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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불臥佛 / 신현정(1948~2009)
나 운주사에 가서 와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와불이 누우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게 무심코 내쳤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 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년 내놓으시라
천년 내놓으시라고 할거야.
- 『바보사막』(랜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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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소(謫所) - 신현정
나, 세한도(歲寒圖) 속으로 들어갔지 뭡니까
들어가서는 하늘 한복판에다 손 훠이훠이 저어
거기 점 찍혀 있는 갈필(渴筆)의 기러기들 날아가게 하고
그리고는 그리고는 눈 와서 지붕 낮은 거 더 낮아진
저 먹 같은 집 바라보다가 바라보다가
아, 그만 품에 품고 간 청주 한 병을 내가 다 마셔버렸지 뭡니까
빈 술병은 바람 부는 한 귀퉁이에 똑바로 세워놓고
그러고는 그러고는 소나무 네 그루에 각각 추운 절 하고는
도로 나왔습니다만 이거야 참 또 결례했습니다 *
* 적설
흰눈도 쌓이다보면 그 속이 캄캄하다
흰눈도 무너질 땐 그 속이 캄캄하다
문득 노송(老松)이 팔뚝 하나를 주어버린다 *
* 타인
사람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일 중에서
더욱 이름 없이 사는 일 중에서
아주 조그만 풀잎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참으로 오는 바람, 가는 바람에
조용히 나부끼고자 *
* 우체부는 더 빨리 걷지 않는다
우체부가 지나가니까 들국이 소담하니 핀다
개똥지바퀴가 우는가 하면
어느 담 밑에 늦은 과꽃은 세 번을 벨을 가장해 울기도 한다
저 우체부 아저씨 조금만 빨리 걸으시면 안 되나
늘 그 걸음이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항시 그 걸음이다
아예 자전거는 옆구리에 모시고 다니신다
염소에게 글을 가르치시나
담배 한 대 더 태우고야 엉덩이를 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나도 기다림이 된지 오래다
오늘은 유난히 행낭이 불룩하시다
하, 새끼 기러기 몇 마리 목을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걸음이 더 빨라지지 않는다
그 걸음으로 저기 저 달까지 무난히 갈 것을 내 믿는다 *
* 하나님 놀다 가세요
하나님 거기서 화 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2005
*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연두가 눈을 콕콕 찌르는
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는 이 들판에 와서
무어 할 거 없나 하고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하는 것이어서
옳다, 나는 누가 말목에 매어 놓고 간 염소를
줄을 있는대로 풀어주다가
아예 모가지를 벗겨주었다네
염소 가네
어디로인가 가네
나는 모르네
어디서 음메에가 들리네
하늘 언저리가 파랗게 젖어 있는 것으로 봐서
거기서 잠시 울다 간 거 같으네
아 저기저기 뿔 쬐그맣게 달고 가는 흰 구름이 저거 염소 맞을거네
나는 모르네
이 봄, 팔짝 뛰고 뒤로 자빠질 봄이네
정말 모르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염소와 풀밭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 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
*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난, 이때만은 모자를 벗기로 한다
난쟁이와 식탁을 마주할 때만은
난 모자를 식탁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이번 것은 아주 높다란 굴뚝 모양의 모자였다
금방이라도 포오란 연기가 오를 것도 같고
굴뚝새라도 들어와 살 것 같은 그런 모자였다
사실 꼭 이런 모자를 고집하자는 것은 안다
식탁 위에서 모자는 검게 빛났다
오라, 모자는 이렇게 바라보기만 하여도 되는 것이로구나
식사를 마친 우리는
벽난로에 마른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었으며
그리고 식탁을 돌았다
나, 난쟁이가 이렇게 둘이서
문 밖에서 꽥 꽥 하는 거위도 들어오라고 해서 중간에 끼워주고는
나, 거위, 난쟁이 이렇게 셋이서
모자를 돌았다 *
* 바보사막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
*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末端)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가면 된다//
뒤뚱뛰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 꽥 꽥.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영역
산기슭 집을 샀더니 산이 딸려 왔다
산에 오소리 발자국 나있고
쪽제비가 헤집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제비꽃 붓꽃 산나리 피고
멀리 천국에 사는 아기들이 소풍 와서는 똥을 싸고 갔는지
여기 저기 애기똥풀꽃 피고
떡갈나무는 까치부부가 독채를 들었다
풀섶에선 사마귀 둘이 덜컥덜컥 턱을 부딪히며 싸우는데
허 나도 질세라
집 있는 데서 오십 보 백 보는 더 걸어나가서
오줌이라도 누고 오고 그러는 것이다 *
* 단풍
저리 밝은 것인가
저리 환한 것인가
나무들이 지친 몸을 가리고 있는 저것이
저리 고운 것인가
또 어디서는 짐승이 울고 있는가
어느 짐승이 덫에 치인 생채기를 핥고 있는가
저리 뜨거운 것인가 *
* 담에 빗자루 기대며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만이냐
여기 땅집으로 이사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
얼마만이냐
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
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
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
어제 쓸은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
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쓸고 또 쓸고 한다
마당 쓸고 나서
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
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해바라기
해바라기 길 가다가 서 있는 것 보면 나도 우뚝 서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쓰고 벗고 하는 건방진 모자일망정
머리 위로 정중히 들어올려서는
딱히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간단한 목례를 해보이고는
내딴에는 우아하기 그지 없는
원반 던지는 포즈를 취해 보는 것이다
그럴까
해를 먹어 버릴까
해를 먹고 불새를 활활 토해낼까
그래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거겠지
오늘도 해 돌아서 왔다 *
* 희망
앞이 있고 그 앞에 또 앞이라 하는 것 앞에 또 앞이 있다
어느날 길을 가는 달팽이가 느닷없이 제 등에 진 집을
큰 소리나게 벼락치듯 벼락같이 내려놓고 갈 것이라는 데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말하는 앞이라 하는 것에는 분명 무엇이 있긴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전속력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기러기 울음
난 그렇게 듣는다
기러기들이 감나무 위를 날아가니까
기럭기럭 우는구나 하고 듣고
억새밭 위를 날아가니까 억새억새 우는구나 하고 듣고
또 달을 지나가니까 달빛달빛 우는구나 하고 듣는다
오늘 기러기들은 임진강에 떠 있는 임진각 위를 지나
북녘 하늘을 날아가니까 북녘북녘 우는구나
하고 나는 듣는다. *
* 외면(外面)
연잎 위에 개구리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어쩌면 저렇게 꼼짝 않고 있는 개구리 그게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바람 불어 연잎 날리고
급기야는 개구리 첨벙하고 못 속으로 뛰어들 것 같아서
아 못이 한순간에 뒤집어질 것 같아서
가부좌란 저런 동작 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연잎 위에 개구리 애써 외면하며
하늘 본다 흰구름아 어디 가느냐. *
* 종달새야 솟구쳐올라라
종달새가 하늘로 까마득히 솟구쳐오른다
또 한 마리가 솟구쳐오른다
글쎄 하늘의 무엇을 보았는지
하늘 저 속의 은밀한 무엇을 보았는지
분홍을 보았는지
하늘 한복판에 달랑달랑 매달린 열쇠를 보았는지
이내 구름 아래 세상으로 나와서
서로가 몸을 만진다
뺨을 대며 재잘댄다
이빨을 깡그리 보이며 재잘댄다
등에 올라 탄다. *
* 은사시나무
바람이 불면서 은사시나무가
일제히 잎사귀를 뒤집어 팔랑이는데
이때야말로 은사시나무가 은사시나무일 때이다
은사시나무는 배면이 은빛인 잎사귀를 뒤집어
은빛을 팔랑이며 은사시나무임을 보여준다
바람이 불면 옳거니 이 때를 놓칠세라
굳이 잎사귀를 뒤집어 보여준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파문(波紋)
연잎 위의 이슬이
이웃 마실 가듯 한가로이 물 속으로 굴러 내리지만
여기 평화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슬 한 개 굴러내리면서
아, 수면에 고요히 눈을 뜬 동그라미가 연못을 꽉 차게
돌아나가더니만
이 안에 들어와 잠을 자던 하늘이며 나무며 산이
건곤일척(乾坤一擲) 일거에 일어서서 그 커다란 몸을 추스른다
새들, 도도히 날아간다. *
* 신현정시집[자전거 도둑]-애지
* 달팽이 가다
조그만 집 한 채 구해서
벚꽃 떨어진 마른 땅을
살살 비질하며
길 한 줄 내어 가고자
달팽이처럼 전속력으로 *
* 신현정(申鉉正) 시인
-서울 사람 (1948~2009)
-1974년 [월간문학]에 시 [그믐밤의 수] 당선. 2003년 서라벌 문학상, 2004년 한국시문학상 수상
-시집 [염소와 풀밭] [자전거 도둑].....
신현정 시인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월간문학예 시부문 당선.『그믐밤의 수』
1983년 시집 『대립』민족문화사
2003년 『염소와 풀밭』문학수첩
2005년『자전거 도둑 』애지
2004년 제4회 한국시문학상 수상
2008년 『바보사막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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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氷點 / 신현정
첫, 겨울
냇강을 오르내리며 살던 붕어가 세상이 어디인가 하고
아주 쬐끔 입질해 물을 열어보았던 것인데
그만 닫는 걸 잊고 가버린 거기에서 부터
온 천지가 물 얼다
하산 下山 / 신현정
산에 오를 때 지나친 벼랑을
내려오면서 보게 된다
까마득히 내려다뵈는 벼랑 어디쯤
파란 솔 한 그루 몸을 틀었다
알겠다
그 아래부터는 죄다 세상이다
눈사람은 눈을 먹고 산다 / 신현정
눈사람이 섰다
눈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아마 눈을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내리는 눈을 먹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눈이 그만 내리고 눈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눈사람은 제 몸뚱이를 먹고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럴지 모른다
긴긴 겨울은 그렇게 오고 갔으며 그리고 봄이 왔다
도깨비바늘 / 신현정
한낮, 외진 길가 풀섶에
바람부는 대로 흔들리며
그림자도 없이 서 있는 도깨비바늘에는
도깨비가 살면서
이제나 저제나 언제나 세상에 나가볼까 하고는
거길 지나치는 하 세월의 것들에게
무심만 옷이나 한 벌 지어 입으라고
바늘을 꽂고 있으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