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목시계 / 하늘꽃 윤외기
아버지가 하늘 나라로 여행가시던 그날, 장롱 서랍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손목시계 하나를 꺼냈다. 검게 그을린 가죽 줄은 세월속에 시달려서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유리면에는 햇살이 스쳐간 듯 자잘한 흠집이 남아 있었다.
초침은 이미 오래전부터 멈춰 있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체온과 숨결이 조용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나는 시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오래전 장면들이 물결처럼 가슴속으로 전율처럼 번져왔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논두렁과 밭도랑에서 하루를 시작해서 마치는 삶을 사셨고, 손목에는 늘 손목시계가 감겨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손등 위로 힘줄이 불거졌고, 여름이면 땀방울이 가죽 줄을 적셨으며, 겨울이면 찬바람이 손목뼈를 스쳤다. 시계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루와 계절, 웃음과 고단함, 그리고 가족의 시간을 묵묵히 기록하는 벗이었다.
아침이면 시계를 확인하시고 삽을 어깨에 메고 논밭으로 향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석양빛이 창가에 내려앉을 때, 하루를 무사히 마친 안도와 소박한 기쁨이 뒤섞인 웃음을 지으셨다. 그러나 시계가 기록한 날들 속에는 평탄한 날만 있지는 않았다.
장마로 하천가 논이 물에 잠긴 날, 온몸이 젖어 돌아오신 아버지를 맞으며 부엌에서 어머니가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숟가락 위에 걸린 초승달빛이 오독오독 씹히는 눈물 뼈처럼 느껴졌다. 그날 나는 어머니의 눈물이 단순한 짠물이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하는 애간장임을 처음 알았다.
시계의 바늘이 하루를 한 바퀴 돌 때마다 어머니 손등에는 굵은 주름이 새겨졌고, 아버지의 허리는 한 뼘씩 더 새우등처럼 굽어갔다. 그래도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바늘이 멈추는 순간, 가녀린 삶까지 무너질까 두려운 듯 고집스럽게 심장을 뛰게 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 머리엔 억새꽃 같은 흰머리가 돋았고, 그것이 어머니의 눈물과 맞바꾼 세월의 흔적임을 나는 훗날에야 깨달았다.
삼십오 년 전, 내 결혼식이 끝나던 날이었다. 하객들이 모두 돌아간 텅 빈 식당에서 아버지는 나를 불러 세우시더니, 손목시계를 풀어 내 손에 쥐여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제 이 시계는 네 손목에서 계속 뛰게 하거라.” 하시던 그 목소리에는 자랑스러움과 서글픔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그날, 아버지의 손목이 얼마나 가늘어졌는지,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나는 처음 보았다.
그러나 결혼 후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시계를 거의 차지 않았다. 세련된 전자시계와 스마트폰이 내 시간을 대신했고, 서랍 속 시계는 먼지 속에 묻혀 갔다. 그 사이 부모님은 시골집에서 더 늙어 가셨고, 몇 번의 계절이 소리 없이 흘렀다.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시계는 여전히 멈춘 채였다. 아버지 손을 잡아보니,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목이 내 손보다 훨씬 차가웠다. 그날 밤, 아버지 숨소리는 마치 잦아드는 파도처럼 점점 멀어졌다. 며칠 뒤, 아버지는 조용히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셨다.
장례를 치른 뒤, 나는 다시 시계를 꺼냈다. 초침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목에 차자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는 듯했다. 마치 아버지가 곁에서 “괜찮다, 천천히 걸어가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종종 황혼 무렵, 그 시계를 차고 둑길을 걷는다. 석양빛은 아버지가 바라보던 색 그대로이고, 바람 냄새도 변함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쩌면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 걸음을 세고 계실지도 모른다.
시계 유리에는 여전히 수많은 흠집이 남아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걸었던 시간의 자국일 것이다. 나는 그 흠집들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내 시간 위에도 부끄럽지 않은 흠집을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시계는 멈췄지만, 아버지의 시간은 내 안에서 흐른다. 언젠가 내가 이 시계를 내 아이의 손에 쥐여줄 날이 올 것이다. 그날, 이것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와 사랑, 그리고 가족의 역사를 품은 보물임을 내 자식은 알게 되리라.황혼길 끝, 그날의 맹세처럼 아버지의 손목시계는 오늘도 내 손목 위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수필집 언약의 길 중에서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