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사도 25,13-21; 요한 21,15-19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성 필립보네리 사제 기념일; 2023.5.26.;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 대화의 소재는 베드로의 배반이었지만, 사실은 부실했던 최초의 신앙고백을 보완하여 제대로 된 신앙을 고백받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면하기 위해 그 자리를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독서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오로가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면서 로마법에 의한 정식 재판을 황제에게 항소함으로써 바야흐로 복음선포의 무대가 제국의 변방에서부터 제국의 수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저지른 죄란 그가 스승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가셔서 재판을 받으시는 동안에 그 자리를 얼쩡거리다가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어 추궁을 당하자 얼떨결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배신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고, 바오로가 고소를 당한 죄목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자렛 예수가 살아났다고 주장한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예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았고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한복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심판은 신앙에 관한 사랑의 심판이요 재판은 부활에 관한 종교사항 재판입니다. 심판이든 재판이든 무척 엄중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분위기는 둘 다 매우 싱겁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심판은 어차피 죄를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해 주기 위한 심판이고, 바오로의 재판도 로마인들은 하도 많은 신들을 믿고 있고 그 신들이 죄다 부활과 같은 하늘의 사정이나 내세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지라 무죄로 판결날 것이 뻔해서 그렇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발현하셔서 물으셨던 이 질문은 우리가 지녀야 할 부활 신앙의 은총스러운 효과를 알려줍니다. 그분은 죄를 따져서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없애고 용서하기 위해서 발현하십니다. 정작 예수님께서 가지신 관심의 초점은 베드로의 배신죄가 아니었고, 베드로가 당신의 양 떼를 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시고 이를 위해 체면을 세워 주시려고 베드로의 입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다른 제자들이 모두 듣는 앞에서 하게 하시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래도 다른 제자들보다는 수제자가 더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시는, 그래서 죄책감을 덜어주고 리더십을 강화시켜주려는 의도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복음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도 베드로처럼 수시로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책임을 잊어버리고 결과적으로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입니다.
또한 바오로의 목표는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함으로써 복음선포의 효과는 극대화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로마에 압송되기 위해서 로마 시민권을 발동했던 것이었으며, 어차피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부활 신앙 문제를 꺼낸 이유는 바리사이들을 끌어 들여 사두가이들을 제쳐놓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사실 바오로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사는 인생이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니던 시절의 자신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고 대단한 영적 진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도 바오로이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오늘의 말씀에서,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은 수제자로 임명되었던 그의 권위와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고, 로마관헌들과 황제는 본의 아니게 로마의 재판정에서 부활 신앙을 공식재판을 통해 공표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쾌하리만치 시원스럽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역전의 상황이 오늘 말씀의 공통 코드입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8주년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지구 생태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 또한 수백 년 전에 일어났던 무신론 사태를 역전시켜 하느님을 찬미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모두가 가톨릭 신자였던 중세 유럽에서 무신론이 퍼지게 된 계기는 이러했습니다. 천동설을 믿고 있던 중세 유럽에서 폴란드의 사제이자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가 육안 관찰과 수리 계산을 통해 지동설을 발견했고 훗날 갈릴레오가 이를 천체망원경으로 확인함으로써 천동설이 오류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갈릴레오를 종교재판으로 입을 막아보려던 교회의 처사는 문제가 있었으니, 과학적 연구성과를 종교문제를 다루는 법정에서 다룬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이 억압적인 종교재판에서 마지못해 지동설을 부인하고 천동설을 시인하고 재판정을 빠져나오면서, 중얼거렸다는 한 마디가 더 무게있게 역사에 남았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 말과 함께 천동설을 지지해 온 가톨릭교회의 권위도 함께 흔들리면서 교회가 선포해 온 하느님 신앙도 흔들리는 바람에 무신론이 퍼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반포한 이 회칙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지구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알면 알수록 태초에 하느님께서 조성하신 지구 별의 생태 환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과학적이었는지 알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생태 환경과 생명을 귀하게 지키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임을 깨닫게 해 줌으로써 하느님 신앙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대역전극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땅과 물과 공기와 햇빛, 이 네 과목에서 인류 문명은 새롭게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류의 길잡이로서 앞장서야 합니다. 우선, 땅을 아름답게 보존하려면, 하느님께 온유한 이들의 새로운 땅을 이룩해야 합니다. 또한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으면, 생명의 물이신 성령부터 받아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공기도 맑게 하고 싶으면, 혼탁해진 무신론 사조를 성령의 바람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햇빛을 받아서 광합성 작용으로 산소를 내뿜는 식물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적으로 향기로운 삶을 살자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유하는 행복 십계명을 소개하고 이 강론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