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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 해석 해설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 해석 해설입니다.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상징적, 자기 응시적
▶제재 : 바람
▶주제 :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 대한 성찰
▶특징
소재의 상징적 의미를 구현함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어투로 불안감과 내적 갈등을 표현함
구성
1∼2연: 바람으로 인해 괴로움을 인식함.
3∼4연: 괴로움의 원인을 탐색함.
5∼6연: 반석과 언덕 위에 서 있는 화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에는 자신이 느끼는 괴로움에 대해 성찰하는 화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화자는 출발점과 종점을 알 수 없이 흘러가는 바람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 생각하는데, 자신의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4연에서 시대를 언급한 것을 통해 이 괴로움의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5, 6연에서 화자는 바람이 불고 강물이 흐르는 중에 반석과 언덕에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소극적으로 현실에 대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있다.
<추가>
<바람이 불어>는 윤동주의 유작을 모아 출간한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초판본에 수록된 시이다.
전체가 6연 11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적 화자가 자신이 처한 괴로움의 이유를 찾으려고
고뇌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의 성향을 고려할 때
나라를 잃은 식민지 백성이라는 슬픈 현실에 대한 인식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시적화자의 자아성찰과 정체된 삶에 대한 번민과 고뇌이다. 1, 2연에서는 화자는 바람을 맞으며 까닭 모를 괴로움에 사로잡혀 괴로움의 이유를 찾고자 내면으로 향한다. 4연에서 화자는 괴로움의 근거가 실연도, 시대적 상황에 대한 슬픔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5, 6연에서 바람이 불고 강물은 자꾸 흐르는데 화자는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모습이다.
이를 통해 괴로움의 근거가 정체되어 있는 자아에 대한 고뇌임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자기 응시를 통해 자신의 무력감과 괴로움을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부당한 시대 현실 앞에서 방관자로 남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시인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때문에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는 강한 부정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대를 아프게 슬퍼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5, 6연에도 동일한 구조를 취하여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바람과 강물이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대상으로 제시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반석과 언덕이 목표 없이 정체된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표현된다.
윤동주의 시에서 보통 부정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바람은 이시에서는 화자가 괴로움의 이유를 찾는 계기로 등장한다.
윤동주의 시에는 조국을 잃은 민족의 설움과 현실을 이겨 내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그의 시 전체에 담겨져 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이 자아 성찰과 부끄러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역사 앞에 방관자로 서 있는 자신을 자책하고 반성하는 부끄러움의 미학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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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에 나온 윤동주의 어록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한국 문학사에 큰 기여를 한 문인이다.
사실상 김소월, 한용운 등과 함께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그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는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데다 교과 과정에서도 배우기 때문에 한국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윤동주하면 주로 시인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만, 상술했듯 윤동주는 엄연히 독립운동가였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 그리고 삶의 고뇌에 대한 시를 많이 썼고,
결국 체포된 와중에도 2010년에 세상에 공개된 윤동주 재판 관련 문서를 살펴보면 놀라운 점이 많다.
윤동주는 당시 악명 높았던 특고 앞에서도,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내성적인 이미지의 시인은 사라지고, 형사 앞에서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를 마다하지 않은
독립투사의 이미지가 선명히 다가온다. 윤동주의 판결문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인 운동 방침을 논의했다는 사실도 적시돼 있다.
윤동주 본인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일본 유학으로 인해 민족의 걸어가야 하는 길과 다른 길을 걷는 것 아닌가 싶은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낸 것으로도 알려져있지만,
정작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많은 문인들이 절필 혹은 변절하는 세태 속에,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독립운동을 하다 죽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민족시인으로 추앙받는다.
2. 생애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룽징시 즈신진 밍둥촌)의
유복한 집안에서 개신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위의 손윗 누이 둘이 연이어 요절한 후에 태어난 아이라 집안의 기대가 남달랐다고 한다.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이다.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
윤동주의 출생지인 명동촌[23]은 그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마을의 정신적 리더이자 윤동주의 외숙부인 김약연 목사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인물로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으로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24]
1925년 4월 송몽규와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1931년 3월 졸업한 후 송몽규와 함께 대랍자(大拉子)에 위치한 중국인 소학교인 화룡현립제일소학교 6학년(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 수학했다.
이 때의 경험은 그의 시 <별 헤는 밤>의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이란 구절로 나타난다.
1932년 3월 화룡현립제일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캐나다 장로회에서 설립한 미션 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중화민국 학제에 따른 4년제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은진중학교는 일본제국의 5년제 구제중학교/고등보통학교 대비
수학연한이 1년 짧았기 때문에, 졸업 후 일본 내지나 조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전문학교입학검정시험(전검시험)이라는 검정고시를 별도로 치러야만 했다.
때문에 진학을 희망한 윤동주는 1935년 8월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졸업까지 한 학기만을 남겨둔 상태로 은진중학교를 중퇴하고, 친구 문익환을 따라서 평양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의 편입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시험 결과 4학년 수준의 학력을 인정받는 데 실패한 윤동주는 1935년 9월 숭실중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렇게 멀리 유학와서 어렵게 들어간 숭실중학교는 1935년 연말부터 신사참배 문제로 당국과 갈등을 겪다가
1936년 1월 20일부로 총독부 학무국장의 명령으로 교장이 해임되고 동맹휴교가 이어지면서 공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평양으로 유학와있던 윤동주는 불과 반 년만에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4학년 수료)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숭실중학교는 1936년 3월 5일 숭실전문학교 교수 정두현을 교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계속 갈등을 겪다 1938년 3월 19일 자진 폐교하게 된다.
문익환과 함께 평양에서 돌아온 윤동주는 1936년 4월 간도의 유일한 일본식 5년제 중학교였던
용정 광명중학교(광명학원 중학부)에 다시금 4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25년 일본인 자본가에게 인수된 광명중학교는 조선총독부 지정한 교과과정을 따르고,
일본제국 문부성과 외무성에서 인가를 받은 해외지정학교였으며, 배속/예비역 일본군 장교들을 다수 영입해 일본육군사관학교와 더불어 특히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진학을 학교에서 권유했으며
윤동주와 문익환 1년 선배인 정일권을 비롯해서 1년 후배 기수는 박임항, 이주일(군인), 김동하(군인), 최창륜, 방원철 등
만주국육군군관학교 1기의 조선인 입학생 13명 중에서 12명을 차지했을 정도로 사관학교 입시 명문교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다.
사촌 송몽규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온 윤동주는
조선인의 철저한 황국신민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에 입학한 것이었다.
함께 광명중에 편입했던 문익환은 이를 두고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회고했다.
1937년 12월 광명중학교 5학년을 마친 윤동주는 대성중을 졸업한 송몽규와 함께 구제전문학교 입시를 준비했다.
집안에서 경성의전이나 세브란스의전 같은 의대나 경성법전 진학을 강력하게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문과를 고집한 윤동주는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라는 부친과
매일 이 문제를 두고 충돌해서 집에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윤동주의 고집에 손을 들면서 윤동주는 문과 지원을 관철하게 된다.
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와 뜻을 같이 했으나, 부자간의 싸움이 너무 심해지자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섰다고 한다.
결국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다.
국학 연구의 산실이었던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는 최현배에게서 조선어를, 손진태에게 역사를,
그리고 이양하에게 영문학을 배웠다. 그의 오촌 당숙인 윤영춘은 윤동주가 최현배를 깊이 존경했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연희전문 입학 후 조선어로 정제된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회의 문예지인 <문우> 발행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은 윤동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으며, 이때 그의 많은 명시가 쓰였다.
중일전쟁의 격화로 인한 전시 수학연한 단축에 관한 임시조치에 따라 예정보다 3개월 빠른 1941년 12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공부를 더 하는 것을 선택했다.
조선의 유일한 구제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은 예과를 두고 신입생을 받았기 때문에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바로 학부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내지로 유학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봄 일본으로 가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의 선과생 선발시험에 응시했으나
사촌 송몽규가 합격한 것과 달리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에 위치한 미션스쿨인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생으로 입학했다.
릿쿄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영문학연습]과 [동양철학사]를 이수한 윤동주는
1942년 여름에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선과생 선발시험에 재차 응시했으나 불합격했다.
이후 그는 도시샤대학 문학부(영문과 선과생)로 편입해 교토로 옮겼다.
릿쿄대학을 다니다 갑자기 도시샤대학으로 옮긴 것은
릿쿄대학의 교련 수업에서 윤동주가 고초를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윤동주와 중학교 동기인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에 따르면
도쿄의 대학 재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학도출진)이 강제되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하며,
김형석 교수도 윤동주와 함께 교토로 옮겨서 공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요시찰인' 딱지가 붙어 상시 감시 대상이었던 송몽규가 있는 교토로 간 것은
윤동주 스스로 일제 공안당국의 감시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은 일이었다.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재경도(京都,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되어
시모카모 경찰서로 압송되자, 그로부터 사흘 뒤 윤동주 자신도 고희욱과 함께
고오로기 사다오(興梠定) 형사에게 체포되어 취조를 받고 12월에 송몽규, 고희욱과 함께 검찰국으로 넘겨졌다가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2형사부에서 2년형(미결 구류일수 산입)을 선고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일본제국 경찰의 요시찰인이었던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제3고등학교 학생 고희욱 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하면서 특히 "징병제 실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태평양전쟁 강화협상이 진행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서 세계의 관심을 끌고 조선 독립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파악한 특고경 측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한 것이다.
약 1년 7개월 동안 수감 생활에서 건강이 악화된 윤동주는 광복을 불과 반 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뇌일혈로 인해 향년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요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