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현·한끼서울] ① 중구 을지로3가 안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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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은 발에 채였다. 그러나 갈만한 곳은 없었다. 서울에 아파트는 많지만 내 아파트가 없듯 점심시간마다 빠지는 이 딜레마에 머리가 아팠다. 깔끔한 간판을 단 프랜차이즈, 가성비가 좋다는 밥집도 널렸지만 한 끼를 그곳에서 해치우기는 싫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것은 사료라고. 단 1그램의 영혼도 없는 서비스를 받고 판에 박힌 음식을 먹으면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저것 많이 얹어 주어 가성비가 좋다는 곳에 몰려드는 것도 취향에 맞지 않는다. 물론 음식에는 적당한 값이 있을 것이고 그 값에 합당한 가치를 받기를 원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가성비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 이유는 나의 한 끼에 단위 당 가격과 칼로리로 측정되는 경제적인 가치만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는 무언가도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다.
“어디 갈래?”
친구가 나에게 이야기 하는 것인지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굴려 봤다. 우리는 을지로를 걷고 있었다. 점심 무렵, 어느 때보다 해맑게 웃고 있는 직장인들이 거리를 서성였다. 그 틈에 섞이지 않고 길을 계속 걸었다.
“안동장 가자.”
내가 말을 던졌고 친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 건너 빨간 간판이 보였다. 1948년 문을 열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집이라는 ‘안동장’이었다.
만약 처음 안동장에 간 것이라면 자리에 앉은 지긋한 연령대 손님들에 대해 먼저 놀라게 된다. 을지로3가 오래된 중국집, 이곳에는 흔한 탕수육 세트 메뉴도 없고 당연히 배달도 하지 않는다. 오래된 단골을 상대로 옛 메뉴를 변함없이 팔 뿐이다.
그날 안동장에 들어서니 여느 때처럼 근처 회사에 다니고 있는 듯 회색 양복을 입은 신사가 혼자 앉아 볶음밥을 먹었고 중절모를 쓴 노인은 짜장면 한 그릇을 막 받았다. 조끼를 걸쳐 입은 백발 종업원이 안내한 자리는 이층이었다.
안동장 굴짬뽕
이곳에서 꼭 먹어봐야 할 메뉴는 없다. 워낙 기본기가 좋아 어느 것을 시키더라도 평균 이상이다. 그럼에도 꼭 골라야 한다면 우선 굴짬뽕과 중화냉면을 꼽는다. 굴짬뽕은 안동장에서 시작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메뉴다. 자극적이지 않고 무난한 맛에 감흥이 적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나지 않고 단단한 맛은 쉽게 질리지 않는다. 먹으면 먹을수록 순한 맛은 지층이 쌓이듯 무게를 만든다. 그리고 그 무게에 이끌려 어느 날이면 안동장 한 구석에 앉아서 또 같은 메뉴를 시키게 된다.
땅콩 소스를 조금씩 흩뿌려 먹는 중화냉면도 언뜻 보면 평범하지만 밑에 깔린 육수 맛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은은히 퍼지는 팔각 향에 허겁지겁 면을 우겨넣던 속도를 늦추고 차를 마시는 것처럼 지그시 눈도 감아 본다. 흰 밥이 아닌 볶음밥을 내주는 잡채밥도 이 집 특기다. 간간한 잡채를 볶음밥에 비비듯 얹어 먹으면 혼자라도 외롭지 않다.
둘이라도 요리를 아니 시킬 수 없는 일, 간기가 살짝 느껴지는 난자완스는 잘 조율된 첼로처럼 끈끈하고 담백한 맛을 냈다. 점심이니 가볍게 맥주 한잔. 사람 수가 몇 더 있었다면 우아한 현악 3중주를 듣는 것처럼 순한 탕수육과 알싸한 양장피도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맛만큼이나 정중히 다가와 조용히 그릇을 놓고 가는 종업원들은 여느 호텔이 부럽지 않다.
앞에 놓인 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것은 쉬운 숙제를 해버리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살짝 취기가 오른 채 길 위에 다시 올랐다. 그리고 간단히 인사를 하고 갈 길을 갔다. 우리는 또 볼 것이니까. 앞으로도 함께 할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안동장 담담한 한 끼가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