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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뿌리아름역사동아리 원문보기 글쓴이: 麗輝
요즘 KBS에서 ‘추노’라는 드라마가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면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필자도 얘기만 듣다가 1~4회를 한 번에 보고 이번 주 5~6회를 시청했다. 일단 이 드라마의 장점을 꼽자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재를 갖고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촬영기법이나 대사, 고증 면에서도 아주 훌륭하게 기존 사극과 다른 선을 긋고 있었다. 이 드라마의 감독은 이미 예전에 ‘한성별곡 正’으로 필자가 한번 접했었는데, 그때보다 더 스타일리쉬하게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 같았다(필자는 개인적으로 한성별곡 正을 너무나도 재밌게 봤다. 아마 그런 사극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전의 드라마는 아는 이가 별로 없어 필자가 주변에 여기저기 소문을 많이 내고는 있는데, 뭐 얼마나 볼는지는 잘 모르겠다. 암튼 이 드라마를 보면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추노꾼’이라는 직업이 정말 저 시대에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한번 찾아봤다.
추노
주인집에 거주하면서 사역(使役)하는 가내노비와 달리 주인의 거주지를 벗어나 독립생활을 하는 노비는 사역을 하지 않는 대신 몸값으로 일정한 포(布)를 바쳐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 공포(貢布)를 징수하던 일을 말한다. 또한 도망간 노비를 수색하여 연행해 오는 것도 추노라고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100.nhn?docid=148326) 검색 결과.
추노의 의미가 2개였다. 드라마에서는 하나만 나왔는데...-.-; 도망간 노비를 쫓는 건 알겠는데, 외거노비가 몸값을 지불하는 것도 추노라고 한단 말인가? 이게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한번 찾아봤다. 그래서 찾아보니 推奴는 도망간 노비를 추쇄하는 일과 외거노비에게 신공을 징수하던 일을 말하는데, 추노관련 고소설이나 현재 KBS 드라마에서 얘기하는 것은 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노비 주인이 속량해준 노비는 그냥 노비라 하고, 도망간 노비는 叛奴라고 칭한다고 한단다(신기철 외 편 1987: 3293).
그럼 이 몸값은 한번만 내면 되는 건가? 아니면 정기적으로 수입의 얼마를 바쳐야 하는 건가? 뭐 하나가 궁금하니,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만 갔다. 마침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추노’ 관련된 글을 검색하다가 주석 하나를 보니 ‘노비가 그 소유주의 거주지를 이탈하여 외거(外居)하고 있을 때 그 소유주가 노적(奴籍)을 제시하여 이탈 노비 및 그 자손으로부터 공포(貢布) · 신대금(身代金)을 받던 일’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 금전적으로 한번만 뜯어가는 것일 텐데 아마 양반네들이 여러 번 뜯어갔을 것 같기도 하다. 암튼 자세히 모르니 Pass~
그래서 먼저 ‘추노’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학계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관심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한국고전번역원을 들어가 ‘推奴’로 검색해봤다(http://db.itkc.or.kr/index.jsp?bizName=FD&url=/itkcdb/text/searchAllTotalListIframe.jsp%3Fstartdate=%26enddate=%26setidlist=nOnE%26sugiid=%26suginame=%26dbname=%26gunchaid=%26gunchaname=%26muncheid=%26munchename=%26upperSugiNo=%26chkInDirectory=%26searchInResult=%26chkInjipsu=%26paramSerise=%26bizName=FD%26url=%252Fitkcdb%252Ftext%252FsearchAllListIframe.jsp%26searchSaveChk=Y%26sectionname=total%26extOrEqual=0%26keyword=%25EC%25B6%2594%25EB%2585%25B8).
그랬더니 총 98건이 검색되었다. 그중에서 한국문집총간의 34건, 한국문집총간 총목차의 1건, 국학원전의 2건을 제외하니(이건 다 한문 원문이기도 하고, 내용상 개인문집들이 많아서 일단 제외하기로 하였다),『燕行日記』에 1건,『弘齋全書』에 1건,『朝鮮王朝實錄』에서 25건,『承政院日記』에서 31건,『日省錄』에 3건, 총 61건을 골라낼 수 있었다.
먼저『연행일기』한번 살펴보자. 이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유득일(兪得一)의 청나라 기행문집이라고 한다. 한번 원문을 발췌해보겠다.
임진년(1712, 숙종 38) 11월 15일(갑오)
맑고 저녁에 눈이 왔다. 숙천을 떠나 60리를 가서 안주(安州)에서 잤다.
아침에 서울에서 온 편지를 보았다. 해가 높이 뜬 뒤에 출발하여 안흥관(安興館)에 닿았다. 부사가 서관(西館)에 들지 않아서 내가 들었다. 병사(兵使)가 내현하였으니, 족의(族誼)가 있기 때문이었다.
석새 융복[三升戎服] 1벌, 남색 면주전대(綿紬纏帶) 1조(條), 쥐털 소호항[鼠皮小護項] 1령을 선사받았다. 김수하(金壽河)가 개천(价川)에서 와서 맞이하고 가산 군수(嘉山郡守)의 장인(莊人) 건적(建狄 :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곧 만주족) 도전객(島佃客)과 청룡사(靑龍寺) 승려들까지 모두 내알하고 돌아갔으며, 순안 군수가 여기까지 따라왔다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김제겸(金濟謙)은 유봉산(柳鳳山)과 함께 망경루(望京樓), 관덕당(觀德堂), 백상루(百祥樓)를 구경하였다. 관덕당은 병사(兵使)의 아문 뒤편에 있고 망경루는 관덕당 위에 있는데 현직의 병사(兵使)가 세운 것이다. 백상루는 성의 동북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정묘년(1627년 정묘호란을 가리킴)에 적이 성을 함락했을 때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죽은 곳이다.
안산(安山) 상인(喪人 : 상중에 있는 자) 성몽량(成夢良)이 내알하였다. 그는 마침 추노(推奴)의 일로 목사(牧使) 댁에서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목사는 바로 성수(成璹)였다.
안산의 성몽량이라는 사람이 추노, 즉 도망간 노비를 수색하는 일로 목사 집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리였다. 여기에서 성몽량이라는 사람이 ‘추노꾼’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18세기 초 조선에서 ‘추노’가 있었고,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음은 조선 후기(1814) 편찬된『홍재전서』를 한번 들춰보자. 이건 처음 보는 책이었는데, 네이버에서 찾아보니 대단한 책이었다. 이 책은 1799년(정조 23) 이만수(李晩秀) 등이 편집하기 시작하여 총 190편으로 정리하였으며, 정조 사후에 말년의 저술들을 덧붙여 심상규(沈象奎) 등이 1801년에 재편집하여 1814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본시 국왕의 저술은 사후에 신하들이 편집하여 전대로부터 내려오는『열성어제(列聖御製)』에 덧붙이는 것이 관례였으며, 정조에 대해서도 후에 어제집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가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다방면에 걸친 문화 사업을 추진하고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조는 사후에 편찬될『열성어제』에 만족하지 않고 국왕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문집 편집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정조의 학문과 저술은 학문적 권위를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산림(山林)에 의해 국왕권이 제약당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 절대적인 학문적 권위를 세운다는 특수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후대의 국왕들과 대리 청정한 효명세자(孝明世子)에 대해서도 대개 개인 문집이 열성어제와 별도로 편집되었다.
앞에는「춘저록(春邸錄)」이라는 표제 아래 세손으로 있을 때의 시와 편지 및 기타 형식의 글들을 모았는데, 첫머리가 해[日]와 달[月]이라는 제목의 시로 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수록된 글이 모두 정조의 개인 저술은 아니어서,「경사강의」와 같은 경우 신하들이 응답한 내용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심리록」은 해당 관서의 기록에 국왕이 최종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정조의 학문과 정책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권 5부터는 시를, 권 8 이후로는 여러 종류의 책과 저술에 붙인 서문들인「서인(序引)」을 수록하였는데 그중 권 12 <연분인(年分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토질의 비옥도와 농사의 풍흉에 따라 조세의 양이 결정된다. 전분(田分)은 매 20년마다 개정하는데 반해, 연분(年分)은 당년의 문제라서 얼핏 보기에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전답은 그해의 풍흉에 달려 있고, 그 해의 풍흉은 전답의 작황을 결정하는 것이어서 그 둘 사이는 형체와 그림자의 관계와 같다.
영묘 때 전분과 연분 제도를 때로 손질했었지만 다 같은 때에 했기 때문에 연분이 전정(田政)과 병렬이 되어 전분을 말하면 연분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연분이라는 이름을 별도로 붙인 것은 모든 조처가 전정이라는 한 일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위로는 공헌(貢獻)과 경용(經用)에서부터 중간으로는 희름(餼廩)과 양향(糧餉), 그리고 아래로는 신공(身貢)과 요역(徭役)에 이르기까지, 그 밖에 심지어 추노(推奴)와 징채(徵債) 등등 자질구레한 일들까지도 전부 연분에 따라 좌우되고 있으므로 해마다 그해의 연분에 따라 모든 것을 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노 문제가 국가적으로 제대로 자리가 잡지 않은 듯 한 느낌도 나며, 폐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선『연행일기』보다 1세기 정도 뒤의 기록인데 아무래도 같은 제도(혹은 관례, 풍습 등)가 1세기 이상 지속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18세기 초~19세기 초까지는 ‘추노’가 있었고, 그러한 ‘추노’를 잡는 ‘추노’ 행위 역시 이뤄졌으며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러한 ‘추노’는 조선 후기에만 등장하는 것이었을까? 정말 드라마에서 언급한 것처럼 숙종조 시기에 그토록 ‘추노’와 관련된 일들이 조선 사회 전반적으로 많았을까? 그래서 이번에는『조선왕조실록』등을 찾아봤다.
역시나 재밌는 기사가 나왔다.
세종 56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4월 22일(경술) 2번째 기사
유자가이의 자손에 대한 처리방법에 대해 논의하다
형조 참판 고약해가 아뢰기를,
“유자가이(有子加伊)의 자손으로서 아직까지 추노(推奴)하지 아니한 자가 1백여 인이오니, 청컨대, 급사(急使)를 보내서 각도에 공문을 발송하여 잡아오게 하소서.”
하고, 우사간 금유(琴柔)가 아뢰기를,
“이 소송(訴訟)은 형조에 내려 준 것이 이미 17년이 되었으며, 대간에게 내려 준 것이 4년이 되었습니다. 그것의 처리가 지체됨이 이와 같고, 더군다나 지금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이 복잡하오며, 또 농사철을 당하였는데 관련되어 추문을 받을 자가 어찌 수백 명에 그치겠습니까. 더군다나 대간은 그 일의 대체(大體)만을 분변(分辨)할 뿐인 것입니다. 현진(玄進)의 자손 5백여 인안에 그 명문이 확실한 자가 4백 명입니다. 기한 전에 양인이라는 것을 제소하여 미결된 것은 옳고 그른 것을 묻지 않고 죄다 보충군(補充軍)에 편입한 것이 백여 명이고, 제소 기한(提訴期限) 전에 천인으로 사역되면서 오판이라고 주장한 소장을 제출하지 아니하고 그냥 전대로 천인으로 행세하면서 추고를 마치지 않은 자가 90여 인입니다. 마땅히 당해 관원으로 하여금 바르게 구분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낳은 자손으로서 기한 전에 제소한 자는 양민이 되고, 제소하지 않은 자는 천인이 된다는 법이 이미 이루어졌는데, 경술년에 전교(傳敎)하옵기를, ‘유자의 자손은 그 한 사람의 양천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곧 유자의 양천을 밝히는 것이니, 그가 분명히 유자의 자손인 것이 밝혀진 자는 죄다 보충군에 입속시키라.’고 하여, 앞과 뒤의 법률 시행의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드디어 정부와 육조에 이르기를, “금유(琴柔)가 아뢴 유자의 자손에 대한 처리 방법을 나는 타당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같이 의논하여 아뢰라.” 하매, 모두가 말하기를, “유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가이(加伊)는 여성의 이름 혹은 별칭 뒤에 붙는 명칭 같은데 유자라는 여인이 큰일을 저질렀나 보다(네이버에 찾아보니 처녀를 일컫는 전라도 사투리로 ‘가이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국문학적인 고증은 역시 Pass!). 그 자손 중에 추노되지 않은 자들이 100명이라고 하는 걸 보면 집안이 쑥대밭이 된 것 같다. 암튼 신분을 확실히 따져서 양인인지, 천인(노비)인지 판단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보충군으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빡세면 양인이라는 판결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천인으로 살고자 하겠는가? 암튼 우사간 금유는 정확하게 호구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도 ‘추노’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도망노비’나 ‘도망노비를 좇다’는 의미보다는 단순히 노비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하므로 이와 관련된 ‘범인을 좇다’는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그 다음 기록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광해군 때로 넘어가보자.
광해 94권, 7년(1615 을묘 / 명 만력(萬曆) 43년) 윤8월 2일(병오) 6번째 기사
역변을 고한 죄인 문경천의 공초 내용
문경천이란 자는 자칭 경주 교생(校生)이라 하였는데, 당초 포도청에 붙잡혀 전옥(典獄)에 수감되어 있다가 스스로 죄가 커서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살아날 계책으로 마침내 역변을 고한 것이었다. 그의 공초에 이르기를,
“계축년 9월에 도감(都監)에서 판매하는 면포를 받아 은을 사가지고 올라와 주인(主人) 집에다 두었는데 도둑을 맞는 바람에 노비를 팔아 겨우 갚았습니다. 알성시(謁聖試)를 보기 위하여 모화관(慕華館)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고, 영조문(迎詔門) 근처에서 말달리기를 하곤 하였는데, 이름을 모르는 5, 6인이 말을 사겠다고 하면서 장흥동(長興洞)에 사는 김입신(金立信)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말을 사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고 술을 사주면서 성명을 묻기에 대답해 주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길에서 윤기(尹錡)라는 자를 만났는데, 동대문 안 제2교(第二橋) 가의 주인(主人)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가서 보니 전일 김입신 집에서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그 집에 있었는데, 또 술을 사서 서로 마시면서 글씨를 써놓은 종이를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맹세하는 말이었는데 종이 끝에 각기 성(姓) 자를 써놓았고, 그 중에 3인은 이미 서명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윤기가 답하기를 ‘네가 서명을 하면 말해주겠다.’고 하여, 서명을 하였는데, 그래도 말해주지 않다가 황혼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가 하려는 일을 너도 하겠느냐?’고 묻기에 ‘너희가 하는 일은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윤기가 ‘나와 정호의(鄭好義)는 충청도에서 군사를 모으고, 김입신(金立信) · 황난수(黃蘭秀)는 황해도에서 군사를 모으고, 너는 경상도 사람이니 김경남(金慶男)과 경상도로 가야 한다.’고 하기에 ‘말한 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변(告變)을 하려던 참에 예천에 사는 충찬위(忠贊衛) 이사음(李嗣音)이 빚을 받기 위해 대장(大將)에게 부탁하여 저를 가두었으므로 마침내 전옥 참봉(典獄參奉)에게 고변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김경남이 언문(諺文)으로 쓴 36명의 명단을 가지고 와서 은밀히 말하기를 ‘나는 글을 모르니 네가 진서(眞書)로 쓰라. 이는 바로 전년에 역모를 할 적에 모집한 군사의 수효인데, 이 문서는 지난해부터 만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옥관으로 하여금 김경남을 잡아 가두게 하고는 포도청 군관 2인이 마침 그 곳에 있기에 윤기 · 김입신 · 정호의 · 황난수의 성명과 거주지를 말해 주어 체포하여 가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홍준(金弘俊)이라는 자가 마침 왔는데 김경남이 같은 당이라고 하여 옥관을 시켜 수금하게 하였습니다.
당초 같이 모의한 6인 중에 최시망(崔時望)은 추노(推奴)의 일에 관련되어 남양(南陽)에 갇혀 있고, 김우립(金友立)은 현재 서울에 있습니다. 명단에 있는 30여 인은 각기 그 무리가 있는데 괴수는 전 양구 현감(楊口縣監) 이정남(李庭男)입니다. 태묘(太廟)에 부묘할 때에 군대를 모아 반역을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김경남과 대질심문을 해보면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기록 자체가 재밌다. 포도청에 잡혀 들어간 사람이 살기 위해 역변을 고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중 최시망이라는 사람이 추노의 일과 관련하여 남양에 갇혀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추노’의 일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도망노비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싶다.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문경천이라는 자도 도둑맞은 은을 갚기 위해 노비를 팔았다는 내용에서 17세기 초에는 이미 노비를 賣買하는 행위가 상당히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추론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조선 초~중기에 추노와 관련된 직업이 있었고, 사회 전반적으로 추노가 보편적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뒷시기의 기록을 보면 추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현종 개수실록 5권, 2년(1661 신축 / 청 순치(順治) 18년) 3월 11일(경신) 2번째 기사
헌부가 영신군 이형의 행실이 나쁘다는 것과 조신기 등의 일로 아뢰다
헌부가, 종실(宗室)인 영신군(靈愼君) 이형(李瀅)이 도리도 모르고 행실이 나빠 적모(嫡母)를 잘 섬기지 못하고 그 시비(侍婢) 모녀 두 사람을 때려죽인 일을 논하여 잡아다 국문하고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또 개성경력(開城經歷) 조사기(趙嗣基)가 국가의 금법을 무시하고 추노(推奴)하는 일로 인하여 여인을 9개월이나 가두어서 끝내는 목매어 자살하게 만든 일을 논하고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또 형조 월령 낭청(月令郞廳)의 조보(朝報)와 추(騶)의 값을 옥졸(獄卒)에게 징수하고 옥졸은 죄수에게서 징수하는 것을 논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변통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또 사도(師道)가 행해지지 않고 동몽의 배양이 단정치 못하여 동몽의 무리들이 책을 배우는 여가에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고 길가는 사람을 욕보이는 일을 논하여, 교관(敎官)을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따랐다.
역시 재밌는 기록이다.
‘경력’이라는 직책은 고려 말~조선시대에 걸쳐 주요 부서에서 실무업무를 담당했던 관직이었다. 조선 초기에 충훈부(忠勳府) · 의빈부(儀賓府) · 의금부(義禁府) · 개성부(開城府) · 오위도총부 · 중추부(中樞府) 등에서 행정실무를 맡아보던 종 4품의 관직으로서 조선 후기에는 충훈부 · 의빈부 · 의금부의 경력은 폐지하고 오위도총부에는 오히려 4명을 증원하였으며, 강화부와 광주부를 잠시 두었다가 판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역시 네이버 검색). 그렇게 봤을 때 조사기라는 사람은 종 4품의 관직에 있는 인물로서 당상관(정 3품)보다는 낮지만 참상관(정 6품)보다는 높은 인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종 4품의 인물이 추노와 관련된 일에 연류되었는데, 일이 잘못되자 그를 파직하고 다시는 서용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헤깔리는 부분이 있다. ‘추노’ 자체가 국가의 금법인지, 아니면 ‘추노’와 관련된 행위 중 국가의 금법 중 일부를 어겼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암튼 그가 추노와 관련하여 어떤 여인을 9개월이나 감금하여(감금만 했겠느냐마는 -.-;) 그 여인은 끝내 목매어 죽고 만다. 사람을 죽게 만들었는데, 단순히 파직만 한다는 것은 그 여인이 신분이 낮은, 즉 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추정해보면 국가의 녹봉을 먹는 벼슬아치가 직접 추노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데 조사기는 여기에 발을 들여 놓았고, 도망노비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미처 도망가지 못 했거나, 도망간 이들과 친한 여자노비를 잡아다가 족친 것 같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죽어버린 것일 테고...
요즘 드라마에서도 보면 일을 하고 현상금을 타는 추노꾼과 일을 물어오는 대가로 현상금을 쪼개 먹는 벼슬아치의 긴밀한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현종 시절, 관리와 추노꾼 사이에도 이런 관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비가 제대로 인격체 대우를 못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17세기 중반에는 노비와 관련된 사안들이 국가적으로도 문제가 될 정도로 사회 문제화 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실제『조선왕조실록』의 25건을 보면 세종 대 1건, 광해군 대 1건, 현종 대 1건, 숙종 대 10건, 경종 대 4건, 영조 대 8건으로 확실히 숙종 10년(1684) 이후 추노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숙종 때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추노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들이 등장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에는 기사 전문을 싣지 않고 일부분만 정리해서 옮겨보도록 하겠다.
숙종 10년 갑자(1684, 강희 23) 12월 13일(갑진) - 전 지평 정제선의 사안을 의논하다
임금이 뜸질을 받았는데, 약방 여러 신하가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전 지평(持平) 정제선(鄭濟先)의 사안(査案)을 앞에 놓고, 곧 하교하기를,
“정제선의 일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는데, 이제 사본(査本)을 보건대, 비부(婢夫) 2인과 양민(良民) 1인을 반노(叛奴)와 함께 일시에 함부로 죽였으니, 속담에 비록, ‘자식이 있는 비부는 상명(償命)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원래 법문(法文)은 아니다. 하물며 양민 1인을 또 함부로 죽였으니, 진실로 살인의 율(律)을 면하기 어렵다. 효묘조(孝廟朝)에 이증(李曾)이 살인한 일로 마침내 장폐(杖斃)되는 데 이르렀는데, 근래에는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법이 엄하지 못하여 해부(該府)에서 상재(上裁)를 범연히 품계(稟啓)하니, 자못 방자함이 지극하다. 판의금(判義禁)을 체차(遞差)하고 다음 당상(堂上) 이하를 추고(推考)할 것이며, 이 공사(公事)를 도로 내어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이증(李曾)의 일은 이와는 다른 바가 있습니다. 강석규(姜錫圭)가 일찍이 사람을 죽여서 여러 해 동안 귀양 갔었는데, 이는 강석규의 일과 서로 같습니다.”
하고, 부제조(副提調) 윤지선(尹趾善)은 말하기를,
“이증은 송척(訟隻)을 몰래 죽였으니, 정상(情狀)이 미워할 만하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법으로 처치하였는데, 정제선의 일은 이에 비해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살인의 율(律)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한데, 금오(金吾)의 복계(覆啓)가 이와 같이 헐후(歇後)하니, 지극히 괴이하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제선(鄭濟先)은 비록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대관(臺官)을 겸하므로, 형장(刑杖)을 쓸 수 있다 하나, 추노(推奴)의 사사로움으로 인하여 하루아침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여 6인의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이르렀고, 양민도 그 가운데 있으니, 국법을 만약 시행하면 진실로 상명(償命)의 율(律)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직 그 형세가 있는 터이라 해부(該府)에서도 집법(執法)할 것을 논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노여워하여 꾸짖은 뒤에 이르러 대신(大臣)과 재신(宰臣)이 모두 우물쭈물하며 논의만 분분하여 사(私)가 공(公)을 이기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만약 법부(法府)에서는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의논하고, 임금은 일찍이 시종(侍從)에 임용한 것과 정법(情法)을 참작하여 혹시 그 죽음을 용서함이 가할 것이다.”
정제선이라는 관리가 (아마도 자신의 도망노비에 관련된 일 때문에) 국법을 사사롭게 적용하여 6명의 사람을 죽였다. 앞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비부(婢夫) 2인과 양민(良民) 1인을 반노(叛奴) 3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정제선의 잘못이 아니라고 관리들이 두둔하니, 임금이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다. 노비에 대한 벼슬아치에 대한 생각이 어쨌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숙종 12년 병인(1686, 강희 25) 12월 13일(계해) - 우의정 이단하의 공안에 관한 차자에 대해 대신들이 의논하다
(전략) 이단하가 아뢰기를,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흉년에 노비를 추쇄[推奴]하고 빚을 독촉하는 것은 모두 금령이 있는데도, 해미 현감(海美縣監) 강필건(姜必建)이 그 족인(族人)을 위해 병자년(丙子年)에 도망간 노비의 족속을 끝까지 추쇄하면서 혹독하게 형장(刑杖)으로 신문[訊問]하여, 한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으니, 잡아들여 신문하여 정죄(定罪)해야 할 것입니다. 본도(本道)의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어 보니 매우 놀랄 만하다. 강필건을 잡아들여 신문[拿問] 정죄하고, 본도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밝히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흉년에 노비를 추쇄하여 빚 독촉하는 것은 금령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추노는 2가지 가능성을 따져볼 수 있다. 외거노비가 자신의 몸값을 못 낼 경우, 흉년임에도 재물을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흉년에 도망간 노비들은 봐주는 건지(?) 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다. 암튼 해미현감 강필건이 집안사람 중 누군가에게 소속된 노비를 끝까지 쫓아가 잡아 족치자 그 동네 노비들이 다 도망간 모양이다. 이 얘기를 듣고 임금이 매우 놀랄 정도였다니 아마 그 이전에도 이런 일은 많았겠지만 임금은 잘 몰랐던 모양이다. 점점 추노와 관련된 일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아닐까 싶다.
숙종 21년 을해(1695, 강희 34) 8월 3일(임진) - 여러 재신들과 흉년으로 인한 궁가의 절수 문제 등을 의논하다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이 이 해가 흉년듦을 가지고 청하기를,
“(전략) 문수산성(文殊山城)의 창고(倉庫)의 역사(役事)와 낙선군(樂善君) 이축(李潚)의 묘소에 돌을 끄는 역사 및 경외의 추노(推奴) · 징채(徵債) 같은 것을 모두 정지하고 외방의 관원으로서 말미를 받는 자는 친병(親病) 외에는 일체 허락하지 마소서.”
흉년으로 인한 나라의 국고를 아끼는 방책 중 하나로 추노 · 징채를 중지하자고 적고 있다. 추노가 경제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적으로 이득이 없는 문제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숙종 28년(1702), 사헌부에서 다시 상소가 올라온다. 7년 전에 추노 · 징채에 대한 금령이 있음에도 유독 서울에서만은 전과 같이 추징(推徵)이 이뤄지고 있으니 다시 이를 모두 금지해달라는 청이었다. 아마 서울에서도 좀 산다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추노 행위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숙종 39년(1713) 7월 30일, 우의정 김우항이 ‘추노 · 징채는 모두 장계에 의해서 하게 하라’고 상소한 것을 보면, 그간에도 이게 잘 행해진 것 같지는 않은 듯 하다. 암튼 보다 못한 김우항은 같은 해 8월 10일, 다시 상소를 올려 각도의 추노 · 징채를 모두 중지하게 해달라고 한다. 여러 시행 요구의 첫머리에 이제는 추노 · 징채가 거론될 정도이다.
숙종 39년 계사(1713, 강희 52) 11월 22일(병인) - 비국에서 한성부와 형조의 오래된 추노 징채는 천천히 처리할 것을 건의하다
비국(備局)에서 대계(臺啓)의 복주(覆奏)로써 청하기를,
“한성부(漢城府)와 형조(刑曹)의 오래된 추노징채(推奴徵債)는 천천히 처리하고, 그 나머지는 참작하여 청리(聽理)하고, 또 북도(北道)의 삼수(三水) · 갑산(甲山)과 육진(六鎭)의 세초(歲抄)는 명년 가을을 한정하여 정지하기를 허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추노 행위가 쉽게 근절되지는 않는다. 한성부와 형조에서 오래된 추노징채는 천천히 처리하고, 나머지도 상황에 따라 정리하고 명년 가을을 한정하여 정지하게 하자는 것이다. 늘 그렇지만 높은 양반네들이 자기들 잇속 챙기는데 불리한 정책을 쉽게 따랐을 리 만무하다. 결국 숙종 39년에 지속적으로 추노와 관련된 사안들이 논해지지만 쉽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종 1년 신축(1721, 강희 60) 4월 30일(경신) - 정사에 마음을 둘 것, 대간을 경시하지 말 것 등을 청하는 집의 임형의 상소문
집의(執義) 임형(任泂)이 소를 올려 일을 논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략) 덕산현감(德山縣監) 윤항(尹沆)은 친구를 위해 추노(推奴)하면서 조정의 금령(禁令)에 개의치 않고 소민(小民)을 침요(侵擾)해 두루 족속(族屬)에까지 미쳤습니다. 두 고을의 수령(守令)은 마땅히 즉시 파직하여야 합니다.”
덕산현감 윤항이 친구를 위해 추노하는데 조정의 금령도 무시하고 일반 백성들까지 괴롭히고 있다는 상소다. 숙종 때 그렇게 노력했던 추노징체 근절은 경종 때에도 여전히 지켜지지 않음을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관리들이 추노 행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그 행위가 심했음도 추측할 수 있을 정도다. 관리의 이런 작태는 다음 기사에 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경종 3년 계묘(1723, 옹정 1) 9월 29일(을사) - 사간원에서 도적을 잡는 핑계로 추노한 온성 부사 노흡을 삭거 사판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온성부사(穩城府使) 노흡(盧洽)은 일찍이 영남(嶺南)의 영장(營將)을 맡았을 때 도적을 잡는다 빙자하고 추노(推奴)를 겸하여 행했는데, 부민(富民)을 마구 침탈(侵奪)하여 받은 뇌물(賂物)이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청컨대 삭거사판(削去仕版)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온성부사 노흡이란 인물이 영남의 영장을 맡았을 때 도적을 잡는다는 구실로 추노를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추노꾼과 연계하여 이 일을 벌였는지(드라마처럼) 어땠는지 알 수 없으나 도적을 잡는다는 구실로 그러했다는 것을 보니 官兵들을 사적으로 동원해 추노질을 행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난리도 아니다. 여기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추노징채가 분명히 돈이 되는 행위이며, 썩어빠진 관리들도 여기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또한 관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목숨 거는 걸 보면 관리들이 개입하기 이전에 추노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던 사람들(드라마 속의 추노꾼들)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추노가 이렇게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면, 단순히 추노를 백성들이 고발해서 잡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사간원의 삭거사판 요청을 경종이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영조 즉위년 갑진(1724, 옹정 2) 10월 29일(기해) - 공무를 빙자해 사욕을 채운 경상감사 권이진과 진주영장 김박을 정죄하게 하다
하교(下敎)하기를,
“추노(推奴)를 엄하게 금하기를 거듭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닌데, 자신이 영장(營將)으로 있으면서 공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고 도둑을 잡는다는 핑계로 추노하고 있으니, 뒷날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방백(方伯)의 직무를 띠고 있으면서 파출(罷黜)만 청하는 것은 매우 소홀한 처사이다. 경상감사(慶尙監司) 권이진(權以鎭)은 종중추고(從重推考)하고, 진주영장(晋州營將) 김박(金鑮)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관리들이 추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상감사와 진주영장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도둑을 잡는다는 핑계로 계속 추노를 행하고 있다. 영조는 앞서 경종과 달리 부패한 벼슬아치를 처벌하라 이른다.
영조 14년 무오(1738, 건륭 3) 12월 25일(계묘) - 송인명이 노비법의 붕괴와 관련해 조가 3대를 노속이 살해한 사건에 대해 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노비에 관한 법은 이미 기자(箕子)의 팔조지교(八條之敎)에 나와 있습니다. 고려(高麗)의 조훈(祖訓)도 이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고려 말기의 식자(識者)들이 이 노비에 관한 법이 점점 무너져가는 것으로써 장차 망할 조짐으로 여겼습니다. 근래에 빈궁한 양반들이 이른바 추노(推奴)하는 경우 비리(非理)를 저지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매양 재해(災害)를 받은 해에는 반드시 추노를 금했으니, 진실로 백성들의 생업(生業)을 안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비에 관한 법이 또한 이로 인해 점점 무너져서 심지어 노비가 주인을 죽이는 변이 있기에 이르러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이 또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무신년의 역변(逆變)때 역적이 양반들에게서 많이 나왔으므로 문득 상한(常漢)들이 양반을 후욕(詬辱)하는 구실로 삼았습니다. (후략)”
재밌는 사실이다. 빈궁한 양반까지 추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이 빈궁하니 자신의 도망노비를 사람을 부려 쫓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딱 하나다. 돈 없는 양반네들이 직접 도망노비를 쫓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드라마 속의 장혁(양반네 도련님 출신)이 추노꾼을 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추노꾼을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그리 당당할 일은 아니고, 나라에서도 금령을 내린 일이므로 위험한 일이었지만(드라마에서 추노꾼들이 가짜 마패를 갖고 다니고 관리를 사칭하면서 다니는 것들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 그만큼 돈이 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달렸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거기다가 노비가 주인을 죽이는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니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영조 49년(1773), 홍주영장 이언방의 추노와 관련된 비리를 지탄하는 상소 기사를 끝으로 더 이상 추노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18세기 말에 추노징채가 어느 정도 근절되었단 말인가? 그건 또 아니다.『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 1년(1864)~고종 20년(1883)까지 31건의 추노 관련 기사가 검색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31건의 기사 모두가 추노징채를 내년 가을까지 보류해 달라~는 사실이다. 아마 흉년 때문에 먹고 살기 바쁜데 추노징채를 이때 행하면 국고 수입에 큰 차질이 있기 때문에 일단은 가을걷이를 한 다음에 추노징채를 실시하자는 미봉책을 제시하는 것일 것이다. 마치 25일 날 봉급날까지 어떻게든 사채든, 카드빚이든 기다려달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차피 봉급날이 되도 봉급은 여기저기 다 뜯겨서 돈을 갚을 수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은 19세기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어느 정도 추노징채가 시스템화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은 외거노비에 대한 추노징채 행위만 법적으로 잘 정비가 되고, 도망노비를 쫓아 돈을 버는 행위는 근절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튼 더 이상 추노징채를 갖고 관리가 처벌받거나, 죄 없는 양민이 고통 받거나,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등의 행위는『승정원일기』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있다. 그밖에『일성록』에서도 2건 모두 추노징채를 내년 가을까지 보류해달라는 것이어서 정조대부터 이와 관련된 제도가 어느 정도 법제화되어 정착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암튼 이상의 사실을 통해 몇 가지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1. 추노징채가 조선 초기부터 있었지만 그 정도가 심각하지 않았으며, 조선 후기(특히 조-일 전쟁과 조-청 전쟁 이후)가 되면서 심각해졌다.
2. 추노꾼의 존재를 충분히 상정 가능하며, 추노징채에 빈궁한 양반들은 물론, 직책 높은 관리들까지 깊숙이 관여하여 조선 후기 생업경제 활동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였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3. 국가에서 추노징채에 대한 금령도 여러 번 내리고 관련 규정도 법제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시행되지 않았으며 19세기 중반 이후, 즉 조선 말기에 와서 겨우겨우 안정화되는 경향이 보인다.
뭐 이 3가지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조-일 전쟁과 조-청 전쟁 이후 이에 따른 재정 곤란, 병제의 개편 등으로 조선은 더 이상 엄격한 신분체제를 유지할 수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노비안이 불타버려 노비들이 흩어져 버린 데다, 전란으로 농촌이 황폐화되고 경작면적이 줄어들었으니 이로 인해 납속책(納粟策)을 빈번히 시행하여 매관현상을 합법화하였다. 또한 노비들은 軍功, 功勞, 代口贖身 등의 합법적인 수단이나 노비가 양녀와 혼인함으로써 그 자손을 良人으로 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도모하였다. 심지어는 혼란한 시기를 틈타 도망치는 방법으로 제도 자체에 혼란을 일으키고 사회를 변동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으니 사회적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平木實 1982: 208). 추노 관련된 기록이 숙종 이후 급증한 것도 다 이런 사회적 현상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싶다.
‘추노’에 대한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고 나니, 이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나 연구는 어느 정도였는지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관련 논문들을 한번 찾아봤다. ‘추노’ 제작진들이 無에서 有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면 작품 제작에 저본이 될 만한 자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이 예상보다 길어져 뒷 내용은 다음 글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 참고문헌
『燕行日記』
『弘齋全書』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신기철 · 신용철 편, 1987,『새우리말 큰사전』, 삼성출판사.
平木實, 1982,『조선후기노비제 연구』, 지식산업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