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백혜선
“바로 그게 문제야. 자네의 가장 못생긴 발부터 앞으로 내밀어야 하네. 매끈한 발을 내미는 걸로는 모든 사람과 똑같을 수밖에 없어. 그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니까.
자네의 가장 못생긴 발이야말로 자네가 가진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구석을 드러내는 것이라네.”
누군가 나에게 연주자의 직업윤리를 물을 때면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연주자는 변명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만……”,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어깨가 좀 결리니 이해해주세요” 하는 말을 하지 않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연주자다. 어떤 불상사가 닥치든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 안에서 최선의 것을 가져와야 한다. 아니, 애초에 변명 따위를 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모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연습할 때는 스스로를 꽉 쪼아서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어떤 조그만 위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이 새까맣게 될 정도로 연마하되,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새하얗게 잊어버려야 한다. 걱정할 필요 없다, 실제로는 잊지 않았으니까. 타성에 젖은 음악은 완벽할 수는 있어도 관객에게 감흥을 전하지 못한다.
완벽을 넘어선 즉흥성을 담아야 감동을 주는 음악이 된다.
“그렇게 많이 치면 손에 굳은살이 박이지 않아요?”
그 말에 나는 무심코 내 엄지손가락으로 손끝을 문질러본다. 짧게 자른 손톱 아래로 말랑말랑하고 만질만질한 살이 느껴진다.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쳐온 뒤로 거의 항상 느껴온 촉감이다. 그럼 그렇지, 당연하고 다행인 일이다. 연주를 많이 하면 굳은살이 박인다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들 가진 오해다. 굳은살이란 오히려 피아노를 한동안 치지 않았다가 오랜만에 쳤을 때야 박이는 것이다. 고로 굳은살이 박였다는 것은 곧, 그 연주자가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뜻이 된다.
“너 책은 읽니?”
“네…… 조금요.”
대답이 신통치 못했는지 선생님이 한 번 더 캐물었다.
“지금은 뭐 읽고 있고?”
“지금 읽고 있는 건 없어요.”
적절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면 지금 당장에도 읽고 있는 책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그 무대는 완벽한 연주의 반복이었고,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연주에서 ‘완벽’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반복’은 문제가 된다.
피아니스트는 같은 곡을 치더라도 매번 전혀 다른 곡을 치는 것처럼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날 나는 내 경력을 통틀어 최악에 해당하는 연주를 선보였다. 최대한의 집중력을 동원해서 연주를 해나갔지만 중간중간에 감정선이 끊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수많은 연습으로 쌓아올린 실력도 준비되지 않는 자세 위에서는 모래 위의 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최악에서 최선을 다해본들 최악이긴 매한가지였다. 흐려지는 집중력을 총동원해서 붙잡았지만 거센 비가 들이닥치는 인력거 의자 위처럼 지금 이 의자 위에서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 보일 뿐이었다. 그 최악의 연주 중에서도 최악은, 곡을 끝내야 하는 지점에서 다시 곡 중간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피아니스트를 비롯하여 연주자라는 직업이 원래 그렇다. 보통의 직업은 인정, 성공, 성취, 보람, 지위, 유명세 등을 통하여 이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기 마련이다.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늦더라도 언젠가 마땅한 진전과 보상이 주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연주자에게는 노력과 성취의 등가교환이 주어지는 법이 결코 없다. 가끔씩 보상이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꼭 알아두어야 한다. 잔인하고 잔혹하지만, 정말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그 기분 좋은 박수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진짜 이것이 나를 향한 박수란 말인가. 내가 다시 무대로 나갈 때까지 이 박수가 정녕 이어질까. 결국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그만 나가자고 권하여 다시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에어컨도 없이 수천 명이 들어찬 공연장의 열기와 함께 여전히 이어지고 있던 박수 소리가 크게 전해졌다.
잘 풀리지 않는 듯한 오랜 날들을 살다보면 그것을 비정상이라 여기고, 겨우 뭔가 매끄럽게 잘 굴러가고 있구나 싶은 날들이 찾아왔을 때 마침내 나도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전의 생활로는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반드시 이 생활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온함이 반드시 정상일 필요는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벗어나서 연주자가(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더 나은 내가 되려는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성장이 있는 삶에는 좌절과 불안과 걱정이 필연적으로 함께한다.
첫댓글 사연인즉슨 요즈음 '콩'과 자주 노는데
백혜선의 작품집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평소에도 백혜선 자체를 좋아하지만
그녀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고,
업어 온 케이스입니다. ^^
음악은 백혜선의 것으로 하고 싶었지만
마음에 쏙 들어오는 음원이 보이지 않아
오랜만에 얀 갸브렉 듣고 싶어 올렸는데
내친 김에 데이빗 달링까지 ~~
그리고 다음 연주들도 이어 접하실 수 있을 것 같아 ....()....
저도
이 책은 안읽엇지만
이 책 리뷰는 읽엇고
...
이 책과 관련된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엇더랫어요
세계적 명성의 피아니스트로만 알앗는데 굴곡이 심한 개인사가 좀 의외(?)이기도 햇답니다
백혜선 음악의 깊이와 굵기는 삶의 질곡을 견뎌온 내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젊은 시절 미국에서 고생하며 공부에 열중했던 스토리를 오래 전에 알아서인지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공감하며 연주를 듣게 되더군요.
저는 그녀를 음악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아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