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연의 연인들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정아 씨와의 인연은 결과적으로 영우가 이곳에 더 오래 머물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는데, 정아 씨 소개로 이곳의 새댁? 들과 교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군인가족들 하고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다른 여자들과도 한번 안면을 트자 자연스럽게 교류가 빈번해지게 됐고, 깊은 대화를 많이
갖게 되면서 그들이 이곳에 머물게 된 각자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영우도 그들과 사연을 공유하게 되고 가깝게 지내면서 오히려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을 겪으면서 이곳의 생활에 점점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정아 씨에 관한 사연은 분분한데, 영등포 유흥가에서 일하던 여자라는 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원래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백화점에서
아동의류 판매원으로 일을 했었다. 그녀가 버는 월급으로는 자신의 생활비로 쓰고 고향에 어린 동생들 학비를 보태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꾐에 넘어가 선택한 직업인데, 그녀 스스로 유흥가에 발을 들여놓은 케이스이다.
그곳에서 일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때 박창기 중사님이 손님으로 오셨고 그곳에서 박창기 중사님을 처음 만나게 됐는데,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첫날부터 선배언니들한테 비슷한 이야기를 경험담으로 전해 들었던 정아 씨는 박중사와의 관계를 다음날 바로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정아 씨 생각에 박중사도 손님 중에 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치부해
버렸던 거였다.
그곳의 여성들은 생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누군가와의
사랑은 사치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박중사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 본 정아 씨 얼굴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숙했고 마주보고 대화를 할 때 정아 씨의 진지한 모습은 이곳에 있는 다른 여자들하고는 다르게 편안하고 진실해 보였다.
부대로 복귀한 박중사는 매일매일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벗어나 예전일하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처음 정아 씨는 박중사님의 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정아 씨는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사랑 고백을 그대로 믿기에는 더더욱 어려웠고 믿어서도 안될 일이라고 여겼다.
박중사의 편지를 받은 정아 씨는 처음 몇 번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된 구애편지를 받으면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고 한편으로 너무 매정하게 하는
것도 않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대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정아 씨는 박중사에게 답장을 보내기로 마음먹고 가까운 문방구점에 갔다. 정아 씨가 그곳에서 가장 예쁜 편지지를 샀다. 여고시절 도시의 남학생과 펜팔을 할 때 사보고 이후 처음으로 색깔 입힌 편지지를 사는 거다. 편지지가 비에 젖을까봐 옷 속 깊은 곳에 품고 달려온 정아 씨가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빗소리를 벗 삼아서 편지를 쓰는 정아 씨의 손끝에 따뜻한 온기가
고요하고 차분하게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편지를 보낸 후 곧바로 이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직장을 잡을 때까지 정아 씨는 새로 옮긴 조그만 자취방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 다행히 매일 도착하는 박중사 편지를 기다리며 답장 쓰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 교환으로 두 사람의 사랑과 믿음은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정아 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박중사의 편지가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기다려지기 시작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서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시작된 화제의 두 사람이 만난 지 일 년 만에 결혼을 했다는 풍문이다.
그래서일까 영우가 처음 봤을 때 첫인상이 조금은 화려하고 싹싹했던 모습이 그려졌다. 그녀의 장점은 한번 봤던 사람의 얼굴하고 이름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이곳의 마을사람들 이름과 가족관계를 전부 알고 있다. 게다가
항상 친절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환한 미소로 웃음을 지어 보여서 마을의 꽃으로
불려졌다. 그녀의 과거는 흉이 될 수 없었고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던져서 살아온 희생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정아 씨는 이곳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임이 분명하다.
그녀는 현재 방송통신대 영문과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는 중이다. 여고시절부터
영어에 소질이 있어서 어지간한 영문은 번역이 가능할 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영어 과목은 언제나 A학점을 받고 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한 아이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희망이 있다고 했다.
이름이 선미라는 여자가 있다. 영우보다 3살 위인데 한 살배기 아기가 있었고 남편이 나이가 좀 많은 김중사님이시란다. 원래 고향이 남쪽의 작은 섬이라고 하는데, 서울로 상경해서 직장을 다니다가 어느 날 야간근무를 할 때 직장의 반장님한테 불려 가서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해 강물에 빠져 죽으려고 혼자 강변을 서성일 때, 근처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지금의 김중사님이 그녀를 보고 느낌이 이상해서 말을 걸었다. 덕분에 죽으려던 생각을 접었고
이를 계기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어서 지금은 오순도순 잘살고 있다고 했다. 현재는 큰 길가에 있는 조그만 미용실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단다. 내년에는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라고 했다.
큰 길가에서 조그만 식료품가게를 하는 범수 아저씨네도 군인가족이다. 원래는
이곳에서 선대로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토박이인데 큰아들이 공부를 위해 도시로
나가서 살게 되면서 큰아들이 쓰던 방을 놀릴 수 없어서 세를 놓기로 했다. 그 방을 막내아들 용두가 갖기를 원했지만,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부모님 방에서 생활하기로 하고 그 방에 부엌을 따로 만들고 방문도 개조를 해서 허중사한테 세를 놓았다. 허중사님이 그 집에서 하숙을 하다가 아저씨네 외동딸과 눈이 맞아서 결혼까지 한 경우다.
원래 범수아저씨는 이름이 따로 있는데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아서 범수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허풍이 덧씌워졌을 테지만 얼핏 보기에도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이시다. 허중사님은 처음에 그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순희라는 이름의 그 집 딸과 몰래 연애를 하다가 범수아저씨한테 발각이 되었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불안해하고 있는데 범수아저씨가 허중사한테 지령을 내렸다. 한밤중에 개울 건너 산 아래 공동묘지 입구 근처에 있는 상여 집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한 거다. 그것을 완벽히 수행하면 당신의 딸을 주겠다고
했는데, 허중사가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일념으로 복숭아 나뭇가지 하나만 들고
상여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거다. 허중사가 부여받은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는 이야기인데, 아마도 사위 될 사람의 담력을 테스트하려는 속심이었겠지만 그런 경우 어지간한 배짱이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왜냐하면 이곳 마을 상여 집에는 밤마다 처녀 귀신이 나와서 울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낮에도 혼자서는 상여 집 방향으로는 잘 안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은 국경도 초월한다고 했던가, 하물며 그깟 상여 집에서 하룻밤 보내는
일쯤이야 별거 아니었다. 적어도 허중사한테서 만큼은 그랬다.
개울가 옆 슬레이트집에 월세로 살고 있는 이중사와 은정이라는 여자 이야기도 있는데,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동네오빠를 따라와서 살고 있는 여자이다. 원래 고향에서부터 은밀하게 연애를 하던 사이였는데, 그 오빠가 서울 가서 성공하면 은정 씨와 결혼하기로 약속을 하고 상경하게 되었다. 그 후 2년의 세월이 지나고
마음이 변한 이중사가 은정 씨 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공군에 자원입대를 해서
직업군인 됐다.
원래 고향에서도 이중사는 은정 씨와 결혼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은정 씨가
하도 매달려서 얼렁뚱땅 약속을 한 것인데, 은정 씨는 몇 년이 지나도록 잊지 않고 있다가 이중사가 자신의 집으로 보내온 편지 주소를 알아내서 이곳까지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은정 씨 왈, “오빠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 하니까 그렇게 알고 허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 라며 엄포를 놓았고, 이중사는 “내가 졌다” 라며 거의 공포를 느끼며 체념하듯 말했다.
은정 씨가 찾아온 처음 몇 달 동안, 이중사는 은정 씨한테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고 은정 씨는 못 간다. 나는 여기서 살 거다. 하며 버티면서 이틀이 멀다 하고 투닥 거리며 지냈는데, 요즘에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다른 군인 가족보다 다정해 보이기도 하다. 이중사가 처음에 왜 그토록 은정 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이중사
보다 은정 씨가 훨씬 옹골차고 잘나 보인다. 상냥하고 애교 있고 생활력 강하고
뭘 해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것을 보면 아들 가진 부모들이 탐낼 만큼 아까운 인물이다.
이중사도 이런 은정 씨를 잘 알고 있고 좋아한다. 추측컨대 이중사 생각에 고향에서 앞뒷집 살면서 서로가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에 그런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신선함이라든가 미지의 매력을 못 느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특히 이중사가 가장
불편해하는 것은 고향 친구들에게 놀림 받는 것이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결혼을
했더래요’ 하고 놀려댈까 봐 그것이 싫었을 것이다.
이들 커플은 여유자금이 생기면 부모님들만 모시고 이곳 횡계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당연히 고향 친구들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요즘 그들 커플에게 가장 큰 목표는 결혼자금 모으는 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 은정 씨는 대관령 휴게소에 제법 큰 식당에 일을 나간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점심시간 바쁠 때만 일을 하고 오는데, 조금이라도 살림에 보태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은정 씨는 성격에 맞게 이곳 생활에도 빠르게 적응했는데, 은정 씨의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은 여기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해서 마을사람들과도 금세 친분을 맺고
스스럼없이 지낸다. 물론 이중사도 비슷한 스타일이라서 그들 부부는 마을의 대소사를 빠짐없이 잘 챙기는 마을의 일꾼으로 소문나 있다. 은정 씨 사연을 알게 돼서 그런가 어쩐지 첫 인상부터가 당돌해 보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