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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나니,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1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넷째 주일이다. 지난 설 명절은 잘 지내셨는가? 고향을 가든, 못 가든 명절은 명절이었다.
아마 설날처럼 축복을 많이 하는 때가 없을 것이다. 설 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라고 하면 반응이 재미있다. 대체로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어떤 경우 당황하기도 한다. 주저한 끝에 듣는 궁색한 대답이 “네 앞으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정도다.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는데,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라고 하니 힘차게 “아멘!”하더라.
누구나 입버릇처럼 복을 빌지만, 가벼운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인생을 걸만한 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의식하든, 않하고 지내든 모든 사람은 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갖고 있다.
그러니 복을 빌어주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모가 자녀에게, 부부가 서로 그대를 향해, 누구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웃과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한다.
다만 그러한 복이 인간의 황당한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인간의 이기심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남들과 더불어 주님의 평화 가운데 살도록 소망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 2023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어록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이다. 무려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말씀이니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마태복음 5-7장의 말씀을 묶어 ‘산상설교, 산상수훈, 산상보훈’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보훈은 보물 보(寶) 자를 붙여 보물과 같은 가르침이란 의미이다. ‘보감, 보훈, 보물’이 두루 통한다.
‘산 위에서 하신 보물과 같은 말씀’이란 의미는 어거스틴이 회심 이후 마태복음 5-7장에 붙인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산상설교의 당혹스러운 요구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워하였다. 그 이상은 아름답지만, 만약 곧이 곧대로 살 경우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교회는 이 규범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크게 네 가지 주장이 있다.
산상설교는 기록된 그대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지금도 문자 그대로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들과 그 이상을 이어간 아미쉬,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공동체가 있다. 영화 ‘위트니스’에 미국 아미쉬 공동체 이야기가 등장한다.
러시아 소종파 공동체인 몰로칸(Molokans)도 있다. 그들은 19세기 러시아 차르 체제에서 이단자로 처벌을 받아 추방된 러시아 그리스도인들이다. 몰로칸은 스스로 영적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으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러시아정교회의 제도화된 형식주의를 거부하였다. 평화주의, 공동체 조직, 영적 모임 등에서 다른 소종파들과 서로 통한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산상설교를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갖게 될 비전이지, 현실에서 문자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한다. 다만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산상설교는 보통 사람이 아닌 수도자와 성직자 같은 특별히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갈망하는 사람에게만 해당 된다는 주장도 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 보나벤투어의 말이다.
마틴 루터의 주장이 명쾌하다. 산상설교는 인간의 의지와 공로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였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의에 맞출 수 있는가? 그러니 교만하지 마라. 산상설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우치기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영국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당시 교회를 향해 질타하였다.
“지금껏 기독교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다.”
존스 목사가 말하는 시도되지 않는 기독교란 바로 그 예수 신앙, 본질적인 그리스도교를 의미한다. 그는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우리는 변질된 기독교, 사이비 기독교, 미신적 기독교를 보아왔고 믿어왔으며 흉내 냈다”고 하였다.
우리의 경우 예수님에 대해 늘 입버릇처럼 말하고, 귀 벌레처럼 듣지만, 그러나 ‘홍수에 마실 물이 없듯’이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부족한가?
2)
본문은 산상설교 중에서 서문에 해당 되는 대목이다. 유명한 여덟 가지 복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마태복음은 산 위에 앉아 무리를 향해 가르치는 예수님을 마치 권위 있는 랍비처럼 그리고 있다.
그 위대한 가르침 때문에 이름 모를 산은 하나님이 약속을 주신 모세의 시내 산처럼 느껴지고, 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이사야의 시온 산과 같다. 예수님의 설교는 카리스마로 가득하다.
‘팔복’의 말씀이 특별한 까닭은 권위 있는 말로 “복이 있나니,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복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내적 욕망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산상설교의 첫머리에서 먼저 ‘여덟 가지 복’에 대해 말씀을 시작하셨을 것이다.
여기에서 ‘복이 있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마카리오스’이다. 마카리오스는 그리스 사람들이 행복의 섬이라고 여긴 ‘마카리아’라는 땅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카리오스’는 행복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그 섬을 차지하는 ‘복의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섬에 살게 되는 ‘복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이 본보기로 드신 복 있는 사람의 모델은 영 기대밖이다.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 또 사회적 통념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을 복이 있다,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덟 가지 경우는 앞의 네 경우와 뒤의 네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뒤의 네 경우 즉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그들은 칭찬을 들을 만한 사람이고,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앞의 네 경우 곧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동의하기에는 석연찮다. 가난하고 슬프고 목마른 사람이 복 받을 이유가 될까,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의 상식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이나 슬퍼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닐까?
그들은 실패자요, 무능력한 사람이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이다. 그들에게서 행복 의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들을 복 있는 사람의 대표모델로 말씀하시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람들이 예상은 늘 빗나간다. 천국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전(逆轉)이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우리는 산상설교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1-3).
예수님이 첫 번째 보기로 드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에게 무엇 하나 내세우거나,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아무리 미사여구를 써서 두둔한다고 해도 포장이 어렵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정말 가난한 사람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위를 보여드릴 것이 없어서, 면목이 없고,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전적으로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군가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이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변호자가 되신다. 율법은 가난한 자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때론 적극적으로 편들고 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외롭지 않다. 심지어 가난할망정 복되다.
생각해 보라. 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꼼꼼히 읽어본다면, 복되다고 한 이유는 ‘왜냐하면’ 바로 다음에 소개되어 있다.
“복되어라. 마음이 가난한 그대여!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그대의 것이기 때문이다”(3).
‘복이 있다’는 말보다 ‘복 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의미가 분명하다. 무엇을 소유한 상태가 아니라, 그런 존재의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복을 받으려면 그만한 자격이나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난하고, 슬퍼하고, 무시당하고,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유로 복을 받는다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이는 조건 없이 주시는 역전으로서의 복이다. 하나님 나라는 받을 사람의 자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고자 하는 이의 의지에 좌우된다. 하나님 나라는 선물, 곧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의 선택을 받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하고, 슬퍼하고, 무시당하고, 부당한 취급을 받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누군들 시비할 수 없다. 하나님은 대가를 치루는 분이기 전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그러면 뒤의 네 가지 경우가 받을 복은 무엇인가?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이 받는 복은 바로 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선물이요, 은혜로 들어가지만, 또한 상급이기도 하다. 은혜와 선물은 자격을 따지지 않지만, 상은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생각해 보라. 누가 생각해도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상으로 받은 자격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그 나라를 위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다.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의’는 모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뒤의 네 가지 경우인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와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앞의 네 가지 경우인 ‘가난하고 슬퍼하고 비천하고 의에 주린’ 이들의 이웃이 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신 분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비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억울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손해를 감내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복을 주신다.
여덟 가지 경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있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그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행복의 정답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렇듯 인간의 실패와 무능함과 연약함 때문에 복이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실패, 그런 무능함, 그런 연약함, 바로 그런 삶의 조건이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3)
지난 주 금요일에 강화의 십자가 목수 김명원 권사를 만나러 갔다. 몹시 추운 날이었다. 대화 중에 “목사님 저 새 차를 샀어요” 한다. 그가 몰고 다니는 1톤 트럭은 무려 21년이나 된 것이다. 언제 길에 멈춰도 이상하지 않은 차이다. 내가 궁금해 하니 저간의 사정을 다 설명한다.
오산에서 직장 생활하는 딸이 이사한다고 해서 예전의 차를 몰고 갔더니, 딸이 정색을 하면서 아빠 아직도 이 차를 몰고 다니냐면서 하나 사주었다고 한다. 딸은 자기의 새 차를 주문하고 1천만 원을 예약했는데, 그걸 아빠의 트럭으로 돌려주었다고 했다. 모두 2,600만 원이 들었다며, 감격해하였다.
평소 그는 사람이 착하게 굴어서 늘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했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는 커녕, 손해를 보기 일쑤였다. 그래도 마음먹은 대로 십자가만 만들면서 산다. “포도시 운영은 하는데, 돈 모아지는 것은 없어요.” 그래도 그는 “하나님이 도우시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한동안 아빠에게 말도 안 붙이고 살던 딸이 아빠에게 새 차를 사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고물이 보물이 된 경우라고 말해주었다.
예수님은 성공이나, 부유함이나, 어떤 물적 조건이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성공이, 우리의 넉넉함이, 우리의 물적 조건이 오히려 내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인간적인 행복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나를 오만하게 만든다면,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더 나아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면, 그 행복 거리가 수없이 많아도 결코 자랑거리가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궁극적인 행복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팔복의 말씀에서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기에서부터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가 복이 있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졌다.
예수님은 여덟 가지 행복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이 말씀을 행복 선언으로 듣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여를 약속하신다. 그리고 내 삶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라고 하신다.
무엇보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올해도 언제나 여러분의 삶에 순간순간 기쁨으로 다가오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