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목적 자회사를 설립해 의약품 개발, 의료용구 판매 등을 할 수 있도록 보건의료분야 규제완화를 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정책에 대해 누구는 의료영리화라고 지적하고 누구는 의료민영화라고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 정부도 의료민영화는 반대한다면서 의료민영화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도 의료영리화가 아니라는 말은 못합니다.
먼저, 우리나라 의료체계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병·의원 등 의료기관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의료기관의 95%는 민간병원입니다. 공공병원은 5% 밖에 안됩니다. 이 수치를 근거로 일부에서는 "우리 의료체계는 이미 민영화 상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병원을 민간이 소유했는지, 공공부문(국가, 지자체 등)이 소유했는지를 기준으로 따지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병원의 대부분을 민간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국가가 보건의료서비스에 개입하는 강력한 제도가 하나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전국민 의료보험체계입니다. 2012년 기준으로 국민의 97%가 가입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병·의원들은 국민건강보험 환자들을 의무적으로 진료해야 합니다. 돈이 된다고 병원 마음대로 민간보험 가입 환자만 받고 국민건강보험 환자는 진료를 거부하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이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라고 합니다. 국민건강보험과 건강보험당연지정제 덕분에 우리가 동네 병원에 가서 2~3천원의 본인부담금만 내고 기본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의료민영화는 큰 틀에서 보면 국가가 하던 역할을 축소하고 보건의료서비스분야를 시장에 맡기는 것으로, 공공병원을 민영화하거나, 국민건강보험이라는 공적보험 체계를 허물고 민간보험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료민영화의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입니다.
말 그대로 의료행위 과정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병원이 환자를 받으면서 환자를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겠죠. 현재도 병·의원들이 환자들을 진료하고 돈을 벌지 않냐고요? 물론, 병원들은 환자를 진료해서 돈을 법니다.
그러나 제동장치가 있습니다. 의사들이 또는 병원들이 환자를 진료하고 제 마음대로 돈을 받지 못합니다. 병원의 수익과 직결되는 의료수가, 즉 진료행위에 대한 가격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결정합니다. 건정심은 건강보험 가입자 대표 8명, 공급자(의약계) 대표 8명, 공익위원 8명에 복지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총 25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매년 의료수가는 물론, 건강보험에 대한 주요 결정을 합니다. 한 해 건강보험료를 얼마나 올릴지, 어느 치료행위나 약제를 건강보험으로 적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를 모두 건정심에서 결정합니다.
의료법에도 제동장치가 있습니다. 의료법 시행규칙 20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료법인과 의료기관을 개설한 비영리법인은 의료업(부대사업을 포함)을 할때 공중위생에 이바지하여야 하며, 영리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영리추구 금지를 법에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조항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병의원체계를 짚어봅시다. 의료법에 따르면, 병원은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조산사 등 자격증을 가진 개인이 설립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아닌 법인도 병원을 설립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의료법인, 사회복지법인, 재단법인, 학교법인 등 비영리법인에 한해 병원을 설립할 수 있습니다. 아산병원과 삼성의료원은 사회복지법인이 설립했고, 을지병원, 차병원, 길병원 등은 의료법인이 설립한 병원입니다. 세브란스병원 등 대학병원은 학교법인이 설립주체입니다. 즉, 이들 병원은 모두 비영리병원인 것입니다.
동네의 조그만 개인병원들은 국민건강보험제도의 통제 아래 놓여있고, 중대형병원들도 건강보험의 통제 아래 놓여있는 것은 물론 의료법상 영리 추구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대신 비영리병원들은 정부로부터 각종 세제 혜택을 받습니다. 결국, 의료 영리화는 이 규제들을 느슨하게 하거나 풀어서 병원들이 영리추구 행위를 수월하게 하도록 조건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히 병원이 벌어들이는 돈은 환자의 주머니에서 나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의료법상 각종 규제를 풀어서 병원들이 영리 추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게 핵심입니다. 대표적인 정책은 영리추구가 금지돼 있는 의료법인 병원들이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를 설립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 주려는 것입니다.
이는 의료계의 토양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조치입니다. 중대형 병원들인 의료법인 병원들은 병원수익을 병원에 재투자해야 합니다. 영리추구가 금지돼 있는 대신 재산세, 종합토지세, 면허세, 취득세 등을 감면해줍니다. 비영리법인인 만큼 환자들을 위해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의술을 펼치라는 취지에서 정부에서 이런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다만, 경영이 어려운 중소병원들이 있어서 정부는 현재 의료법인 병원들이 장례식장, 주차장, 산후조리원, 구내식당, 매점 등 제한적으로 부대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부대사업을 통한 수익을 병원 밖으로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부대사업을 통한 수익은 진료환경 개선 등에 재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대로 영리 목적 자회사 설립이 허용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부대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투자자,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됩니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의료법인 병원은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를 설립해 의약품 개발, 화장품·의료용구 개발 및 판매, 건강기능식품·음료 연구개발, 숙박업, 온천·목욕장업, 체육시설, 부동산 임대업 등의 사업 등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정부는 이외에도 투자개방형 외국병원(영리병원) 유치, 보험사의 해외환자 유치 허용, 줄기세포치료 임상시험 규제완화 정책 등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의료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규제했던 것들의 상당부분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제도를 고치지 않기 때문에 의료비는 절대 오르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있는 보건의료단체들은 '의료비 폭등'을 가져올 조치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누구 말이 맞을까요?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수도권에 대형병원을 갖고 있는 A 의료법인이 의료용구를 개발·판매하는 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A 의료법인이 50%를 출자했고, 나머지 50%는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았습니다. 주식회사인 이 자회사의 목표는 의료용구를 개발하고 팔아서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익 중 일부는 현금배당으로 투자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이 자회사가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는 의료용구를 많이 팔아야 합니다. 병원을 상대로 영업을 해서 판매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전에 자회사 입장에서 의료용구를 파는 가장 손 쉬운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A 의료법인 소속 병원에 의료용구를 납품하는 겁니다. 자회사의 지분 50%를 보유한 A의료법인의 입장에서도 자회사가 이익을 많이 내야 좋은 일이니 이는 서로 윈윈(win-win)하는 길입니다.
A 의료법인 소속 병원 의사는 자회사의 의료용구를 처방하거나 사용할 겁니다. 이 의료용구가 건강보험 급여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품이라면 그 부담은 국민건강보험 재정과 환자들에게 돌아갈겁니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비급여제품이라면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 개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정부 정책대로라면 앞으로 비영리 의료법인이 자회사를 만들어 다양한 형태의 영리 추구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환자의 의료비 부담이 증가할 수 밖에 없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비영리 의료법인이 자회사라는 우회로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고 그 돈은 다름아닌 환자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니, 의료비가 오르지 않는다는 정부의 주장은 거짓인 셈입니다. 현재도 병원들의 과잉진료 등으로 우리나라의 의료비 지출 증가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고입니다. 또 과거 보건산업진흥원은 개인병원 5%가 영리병원으로 전환할 경우 국민 의료비가 1조원 상승한다는 연구 보고서를 낸 바 있습니다.
정부 정책대로하면 자회사 설립이 가능한 의료법인은 840여개 입니다. 보건의료단체는 이는 이명박 정부 때 경제자유구역에 한해 영리병원을 설립하려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병원들을 영리병원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국민 의료비 부담이 가중될 거라는 얘깁니다.
병원이 자회사를 설립해 다양한 부대사업을 벌이면 병원 경영도 개선되고 의료서비스의 질도 높아진다는 게 정책 추진의 명분입니다. 그러나 의료의 공공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큰 보건의료서비스 분야의 상업화는 재벌과 경제계에서 줄기차게 요구해 온 것입니다. 의료영리화는 2000년대 초반부터 삼성의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에서 '의료서비스산업 제도개선 과제' 등을 발표하면서 방향과 논리를 제공했습니다.
2006년에는 노무현 정부가 의료법인이 병영경영지원회사에 출자해 수익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재계의 요구에 호응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본격적으로 영리병원을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의료업계는 '세기의 개혁, 꿈틀대는 의료민영화 조짐'(미래에셋 보고서, 2010. 5.)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회 입법으로 의료법인 부대사업 확대, 원격의료 허용, 의료법인 합병 절차 등을 마련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론의 반대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재계가 방향타와 논리를 제시했던 의료영리화는 박근혜 정부에서는 반환점을 돌아 결승선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국회 입법이 아닌 정부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시행령 개정 등으로 의료영리화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료영리화 논리를 제공했던 재벌들은 보건의료산업 진출을 착착 준비하고 있습니다. 삼성은 의료기기와 바이오제약을 5대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한 뒤 국내 1위 의료기기업체인 메디슨(자회사 편입)과 2010년 2월 치과용 엑스레이·CT 업체 레이(Ray)를 인수했으며, 송도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전자와 삼성에버랜드로부터 6천억 원 투자를 받는 등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성물산은 병원건립 및 의료물품 도소매업(케어캠프)에 진출했고, 삼성SDS는 의료 전산 시스템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는 병원과 합작해 스마트 헬스케어 시장 진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전 국민 의료 보장 체계가 없는 나라입니다. 65세 이상 노인 및 신체장애자를 위한 메디케어와 저소득자를 위한 메디케이드라는 공적의료보험이 있긴 하지만, 민간 보험 위주의 의료 보장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과 민간보험사가 직접 계약을 맺고, 특정 보험에 가입한 환자만 받기도 합니다.
미국에서 민간보험에 가입하는 방법은 회사에 다니는 정규직 직원이 회사를 통해 가입하는 것이 있고, 개인이 직접 가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 가입을 하게 되면 보험료가 훨씬 비쌉니다. 또 질병에 걸려 치료를 받고 나면 보험료가 급상승합니다. 수술 등 치료비 자체가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비싼 것은 물론입니다. 이런 연유로 미국내 전체 파산자의 절반 가량이 의료비로 인한 파산자입니다. 미국은 의료비용은 높고, 의료의 형평성은 떨어집니다. 저소득층, 서민 등에게 병원 문턱이 높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슈퍼 파워를 가진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평균수명, 영아사망률 등 보건의료지표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낮습니다.
우리는 국민건강보험이라는 공적보험 중심의 의료전달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당장 미국처럼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의료영리화 정책과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상반되는 정책입니다. 지금도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높지 않아 국민의 상당수가 다양한 민간보험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의료영리화로 의료비 지출이 늘어나는 가운데 건강보험의 보장성도 높이는 식으로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현재 의료비 지출 증가 추세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할 때, 건강보험 보장률을 그대로 유지하는데만도 2014~2017년 동안 46조원이 소요됩니다. 보장률을 70~80%로 높이기 위해서는 다시 추가로 15~37조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멕시코의 경우 의료민영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적 의료보험이 붕괴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멕시코 국민의 52%는 비싼 진료비를 부담할 수 없어 진료를 포기한다는 연구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부 정책 시행이 당장 미국의 참담한 의료현실을 우리 나라에 이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정책 방향이 의료민영화의 지옥문으로 들어서는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