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확대 허조(許稠 1369년(공민왕 18년) ~1439년(세종21)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庵). 시호 문경(文敬)
허조(許稠)는 어질고 강직한 청백리로 세종때 예조 · 이조판서의 중책을 20여년간 맡아 국가통치 대강령인 ‘예제 · 법전’ 재정비하고 황희 맹사성과 세종시대의 3정승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1369년(공민왕 18) 4월 11일에 태어났으며, 5세 때에 이미 자품(姿品)이 순수(純粹)하고 식견(識見)이 밝아서 이미 성인(成人)의 모습을 띄었다고 한다. 8세 때에는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修學)하며, 뜻을 가다듬고 힘껏 공부하였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해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다.
1392년(태조1) 조선이 건국되자 좌보궐(左補闕) · 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 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 · 집현전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
1408년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趙大臨)사건에 연루되어 춘주(春州)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 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뒤에 이조 · 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 · 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自制)를 극간(極諫)하기도 하였다.
1415년 한성부윤 · 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 · 제조, 1418년 개성유후사유후 ·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부윤(恭安府尹) · 예조판서로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 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 한 이듬해에는 『속육전(續六典)』 『국조오례』의 편찬에도 착수하였다.
1426년 참찬 · 빈객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1430년 찬성을 거쳐, 1432년 다시금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孝子順孫)과 충현(忠賢)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야인(婆渚江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詞章)보다는 강경(講經)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라, 그해에 죽었다.
부음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매우 슬프게 여기어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고기 반찬을 거두고,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를 내렸으며, 관(官)에서 장사지내게 하고 원평부 향양리 갑좌 둔덕(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에 안장하였다. 현재 파주시 향토문화유적 제29호로 지정되었다. 1452년 세종 묘정에 배향되고. 시호를 문경(文敬)이라하였다. 효종4년 1653 금호동에 사당을 세우고 1684년에 위판을 봉안했다. 1724년 윤사월에 사이동으로 이건하고 1790년 3월 특명으로 금호서원이라 사액(賜額)하였다. 1871년에 훼철되었다가 1923년 5월에 지금의 부호리(釜湖里) 114번지에 복원하여 위판을 봉안,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