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며칠은 녀석이 팥쥐 엄마라도 된 양 이거해라, 저거해라 몸이 부서져라 일을 시켜 눈앞이 깜깜했는데 그 주일이 지나고 나자 월요일 아침부터 줄줄이 생필품이 한 보따리 배달되고, 일회용 용기에 깔끔히 포장된 요리들이 배달되고,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말끔하게 되어있는 옷들이 배달되면서 세탁물들을 싹 걷어가고.. 하는 바람에 거의 할 일이 없어져버렸다. 기껏 하는 일이라곤 배달된 물건들을 정리하고 그에게 때맞춰 식사를 차려주는 것 정도랄까. 그나마도 그가 새벽같이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통에 내가 차려내는 것은 달랑 그의 아침상 한끼뿐이다.
도대체 직업이 뭐기에 그렇게 날마다 꼬박꼬박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걸까?
옷은 매일매일 공작새처럼 갈아입고 나가지, 차는 값이 얼마나 나갈지 모를 국내에 몇 개 없다는 맞춤형 스포츠카요, 금액도 써있지 않은 백지 수표가 거실 탁자 위에 아예 수표책 째 굴러다닌다. 하고 다니는 모양새를 보면 패션모델이요, 차를 보면 자동차회사 간부, 집 꾸며놓은 걸 보면 수입가구회사 2세쯤 되는 모양인데....
알게 뭐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해답이 나오지 않자 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오디오 전원을 끄고 리모컨을 테이블 위로 휙 던지면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버렸다.
이상하게 피곤하네. 어제 1시에 자서 10시에 일어났으니깐.. 힉, 9시간이나 잤잖아?!
내 방의 알람시계가 고장나는 바람에 10시가 다 돼서 부랴부랴 일어나 보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안이 쥐죽은듯 조용했다. 아마도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나간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살펴보았지만 아래층 식당에도 어젯밤에 맞춰놓은 커피 메이커가 혼자 끓고 있을 뿐 누군가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가만, 어제 잠든 게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는데 이렇게까지 기척이 없다는 건 안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게까지 아침도 안 먹고 집 안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가 늦게 들어오던 아예 안 들어오던 전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전혀 아닌데도 이상하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누구는 저를 기다리느라고 새벽 한 시까지 잠도 못 자고 기다렸는데 외박이나 하고. 투덜거리며 기지개를 펴는데 문득 맞은편 소파 위에서 무언가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 하고 빛났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내 손바닥의 반밖에 안 되는 그의 최신형 휴대폰이었다.
"이건 왜 놓고 갔지?"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들어 절로 스륵 열리는 폴더를 밀어 열자 액정화면이 밝아지면서 '정원형'이라는 이름 석자가 나타났다.
"하여간에 지 이름 새기는 건 끔찍이 좋아하네. 집 문패도 정원형, 핸폰 배경에도 정원형! 웃겨!!"
괜히 심통이 나서 휴대폰을 휙 소파 위에 던져놓고는 식당으로 가서 토스터기에 넣을 식빵을 찾기 위해 냉장고를 뒤적였다. 녀석이야 외박을 했든 말든 아침은 먹어야 하고 3일전 생리대 사러 갔다가 핑계 김에 사온 식빵이 아직 남아 있으니 상하기 전에 얼른 해치워야 한다.
어디선지는 몰라도 1주일에 두 번씩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종류도 다양하게 배달되어오는 음식이 아니면 아예 입에 댈 생각도 안 하시는 까탈스러운 입맛의 소유자인 녀석이 식빵 같은 건 입에 댈 리가 없으니 버리지 않으려면 나라도 줄기차게 먹어야 하는 것이다.
아랫칸 깊숙이 집어넣은 식빵봉지를 끄집어내며 안을 살펴보니 냉장고 안은 어젯밤 내가 물을 마시러 내려왔을 때와 똑같이 하나도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확실히 외박을 하긴 하셨군."
왠지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토스터기에 거칠게 빵을 꾸겨 넣고있을 때였다.
챙그랑!
방음이 완벽한 집안에서도 놀랄 만큼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는 가 싶더니 이어서 우당탕- 뭔가가 한꺼번에 떨어지던지 아니면 부서지던지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뭐. 뭐야?!!"
그야말로 뛸 듯이 놀란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냅다 뛰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요란한 소리가 난 곳은 다름 아닌 복도 안쪽에 위치한 그의 방인 것이다.
평소 같으면 '방에서 뭔 소리가 난 걸 보니 녀석이 안에 있는 거겠구나' 생각하면서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겠지만 돌연한 사고에 어찌나 놀랬던지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방이라는 것도 잊은 채 방문을 벌컥 열고 우당탕탕 그의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무. 무슨 일이야?!!"
그러나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은 조금 어질러져 있었지만 여느 때처럼 옷가지뿐이었고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흐트러진 침대시트 뿐이다. 당황한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욕실로 통하는 복도 앞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발견하고는 순간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욕실이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후다닥 욕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더니... 세상에 내 방의 두 배는 됨직한 욕실 바닥에 청색 실크가운만 걸친 녀석이 죽은 병아리 마냥 축 늘어진 채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넘어지면서 찬장을 엎었는지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깨진 로션 병이며 쉐이빙 크림 병, 샤워코롱 병 파편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저기, 이봐요! 눈 좀 떠 봐요, 정원형씨!!"
뺨을 툭툭 치다가 아예 철썩철썩 때려봐도 아무 반응이 없어 아예 멱살을 틀어쥐고 그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릴 정도로 흔들어대다가 순간 머리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얌전히 내려놓고 정신나간 사람 마냥 맨발로 욕실 안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인공호흡을 해야 하나? 아냐,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웬 인공호흡?! 머리를 다쳤으면 어쩌지? 피는 안 나는 거 같은데.. 심장 발작 같은 건가?? 대체 어떻게 해야... 아, 맞다! 119!!!”
번뜩 생각이 나자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거실로 뛰어나가 전화기를 들었다. 거실 안을 헤맨 끝에 간신히 무선전화기를 찾아 버튼 세 개를 누르는데 어찌나 손이 떨리던지 이대로 그가 죽어버리면 어쩌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거의 비명처럼 냅다 소릴 질러주고(이미 주소가 이상하건 뭐하건 신경쓸 만큼 이성이 남아있지를 않은 상태였다.) 전화를 끊은 다음 미친 사람처럼 다시 욕실로 뛰어 들어가 보니 그는 아까 내가 눕혀놓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정원형씨.. 제발 눈 좀 떠봐요, 정원형씨..."
얼굴이 얼마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지 도저히 그 시건방지고 버릇없는 녀석과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의 얼굴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 뜨려가며 구급차가 올 때까지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엉엉 울어버렸다.
(07)
"급성 위경련입니다."
전체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인지 굉장히 인자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의사는 차트를 죽 훑어보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위경련이요...?"
"식사가 불규칙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인 것 같군요. 환자가 상당히 예민한 편인 것 같으니 보호자 분이 평소에 좀 더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일단 필요한 조치는 취해놨으니 오늘밤은 병원에서 보내고 사나흘 경과를 봐서 퇴원하셔도 좋습니다."
"저기.. 그럼 생명엔 지장이 없는 건가요..?"
내 질문이 뜬금 없었는지 의사는 눈을 들어 잠깐 나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그럼요. 보호자 분이 작정하고 괴롭히지 않는 한 생명엔 전혀 지장 없을 겁니다."
핫, 너무 멍청한 질문이었나?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한심한 질문을 하고 만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얼굴이 빨개진 나는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진찰실을 빠져 나왔다.
고작 위경련일 뿐인데 무슨 생명에 지장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녀석이 죽은 병아리 마냥 한없이 늦어진 걸 보고 지나치게 놀랬던 탓인지 날아간 이성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십년감수했네. 송장 치르는 줄 알고 진짜 내가 심장마비 걸려 돌아가실 뻔 했다.
나는 입원실까지의 긴 복도를 걷다말고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어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잠깐, 근데 대체 그 녀석이 무슨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위경련이람? 돈이 없어서 쪼들리길 해 아님 먹을 게 없어서 굶길 해! 저 나가고 싶을 때 나갔다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오고, 냉장고 열면 먹을 게 넘쳐나겠다, 돈은 집에서 썩어 문드러질 만큼 넘쳐나겠다.. 진짜 복에 겨웠다, 겨웠어!!!
나는 혼자서 얼굴이 하얘졌다 빨개졌다 해가면서 투덜거리며 복도 끝에 있는 놈의 병실로 향했다. 응급실에서 일단 치료를 받고 두시간 전 병실로 옮긴 다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 죽지는 않는 병이라니 한시름 놨지만 그래도 가족들에게는 연락을 해줘야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난 그에게 식구가 몇 있는지, 아니 식구란 게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는데... 고민을 하며 문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병실 문이 활짝 열렸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는데 뜻밖에도 안에서 나온 사람은 입고 있는 핑크색 간호사복보다 훨씬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간호사들이었다.
아까 체온이랑 심박수는 체크를 했는데?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그런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자기들끼리 걸어가며 어머, 어머 탄성을 해가면서 난리법석이 아닌가.
"이 선생 봤지? 저 환자 얼굴 진짜 예술이지 않아?"
"완전 000이야! 혹시 신인 연예인 아닐까?"
"연예인은 무슨. 무슨 재벌집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난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진짜 내 미모를 이용해서 꼬셔볼까? 딱 내 이상형인데..."
"어머, 벌써 내가 찍어놨는데 왜 이래?"
"소용없을걸? 사실 미모로는 내가 한 수 위 아니겠어? 누구한테 넘어오나 내기할까?"
여보세요, 간호사 언니들. 지금 저 안에 누워있는 녀석을 두고 그런 발언들을 하는 거요? 아니, 대체 감히 누구를 넘보는 거람! 사람을 무슨 집안에 있는 가구 보는 듯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저 냉혈한한테 그 미모란 게 통할 줄 알아요?! 일찌감치 꿈 깨시지!!
간호사의 신분으로 환자 얼굴을 보며 즐기러 온 그녀들의 태도에 발끈 화가 치민 나는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가 녀석이 잠들어있는 침대 맡에 섰다. 몇 시간 전 응급실로 실려온 그는 응급처치를 받고 진정제를 맞은 후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새하얀 베게 위에 곱게 머리를 대고 누운 그를 찬찬히 내려다보니 방금 전 여자들이 그렇게 호들갑을 떤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은 게... 평소의 날카롭고 냉랭한 모습과는 다르게 하얀 이마 위에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칼을 흐트러트린 채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그는 완벽하게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숱이 촘촘한 속눈썹이 둥근 뺨 위에 그늘을 드리우며 살짝살짝씩 떨리고 있는 모습은 가슴이 짠해질 만큼 천진하게 보였고, 약간 벌어진 도톰한 입술 사이로 색색 소리와 함께 엷게 배어 나오는 숨결에서는 어쩐지 우유냄새도 날것만 같아서 나는 왠지 모르게 명치끝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쳇, 자는 얼굴만 이렇게 애들이고 천사지! 눈 떠봐, 또 싸가지 없는 얼굴로 혼자 잘난 척 다 하면서 코끝으로 사람 부리려고 할껄?!
일부러 트집을 잡아 투덜거리면서도 혹시라도 그를 깨우게될까 봐 살금살금 침대 아래서 간이 철제의자를 조금 끌어내 앉았다.
가끔씩 그의 색색거리는 가는 숨소리와 가습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릴 뿐 병실 안은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흐트러진 시트를 조심스럽게 바로 덮어준 다음 링거액이 떨어지는 속도를 확인하며 한숨을 돌리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그의 얼굴을 아까보다도 찬찬히 시간을 들여 뜯어보았다.
생각해보니 벌써 6주 가까이 같이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그렇게 자주 눈썹을 찌푸리는 데도 불구하고 미세한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미간, 짙은 눈썹과 이어지는 굴곡에서부터 깎아놓은 듯 곧고 반듯하게 뻗어 내린 높은 콧날,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속 쌍꺼풀이 진 가늘고 긴 그래서 눈을 뜨면 서늘한 인상을 주는 눈매, 그리고 입술 산이 높고 선이 뚜렷해서 고집스럽게 보이는 입술과 군더더기라곤 하나 없이 날렵하게 빠진 턱 선까지.
"...한숨 나올 만큼 잘 생겼네. 진짜 얼굴만 보면 딱 내 타입인데 말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4인용 병실이었지만 다행히 다른 입원환자가 없는지 침대들이 텅 비어있다.
아무도 들은 사람은 없겠지?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 위에서 손바닥을 서너 번 흔들어본 다음 눈도 깜짝거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 내리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빠져나왔다.
뭐, 그 인간이 외모 하난 반반한 게 사실이니까. 나도 여잔데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거라구....
누구에게 인지도 모를 변명을 중얼거리며 복도를 지나다 문득 복도 앞에 붙은 대형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곤 움찔 멈춰 선다. 아까 봤던 간호사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내가 어딘가 굉장히 당황한 듯 허둥거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비치고 있다.
뭐. 뭐야? 기껏해야 그 녀석 자는 얼굴 한 번 본 거 뿐인데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이 난리야?! 누가 보면 진짜 반하기라도 한 줄 알겠네!!
생각하니 뜨거워진 얼굴이 욱씬거리기까지 해서 참을 수가 없어진 나는 얼른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찬물로 뜨거운 얼굴을 북북 씻기 시작했다.
감기기운이 있나? 대체 열이 식지를 않네!
아무리 씻어도 얼굴의 열은 내릴 줄 모르고 애꿎은 손만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시려와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나올 때 들고 나온 그의 점퍼를 뒤집어쓰고 삼십분 넘게 비상구 계단 창가에 서서 미련스럽게도 찬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08)
"우선 참기름에 잘게 썬 전복을 볶다가... 앗, 뜨거! ...다음에 믹서에 갈아놓은 쌀을... 이런, 물이 너무 많잖아?!"
얼른 냄비 안의 물을 국자로 떠내며 기름기 때문에 손에서 미끄러진 요리책을 주워 보고있던 페이지를 찾아 뒤적였다. 전복을 싸고있던 랩에서 떨어진 물기로 식당 바닥이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음에는 쌀알이 다 풀어질 정도로 오랫동안 익혀라...?"
요리책 화보 안의 맛깔스럽게 윤기가 도는 전복죽과 지금 냄비 안에서 끓고있는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한참동안 번갈아 바라보다 체념한 표정으로 뚜껑을 닫고 불을 줄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난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까.
냉장고 옆의 장식장에서 사기그릇과 작은 교자상을 꺼내며 복도 안쪽에 있는 그의 방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프긴 아픈 모양이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어느새 칙칙 소리를 내며 끓고있는 냄비를 열고 한 번 뒤적인 다음 다시 뚜껑을 닫았다. 죽이라는 게 보기보다 상당히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로운 음식이어서 벌써 세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태우지 않고 만들어낸 참이었다.
"에휴...."
난데없이 웬 가정부인가 했더니 이제는 팔자에 없는 간병인 노릇까지. 그치만 나라고 뭐 이걸 하고 싶어서 하나? 환자라 죽을 먹여야 한다는데 어떡해. 그렇다고 저 까다로운 입맛에 인스턴트죽을 사다 먹일 수도 없고. 결국 이 한 몸 희생하는 수밖에.
팔자타령을 하면서 투덜거리다 보니 죽이 어느 정도 다 끓은 것 같아 불을 끄고 정체불명의 흐물흐물한 액체를 식히기 위해 잠시 나무주걱으로 휘저었다. 하지만 그 전복인지 뭔지 모를 시커먼 게 불규칙적으로 뒤섞여 보기에 좋지 않았던 죽도 때깔이 고운 사기그릇에 얌전히 담아놓으니 꽤 그럴 듯해 보였다.
"뭐, 역시 뭐든지 일단 시도하다보면 안되는 일이 없다니깐."
요리 책에서 봤을 땐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지던 죽이란 음식을 그럴듯하게 끓여낸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면서 나는 작은 교자상에 죽 그릇과 수저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다음 그걸 들고 발소리를 죽여 복도 안쪽의 놈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일단 문 앞에 멈춰 서서 가만히 노크를 해봤지만 감감 무소식. 자나?
의아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휙,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뭔가 커다란 것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나가!"
히익?!!
고함소리가 들린 순간 스스로도 놀랄 만큼 민첩한 반사신경으로 재빨리 몸을 숙여 날아오는 것을 피했다. 천만다행으로 죽은 그릇을 조금 넘쳤을 뿐 무사했지만- 대체 지금 뭘 던진 거야?
"뭐야?"
내가 미처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침대에 기대 누워있던 녀석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기, 약 드시려면 뭐라도 좀 드셔야..."
"필요 없어!"
아니, 이런 왕 싸가지를 봤나! 진짜 세시간 넘도록 악전고투해가면서 끓여왔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도 '그럼 니 맘대로 해!' 라고 소리쳐주면서 방문을 소리나게 쾅! 닫고 나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놈의 안색이 정말로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지 발갛게 충혈이 된 눈동자에 까칠하니 푸르스름한 입술, 평소와는 다르게 무방비하게 이마 위로 흩어져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창백한 안색과 더불어 엄청나게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기, 그래도.."
"시끄러, 나가!"
아프다는 인간이 목소리 하나는 더럽게 크다. 진짜 보자보자 했더니- 나가면 될 거 아냐, 나가면! 위경련으로 죽든 말든 이제 난 모르니까 맘대로 하라고!!
소리쳐주고 싶은 걸 입술을 깨물어 참으며 홱 돌아서서 방을 나오려고 했을 때였다. 곧 죽어도 버럭버럭 나가라며 소리를 지르던 녀석이 돌연 윽, 하는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시트 위로 고꾸라지는 게 아닌가.
"어머, 왜 그래요? 괜찮아요?!"
"..신경 꺼.. 그냥 내버려 둬......"
깜짝 놀라 달려간 내게 힘겹게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쓰러져 버렸다. 놀라서 가슴팍에 귀를 대보니 다행히 호흡만은 정상인 것이 아마도 기절하듯 잠이 든 모양이었다.
참 내! 진짜 가지가지 하시는 구만.
그 모습을 보니 새삼 속이 울컥 뒤집혀 잠든 사이에 한 대 때려줄까 했지만 하필이면 목덜미며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와 나는 입술을 깨물고 놈을 노려보다 결국 물수건을 챙겨 녀석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열이 어찌나 높은지 찬 물수건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속눈썹이 움찔움찔 한다. 평소에는 정말 뒤통수라도 갈겨주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또 그런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자꾸만 약해지는 게... 아무튼 난 이 물러터진 성격 때문에 뭐가 안 된다니까!
RRRRRR-
얼음이 든 통을 조심스레 테이블 위의 대야에 쏟아 붇고 있는데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지? 전화 올 데가 없는데?
이 집에 붙어 산지 한 달하고도 2주가 넘도록 집에 전화가 온 적은 딱 한번 욱이 형에게서 온 것밖에 없었다. 어, 그러면 혹시...? 설마설마 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수화기를 들어보았다.
[.....죽을죄를 졌다. 그래도 한번만 용서해다오!]
역시나 욱이 형의 음성이다. 감기가 걸렸는지 잔뜩 코맹맹이 소리가 섞인 풀이 팍 죽은 목소리로 기어들어 갈 것처럼 말해오자 잠깐 울컥 올라왔던 게 금새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연락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진짜 미안. 가게문제까지 완전히 마무리지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보니 이제야 정신이 들더라.]
"그래서 가게는 다시 찾은 거야?"
[그럼! 그래서 내일 너 데리러 갈려구하니깐 얼른 짐 싸둬.]
가게 찾았단 소리에 반가워서 입을 헤 벌리고 웃다가 짐 싸두라는 말에 멈칫 표정이 굳는 걸 느낀다.
"저기 형... 나 내일은 못 갈 거 같은데..."
[뭐? 왜?]
"녀석.. 정원형씨- 여기 집주인 말야. 갑자기 쓰러져서 입원했다가 오늘 퇴원했거든. 근데 쫌 아까 또 쓰러져버렸네."
[그래? 쓰러졌어?]
"응, 급성 위경련이래. 진짜 송장 치르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니깐."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아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대답했더니 욱이 형이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근데 꼭 니가 옆에 있어야 하는 거야? 그 사람은 돈도 많으니까 전문 간병인사서 쓰는 게 훨 낫지 않겠어?"
"그런 사람들한테만 맡겨두고 나가면 마음이 안 놓이지. 식구들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인데 외부 사람 함부로 들이기도 불안하고. 무엇보다 몸 아픈 사람 혼자 두고 어떻게 나가..."
녀석의 체온을 재기 위해 체온계를 흔들면서 말하다 말고 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녀석이 어느새 깨어났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웃긴다, 야. 넌 무슨 식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
"형, 내가 다음에 다시 전화할게!"
급한 마음에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도 않은 채 황급히 전화를 끊고 나서 행여나 녀석이 소릴 지를까 싶어 침대에서 조금 물러서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몸은 좀 괜찮으세요...?
"......"
힘겹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그가 입술을 달싹였으나 열 때문인지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는 눈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묻는다.
"저..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아파."
아.....!! 간신히 입 밖으로 새어나온 그 속삭이는 듯한 말뜻을 이해하자마자 나는 불현듯 명치끝이 저릿해져 눈앞에 있는 그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열에 들뜬 푸른빛 도는 새까만 눈동자. 숱이 촘촘한 까만 속눈썹까지 지친 듯 물기에 젖어 투명한 느낌이다.
너무 열이 높아서인지 아마도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나는 자신도 모르게 창백한 그 얼굴을 손끝으로 가만가만 쓰다듬기 시작했다.
"많이 아파요?"
대답대신 그는 괴롭다는 듯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음.. 하고 고통이 묻어나는 신음이 메말라 거칠한 입술 사이에서 힘겹게 흘러나온다.
"저기 힘들면 말하지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순간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허둥지둥 그렇게 말하면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약봉지를 찾아 뒤적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물 컵을 찾아 가루약을 붓고 살살 저어 스푼으로 조금씩 놈의 입가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물론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턱으로 흘러 시트를 적시는 양이 훨씬 많았지만 그래도 용케 효과가 있었는지 조금 뒤 그의 숨소리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휴우..."
길게 한숨을 뽑아내면서 반시간쯤 후에 다시 체온계를 가져다가 체온을 재보니 좀 전보다 2도 떨어진 39도 5분. 일단 급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아 그새 다 녹아버린 물을 그의 방에 딸린 욕실에 가져다 버리고 냉동실에서 새 얼음을 가져다 수건을 적셔 쉴새없이 식은땀이 맺힌 이마와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간호한 보람이 나타나는 건지 새벽이 올 즈음에는 놈의 증세도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심하는 것도 잠시. 새벽 세시쯤 녀석이 갑자기 상태가 악화됐는지 괴로운 듯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는가 싶더니 결국 아까 힘들게 먹인 약을 물과 함께 시트에 토해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계속 고통스럽다는 표정으로 헛구역질을 해대는 바람에 나는 아까 그가 빈속이었다는 걸 뒤늦게 기억해내고는 '죽이라도 먼저 먹이고 약을 먹였어야 하는 건데.' 자책하면서 벽에 몇 번이고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기진맥진해서 반 기절상태에 있는 그를 두고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상황이 아닌가.
나는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정신 없이 움직이면서 땀으로 흠뻑 젖어 축축해진 시트를 벗겨서 세탁기에 넣고, 아까 만들어두었던 죽을 다시 데워 억지로 먹이고, 열에 들뜬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괴로워하는 그의 뜨거운 손을 잡아주면서 파리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그렇게 움직이는 사이 어느새 발코니 창에 쳐 놓은 버티컬 너머로 희뿌옇게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으으.....눈부셔.........
얇은 모슬린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편으로 천천히 돌아누웠다. 그렇지만 분명히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는데도 햇살은 길다랗게 쫓아와 눈꺼풀에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한참을 시트에 고개를 박으며 신음하다가 나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아우... 더 자고 싶은데..... 다른 때 같으면 동이 트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겠지만 오늘은 왠지 이상하게도 몸이 몹시도 나른하고 피곤한 게.... 하는데
쏴아아아아-
반쯤 몽롱한 상태로 시트 속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어딘가에서 아련하게 물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오나? 하지만 어제 일기예보에서는 그런 말 없었는데... 음.. 근데 비가 오면....
"어? 베란다에 빨래 널어놨는데!"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나는 눈을 번쩍 뜨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시트자락에 팔이 휘감겨 쿵!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바닥으로 요란하게 굴러 떨어졌다.
"아우우...."
바닥에 떨어질 때 정통으로 부딪쳤는지 욱신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방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엄청 낯익은 방이긴 한 거 같은데.... 입가의 침 자국을 손등으로 닦으며 두리번거리다가 뒤늦게 손에 아직도 축축한 수건을 꼭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제 찬 수건으로 얼굴 닦아주다가.. 기억이 끊어졌으니까..... 헉, 그럼 내가 어제 녀석의 침대에서 잤단 말이야?!!
그제야 간신히 어젯밤 상황을 기억해내고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물소리가 뚝 그치는가 싶더니 소리 없이 욕실 문이 열리면서 하얀 타올지의 가운만 걸친 듯한 그가 머리를 가볍게 털면서 나타났다.
나. 난 몰라아!!!!!!!!!
갑작스럽기도 하고 남사스럽기도 한 녀석의 출현에 뛸 듯이 놀라 기겁을 하면서 다시 침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자신의 침대 한 가운데에 앉아 있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이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맞은편에 있는 옷 방문을 열고 안에서 비닐이 씌워진 흰 셔츠와 검은색 정장을 꺼내 오더니 그 자리에서 갈아입기 시작했는데- 마치 내 앞에서 수 백 번은 옷을 갈아입어 본 사람처럼 어찌나 태연자약하던지 나는 순간적으로 '혹시 내가 눈에 안 보이는 거 아냐?' 하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순간적으로 드러난 속살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삼키며 눈을 감아버린다. 남자라고 거짓말을 해 놓았으니 대놓고 놀란 티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더라도 진짜 뻔뻔스런 놈이잖아? 지랑 나랑 뭐가 그렇게 친한 사이라고 함부로 벌거벗고 옷을 갈아입는담?! ...아, 남자들은 그런 거 별로 상관 안 하던가....?
중얼거리며 실눈을 살짝 떠보니 그새 옷을 다 갈아입고 이제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항상 젤 같은 것으로 깔끔하게 스타일링 한 모습만 보다가 자연스럽게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보니 어딘지 소년스럽고 신선한 느낌이다.
머릿결 예술이다. 짧은 데도 차분하게 가라앉는 게 반드르르 윤기까지 도는구나... 하면서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저기요..."
그새 또 녀석의 미모에 홀딱 넘어가 버리려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유리 테이블 위의 얄팍한 백금시계를 들어 손목에 채우고 있는 그를 향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야 벌써 이렇게 막 싸돌아다니면 어쩌냐고, 더 누워있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언제 아팠냐는 듯 생생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원상 복귀한 그에게는 그야말로 씨도 안 먹힐 소리일 테고. 그러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뭐라고 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고 싶긴 한데.... 음.....
"저기, 음... 아, 그러니까 아침이..."
"너 옷이 그거밖에 없어?"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더듬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지더니 난데없이 그렇게 묻는다.
"...예에...?"
"옷. 신경 안 썼는데 이제 보니 계속 같은 걸 입고있는 거 같아서."
뜬금 없는 질문에 얼른 이해가 가질 않아 멍청한 얼굴로 반문하자 눈으로 발끝에서 머리까지를 쓱 한번 훑어보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좀 더 길게 부연설명을 해준다.
"아... 제가요.. 그러니깐 기억이 잘 안 나잖아요, 기억상실증. 그래서 집이 어딘지 기억을 못해서요.. 나왔을 때 입고 있던 옷 밖에 없거든요."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갑자기 급조해서 둘러대느라 떠듬거리려니까 문득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느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는 그의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
혹시 의심을 하나? 설마 기억상실증이 거짓말이란 거 눈치챈 거 아냐?! 생각하자 머리에서 피가 싸악 식는 게 느껴지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난다.
"일어서."
헉!!! 쪼. 쫒아 내는 건가?!!!!!
"저. 저기요, 그게 사실은요..."
기겁을 해서 급한 대로 팔을 잡고 늘어지자 그는 얼굴을 팍 찌푸리더니 다른 쪽 손으로 내 손목을 냉정하게 떨쳐내고는 그대로 손목을 잡아 끌어당긴다.
"잠깐만 제 얘기부터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사실은요..."
"됐으니까 일단 나가자고."
애원을 하는데도 듣기 싫다는 듯 말을 뚝 자르고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녀석에게 한쪽 팔을 붙잡힌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텨봤지만 결국 그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밖으로 끌어 내지고 있었다.
아,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어떻게 밤새 절 간호하느라 고생한 사람을 이 엄동설한에 이렇게 모질게도 내쫓을 수가 있담?! 정원형, 이 천하에 다시없을 냉혈한 놈아아아아아아!!!!!!!!!!!
(09)
...대체 여기는 왜 끌고 온 거지...?
집에서 끌려 나온 지 한 시간쯤 뒤, 나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손을 대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천장의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 원형으로 늘어진 수많은 금줄과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총천연색 유리벽화, 그리고 아래에서 뿜어져 올라오는 분수의 오색조명이 흩어지는 <다이아몬드 스트리트>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명품관 홀에 서있는 녀석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기 여기는 왜..."
"보면 몰라? 옷 사러 왔잖아."
어엉? 뭐라고....?
어디 경찰서에라도 끌려가는 줄 알고 잔뜩 오그라 붙어 있었던 심장을 쓸어 내리며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쉰 나는, 그러나 곧 자다 깨서 세수도 못한 사람을 쇼핑한답시고 이런 데 끌고 와 버린 녀석이 얄미워져서 눈을 쫙 흘긴다.
대체 누가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 백화점에 옷을 사러 오냐? 아마 우리가 개장이래 첫 손님일거다!
엄청나게 휘황찬란하고 커다란 매장에는 손님이라곤 달랑 우리 둘 뿐으로 나머지는 모두 같은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은 판매원 몇몇 뿐이었다.
돈이 썩어 넘치는 놈이니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데 와서 흥청망청 쓰건 어쩌건 내가 참견할 바야 없지. 근데 어째서 나까지 세수도 못한 몰골로 이런 쇼핑 같은 델 끌려와야 하는 거냐구!
도대체가 녀석의 사전에는 오로지 '성급'이라는 단어만 존재하는 건지 무슨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듯 휙 하니 정신 없이 차에 태워진 후 외곽도로를 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서울시내, 아니 전국에서 옷값이 가장 비싸다는 백화점 명품관 입구에 멍청한 얼굴로 서있었다.
거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화살처럼 쏟아지는 판매원들의 시선이라니!
집에서 봤을 때도 어지간히 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싹 차려입고 이런 휘황찬란한 조명아래 세워놓고 보니 이건 무슨 몸에서 광채라도 번쩍번쩍 나는 거 같은 게- 녀석이 특유의 오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통로를 걷기 시작하자 손님 하나 없이 클래식 음악선율만이 잔잔히 흘러나오던 명품관 안이 삽시간에 술렁거리기 시작하는데... 멋모르는 남들이 보면 무슨 유명 연예인이나 어느 나라의 왕자라도 떴는 줄 알겠다.
"어머, 어머! 저 사람 좀 봐! 우리나라에도 왕자가 다 있었니?"
"설마. 무슨 영화배우 아닌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거 같애."
"난 첨 보는 인물인데, 얼굴은 완전 조각에 바디는 예술이고.... 한마디로 펄팩이다!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완벽하게 내 타입이네!!”
뭐, 조각? 예술? 펄팩 좋아하시네! 이 녀석이 대체 얼마나 사람 피 말리는 인간인 줄 알기나 하고 하는 소리야? 대체 그 간호사들이건 여기 판매원 아가씨들이건 놈에 대해서는 쥐똥만큼도 알지도 못하면서 조잘조잘 말들이 많아, 진짜!!
일전에 병원에서도 그러더니 녀석에 대한 여자들의 외모찬양이 어찌나 귀에 거슬리던지 나는 녀석의 뒤를 쫓으면서도 일일이 그녀들을 째려봐 주며 괜한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뭐 보아하니 녀석도 그다지 기분 좋은 얼굴은 아니지만.
옷 고르는 것을 도와주는 척하며 그 옆에 선 여직원이 아까부터 주위를 빙빙 맴돌며 계속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는 냉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서 그 옆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노골적으로 흘끔거리는데 신경이 쓰이지도 않나?
"하긴. 저 인간은 신경줄이 완전 생고무로 되어 있을 테니까."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왔다.
쳇, 완전히 짐꾼으로 끌고 온 거잖아? 생각해보니 은근히 열 받아서 투덜거리며 막 통로를 지날 때였다.
"...어...?"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다말고 통로 끝에 있는 맨 마지막 코너의 쇼 케이스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청남색. 원래 사치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옷은 비바람만 가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자였지만 연한 레몬빛 할로겐 조명등 아래 걸린 그 옷이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워 보여 나는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말았다.
"와, 진짜 고급스럽고 이쁘다..."
저런 걸 캐시미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손가락 푹 파묻혀 버릴 듯한 섬세하고 투명한 블루. 생각해보니 그도 저렇게 빛깔이 근사한 캐시미어 스웨터를 여러 벌 가지고 있었다. 잘못 세탁하면 어김없이 늘어나 버리기 때문에 그가 한 번 입고 던져놓을 때마다 거실의 벽난로에 불을 피우고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취급이 까다롭고 지긋지긋한 옷이라고만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찬찬하게 옷을 살펴보니 그런 소재만 고집하는 녀석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나는 쇼 케이스에 아예 얼굴을 박듯이 하고 서서 선망 어린 시선으로 그 옷을 올려다보았다.
저런 색 옷은 없었던 것 같은데. 녀석이 입으면 깔끔하니 잘 어울리겠네.
그런 생각이 들자 시선이 자동적으로 스웨터 아래에 붙은 가격표로 향했다. 뭐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곳에서 파는 옷은 많이 비싸겠다, 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냥 가격이나 봐두고 나중에 돈을 모으더라도... 가만 보자- 일, 십, 백, 천, 만, 십만......
"히이익! 오. 오십 만원?!!"
가격을 확인한 순간 너무 놀라 저도 모르게 유리에 철썩 달라붙었다. 내 눈으로 확인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고작 스웨터 한 벌에 오십 만원이라니! 금실로 만든 것도 아니고 아니 옷에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말도 안되는 가격이 매겨진 거지?
예전에 편의점에서 하루 예닐곱 시간씩 하루도 못 쉬고 한 달 동안 죽어라 일하고 받은 돈이 오십 만원 가량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나는 절로 입을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그렇게 부자가 많아서 이렇게 한달 알바 일당을 호가하는 옷을 걸어놓고 팔고 그렇게 된 건지... 우리나라에 돈이 썩어나는 인간들 많은 모양이네... 허허허.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허탈한 웃음이 다 나온다. 허탈한 마음에 비틀비틀 돌아서는데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듯 남색 유니폼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스타일 좋은 여직원이 시선이 마주친 순간 활짝 미소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손님. 그 옷이 마음에 드세요? 보여드릴까요?"
"...예에...?"
아. 아니, 저, 그게, 꼭 사려는 게 아니라 그냥 가격이나 한 번 알아보려고 한 거였거든요... 어찌나 당황을 했는지 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리며 뒷걸음질로 슬금슬금 도망가려는데 뭔가가 푹, 하고 뒤통수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보다는 밝은 색 계열이 좋겠는데."
헉! 넌 또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거냐?!
화들짝 놀라 돌아선 내 눈에 비친 것은 아니나 다를까 특유의 오만해 보이는 포즈로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녀석이었다. 대체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까딱, 하고 고갯짓을 해 보이더니 성큼성큼 나를 지나쳐 매장 한가운데의 푸른색 비단소파에 시건방지게 걸터앉아 짧게 명령한다.
"가서 입어 봐."
뭐, 뭘?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얼빠진 내가 입구에서 눈만 크게 뜨고 있자 좀 전의 그 여직원이 언제 찾아왔는지 때가 탈까봐 무서울 만큼 여리여리한 벌꿀 색 스웨터를 손에 든 채 나를 부른다.
그의 옷차림을 보고 한눈에 모든 걸 다 파악했는지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들러 붙어온다. 힘을 주면 뚝 부러질 듯한 가냘픈 팔목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있었는지 반항하는 나를 거울 앞으로 질질 끌고 가 코트를 벗기고 이리저리 팔을 끼워 넣더니 순식간에 머리위로 뒤집어 씌워서 돌려세워 놓는데 정말이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직 학생인가 봐요, 노란 색을 입으니까 너무 천진한 게 병아리 같아 보인다~"
학생? 병아리이?! 아니 지금 그게 칭찬이라고 나불거린 거랍니까?! 그리고 왜 은근히 반말을 하는 건데? 정말 끽해야 내 동갑이거나 또래로 보이는 구만- 진짜 빈정 상해서, 원!!
그렇지 않아도 남장을 해놔서(라기보다는 동안인 탓에) 제 나이만큼 대접도 한 번 못 받아 서러워죽겠는 판국에 학생이니 병아리니 어디서 그따위 망발을!! 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겉으로는 표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며 씩씩대는 나와는 달리 자리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별 표정이 없다.
그저 약간 고개를 기울인 채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 내 짧은 표현력으로는 도저히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는 묘한 표정이다. 덕분에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 나 '나 가버릴 거다!' 등등 당장이라도 버럭 소리치고 싶은 말은 그저 입 속에서만 웅얼웅얼 중얼거릴 뿐, 잘못 움직였다간 오십 만 원짜리 스웨터가 늘어나기라도 할까봐 옴짝달싹도 못한 채 힐끔힐끔 녀석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쁘다.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대어를 놓칠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표정이 눈에 띄게 초조해진 여직원은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눈웃음까지 쳐가며 눈앞에 대 여섯 벌이 넘은 옷을 꺼내 주욱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100% 캐시미어 소재의 어마어마한 가격표가 달렸을 법한 고급 옷들.
"하나씩 다 입어봐."
한 팔을 소파 뒤에 걸친 채로 지시를 내리는 녀석을 보니 울컥 화가 난다.
참나, 지가 무슨 리처드 기어라도 되는 줄 아나.. 밑도 끝도 없이 웬 귀여운 여인 놀이냐고! 가뜩이나 세수도 못하고 와서 쪽팔려 죽겠는데 내가 지금 옷 갈아입기 놀이 같은 걸 즐길수가 있겠냐고!!
분통이 터졌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가 녀석에게 반항다운 반항 한 번 해본 적이 있었던가. 왜 그렇게 그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못하는지 몰라도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신바람이 난 듯한 여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탈의실을 들락날락, 스웨터에서 조끼, 코트까지 열 두벌도 넘는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이지 드럽게 말을 잘 듣는 인간이다. 하지만 생긴 것만큼이나 취향이 까다로운 녀석은 좀처럼 제 눈에 들어오는 옷이 없는 건지 여간해선 O.K 사인을 해주지 않는다.
젠장, 눈 튀어나오게 비싸빠진 옷이라 입고 벗는 것만도 심장 떨려 죽겠는데 얼른 아무거나 고를 것이지!!
마지막 의상은 내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무렵 녀석이 저거, 라고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골라놓은 눈밭을 뒹굴어도 하나 춥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가볍게만 보이는 새하얀 패딩점퍼였다.
".....어떠세요....?"
어울리는 코디라며 겨자 색과 푸른색이 섞인 목도리까지 유행하는 스타일로 두른 나와 열 두벌도 넘는 옷을 입히고 벗기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여직원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다. 열 두벌이나 입어봤으니 이제는 제발 결정해. 라는 간절한 희망을 동시에 마음에 담고.
"좋은데."
그러나 막상 그의 입에서 저런 멘트가 흘러나오자 순간 둘 다 얼이 빠져 버렸다. 그 냉랭한 분위기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건만 놈은 푹신한 흰색 패딩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향해 여전히 거만하지만 뭔가 만족스럽다는 듯 나른한 미소까지 떠올리며 그렇게 말해준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좋은데.... 좋은데- 라니....!! 게다가 웬 미소?!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지라 내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잠시 의심스러웠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웃는 표정이었다. 여느 때처럼 찬바람이 쌩쌩 도는 냉랭한 표정이 아닌, 날카로웠던 인상까지 한순간에 달콤하기 그지없게 바꾸어버리는 어딘가 온기까지 어린 듯한 미소.
한 달이 넘게 같이 살았지만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언제나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그 이목구비가 가벼운 미소 한 번으로 그렇게 달콤하게 변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채로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리는 느낌에 사로잡혀 어떻게 해야할지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 바람에 목덜미에 닿는 고급 캐시미어의 촉감조차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금방이라도 입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럽게 요동을 치는 게 느껴진다. 내, 내가 왜 이러지..... 감히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푹 수그린 나는 포근하면서도 가벼운 패딩점퍼를 걸친 채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바닥 위의 신발 끝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서있었다.
"그럼 이걸로 포장해 드릴까요?"
이제야 그의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반색을 하며 여직원이 묻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가차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전부 포장하세요."
..........뭐. 뭐를 어떻게 하라고.........?
"저. 전부다- 요?!"
나 못지 않게 놀랐는지 여직원이 말까지 더듬어가며 재차 묻자 녀석은 귀찮다는 듯 말없이 재킷 안에서 은색 신용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허걱, 정녕 니가 미친 게로구나! 이게 한 벌에 얼마짜리들인데 한 두 벌도 아니고 몽땅 다라니!!
"몇 개월로 해드릴까요? 이 정도 가격이면 36개월까지도 할부로..."
"일시불로."
사색이 다 되어 버둥거리는 나와는 달리 행여나 녀석이 변심할까 두려웠는지 여직원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산을 하더니 커다란 쇼핑백을 한아름 들고 와 카운터 위에 산처럼 쌓여있는 옷을 모조리 쓸어 넣다시피 했다.
"여기 있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불룩하게 들어찬 쇼핑백 일곱 개를 건네주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온다.
"들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 자약한 표정으로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으며 녀석이 지시를 내렸지만 나는 도저히 간이 떨리고 손이 떨려서 그 쇼핑백들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저. 저기요, 저는 정말 이런 거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럼 버릴까?"
입술까지 다 떨려와서 버벅 거려가며 거절하려는 내 말을 자르고 대뜸 그가 날카롭게 묻는다.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버려? 지금 새로 산 이 옷들을?!! 대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엽기적인 짓을!!! 생각하면서도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쇼핑백 꾸러미들을 번개처럼 받아 안아버린다.
말을 꺼낸 이상 정말 그렇게 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성질 건드리면 오십 만원이 아니라 오 백 만원이 넘은 옷이라도 눈도 깜짝 안하고 버릴 수 있는 게 바로 이 정원형이라는 인간이 아닌가.
진짜 돈이 썩어난다, 썩어나! 이 딴 식으로 싹쓸이 쇼핑을 하니까 옷들이 그 넓은 방을 하나 다 차지하고도 넘쳐나지!!
목구멍까지 솟아오르는 말을 억지로 꾹꾹 눌러 삼키며 쇼핑백을 한아름 품에 안은 채 슬쩍 흘겨보는데 갑자기 앞서 걷다말고 잠깐 발을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
"선물이야."
....선물.....?
초여름에 활짝 봉우리를 터트리는 장미꽃처럼 머릿속에 그 말의 뜻이 팍 하고 머릿속에서 터지는 순간, 나는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놈을 쫓을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설마 밤새 간호해준 것에 대한 보답일까...? 정말로 녀석이 나한테 고마워하고 있는 거야...?"
품 안 가득한 쇼핑백의 묵직한 무게조차 느끼지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비록 고맙다고 직접적으로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녀석의 성격을 아는 이상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이건 녀석으로서는 최대한의 감사인사이자 성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그 금액이 지나치게 비싼데다가 선물의 양도 너무 부담스럽게 과해서 탈이지만.
에휴, 도무지 정도라는 걸 모르는 인간이라니깐!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양쪽 입 꼬리가 귀밑근처까지 주욱 치켜 올라갔다는 건 스스로도 느낄 수가 있다.
"거기서 뭐해?"
뒤를 돌아보며 내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알자 그는 여느 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한다.
"네, 지금 가요!"
행여라도 혼자 가버리면 이 많은 짐을 다 어쩔까 걱정이 되어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아까 걸쳐 보았던 패딩점퍼를 그대로 입고 있던 나는 눈사람처럼 뒤뚱거리며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아, 당연히 녀석이 내게 선물해 준 쇼핑백 일곱 개는 소중히 품에 안은 채지, 물론.
(10)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세상에, 진짜 열 두벌이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침대 위에 펼쳐진 가지각색의 옷들을 바라보았다. 발단이 되었던 문제의 오십 만 원짜리 벌꿀 색 스웨터를 시작으로 하얀색 패딩점퍼, 연회색 모직바지, 붉은 색 더플 코트, 크림색 폴라 티, 밝은 오렌지색 티셔츠, 파스텔 색조의 니트 서너 벌, 흰색 후드 반코트 등등.
"우와- 이 정도면 한 십 년은 거뜬히 날 수 있겠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옷들을 처음 가져왔을 때처럼 가격표도 떼지 않은 채 고이 잘 접어 쇼핑백 속에 넣어 옷 방의 구석에 잘 세워둔다.
아까는 당황하는 바람에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저 스웨터 하나만도 오십 만원씩 하는 건데, 그런 게 열 두 벌씩이나 된다면 못해도 오백......... 아, 생각하지 말자. 심장 떨리니까.
나는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옷 방 문을 살그머니 닫았다. 뭐, 워낙에 방 자체도 넓은 데다가 녀석의 옷이 방대하니까 그 안에 있는 저 쇼핑백은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 생전 저렇게 값비싼 옷을 다 갖게 될 줄이야. 선물이고 성의 표시라고는 하지만 그냥 받기에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것이라서 말이지.
"이제 와서 돌려주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덥썩 받자니 당췌 간이 떨려서 입을 수나 있을지, 원."
투덜거리면서도 어느 샌가 다시 옷 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쇼핑백 맨 위에 들어있는 스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우... 이 촉감 좀 봐바. 진짜 너무 포근하고 따뜻해서 잠이 다 올 정도라니깐.....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스웨터를 뺨에까지 가져다대며 그 촉감에 마구 도취되어 있을 때였다.
딩동- 딩동-
갑자기 정적을 깨고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는 게 아닌가.
"엄마야!!!"
넋을 놓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휘청, 하고 바닥에 고꾸라질 뻔한 나는 가까스로 무릎으로 바닥을 집어 균형을 잡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대체 누가 온 거지?
"누구세요?"
조금 아까 헤어진 녀석이 벌써 들어올 리 없고, 그렇다고 음식이나 세탁소에서 배달 올 날짜도 아닌데.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옷 방에서 나와 현관까지 가볍게 뛰어 나갔다. 그런데 누군지는 몰라도 문 밖의 성급한 방문자는 그 새를 못 참겠는지 탕탕하고 현관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 하는 거야, 문 안 열고!"
으응? 웬 젊은 여자 목소리?!
앙칼진 톤의 하이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인터폰으로 먼저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모자와 언뜻 비치는 꽃무늬 원피스뿐.
"누구세요?"
"누구냐니! 그러는 너야말로 누구야?"
머뭇거리는 내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들리는 꽃무늬 원피스의 반격. 거 성깔이 장난이 아닐세.
쾅쾅쾅쾅!
"문 열어, 문! 팔 아파 죽겠다구!"
대체 벨은 놔뒀다 국 끓여먹을 심산인지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며 문을 때려부수기라도 할 듯 두드려대는데, 더 지체하다가는 온 아파트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아서 백기를 들었다.
"아,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보아하니 젊은 여성인 것 같은데 강도일리도 없고(신원이 불확실하다면 아예 건물출입을 안 시켰겠지.) 아마도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적당히 상대해서 돌려보내야지. 생각하면서 얼른 현관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는 거야?!"
우와, 모델인가...?!
문이 열리자마자 홱 잡아 젖히고는 무작정 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들어오자마자 빽 소리부터 질렀지만 나는 그녀의 엄청난 외모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현관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이 반드르르하게 흐르는 긴 생 머리에 어쩐지 낯이 익어 보이는 눈 꼬리가 조금 치켜 올라간 고혹적으로 길고 갸름한 눈매, 끝이 살짝 들어올려진 콧날에 새초롬해 보이는 입술, 대담한 디자인의 검정색 슬립 원피스가 완벽에 가까운 가슴과 허리를 감싸고 한숨이 나올 만큼 길게 뻗은 다리는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모습이 마치 잡지에서 방금 걸어나온 모델 같아 보였다.
"그런데 원형이는 어디 가고 처음 보는 네가 있는 거야?"
역시 미인은 성격이 나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언제 봤다고 보자마자 대뜸 반말이라니.... 아니, 것보다 뭐? 원형이?!
"뭘 그렇게 멍청히 서있는 거야? 원형이 어딨냐니까?"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허리에 손을 척 올린 거만한 자세로 다시 버럭 소리를 질러댄다. 원형이라면 이 집 주인 이름이니까 제대로 찾아온 손님이 맞는 것 아닌가.
"집에 없어? 야, 정원형! 원형이 너 어딨니?"
얼떨떨해진 내가 대답을 못해주자 뭔가 짜증이 났는지 그녀는 샌들을 현관에 집어던지다시피 벗고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니며 그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저기, 이보세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집에 이렇게 멋대로..."
"어머머, 남이라니? 내가 왜 남이야?"
참다못해 마구 휘젓고 다니는 여자의 앞을 가로막고 섰더니 그녀가 기가 막히다는 듯 팔짱을 척 끼고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