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에 대한 시네포엠
사람들은 풍경을 바라본다. 그런데 아마 풍경도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들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것에다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 부여의 이면에는 풍경에도 사람처럼 감정과 정서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한다. 그렇다. 사람이 풍경을 보듯이 풍경 역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풍경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듯이 풍경 또한 사람들을 보고 어떤 정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가와세 나오미의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에서는 풍경도 주인공이 되고 있다. 배우들처럼 말은 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감정을 표현한다. 그것은 곧 바다 위를 내닫는 파도가 되기도 하고, 몇 백 년 된 나무 이파리를 요동하게 하는 바람이 되기도 한다.
가와세 나오미는 어려운 경제 환경 속에서도 가족의 연대감으로 세파를 헤쳐 나가는 가족의 힘 있는 풍경을 그린 첫 번째 장편영화 <수자쿠>(1997)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최연소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했다. 그 이후에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호타루>(2000), <벚꽃편지>(2002), <사라소주>(2003), <출산>(2006)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주목을 받았다. 2007년에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인 <너를 보내는 숲>을 통해 그녀는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형식적 독창성, 그리고 카메라에 포착된 사물과 풍경은 인물의 감정과 정서에 대한 시적 상징과 은유를 나타내는 시네포엠의 영상미학이라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역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정된 작품으로, 시네포엠의 영상미학이 절정에 이를 만큼 시적 상징과 은유가 번뜩이는 작품이다.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는 웰 메이드 플레이의 대중적 영화가 아니다. 작품을 꿰뚫는 논리적 인과율의 사건으로 중첩된 중심 줄거리도 없다. 여느 영화들처럼 작중 인물들 역시 일상을 영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 곧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들과 그곳의 풍경은 혼연일체, 하나가 되어 뒤엉킨다. 그들을 둘러싼 바다와 산, 숲과 나무들은 사람들처럼 숨을 쉬고 감정과 정서를 표현한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씨네포엠’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영상으로 쓴 한 편의 시이고 인물의 감정과 정서의 이완에 대한 리듬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적 명상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8월 대보름 축제가 절정에 이른 아마미 해변의 마을이다. 파도가 포효하는 바다의 모습을 한동안 보여주는데, 이는 앞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격정적인 내면의 풍경을 상징하고 있다. 파도가 잠자고 난 뒤에 해변 기슭에 남자의 시체 한 구가 떠오르고,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술렁이는 마을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인 소년 ‘카이토’와 소녀 ‘쿄코’가 서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둘 다 상처와 아픔을 지니고 있다. 카이토의 어머니인 ‘미사키’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난 뒤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카이토는 그러한 행위가 음란하다며 못마땅해 하고 있다. 카이토는 교우관계가 소원하고 마을의 풍경과 인간관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도시에서 밴드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가로 묘사되고 있는데, 카이토 역시 그러한 아버지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아 섬약하고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청소년이다.
이에 비해 소녀인 쿄코는 매사 적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자연친화적이다. 쿄코의 어머니인 ‘이사’는 말기암으로 시한부 생명 선고를 받고 병원에서의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 상태이다. 두 소년과 소녀의 사고와 행위는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쿄코는 바다와 자신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수영을 즐기며 카이토에게 적극적이다. 그러나 카이토는 바다를 두려워하며 과묵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소극적이다. 소년과 소녀의 이러한 사고와 행위는 다분히 상징적인 은유를 드러낸다. 쿄코는 자연과 자신이 한 몸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어머니처럼 자연도 사람처럼 감정과 정서를 지니고 있다는 원시적인 야성이 바탕이 된 물활론적 사고에 젖어 있다. 그러나 카이토는 도시적 감수성으로 섬약하고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감동적인 시퀀스는 쿄코 어머니가 생을 마감하는 장면이다. 그녀와의 마지막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주위 사람들이 부르는 ‘이큔 나카나’의 노래와 ‘8월의 춤’이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행복하고 안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서슴없이 받아들인다. 어머니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쿄코의 감동적인 모습은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혼연일체가 된 하나라는 내세관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카이토의 모습은 선병적질적인 히스테리에 가깝다. 어머니의 사랑을 음란하다고 소리치며 세간을 부수며 뛰쳐나가는 그의 모습은 자연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밖으로만 떠도는 이방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그러나 쿄코와의 섹스를 통해 카이토는 도시적 문명을 떨쳐 버리고 자연과 한 몸이 되며 환희에 젖어든다. 둘의 섹스는 남녀의 육체적 교접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자연과 인간은 둘 다 감정과 정서를 지닌 하나의 생명체라는 초월적 상태를 은유한다.
가와세 나오미의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초월적 명상에 다름 아니며, 자연과 인간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물활론적 주제를 상징적 이미지로 그려낸 한 폭의 그림에 가깝다. 인간은 자연을 바라볼 때 의미를 부여하면 자연도 감정과 정서가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럴 때 자연 역시 인간을 바라보며 감정과 정서를 사람처럼 드러낸다는 동양적 사유를 나타낸 아름다운 씨네 포엠이다. 소년과 소녀가 있는 해안으로 가 보라. 그러면 우리는 그곳에서 자연도 감정과 정서를 지닌 사람이 된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것이다.
풍경과 사람의 정서적 유대감
이 영화는 일종의 성장 영화이다. 섬약하고 소극적인 카이토가 본능적이고 적극적인 쿄코의 내면 풍경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자연 풍경의 상징적 은유를 통해 써 내려간 한 편의 감각적인 수필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바다는 성적인 이미지를 상징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바다는 우리 정신세계 영역에서 무의식이나 다름이 없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에머지는 ‘리비도’, 죽 성적 에너지이다.
코코는 뭍에서의 걱정거리(어머니의 병)나 시름이 있을 때마다 바다로 뛰어들어 그것과 혼연일체, 한 몸이 되는 경험을 자주 접한다. 그녀는 바다 속을 유영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그녀가 바다 속에서 유영하는 것은 곧 성적인 접촉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의 바다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그녀에게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것이다. 반면에 카이토에게는 바다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쿄코의 몸과 바다는 혼연일체, 그녀의 몸이 곧 바다이고 바다가 곧 그녀의 몸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이토는 바다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낯선 풍경이 되고 있다. 결국 쿄코와 카이토는 성교를 하게 된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남녀의 성적 접촉의 차원을 뛰어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카이토는 쿄코와의 성교를 통해 자연의 일부가 되고, 낯설게 바라보기만 하던 풍경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는 쿄코는 여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그러한 성교를 통해 카이토는 풍경을 감정과 정서가 있는 하나의 인격체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풍경은 등장인물 못지 않은 존재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이 풍경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이면, 풍경 역시 사람을 그 내면 속으로 받아들인다. 사람과 풍경의 연대감, 사람과 풍경의 혼연일체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맺음이 될 것이다. 인간의 근원은 결국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이곳이 왔으며, 돌아갈 때 역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가와세 나오미의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는 물활론적인 자연의 풍경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인간세계의 비극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시작이 되었고, 인간은 본디 자신의 일부였던 자연을 자신에게서 떼어내면서부터 악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지금 이곳’의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선 다시 자연을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여만 한다. 우리가 곧 자연이 되고, 자연이 곧 우리의 일부가 되는 융합의 경지가 우리의 유토피아가 되어야 한다. 가와세 나오미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이런 공존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을 것이다. 8월 대보름 축제가 한창인 아마미 해변 마을처럼 우리의 내면도 영화 속의 바다가 출렁이게 해야 한다. 재미만을 추구하는 상업적 서사의 영화가 넘쳐나는 요즈음, 시적 상징과 은유가 번뜩이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네포엠이 우리 앞에 당도한 것은 어쩌면 우리의 건조한 일상에 퍼붓는 축복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기꺼이 주면 자연도 어느새 우리 가까이 다가와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성난 파도와 흔들리는 숲의 움직임으로 속삭이듯 외쳐대고 있다. 문득 소년과 소녀, 그리고 바다가 그리워진다.
첫댓글 어제 글나라 식구들이랑 통도사 근처에 있는 공간에 갔었죠. 거기서 비가 약간 오는듯한 풍경에 내놓인 한옥을 보았어요. 숲과 한옥이 모두 비에 촉촉히 젖어서 비오는 풍경을 오롯이 같이 느끼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 한옥은 참 풍경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의 현실은 자연을 자꾸 바꾸어서 집을 짓고 건물을 세우고 하는데 참 아쉽습니다.
나의 아이들에게 물려준 자연이 걱정입니다.
이 영화 한번 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