굴이 벌게지”는 고통으로 현상한다. 나아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하는 것이다. “성장하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었”던 기억, “모든 것을 경직시키”고자 했던 기억으로 말이다. 그때처럼 시인은 터져 나오는 기억을 막으려고 상처를 누르고자 한다. “여기는 피가 나올 곳이 아니”라고 하면서. “상처를 가만히 누르면 피가 멈”추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피가 굳어서 딱지가 되거나/ 벌려졌던 살이 미세하게 접합되어 가면” 출구를 찾지 못한 ‘피-기억’은 동굴 같은 터널을 돌아다닐 것이다.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나 있는, “등 밑으로 우툴두툴한 선로”를 이루고 있는 지하 터널을 말이다. 시인 내면 깊숙한 곳에 뚫려 있는 지하 터널, 시인은 이 터널을 돌아다니는 ‘피-기억’을 기차로 환유한다. 이 ‘기차-기억’은 터널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출구를 찾는다. “바늘귀를 찾는 실 끝”처럼 말이다. 터널 바깥에 있는 시인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지혈을 거치면서 이 터널의 끝을 향해 기억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감지한다.
그런데 피를 굳게 하려는 지혈은 시 쓰기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시를 쓴다. 시 쓰기를 통해 상처를 봉합하여 상처가 아물 수 있게 하기 위해. 그 ‘지혈-시 쓰기’의 과정은 고통스럽겠지만 상처는 조금씩 치유될 것이다. 이와 함께 시 쓰기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인지하도록 이끈다. 그 기억이 의식의 표층으로 다가오고자 하는 것도 말이다. 하여 시 쓰기란 상처를 봉합하면서도, 상처가 불러올린 기억을 고통 속에서 감지하도록 만드는 역설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시인하우스》 2024 하반기 ------------------------------ 이성혁 /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사랑은 왜 가능한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시, 사건, 역사』 『이상 시문학의 미적 근대성과 한국 근대문학의 자장들』 등이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