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대신 ‘곳곳말’을
곽 흥 렬
전라도 사투리 경연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전주한옥마을에서다. 전라도 말, 얼마나 찰지고 구수하고 정겨운가. 소식을 듣는 순간, 수백 리 먼 거리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참견해 보고픈 마음이 충동질한다.
한데 무슨 억하심정일까. ‘사투리’라는 말을 접하자마자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한동안 가라앉아 있던 알레르기가 다시 또 도진다. 이것을 나만의 지나친 거부반응이라고 몰아세운다면 좀은 억울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답답한 심경을 하소하기 위해 나는 내 논리의 응원군으로 ‘어감’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어감, 이 단어는 우리말 사전에 “말소리 또는 어투의 차이에 따른 독특한 느낌과 맛”으로 뜻풀이가 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종잡을 수가 없다 보니, 서로 엇비슷한 말일지라도 어감의 차이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이면 나쁜 어감을 지닌 표현보다는 좋은 어감을 지닌 표현이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이러한 심리 기제는 선입견이 끼어들게 만드는 단초로 작용한다.
어감이 선입견의 개입을 부르는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일 터이다. 세상을 살다 보니 별의별 이름들을 만나게 된다. 김치국이나 현상범, 피칠갑, 이병신 등속은 그나마 덜 괴이한 이름에 속한다. 박아라니 임신중이니 방귀녀니 하는 이름들은 아예 듣기조차 민망스럽다. 같은 인물일지라도 이름이 고상하면 괜히 사람까지 돋보이지만, 이름이 저속하면 어쩐지 사람마저 잡되게 느껴진다. 어디 사람 이름뿐일까. 식물의 이름도 그러하긴 마찬가지다. 며느리밑씻개, 개불알꽃, 젖나무, 자지쓴풀…….
이름만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다반으로 사용하는 숫자 가운데도 어감이 나쁜 말들이 더러 있다. 다들 이런 표현을 꺼리다 보니 다방이며 음식점 같은 곳에서 18번 테이블에 앉은 고객을 두고 ‘십팔 번 손님’이라 하지 않고 ‘열여덟 번 손님’으로 부른다거나, 차를 타고 가다 내비게이션을 켜면 10번 도로에 들어섰을 때 ‘십번 도로’ 대신 ‘시번 도로’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온다. 일부러 문법에 맞는 표현을 쓰지 않고 비문법적 표현으로 바꿔서 말하는 이유가 발음상 거북스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임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이다.
‘사투리’ 또한 이 같은 유의 하나인가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어감이 좋지 않아서이다. 당연히 사투리에서의 ‘사’자가 죽을 ‘사’자와는 사돈의 팔촌 관계도 아니겠지만, 자꾸 죽을 ‘사’자가 연상되어 오는 건 왜일까.
한국인들은 대다수 ‘사’자를 꺼린다. 고층 건물에서 4층은 영어 대문자 F를 붙이거나, 아니면 아예 건너뛰고 5층으로 표기한다. 병원이나 장례식장에는 4호실이 없다. 군대도 4사단을 두지 않는다. 초현대 시설인 인천국제공항에서마저 4번과 44번 탑승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 민족에게 평소 ‘사’자 기피 심리가 얼마나 강하게 뿌리박혀 있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 아닌가.
‘사투리’에서 ‘사’자만이 아니고 ‘투’자도 그렇다. 어쩐지 고상하다거나 품위를 지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투’자가 들어간 낱말들은 대다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투정이며 투기妬忌, 결투 따위의 명사는 물론이고 투덜대다, 투미하다, 투깔스럽다 같은 동사와 형용사도 어감이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다가 아니다. ‘-투성이’라는 접미사는 가히 부정적인 어감의 압권이다.
우리말 사전에 따르면 ‘투’에는 두 가지 정도의 뜻이 담겨 있음을 명시해 놓았다. 곧 “어떤 일을 하는 방식이나 솜씨”로 풀이되는가 하면, “버릇으로 굳어진 일정한 방식의 틀”이라는 의미도 지녔다는 것이다.
전자의 해석은 괄호 밖에 두고, 후자의 해석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자. 거기 사용된 어휘들 가운데 ‘버릇’이라는 순우리말 역시 어감이 그리 긍정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이 단어는 “여러 번 되풀이함으로써 저절로 익힌 굳어진 행동이나 성질”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 ‘성질’ 또한 ‘성질내다’ ‘성질부리다’ ‘성질머리’ 등으로 변용되거나 파생어를 낳는 것으로 보아 말맛이 나쁘기는 매일반이다. 아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사투’ 자체가 마치 죽기를 각오하고 처절히 싸운다는 의미를 지닌 ‘결사 투쟁’의 줄임말 같아 거부감이 들게끔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 그물망 엮듯 촘촘히 따지고 들어가면 최초의 ‘사투리’가 보여주는 부정적인 느낌은 저절로 굳어진다. 결국 이 같은 이유로 해서 ‘사투리’라는 낱말이 가지고 있는 어감도 자연스레 달갑지 못하게 인식되는 것이리라.
작가는 기존 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국회의원이 새 법을 만들듯 작가가 새로운 문장, 새로운 낱말을 고안해내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고유권한일 터이다. 이는 어쩌면 작가로서의 소명일지도 모르겠다. 그 이론에 기대어, 나는 작가로서 ‘사투리’ 대신 ‘곳곳말’이란 새 단어를 만들어 우리 사는 세상에 퍼뜨리고 싶은 것이다.
‘곳곳말’의 논리적 근거는 여기서 구해진다. 먼저 어느 한 군데도 빠짐없는 모든 곳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출발하여, 이를 줄인 말인 ‘곡곡’을 찾아낸다. 그다음 ‘곡곡’의 고유어인 ‘곳곳’으로 바꾼다. 다시 그다음 ‘곳곳’에다 역시 고유어인 ‘말’을 합성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밟아서 탄생시킨 신조어가 바로 ‘곳곳말’이다. ‘사투리’가 낡고 부정적인 어감을 지녔다면 ‘곳곳말’은 신선하면서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앞으로는 ‘사투리’보다는 ‘곳곳말’이 언중의 호응을 얻어 널리 쓰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이 각기 고유한 지방어를 아끼고 사랑하는 한 방편이 될 것임을 굳게굳게 믿는다.
- 오메이트 시니어 2025년 2월 16일
첫댓글
단어는 어느 날 갑자기
어느 한 사람이 쓰는 것은 아니지요.
오랜 세월을 여러 사람에게 사용되어서
낱말로 굳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서울의 보통사람들이 쓰는 말을 표준어로 사용하지만,
요즘은 다양한 문화를 존중합니다.
가끔 문학에서나, 지방 분들의 다양한 언어가
재미도 있고 호기심도 갑니다.
교과서에서는 물론 표준어를 사용하지만,
토속어 속에는 그 지방 문화의 특유한 정서도 있지요.
사투리라고 해도, 아무런 부담감이 없습니다.
사투리에는 그 지방의 특유한 정감도 있습니다.
앞으로 자꾸만 사용하면, 곳곳말도 사용되겠지요.
글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말 가운데 예전부터 자주 써 오던 말일지라도 언중의 힘에 의해 새로운 말로 대체되어 쓰이다가 완전히 굳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를테면 지난날에는 취미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두고 '서클'이라고 했지요. 이건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군가 '동아리'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서 시나브로 언중의 호응을 얻어 마침내 '서클'은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이제는 동아리로 바뀌었지요. 신생, 성장, 소멸의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살아 있는 생물 같은 것이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낱말뿐만이 아닙니다. '폐경'이란 단어 역시 어감이 나쁜 까닭에 누군가 '완경'을 처음 사용하였고, 차츰 언중의 호응을 얻어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폐경' 대신 '완경'을 사용하고 있지요.
'사투리'도 물론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어감 때문에 언어를 다루는 작가들 사이에선 '방언'이 많이 사용됩니다만, '방언'은 한자어이기 때문에 어쩐지 사용이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곳곳말'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 단어가 언중의 호응을 받아서 널리 쓰였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곽흥렬 저는 완경을 처음 듣고 사투리가 정겹게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