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예산, 붓끝으로 나눈 대화
김창배
조선 중기의 문신인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그의 제자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 충남 예산(대흥) 지역을 배경으로 시를 주고받으며 차운(次韻) 형식을 취한 것은, 당시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매우 일반적이면서도 고결한 소통 방식이었다. '차운'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그 시대 지식인들의 가장 정교한 언어유희( (言語遊戲) 이자 마음을 나누는 표준적인 문법이었다.
차운은 상대방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 시구 끝에 맞추는 글자) 를 순서대로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시를 짓는 방식이다. 정해진 글자를 반드시 써야 하기에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울러 상대의 운율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당신의 생각과 리듬에 나의 마음을 맞추겠다"라는 깊은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16세기 성리학자들에게 시는 단순히 경치를 읊는 도구가 아니라, 천리(天理)를 탐구하고 사제간의 정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다. 이황은 제자들과 서신이나 시를 통해 끊임없이 소통했다. 특히 같은 운자를 쓰면서도 전혀 다른 뜻이나 더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아낼 때 사대부들은 깊은 지적 쾌감을 느꼈다. 이러한 차운시들이 쌓여 이루어진 하나의 문집은 그 자체로 훌륭한 '대화록'이 된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읽으며 두 사람의 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구봉령은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한 핵심 제자 중 한 명이다. 예산(대흥)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시를 주고받은 기록이 전해져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예산 현감 구봉령의 시에 차운하다(次禮山縣監具 鳳齡 韻)
이황(李滉)
公事應多簿領殘 (공사응다부령잔)
관청 일은 응당 장부와 문서에 시달려 피곤함이 많으리니
百城憂責重如山 (백성우책중여산)
고을을 다스리는 근심과 책임은 산처럼 무겁겠구나.
知君不被喧卑累 (지군불피훤비루)
알겠노니 그대는 시끄럽고 비루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靜對梅花意自閑 (정대매화의자한)
고요히 매화를 대하며 그 뜻이 절로 한가하리라.
<출처: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와 함께 한국 성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34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당쟁과 권력 다툼이 치열했던 조정의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고 끊임없이 사직을 청했다. 결국 고향인 안동의 토계(兎溪)로 물러나 정착하면서, '세속에서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문다'라는 뜻으로 지명인 '토계'를 '퇴계(退溪)'로 고쳐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는 권력에서 물러나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풍기군수 시절에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에 명종 임금으로부터 친필 현판을 하사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그의 깊은 학문은 국내를 넘어 일본 성리학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학자들로부터 '동방의 주자'라는 극찬을 받았다. 오늘날 그는 대한민국 1,000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우리 삶 속에 깊이 기억되고 있다.
구봉령(具鳳齡)은 봉화 현감,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병조 참판 등의 관직을 역임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566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충청 지역의 민생을 살피고 관리들의 부정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충청도 관찰사(충청감사)로 부임하기도 했다. 그는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시를 보냈고, 이황은 그 정성에 답하며 지방관으로서의 노고를 위로함과 동시에 선비로서의 청고한 자세를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화답 시를 내렸다. 이때 사용된 殘(잔), 寒(한), 盤(반)은 당시 시인들이 즐겨 쓰던 운자(韻字)로, 구봉령의 원시와 이황의 화답 시가 같은 운을 공유하며 깊은 문학적 교감을 나누었다.
예산에서 차운하다(禮山次韻)
구봉령(具鳳齡)
紅斂高岑日脚殘 (홍렴고잠일각잔) : 햇발 쇠잔하니 높은 산은 붉은빛 거두고
雨餘嵐翠入簾寒 (우여남취입렴한) : 비 온 뒤의 푸른 남기가 차갑게 발에 드네!
官園亦辦山家興 (관원역판산가흥) : 관가의 정원 또한 산촌의 흥취를 갖추어
露葉煙芽飣滿盤 (로엽연아정만반) : 이슬 잎과 안개 싹이 쟁반 가득 수북하네!
< 출처 : 『백담집』 권 2 >
위 한시는 구봉령이 스승인 퇴계 이황(李滉)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구봉령이 예산을 방문하여 이러한 시를 남겼다는 사실은 당시 예산이 내포(內浦) 문화권의 핵심 요충지였음을 잘 보여준다.
당시 예산은 충청도 내륙과 서해안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의 시에는 당시 예산의 산천(가야산, 훗날 예당호가 조성되는 무한천 일대의 평야 지대 등)과 정자, 사찰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16세기 예산의 원형과 인문 지리적 환경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전국 8도를 누빈 유람객이자 관료의 시선에서 예산을 기록했다는 점은, 예산의 풍광이 당대 최고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줄 만큼 뛰어났음을 증명한다.
구봉령은 충청도 지역을 유람하거나 인근 직산현 등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예산을 방문하여 여러 편의 한시를 남겼다. 그중 가야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산으로 가는 중에 동쪽의 가야산을 바라보고’를 소개한다. 이 시는 가야산의 장엄하고 신비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신선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현실적인 제약 사이에서의 고뇌를 담고 있다.
서산으로 가는 중에 동쪽의 가야산을 바라보고 (瑞山道中東望伽倻山)
구봉령(具鳳齡)
伽倻積翠浮層空 (가야적취부층공) : 가야산 겹겹이 쌓인 푸른 숲은 허공에 떠 있고,
萬疊白雲迷洞壑 (만첩백운미동학) : 만 겹의 흰 구름은 깊은 골짜기를 아스라이 가리네.
欲尋仙路杳無蹤 (욕심선로묘무종) : 신선의 길을 찾으려 해도 아득하여 자취가 없으니,
那得天風駕笙鶴 (나득천풍가생학) : 어떻게 해야 하늘 바람 타고 생황 부는 학에 올라 가닿을까.
< 출처: 『백담집』 권 1 >
구봉령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서 영남 사림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관직 생활 중 충청도와 전라도 등 여러 지역을 다스리고 유람하며 그곳의 자연과 역사를 한시로 충실히 기록해 후세에 귀중한 문학적·역사적 자산을 남겼다.
특히 이 글은 퇴계 이황과 그의 제자 구봉령이 충남 예산(대흥)을 배경으로 주고받은 '차운시'를 통해 조선 사대부들의 소통 방식과 철학을 잘 보여준다. 상대방의 운자를 그대로 따르는 차운은 타인의 생각과 리듬에 자신을 맞추는 극진한 존중과 경청의 태도를 내포한다. 사대부들은 정해진 규칙(운자)을 지키면서도 자신만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담아냄으로써, 엄격한 틀 안에서 발휘되는 고도의 지적 창의성을 증명했다.
16세기 성리학자들에게 시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우주의 이치(천리)를 탐구하는 학문적 도구이자 사제간의 정을 나누는 정서적 매개체였다. 이들이 남긴 차운시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당시 사대부들의 인간관계와 소통 양상을 생생하게 복원해 주는 훌륭한 역사적 대화 기록이다.
이처럼 예산(대흥)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의 아름다움은 과거 석학들의 학문적·예술적 교류를 통해 고품격 문화 자산으로 재조명된다. 이는 인스턴트식 소통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 느리지만 깊이 있게 마음을 나누는 '품격 있는 대화'의 가치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첫댓글 퇴계와 그의 제자 구봉령이 주거니 받거니 노닌
대흥의 옛 풍광이 그려집니다.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