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교육협회 노동자 교육위원으로 '강사훈련과정'을 맡아 1년여 일하던 선희씨는 1994년 구로로 돌아갔다. 교육이나 연구활동보다는 대중운동을 하고 싶었다. 구로공단에서 현장활동 하면서 관계를 맺게 된 구로청년회에서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청년…, 이라고 하지만 청년이 다 같지 않을 텐데 청년이라는 이유 하나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선희씨는 계급구분보다는 청년만의 순수성과 역동성을 더 중시했다. 선희씨는 청년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켜 '반미통일전선'으로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친절한 선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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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 |
구로청년회의 사업으로 역사교실, 청년교실, 취미 위주의 각종 강좌를 개설했는데, 이때 선희씨는 복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전공이 역사교육이니까 활동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선배 동료들과 의논을 했는데 운동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 복학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어이없게도, 선희씨에게 밤놔라 대추놔라 했던 그이들은 다들 졸업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다 졸업을 했더라구요?”
구로청년회의 조직적 결정(?)으로 선희씨는 운동에 전념키로 했다. 밤새워 이어지는 회의, 끝까지 남아 정리하고, 투쟁 현장이나 선전전에서 맨 앞에서 얘기하고 싸우고, 힘들어 하는 회원이 있으면 얘기 들어주고 다독이고. 이게 다 선희씨 몫이었다. 선희씨가 구로청년회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선희씨는 갓 결혼을 한 새댁이었고 곧 아기도 낳았다. 청년회 활동시간이 대체로 직장에서 퇴근한 저녁시간부터라 아줌마들은 현실적으로 활동이 불가능한데도 선희씨는 남성 활동가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사업을 벌여 나갔다. 청년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신념으로. 정열적인 선희씨.
경제적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청년들을 또래가 비슷하다는 것만 갖고 묶어낸다는 게 선희씨들이 추구하는 계급운동과 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들어봤음직한 '퉁'에도 선희씨는 꿋꿋하다. "사업장 사정으로 노조를 만들기 어려운 청년 노동자, 노조의 틀로 묶이기 어려운 청년 노동자들이 꽤 있어요." 청년운동도 좋지만 통일운동에 너무 매달린 게 아닐까. 선희씨는 고개를 젓는다. "구로청년회는 그러지 않았어요. 노조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청년회에서 해마다 노동자대회도 참가하고….” 일부 청년운동단체에서는 진보정당의 앞날을 가로막아 왔던 ‘비판적 지지’라는 전술을 2003년 대통령선거에서도 구사하자고 주장했다. 선희씨가 손사래를 친다. “우리가 얼마나 싸웠다고!”
짧은 지식으로 청년운동을 비판하는 온갖 질문을 갖다 대도 선희씨는 싱긋 웃으며 “그런 얘기들도 있죠”라며 이윽고 기자를 설득하려 한다. 하면서 설득하듯이 얘기를 이어나간다. 품성 좋은 선희씨.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약을 올렸다. “요즘 자주파 그룹은 품성마저도!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나 선희씨는 흔들리지 않는다. “어 그래요?”라며 이야기를 다른 데로 돌리는 선희씨. 선희씨는 상처를 들쑤시기보다는 상처를 보듬는 데 익숙하다.
열정과 헌신으로 청년운동에 일로매진 하던 선희씨에게 중요한 직책이 계속 주어졌다. 1996년 구로청년회 부회장, 2000년 구로청년회 회장, 2003년에는 서울청년단체협의회 의장을 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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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노동뉴스 | |
조직이 깨졌다…소련도 무너졌다 광수씨의 조직이 깨졌다. 1992년 대통령선거를 한달 앞두고 계급해방 성두현 대표가 구속됐다. 조직원들은 10여명만 남게 됐다. 대표의 구속도 이유였지만, 소련이 붕괴된 것도 이유였다. 그러나 광수씨는 거짓말 좀 보태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계급해방 하러 소련에도 가야겠군. 사회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스탈린주의가 문제야. 유럽에서 부르조아혁명이 100년에 걸쳐 완성됐는데 그동안 퇴행하는 과정이 여러번 있었지. 사회주의혁명도 마찬가지야….”
광수씨는 서울로 되돌아가서 조직복원에 나서는 한편, 진보정당 건설을 두고 벌어졌던 다양한 논의와 활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1992년 백기완선거운동본부에 참가했던 사회당추진위원회와 민중회의(준)가 통합하여 민중정치연합(민정연)이 결성됐는데. 광수씨네는 민정연의 몇몇 지역지부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민정연 내에서 ‘혁신’을 내걸고 노동운동 외 여성과 환경운동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광수씨네는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강조하며 노선투쟁을 전개했다.
1995년 이 민정연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구 한국노동당)이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진정연)이 결성됐고, 이듬해 총선에서 개혁신당 후보로 나가는 문제 등으로 내분이 있었고, 광수씨네는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창당추진위원회(노진추)를 만들었다.
진보정당 건설과정이 지난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당사자와 마주 앉아 듣고 있으니,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가히 마태복음 1장에 비길 만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민정연 때 어떻게 됐다구요?” 하고 재차 물었더니 우리의 광수씨가 화를 낸다. 진보정당의 역사를 숙지하지도 못한 채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가 한심도 할 것이다. 광수씨의 입이 걸다는 사실은 민주노동당에서 알 만한 사람은 안다. 아래 광수씨 <일문일답>에도 나오지만 세상에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권영길 의원을 덜컥 꼽아버린다.
광수씨는 국민승리21 이후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원탁회의 때 이야기를 하다 기자가 멀뚱한 표정을 짓자 “어떻게 이걸 모를 수 있냐?”며 다시 한번 화를 버럭 냈다. 벽처럼 느껴지나 보다. 하지만 자신이 바꾸어야 할 세상이 무수한 벽들로 둘러쳐져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고는 표정을 푸는 광수씨.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지치기도 했으련만 광수씨는 기죽지 않았다. 광수씨가 가장 염려했던 것은 노동자 대중운동이 움츠려드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1994년 전기협(전국기관사협회) 투쟁, 1995년 한국통신 노조투쟁 등이 일어났고, 광수씨네는 이러한 노동 현장에 개입(?)하는 등 나름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광수씨는 1996년 독재정권 시절에도 겪지 않았던 옥살이를 하게 됐다. 노진추의 강령이 사회주의 선동이라나? 광수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유선희씨 일문일답 |
1. 가장 좋아하는 덕목은? 믿음 - 내가 변함없이 누군가를 끝까지 믿어주는 모습 /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모습,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든든하고 가슴이 벅차다.
2. 남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덕목은? 자상함, 배려, 리더쉽 - 따뜻하게 이끌어주는 사람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3. 여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덕목은? 야무지고 알뜰한 것 - 나약하지 않고 생활력이 있는 건강한 여성의 모습을 좋아한다.
4. 본인의 주된 성격은? 싫고 좋음이 분명하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편 / 반면 조급함과 소심함이 있다.
5.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은? 집단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일 잘한다고 능력을 인정받을 때 / 동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칠 때
6. 본인이 생각하는 불행은? 인간 관계가 형식적이거나 관계가 냉랭할 때
7. 가장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악덕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실수로 잘못을 범했을때 ** 어떤 잘못이라도 본의가 아니거나 반성하는 사람은 언제나 용서가 된다.
8. 가장 싫어하는 악덕은? 시니컬한 것
9.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잘난체를 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10. 가장 좋아하는 일은 ? 어려움에 처한 동지를 도와주는 일 / 동지들의 일시적 행복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일 / 노동자, 농민등 민중속에 들어가 함께 어울릴 때
11.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송경동시인 ( 민중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며 그 아픔과 고민을 생생하게 잘 표현하기에 ) / 이기영시인 ( 연세가 들었음에도 살아있는 열정과 뜨거움의 시 )
12. 가장 좋아하는 산문작가는? 이인휘 (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사색의 내용을 세밀하게 잘 표현하기에 )
13. 가장 좋아하는 영웅은? 영웅의 기준을 잘 모르겠음, 문익환 목사님을 좋아함
14. 가장 좋아하는 여주인공은? 전도연 ( 나는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좋다 )
15. 가장 좋아하는 꽃은? 연보랏빛 국화
16.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연보랏빛 ( 보라색, 자주색 계통 )
17.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새봄, 늦봄등 봄이 들어간 이름
18.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김치콩나물국, 김치떡국, 김치 수제비, 김치전 등
19.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사상과 뜻이 높으면 인품도 높다.
20.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사람을 사랑하자 | | |
선거 때마다 진보정당 지킴이 선희씨는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 되기 이전 당 활동 경험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선희씨에게 학창시절 이후 활동하는 데 있어 가장 영향을 많은 주었던 이는 이번 서울시당 선거에서 사무처장으로 당선된 이상규씨다. 이상규 서울시당 사무처장은 반미통일운동을 하면서도 노동현장을 지향했고, 진보정당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부터 강조를 해 왔다. 이상규 사무처장은 1997년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의 수행비서를 맡기도 하는 등 진작부터 진보정당 활동을 해 왔다.
선희씨 역시 매 선거시기마다 청년회를 비롯한 지역조직과 당을 연결시키는 활동을 해 왔다. 1997년 국민승리21 대통령선거 서울남부지역 선거운동, 2001년 구로을 국회의원 재선거 조직위원, 2002년 6·13 지방선거 구로을 지구당 선거대책본부장 등을 맡았다.
당 사업을 기획하거나 주도적으로 해 오지 않았지만 당을 전혀 모른다고는 할 수 없었다. 2004년 6월 있었던 민주노동당 당직선거에서 선희씨는 최고위원으로 당선됐다. 자주민주통일 그룹 내에서는 청년운동 몫으로 최고위원 후보 한 석을 배정했다. 이른바 '세팅' 선거의 결과라고 하지만 어쨌든 선희씨는 청년 담당 최고위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당내 정파 간 갈등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자신의 경험상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구로에서는 정파가 다른 서울시당 정종권 위원장과도 일을 잘 해 왔는데.” 자민통 그룹에 대한 비난도 시간이 지나면 누그러질 줄 알았다. “(사람들이) 자민통에 대해서 잘 몰라요. 대체로 좌파 활동가들은 지역에서 활동을 잘 하지 못했지만 자민통 그룹은 지역에서 정말 착실히 조직활동을 잘 해 왔어요.” 그러니까 자민통 그룹의 진가를 알게 되면 나아질 것이라는 낙관이었다.
십년도 넘은 그 숙원 '진보정당 건설' 광수씨는 민주노동당 창당 이전부터 깊숙이 결합해 있었다. 1997년 여름 오세철 교수 주도로 정치연대(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가 결성됐고 여기에 광수씨의 노진추도 참가했다. 이견이 있었지만 정치연대는 국민승리21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광수씨네는 국민승리21에 남았다.
1999년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원탁회의를 거쳐 만들어진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조직1국장으로 일했다. 창당 이후 민주노동당 서울중부지부 사무처장, 중앙연수원, 2002년 민영화 반대 공공특위 간사로도 활동했다. 공공특위 간사로 일할 때 발전노조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지구당 위원장들과 단식농성을 하고, 기습시위를 벌이고, 큰 현수막을 들고 지지방문을 갔을 때 우뢰와 같은 함성 소리가 정말 대단했다고 기억하는 광수씨. 광수씨는 이러한 활동이야말로 당의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사업이라고 주장한다.
비정규직 문제에도 광수씨는 이때부터 각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아시아자동차로 현장 투신해 처음으로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는 김기일씨,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비정규직노조를 만들려다 아킬레스건이 잘릴 뻔한 송성훈씨도 민주노동당 당원이자 광수씨네 평등연대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해 왔다고 자부한다. 이 대목에서 광수씨는 당원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광수씨는 민주노동당을 만들기 위해서 움직였고, 초창기 당이 어려울 때 뛰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루더라도, 이때는 민주노동당이라는 명예도 돈도 없을 때였다. 민주노동당이 정말 될까 하는 의구심을 받을 때였다.
'자민통'에게 야단맞고 '좌파'에게 공격받고
선희씨의 낙관과 달리 최고위원회는 출범하자마자 삐걱거렸다. 최고위가 중점사업으로 벌였던 이라크파병철폐투쟁, 국가보안법철폐투쟁은 일부 당 활동가와 당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와중에 부유세 입법안 관련 최고위 발언, 열린우리당 2중대 문건 파동으로 최저위원회라는 오명까지 듣게 됐다.
선희씨가 담당했던 청소년위원회도 그랬다. 당 청소년위원회는 청소년 당원들의 조직인가, 청소년 당원들을 조직하기 위한 조직인가. 여기서부터 꼬였다. 청소년위원회에는 이미 청소년 당원들이 진출해 있었고. 이를 생각지 못했던 선희씨는 청소년을 조직하기 위해 청소년운동을 했던 활동가들을 간사로 추천하고 일하게 했는데 청소년 당원들의 반발이 생겨났다. 선희씨는 “그럼 둘 다 하자”며 사업을 추진했지만 불협화음은 끊이지 않았다.
당은 너무도 달랐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화살이 되어 날아 왔다. 게다가 지역에서는 착실히 일해 왔던 자민통 그룹도 당에서는 패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하기는 민주노동당도 정당이다. 이 세계는 열정, 헌신, 애정보다는 판단, 결단, 공작 등의 덕목을 더 쳐준단 말인가.
선희씨는 최고위에 쏟아진 비판과 비난이 섭섭하다. “세팅된 선거라 해서 이 지도부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어요. 미숙함을 도와주지 않고 무분별하게 공격했어요.” 서운할 수는 있지만 지도부 아닌가. 동네 계모임의 회장도 견제를 받고 지도력을 시험 당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선희씨는 먼저 반성한다. “통합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했고, 계속 설득하고 포용했어야 했는데…." 그러나 선희씨는 자신을 뽑아준 정파로부터도 섭섭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딱부러지게 밀고 나가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을 것이다.
뽑아준 정파로부터는 야단맞고, 좌파로부터 공격당하고. 이러다 울산 재선거에서 당이 참패를 하자 사퇴를 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이 당에 교훈으로 남을 것”이라는 선희씨. 문제는 이 교훈 역시 정파마다 해석을 달리 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6년 최고위원 선거에서 자민통 그룹은 통합을, 좌파는 혁신을 내세웠다. 정파 문제에 대한 선희씨의 답은 “설득과 포용”이다. 이리하여 대화는 돌고 돈다.
최고위를 사퇴한 뒤 선희씨는 구로청년회, 구로여성회, 금천 청년회에서 활동하는 후배들과 만나며 개인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 분야에 집중해 공부를 하고 있다. 물론 북한 관련 서적도 보고 있다. 이후 서울시당이나 지역위원회에서 활동을 할 계획을 갖고 있다.
김광수씨 일문일답 |
1. 가장 좋아하는 덕목은? 의리 2. 남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덕목은? 지조 3. 여자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덕목은? 품어유담냉준변 - 그 품성이 그윽하고 담박하고 차갑고 높고 드높다.
4. 본인의 주된 성격은? 명량, 쾌활 5.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 6. 본인이 생각하는 불행은? 잊혀지는 것 7. 가장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악덕은? 늦는 것 8. 가장 싫어하는 악덕은? 위선 9.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권영길 10. 가장 좋아하는 일은? 놀리고 놀림받는 것 11.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김남주 12. 가장 좋아하는 산문작가는? 박민규 13. 가장 좋아하는 영웅은? 이순신 14. 가장 좋아하는 여주인공? 아름다운 인생 (이탈리아 영화)에서 여주인공
15. 가장 좋아하는 꽃은? 국화 - 이쁘지만 요염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다.
16.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 붉은 색 17.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성훈, 광요 18.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 쇠고기 무국
19.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 향상과 문표 향기나는 전설의 코끼리는 강을 건널때도 강바닥을 발바닥을 꾹꾹 누르면서 지나가고, 무늬가 아름다운 표범은 자기 무늬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흐린 날이나 안개낀 날은 굴밖을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문제를 다룰 때 본질까지 이르고, 어설픈 말과 글은 아예 밖으로 내 놓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20.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지지 (알 지자 그칠 지자) 모름지기 학문하는 사람은 어디에서 그쳐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 | |
'사회주의 정당'에 투표한 당원 4,705명 광수씨의 평등연대는 2004년 당대표 경선에 나갔다 '무참히 깨졌다'. 광수씨 표현이다. 평등연대는 심기일전해서 외연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정당화’를 본격적인 의제로 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해방연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수씨 말로는 “대장은 여전히 성두현 대표이고,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하지만 당내에서 ‘사회주의 정당화’를 본격적으로 선전 선동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번 2006년 당직선거에서 광수씨는 ‘가슴이 따뜻한 사회주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최고위원후보(일반명부)로 나가 4.705표(14.43%)를 얻었다. 5명 가운데 3명을 뽑는데 4등을 했다. 분투했지만 여전히 소수다. 이에 대해 광수씨는 “혁명가가 다수가 되는 시기는 혁명시기뿐”이라고 답한다.
“정말로 올곧은 사람들은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 알아야 된다”는 광수씨지만 당 활동을 하면서 갈증을 느낄 때가 있다. 2004년 광수씨는 당이 비정규 투쟁을 전면적으로 해야 된다는 주장을 제기해도 반영이 되지 않자 비정규 철폐를 위한 당원 모임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했다. 그 뒤 당에 비정규운동본부가 만들어졌지만 광수씨와 함께 비정규직 투쟁을 강조했던 이들은 비정규운동본부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지위나 역할을 양보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다”는 광수씨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특히 가족들을 보면 대체 면목이 서지 않는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명의 의원을 국회에 진출시켰다. 가족들이 “대체 너는 뭐 하자는 거냐”고 물을 때 “민주노동당 하자는 거다”고 답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웃는 광수씨. 사실 그동안 가족들의 질문에 정말 답이 궁했다. “부모님께 프롤레타리아독재, 사회주의혁명 설명할 수도 없고….” 운동을 한 지 20년이 넘었다. 광수씨가 보기에 운동의 원칙을 저버린 선배들, 학교에서 곱게 운동하던 어린 후배들도 당내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외로웠고 짜증이 났다는 광수씨는 “나까지 희망을 놓으면 안 된다”고 자신을 추스르고는 “당 활동가들이 빠지기 쉬운 정치적 욕망에 대해 스스로를 경계하고 수양하고 있는 중”이라고 고백했다.
선희씨와 광수씨는 스무살 이후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사회주의자’로서 살고 있다. 선택에 후회는 없다.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사회주의자로서 살고자 하지 않았다면, 선희씨와 광수씨는 유능한 교사, 엔지니어가 돼 있을 수도. 피가 뜨거운 두 사람은 안락한 삶보다는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지금의 삶에 더 만족한다.
운동을 하면서 두 사람은 고통 받으면서도 행복했고, 기쁘면서도 슬펐다. 그렇게 이들은 컸다. 그런데 선희씨와 광수씨가 함께 하고자 했던 대중들은 얼마나 성장했을까? 혹시 사회주의자와 대중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처방은 선희씨와 광수씨가 서로 다르다. 선희씨는 여전히 중간계층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 광수씨는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더 강화해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선희씨도 광수씨도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 것이다. 혹시 선희씨와 광수씨는 그 옛날 학생운동, 노동운동 할 때보다 사람 만나는 폭이 좁아진 것은 아닐까.
선희씨와 광수씨는 마르지 않는 우물이다. 끝없이 샘솟는 열정이 있다. 지금도 자리를 가리지 않으며 묵묵히 움직이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남편 아까워 집안일 못 시켜요" 화장품뚜껑 닫으라고 잔소리하는 선희씨 남편 김창한씨 |
1993년 선희씨는 결혼했다. 세번째 옥살이를 하고서 한국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남편이 된 김창한씨(42· 현 금속노조 위원장)를 만났다. 만도기계 노동자였던 창한씨는 한국노동자교육협회의 강사훈련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교육위원이었던 선희씨와 수강생이었던 창한씨는 '같은 나이'(믿는 사람이 없지만 사실이다. 창한씨는 머리숱이 적다. 특히 앞부분이. 죄송.) 친구처럼 지내다 좋아져서 결혼을 하게 됐다.
서울대를 다녔던 선희씨 집안의 반대가 예상됐지만 의외로 쉽게 풀렸다. 선희씨 부모님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듯이 하는 전과3범 딸이 결혼을 하겠다는 게 오히려 대견하다는 생각에 이르셨다. 결혼이라도 하면 혹시 '갱생'의 길을 걷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창한씨를 만나보니 대학 나오지 않았다는 것 말고는 빠질 데 없는 믿음직한 청년이었다. 지금도 선희씨 집안에서는 사위 잘 얻었다고 창한씨만 보면 싱글벙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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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노동뉴스 | | 신혼초에는 갈등도 있었다. 선희씨의 늦은 귀가시간 때문에. 아무리 조국통일도 좋고 청년운동도 중요하다지만 선희씨는 한번 나가면 밤을 꼴딱 새고 들어오기 일쑤. 배가 남산만 할 때도, 딸을 업고 다녀야 할 때도. 두 사람만 사는 것도 아니고 혼자 되신 창한씨의 어머니도 계신데.
그렇지만 이 문제는 창한씨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가정을 꾸려 운동을 더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어쩌랴. 이해를 하면서도 ‘아이고 내 팔자야’ 싶었을 창한씨를 위해 선희씨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청년운동의 중요성과 특수성, 그리고 첫 마음을 잃지 말고 각자의 활동공간에서 열심히 일하자며.
선희씨와 창한씨는 지금도 갈등이 생기면 편지를 쓴다. 최근 일어난 갈등이란 '덜렁이' 선희씨에게 '꼼꼼이' 창한씨가 화장품 뚜껑을 닫으라는 둥 충고(잔소리)를 거듭해 생긴 일이다. 민주노총의 주력부대, 한다면 한다는 기풍의 철의 노조 위원장도 집에서는 화장품 뚜껑과 일전을 벌이는 모양이다. 이런 게 갈등이 되리만치 두 사람 사이는 좋다. 특별히 싸울 일이 없다. “나는 아직 여성주의자가 못 됐어요. 남편이 일요일에 자고 있으면 더 자라고 그래요.” 남편이 아까워 집안일도 못 시켜 먹는 선희씨. 민주노동당 최고위원까지 지내신 어부인께서 몸소 집안일을 하신다는데 어찌 안방에 누워 코를 골 수 있으리. 창한씨도 벌떡 일어나 화장실 청소를 한다.
선희씨는 신혼초부터 창한씨의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산다. 어쩌면, 창한씨 어머님께서 며느리와 아들을 모시고 산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며느님께서 집안일을 그리 썩 잘 하는 것도 아닌 데다 밖으로 나돌고 있으니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집안일도 하고, 손녀도 돌볼 수밖에. 기를 꺾어 집안에 주저앉힌다? 세상에 나랏님도 못 마리는 며느리의 극성을? 툭하면 단식투쟁에 삭발투쟁까지 하는 며느리 아닌가.
실은, 요즘에는 어머님께서 운동을 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이해하시게 됐다. 당신께서도 건물청소를 하러 다니시는데 비정규직이다. 노동운동 해야 되고, 민주노동당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아무튼, 선희씨가 진심으로 공경하고, 경우가 바르다 보니 예쁜 며느리다.
선희씨와 창한씨는 딸을 하나 두고 있다. 진솔이는 올해 열세살이다. 딸은 엄마 아빠가 바쁜 덕분에 편하게 지낸다.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듣지 않는 편이다. 당최 잔소리를 하실 시간이 있어야지. 그런데 그런 진솔이에게도 엄마의 삭발은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엄마가 머리를 깎고 집에 들어오신 날, 펑펑 울었다. 엄마는 국가보안법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꼭 머리까지 깎아야 되는 건가? 게다가 엄마는 머리가 예쁘지도 않다. 다른 엄마들처럼 예쁘게 화장하고 다니는 건 바라지도 않는데 정말 너무 한 것 아니냐 이거다. 다행히 선희씨의 머리카락은 이제 원상회복이 됐고, 진솔이는 요즘 여자축구반에 들어 추운 줄도 모르고 운동장을 뛰어 다니느라 바쁘다.
선희씨네는 서울 관악역 근처 30여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2002년 장만한 내 집이다. 생활은 창한씨의 월급으로 한다. 만도기계에서 월급이 나오고 있다. 활동하느라 다니며 쓰는 돈이 많지만 선희씨와 창한씨는 알뜰하게 사는 편이라 생활하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다. | |
"의식화 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 돼…" '남편하고 자식, 아들 둘 키우는' 광수씨 아내 황혜정씨 |
광수씨 아내 황혜정씨(37)는 얘기를 하다 울먹였다.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다 보니 억장이 막힌다. 혜정씨 고향은 경남 창원이다. 초중고 시절을 창원에서 보냈고, 대학도 창원 근처에 있는 김해 인제대학교 행정학과를 다녔다. 대학 시절 예쁘고 평범한 여학생이었던 혜정씨는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기 위해 고시학원을 나갔다가 이 학원에서 문제의 광수씨를 만나게 됐다. 광수씨는 아르바이트로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혜정씨는 고시학원의 친구들로부터 '전산샘'(선생님)이 재미있게 잘 가르쳐 준다는 얘기를 듣고 광수씨의 강의를 듣게 됐다.
처음에는 전산 샘과 혜정씨 친구들이 같이 만났다. 스승과 제자들 사이로. 그러다 이 전산샘이 가끔 혜정씨에게만 따로 연락을 했다. 혜정씨는 이게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 되는 줄 알고 나갔다. 그런데 약속장소에 나가면 전산샘은 너무 바쁜 것이다. 연신 삐삐는 울어대고. 몇번 공중전화통을 왔다갔다 하다 가야 된다며 가는 게다. 혹시 간첩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친구들도 수상하다며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순진한 처녀였던 혜정씨에게는 그런 모습도 특별하게 느껴졌고 전산샘을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전산샘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리저리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까? 커피값도 학생인 혜정씨가 번번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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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노동뉴스 | | 이리하여 광수씨는 혜정씨 마음을 사로잡았다. 혜정씨 집안의 반대는 심각했다. 주제는 ‘니가 미칬나?’였다. 당시 광수씨는 직업이 없었다. 게다가 경상도 사람인 혜정씨 부모님 입장에서 광수씨는 알지도 못하는 서울 사람이다. 서울대 출신? 서울대가 밥 먹여 주지 않는 한 소용없는 것이다. 혜정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확실히 내세워 “죽어도 결혼하겠다”고 집안에 선포를 했다. 1993년 결혼을 했고, 광수씨네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광수씨와 혜정씨가 결혼을 하게 되자, 여성해방을 선언하고 아들과 합류했던 광수씨 어머니께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용서하셨다(전편, 상자기사 참조).
홀홀 단신 경상도 아가씨를 서울 자기집에 덜렁 데려다 놓고는 광수씨는 활동하느라 밖으로 나가 있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광수씨가 돈 한푼 벌어 오지 않는데다 물설고 낯선 시집에서 혜정씨는 주눅이 들어 알아서 기어야 했다. 특히나 광수씨 아버님은 돈을 벌지 않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어 하셨다. 아들이 미운데 며느리가 예쁘게 보일 리 없다.
광수씨네 집안의 구성원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광수씨 여동생이다. 혜정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밥하고 청소하고, 점심 먹고 치우고 빨래하고. 또 저녁 준비하고 치우고 청소했다. 이런 날이 계속됐다. 돈이라는 건 수중에 한푼도 없는 날이 많았다. 자수성가하신 광수씨의 아버님은 독하게 모른 척하셨다. 대체 서울에 광수씨네 집 식구들 밥 해주러 온 것도 아니고…. 어디 나가려고 해도 차비도 없을 뿐더러 아는 사람도 없고, 좌우지간 천지사방 분간이 돼야 나가기라도 할 것 아닌가. 아마 광수씨가 ‘자기야’ 하며 재롱이라도 떨어 주지 않았으면 미쳤을지도 모른다. 철이 없는 것인지, 살벌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광수씨는 실실 웃으며 혜정씨와 재미있게 놀아 주었다.
이러다 성훈이가 태어났다. 엄마가 된 혜정씨는 처음으로 시아버지에게 읍소를 했다. “사실 애 아빠가 생활비를 전혀 주지 않아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될지 모르겠어요.” 손자를 보신 할아버지께서는 마음이 약해지셨다. 한달 생활비로 30만원씩 주셨다.
겨우 숨통이 트일 만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광수씨가 구속이 됐다. 진노하신 시아버님께서는 “애만 두고 니네들은 나가라”시며, 일절 지원을 끊으셨다. 면회도 못 가게 하셨다. 혜정씨는 다시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다 혜정씨는 일을 시작했다. 학습지 교사.
집에만 있다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 혜정씨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아서 학습지 교사의 노동조건과 임금에 대해서는 따지지도 않고 일에 푹 빠져들었다. 혜정씨가 다녔던 윤선생 영어교실은 대략 아침 6시30분부터 일이 시작된다. 집에서 학생들에게 모닝콜을 하는 거다. 8시30분까지 모닝콜 학습지도를 하고, 집안일 하고 1시에 출근해서 가가호호 방문을 해서 밤9시 마치게 된다. 일하는 재미가 들린 혜정씨는 과외까지 하고는 10시 정도 돼서 일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2002년까지 일을 해 2,000만원 가량의 돈을 모은 혜정씨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광수씨의 어머니 아버지도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아들을 포기하는 대신 며느리를 선택하신 게다. 이 대목에서 광수씨는 상당히 흐뭇해 한다. “내가 어학연수도 보내줬는데.” 누가 들었으면 광수씨가 학비 대 준 줄 알겠다.
2003년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혜정씨는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따고 최근 취업 준비 중이다. 혜정씨의 꿈은 아이 데리고 외국 나가서 살았으면 하는 거다. “운동권 마누라가 꿈꿀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런 말도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데…”라며 혜정씨가 머뭇거리자, 듣고 있던 광수씨는 “괜찮아” 하며 싱글벙글거린다. 광수씨는 혜정씨가 무슨 얘기를 해도 좋은가 보다. 어차피 못 갈 것이니 꿈이라도 꾸게 해주자는 걸까. "의식화 시키려고 노력을 했는데 잘 안 돼…"라며 머리를 긁적이는 광수씨.
혜정씨는 광수씨가 좋다. 아직 바가지 한번 제대로 못 긁어봤다. 생활비가 없어도 돈 달라는 소리도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어찌 그런 얘기를 해서 마음 아프게 할 수 있냐는 거다. 좋은 이유? 사람 좋아하는데 딱히 이유야 없지만, 광수씨는 농담도 잘하고 잡학다식한 편이라 음악이면 음악, 영화면 영화, 얘기가 줄줄 나온다. 돈 못 벌어도 혜정씨에게 사랑받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2005년 당직선거에 최고위원으로 출마한 광수씨를 응원하기 위해 혜정씨는 서울 유세장을 찾았다. 남편이 여러 사람 앞에서 얘기하는 건 처음 들어본다. 혜정씨가 듣기에는 광수씨 얘기가 구구절절이 옳고 가장 나은 것 같은데 당선 가능성이 없다니 참말로 안타깝다. 측은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혜정씨를 발견한 광수씨는 혜정씨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은지 “춥지”하며 슬쩍 안아준다.
혜정씨와 광수씨는 2003년 분가를 했다. 혜정씨가 시아버지에게 사정사정해서 시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구로동 다세대 주택의 한 칸을 얻게 됐다. 15평 정도 된다. 광수씨는 여전히 생활비를 갖고 오지 않지만 혜정씨가 어학연수 가서 쓰고 남은 돈, 짬짬이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 |
박미경 kyung@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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