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신도 못 지키는 왕
코로나 팬데믹(pandemic)으로 세계가 불안감에 휩싸였을 때, 여러 종류의 투자로
짧은 시간에 막대한 부를 창출한 젊은 사람들을 ‘영 앤 리치(Young and Rich)’라고
부릅니다. 단기간에 수백억의 자산가가 된 이들은 자신의 투자 방식과 마음가짐에
대한 자서전을 출간하며 제2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가
또 다른 ‘영 앤 리치’를 꿈꾸며 그들의 출판기념회에 참가하고, 강의를 들으려
몰려들고 있습니다. 어느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단기간에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에게 “왜 이렇게 투자에 열광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빨리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요.”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으니까요.
저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빨리 많은 돈을 벌고 싶어요.”
이제 사람들은 돈이 많아야 자유롭다고 여깁니다.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준다고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와 임금이 되어달라고 청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수 아브네르가 죽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침상에서 피살된 뒤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보호해 줄 힘세고 강한 왕이 필요했기에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했던’ 다윗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와 신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많은 돈을
모으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센 왕을 필요로 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사람들의 빈정거림, 조롱, 모독의 중심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왕이라고?”라는 비난이 가득합니다.
모름지기 왕이고 메시아라면 스스로 자신을 구할 힘이 있어야 남들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구하고 남들을 구하는 힘 있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서 남들을 구하는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그 무능함 속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전능합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돈과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십자가라는 왕좌에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글 : 여한준 롯젤로 신부 – 대구대교구
그 아이가 남기고 간 것들
바닷가 마을에 살아 서핑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제 아들 또래였던 그 아이가 어느 날 해초 더미에 걸려 익사 직전에 구조되었다는
지역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병원에 출근해보니,
서핑을 하다 구조된 아이는 제가 맡아야 할 환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너무 늦게 구조돼 상태가 점점 나빠졌고, 결국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간호사였던 저는 아이 엄마에게 너무나 힘든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혹시, 아이의 장기를 기증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건 어쩌면 아이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서 더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도
덧붙여야 했습니다. 아이 엄마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본 채 아무 말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리를 비켜주었고, 엄마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긴 설명이나 장기 기증에 대한 장황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저는 아이 엄마에게 장기이식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의 현실과
이식을 해주는 방법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손을 마주 잡았을 때
차가웠던 엄마의 손에 조금씩 온기가 돌았고,
제 말을 듣던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날 밤, 아이는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아이의 몸에서
아이를 지켜주던 장기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적출되고 있었습니다.
심장과 신장, 간과 소장, 피부와 각막, 뼈와 골수를 내어준 아이.
각각의 장기들은 기증을 기다리던 환자들에게 또 다른 생명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장기이식 세미나에서 그 아이가 선물해 준 장기이식을 도왔던
코디네이터를 만났습니다. 아이 엄마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통해 살아있을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에 묻고 있던 아들에 대한 아픔이 조금은 가벼워졌다고 했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오늘,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며
‘나눔을 실천하는 나’,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우리’가 되고 싶습니다.
저 역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작 장기 기증에 서명을 해 두었습니다.
누구에게 작은 희망이 되고, 나눔을 실천하는 나와, 우리가 된다면
주님 보시기에 더 없이 좋지 않을까요?
글; 전지은 글라라 / 『그래도,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