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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 베드로전서 3:15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베드로전서 3:15) -마경훈목사 - YouTube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인생에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은 소망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심한 화상으로 생사의 기로에 처한 10대 초반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병원에는 청소년 환자가 많아 이들이 치료받고 학교에 돌아갈 때를 위해 공부를 가르쳐 주는 봉사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처음 봉사를 나온 대학생이 중환자실의 환자들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병실에 들어가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회복 가능성이 희박하던 이 소년의 상태가 기적처럼 좋아 지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의 붕대를 풀던 날 소년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소년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사실은 저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 대학생 형이 다음 학기 영어시간에 배울 문법을 가르쳐주기에 저는 확신했죠. ‘아, 의사 선생님들이 내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붕대를 친친 감고 있는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리가 없지.’ 그때부터 기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소망의 힘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베드로전서를 받아봤던 수신자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를 위하여 고난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가 있다면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 있었지만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3-4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거듭난 사람은 산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유업이 주어집니다. 유업은 유산을 말합니다. 그 유산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가진 소망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아파트요. 땅이요”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산 소망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40일 금식을 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시험을 이기신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가셨고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 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읽으신 성경 본문은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4:18,19을 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께서는 이 본문을 읽으신 후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주님이 전파하시는 복음의 능력은 복음을 받는 자들에게 소망입니다. 포로 된 자의 가장 큰 소망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눈 먼 자에게 가장 큰 소망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눌린 자의 소망은 자신이 눌린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19절에서 주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다고 했는데,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입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7번 지난 다음에 찾아오는 50번째 해입니다. 희년은 쉽게 말해 ‘리셋(Reset)’, 즉 모든 소유의 원상 복귀가 핵심입니다. 희년은 히브리어로 ‘요벨’인데, ‘뿔 나팔 소리’란 뜻입니다. 나팔을 불어 자유의 기쁨을 선포하는 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희년이 되면 노예가 자유를 얻고, 모든 소유가 원주인에게로 되돌려지며, 모든 땅은 휴경을 합니다. ‘환희, 축제’를 뜻하는 영어 ‘주빌리(jubilee)’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희년이 왜 축제입니까? 모든 것이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습니다. 그래서 노예에게 희년이 소망입니다. 경제적인 실패로 땅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 땅을 찾습니다. 그래서 땅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년이 소망입니다.
주님은 모든 부분에 희년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주시는 자유, 즉 소망을 몇 가지로 정리하겠습니다.
①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흠도 점도 없는 분이신데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이사야 53:5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찔리셨고 상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입니다.
②사망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사망도 해결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들의 소망이십니다.
③어두움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주님은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십니다. 여기서 눈 먼 자는 육체적으로 눈 먼 자와 영적으로는 진리에 어두운 사람을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못 믿겠다. 천국이 있는 것도 못 믿겠다.”고 하는지 아십니까? 영적으로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못해서 천국도 안 보이고 하나님도 안 보입니다. 우리는 천국도 믿고 하나님의 존재도 믿죠. 왜 그런지 아십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3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거듭나야 천국도 믿어지고 하나님의 존재도 믿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이십니다.
④무거운 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져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짐을 맡기면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마태복음 11:28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거운 짐을 지시고 주님에게로 오십시오. 주님이 안식을 주십니다.
우리의 무거운 짐 중에는 생활에서 만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12해를 혈루증으로 고통당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무리 가운데 끼어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순간에 그의 혈루 근원이 말랐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인을 치유한 것입니다. 그 여인은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질병입니다. 12해를 앓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여인은 경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가진 것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사회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레위기의 말씀에 근거해서 유출을 부정하게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랜 투병으로 가정도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 잖아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 여인은 주님을 만남으로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의 소망이십니다.
사람들이 가진 문제 중에는 질병의 문제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주님은 우리가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질병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소망이십니다.
사람이 가진 문제 중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주님은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해주십니다. 고린도후서 8:9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창조자이시기에 원래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난하게 되셨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소망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2. 육체의 부활입니다.
사람은 다 죽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이 소망입니다. 사도행전 23:6입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사도 바울은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죽은 자의 소망이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부활이 소망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15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총독 앞에서 변론을 하면서 자신의 소망은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은 두 종류입니다. 영생과 영벌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의인에게는 소망이지만 악인에게는 절망입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은 부활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물 한 방울도 구할 수 없는 절망이 가득한 곳입니다.
부활은 순서가 있습니다. ①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②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부활합니다. 주님은 구름타고 공중에 강림하십니다. 그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잠자던 자들은 부활하여 공중으로 들림 받고 살아 있는 믿는 자들은 변화되어 공중으로 들림 받습니다. ③불신자들의 부활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부활하여 무서운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벌을 받습니다.
주님이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죽어있다면 부활하여 휴거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때 살아 있다면 그대로 휴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부활입니다.
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이 썩고 죽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거기서 새생명이 나옵니다.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부활도 그런 것입니다. 육체는 썩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죠. 그런데 때가 되면 썩지 아니할 영체를 입고 부활합니다. 사람의 육체는 욕된 것인데 부활 할 때는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삽니다. 육체는 약한 것인데 부활할 때는 강한 것으로 다시 삽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도 각기 수준이 있습니다. 육체라고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도 있고 짐승의 육체도 있고 새의 육체도 있고 물고기의 육체도 있습니다.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별의 영광이 있습니다. 각기 영광이 다릅니다. 별과 별의 영광도 다릅니다. 부활하면 부활체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저의 영광과 제 아내의 영광이 다르고 여러분도 각자 다른 영광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 12장에서는 마지막 시대에 있게 될 큰 환난 후에 부활이 있음을 말합니다. 다니엘 12:2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영생의 부활과 영벌의 부활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12:3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여기서 지혜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날에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 같은 별이 아닙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듯이 각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영광이 다를 것입니다.
부활이 진정한 소망입니다. 양복임이라는 자매의 간증입니다. 어느 부활절에 친구의 손에 끌리다시피 해서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따라왔지만 자기가 왜 거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미 신앙을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신앙 안에서 만난 남편이 넉 달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너무 많이 사랑했는데, 그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부로 함께 산 세월이 겨우 일 년뿐인데’ 세상에 절망하고 자신에게 절망하고 그래서 삶이 끝나버린 듯 무척 괴로웠습니다. 결국 신앙을 버렸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친구와 교회에 들어갔을 때 자리는 꽉 차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온 것일까?’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밝아 보였습니다. 아무도 자기처럼 고통의 짐을 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자매는 안절부절 어쩔줄 몰랐습니다. 찬송이 울려 퍼지자 친구는 자매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강단 위에 서신 분이 성경 요한복음 11:25-26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순간 이상한 기류 같은 것이 자매를 감쌌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 자기 혼자 있는 듯했고 눈앞은 캄캄해졌습니다. 두려워서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휘저었습니다. 그때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그는 이미 죽었고 내 삶은 절망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음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는 계속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일까요?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겨우 한 마디 내뱉었습니다. “왜... 왜... 저를? 왜요?” 그때 빛이 자매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순간 눈앞이 환해졌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그리고 눈물과 콧물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때 자매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으로부터 솟아나는 큰 울림으로 몸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짐이 사라져버렸어. 이제 괜찮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자매는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죽었던 주님이 살아계시니 남편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자매는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남편의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부활이 소망입니다.
3. 영원한 천국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소망은 천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이 소망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했을까요?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이 있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준비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요 14:2-3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이 아버지의 집인 천국에 가시는데,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십니다. 천국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 된 곳입니다. 천국이 있음을 감사합시다.
사도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봤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습니다.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들어오고 보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지금의 하늘과 땅은 불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천국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데일 블랙이라는 사람이 ‘미리 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데일 블랙은 조종사였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조정하던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죽어있는 동안 천국을 여행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몸은 응급실 수술대에 누워있었는데, 그의 영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의 영은 천장에서 수술대 위에 누어있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봤습니다. 그는 경이롭고 아름답고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곳으로 아주 빠르게 이동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동행했습니다. 그 천사들은 체구는 크고 건장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보니 천국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마치 색채가 뛰어노는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천사들과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예배는 감격과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각 사람이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는데 찬양은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밝은 화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난생 처음 느끼는 평화였다.”
그가 보니 천국의 모든 집들은 다 아름다웠습니다. 각기 모양과 구조가 달랐습니다. 그 집들은 균형감이 뛰어났고 똑 같은 집이 하나도 없는데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국을 여행하면서 꽃들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꽃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지 놀라웠습니다. 꽃들은 각기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낯설지 않았고 그들에게서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이 밀려왔습니다. 나쁜 것이 하나도 없었고, 다툼과 경쟁이나 경멸함도 없었고, 기만과 거짓이 없었습니다. 천국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천국은 완전한 만족의 장소입니다. 환경적으로 만족스러운 곳입니다. 12개의 문이 있는데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있습니다. 진주가 얼마나 크고 아름답겠습니까? 길은 금으로 된 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말할 때 금과 같다고 하는데 천국에는 금이 가장 흔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도 천국에서는 도시의 아스팔트처럼 흔한 것입니다. 성벽은 온갖 보석으로 되어있고,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습니다. 그곳에는 해와 달의 빛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어린 양이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수정 같은 맑은 생명수 강이 흐릅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서는 12가지 열매가 열립니다. 달마다 다른 열매가 열립니다.
천국이 만족스러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엄마 품과 같습니다(갈 4:26). 아기에게는 엄마 품처럼 따뜻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 없습니다. 아기에게 엄마 품은 진정한 안식의 처소입니다. 천국에 들어간 그리스도인은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만족하고 안식하고 행복합니다. 천국은 다시는 저주가 없습니다.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아픔도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완전히 만족의 장소입니다.
천국에는 결핍이 없습니다. 목마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내면의 갈증을 느낍니다. 사랑에 목마르고, 돈에 목마르고, 인정에 목마르고, 성공에 목마릅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지만 또 다시 목마릅니다. 반면에 천국에는 목마름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6입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천국은 그 생명수 샘물을 마시는 곳입니다. 천국은 완전한 만족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음의 질문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오늘이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과연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 문제를 꼭 해결하셔야 합니다.
천국은 누가 들어갈까요? 이기는 자가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 21:7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가 천국을 상속받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이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기는 자일까요? 답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5:4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주님의 의가 믿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의로운 존재가 되며, 죄를 이기게 되고, 그래서 그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무엇을 할까요? 세 가지는 반드시 합니다.
①예배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천상의 예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매주일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지겨운데, 천국에서도 예배를 드린다고, 날마다 예배를 드려야 한다면 나는 천국 안 갈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예배의 감격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직 예배를 통한 황홀함을 체험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으면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만큼 행복합니다. 천국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감동보다 더 강력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에배도 행복입니다.
②안식입니다. 천국에는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몸은 신령한 몸을 입었기 때문에 피곤을 모르니 몸의 상태는 최고조입니다. 마음에는 상처나 근심이 전혀 없으니 완전한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빛을 뿌려주시고 기쁨을 뿌려주시니 너무나 행복한 안식입니다.
③사랑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거울로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듯이 하나님을 봅니다. 그때에는 사랑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우리는 호흡하듯이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세포는 사랑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천사도 사랑하고 만물도 사랑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사랑할 것입니다. 풍선에 바람이 가득하듯이 우리의 전인격이 사랑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완전한 사랑을 합니다.
톰 행크스(Tom Hanks)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톰 행크스는 극중 특급 우편배달 회사 직원으로 나옵니다. 1분, 1초를 아껴가며 정확하고 빠른 배달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태평양 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일상생활에서 겪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켜야 할 약속 시간도, 배달 시간도 없습니다. 천연의 시간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인도에서 주인공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며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우선 물질, 무인도에서도 필요한 음식과 의복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과 생각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감독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희망과 사랑입니다.
주인공은 머리맡에 사랑하는 여인의 사진을 놓아두었습니다. 사진 속에 여인은 주인공이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고, 날마다 약해져만 가는 주인공에게 무인도를 탈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주인공은 4년 만에 무인도를 탈출합니다. 탈출 후에 그 동안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던 사진 속 연인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였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가진 사랑, 희망은 그를 무인도에서 탈출하게는 하였지만 무인도를 탈출한 후에는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는 이미 사라진 희망을 붙들고 탈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를 나눴습니다. 그 소망은 우리를 이 땅에서 거룩하게 만들고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망은 영원한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1.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육체의 부활입니다. 3. 영원한 천국입니다.
첫댓글 감사^^*
"산 소망(1) 산 소망(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