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62
1월6일[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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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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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s1e-6wQ4Og (이현진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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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오늘 내 처지가 어떠하든 하느님께서는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이 장엄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오시는 예수님 머리 위로 하늘이 갈라지더니,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어 하늘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복음 1장 11절)
세례자 요한의 지극한 겸손의 덕이 돋보이기도 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더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만왕의 왕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과 같으신 분,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는 분, 무죄하고 순결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분께서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한 인간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회개할 죄라고는 티끌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인간 앞에 엎드려 회개와 참회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놀라운 자기 낮춤이며 겸손의 덕입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의 극단적 자기 낮춤 앞에 마음이 흐뭇해지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외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아들들인 우리 각자를 향해 똑같은 톤으로 외치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자격 없는 자녀, 죄와 결핍투성이의 부끄러운 자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과분한 칭송을 받는 우리 역시 주변 사람들, 자녀들, 손주손녀들, 제자들에게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우리가 인생 끝나기 전까지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할 진리 하나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내 처지가 어떠하든 하느님께서는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 비록 우리가 샛길로 빠진다 해도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소중히 여기신다는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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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요즘 잘 나가는 드라마의 명대사가 세간에 유행입니다.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특별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다른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환희가 되며, 은총이 되고 축복이 된다는 사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실수투성이요 상처투성이인 우리입니다. 부끄러움과 욕망 덩어리인 우리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언제나 가슴을 치는 결핍된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천덕꾸러기들인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존재 자체로 희망이 되고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참으로 신기할 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참으로 부끄러운 하루를 마감하면서 또 다른 작은 희망 한 가지를 지녀봅니다.
내일은 오늘처럼 우울하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희망 말입니다. 내일은 오늘과 달리 그 누군가에게 눈부신 존재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 말입니다.
여기저기 교구마다, 그리고 수도회와 수녀회마다 본격적으로 새 출발 하려는 예식들이 한창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눈부신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장엄서약을 하는 구도자들의 앞날을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보잘것없는 인간 존재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그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대명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에게 참으로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공적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광활한 대지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나만 생각하고 내 안위만 걱정하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공동선을 위해 헌신하고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기를 바랍니다.
벌써 오랜 세월 ‘포기와 이탈’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몸부림쳐온 수도자들은 진지하게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성찰해보는 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존재 자체로 세상 앞에 선물이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야 마땅한데, 혹시라도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느님의 진한 향기를 맡아야 마땅한데, 오히려 하느님을 떠나가게 만드는 요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납니다.
나란 존재 자체가 이웃들의 보람이요 행복이어야 하는데 반대로 고통이요 십자가라면 도대체 봉헌생활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겸손하게도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베푸셔야 마땅한데 뜻밖에도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사랑스러우셨던지 세례 순간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 복음 1장 11절)
세상의 모든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세상에서 수도생활 하는 우리 모든 평신도들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똑같은 칭찬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리 길지 않은 이 한 세상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눈부신 존재였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은총이고 축복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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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vrgzyEab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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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법: 요한의 세례를 청하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새로 나야 할 필요성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때 하늘에서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기다리는 현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공적으로 드러내시는 주님을 만나느냐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성령을 만나시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보다 낮아지는 방법입니다.
우선 복음을 전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준다는 말은 공범이 된다는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되 그 대상보다 낮아지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만나려면 복음을 전하되 가장 보잘것없는 이보다 자신이 죄인이라 인정해야 합니다.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는 가난하고 병든 한 장애가 있는 형제를 돌보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처음에 화장실도 없는 성남 지하 단칸방에 들어갈 때는 요강과 청소 안 된 방에서 풍기는 냄새에 토가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요강을 비워주고 설거지를 해주고 방 청소를 해주니 마지막으로 그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있었음이 미안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악취로 끌어안기 거북했지만 이내 안고 나니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으로 그분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이, 그 가장 보잘것없는 이와 내가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낄 때 주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차인표 씨의 예도 들어봅니다. 모태 신앙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습니다.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예수님에 관한 뮤지컬도 일부러 4년씩이나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내 대신 가난한 아이들을 만날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람들과 섞이기 싫어 일등석을 타고 가서는 인도하는 목사님에게 너희들은 귀중한 존재이고 사랑한다고 말을 해 달라고 부탁받습니다. 한 꾀죄죄한 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 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소중한 존재이고 너를 사랑한다.”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주님께서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특별한 존재라고 여길 때도 그 사람에게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나보다 나아 보일 때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이런 만남은 삶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차인표 씨의 아내 신애라 씨는 처음엔 차인표 씨를 무척이나 판단하고 정죄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은 이랬다고 합니다. “너나 잘해!”
성령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해야 할 때 그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타이베이 대교구 주보에 실렸던 고 산궈스 바오로 추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중에 이뇨제 처방받고 미사 하다가 오줌을 누기도 대변을 흘리는가 하면 수술대 위에서 소변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골고타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웃을 통해 나 자신이 별거 아닌 존재임을 깨닫고
자유롭고 싶다면 주님께서 분명 만나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 하는 자세입니다. 이때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해주십니다.
정리하자면, 이웃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면 먼저 복음을 전하려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더 큰 죄인임을 마음으로 고백하려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으로 고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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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행성’을 읽었습니다. 전작 ‘문명’의 후속작품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인류와 고양이가 새로운 대표를 뽑으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새로운 대표로 7명의 후보가 등록하고 자신들의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정치인의 대표는 지난 어려움을 자신이 대표로 있는 동안에 해결했으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군인의 대표는 자신이 군대를 동원해서 지난 어려움을 해결했으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명공학자는 바벨 바이러스를 퍼트려 상대방의 소통을 차단했고 어려움을 해결했으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호모사피엔스의 시대는 지나갔기에 생명공학을 이용해서 새로운 인류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원주민 대표는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류의 탐욕과 발전 때문이라고 하면서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오기 전에 아메리카는 생명이 가득한 풍요로운 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종교인 대표는 이런 모든 불행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문학자의 대표는 지구는 포기하고 이제 다른 행성을 찾아가자고 했습니다. 먼저 달에 기지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태양계를 넘어 새로운 행성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다른 행성으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고양이 바스테트는 후보로 등록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꿈’을 이야기합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이 함께 소통하고 연대하자고 합니다. 인간이 자신만의 욕심과 교만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면 ‘감염병, 테러, 전쟁’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석유를 무작정 뽑아내면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환경을 오염시키면 기후변화로 가뭄, 태풍,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3의 눈을 통해서 다른 종들에게 나누자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제3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대표를 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꽃이 피어 향기 가득한 세상입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어린아이와 늑대가 손을 잡고 다니는 세상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때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어쩌면 소설을 통해서 탐욕의 눈이 아닌, 욕망의 눈이 아닌 겸손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구를 떠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기존의 방법과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버팀목’이 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입니다. 그 버팀목을 얻기 위해서 때로 누군가를 속여야 하고, 양심을 팔아야 하고, 폭력을 사용해야 하고, 소중한 것들까지 버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지켜주는,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해주는 버팀목이 될 수 없습니다. 가까이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내면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불꽃을 꺼지게 합니다. 아버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아직도 제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십니다. 성인이 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사제들에게는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십니다. 돌아보니 수많은 분이 제게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분들의 기도와 사랑이 오늘 저를 있게 한 것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분이 오십니다. 온 우주의 버팀목이 돼주시는 분이 오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희생하고, 자신을 봉헌하며 온전히 사랑할 때 참다운 세상이 도래하고, 모든 이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승리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하면, 주님을 믿으면 참된 평화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고, 주님과 함께하면 우리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으며, 주님께 의지하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해주는 ‘성체성사’와 가까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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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7-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역시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7절). 요한은 자신을 철저히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주인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종과 같이 이것은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8절). 마르코가 여기에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한 것은, 요한의 세례에는 성령이 작용하지 않았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내린다고(참조: 사도 19,3-6) 그렇게 기록하였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요한의 증언을 소개한 다음, 즉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영으로 사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확신한 것을 여기에 고백하고 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강한 소명 의식을 지니셨기에 세례를 받으신 후 고향과 친척과 직업을 등지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룩하는 일,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예수님 홀로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신다. 그 내용을 보면 하늘이 갈라지며 하느님의 영이 예수께 내려 그분은 하느님의 힘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어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절).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은 요한계 문헌에 나오는 “외아들”(요한 1,14.18; 3,16.18; 1요한 4,9)과 같은 의미이며,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이사 42,1)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일정한 사명을 부여하시려고 선택하셨다는 뜻이다. 바로 이사 42,1의 “야훼의 종”이라는 인물이 자신은 죄가 없음에도 세상의 죄에 대해 대신 속죄하려고 고난을 겪는 종으로 예수님도 야훼의 종처럼 살아가도록 선택되셨다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성령 안에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당신이 죄 없는 하느님의 고통 받는 종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임을 복음은 전하고 있다. 이제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자녀들로서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즉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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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 마르코 복음서를 시작하는 이 표현은 복음서 전체의 요약이자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그렇게 고백하도록 하는 것이 마르코 복음의 목적입니다. 이에 맞게 복음서는 두 번에 걸쳐 신앙고백을 전합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 다른 하나는 십자가 곁에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 두 인물의 신앙고백은 마르코 복음의 핵심이며, 위치상 복음서의 중간과 마지막에 자리하여 복음서의 시작과 함께 큰 축을 이룹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로 공생활을 시작하셨다고 알려 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지이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이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다른 이들이 받아야 하는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몸소 보여 주신 본보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례 뒤의 모습은 웅장합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씀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구약 성경의 전통을 따르면서 복음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예수님의 호칭이자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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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작년 가을, 아주 어린 시절에 우리 가족에게 교리교육을 해주신 인보성체수도회 오 수산나 수녀님이 사진 한 장을 보내주셨다. 이 사진은 단기 4291년(1958년) 4월 6일에 찍은 흑백사진으로, 어머님이 청평본당에서 윤을수 신부님(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께 세례를 받고 찍은 가족사진이다.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었는데, 중간에 잦은 이사로 분실하여 늘 마음으로 아쉬워했었다. 가족들이 아버지·어머니 주위에 서 있는데 묘하게도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아버님의 친구이셨던 고 김홍섭(바오로) 판사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다.
그렇다! 「무상(無常)을 넘어서」의 저자, 지금까지도 법조인의 귀감으로 존경받는 사도 법관 김 판사님이 주말이면 우리 집 사랑방에 머물며 전도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선하고 마냥 온유하고 인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서재에 모시니 방안이 따스하게 안정을 찾은 듯하다. 전통적 유교문화에서 살아온 한 가정이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한 것은 그 가정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로 전환된 것을 뜻하며 각 사람한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도 요한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 5,4)라고 선언하신다.
세례는 예수님의 영이 우리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움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모님의 태중에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듯이 같은 성령께서 우리 인간 각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룩하심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됨을 말함이니,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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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보지만 동시에 험악함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어서 아름답지만,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카인의 살인 같은 죄가 가득한 이 세상의 추악함을 대면하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사도의 이 말씀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증언하면서, 그분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면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험악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끌어 올려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면서 점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시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지니는 특권을 누리며 삽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미약한 우리의 삶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으로 채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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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
마르코 1,7-11 (세례자 요한의 설교,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분>
하늘에서
땅으로
그분 오시어
하늘과 땅
그 사이에
그분 계시니
하늘은 땅으로
땅은 하늘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하늘이 되어
그분 안에서
하늘도 땅도
오롯이 하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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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가정 방문을 하면 신발을 바로 놓아주고 먼지도 털어주고 가끔은 구두약도 발라 윤을 내주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면 미쳐 단정하게 하지 못한 미안함도 있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예수님 당시 풍습은 주인이 외출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종이 신발 끈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뒤에 오실 주님을 선포하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다”(마르 1,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자기 자신은 감히 예수님 앞에서 종노릇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품위가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라며 지극히 겸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한창 인기가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그 인기를 누릴만한데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오실 주님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큰 겸손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나를 추켜세우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그 바보의 몫, 겸손이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목입니다. 겸손으로 세례자 요한의 뒤에 오신 주님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는 “너는 나의 귀염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이다.”(이사 43,4)라는 말과 같다.
하늘이 갈라졌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세상이 인간의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사63,19)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에게 내려왔다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의 활동이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가끔 신자들이 나는 추기경님께 세례를 받았네, 어떤 주교님께 세례를 받았네 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누구한테 세례를 받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오는 은총은 베푸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내려오는 것은 하늘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물론 세례를 주신 분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은총을 얻게 되었으니 그분이 영적 은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마운 만큼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에 마음을 더 두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무리에 섞여서 마치 당신 자신도 죄를 고백하여야 할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마치 불 속에 있는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듯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처지가 되어서 오신 것입니다.
무능력한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능력을 지니고 죄인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어둠 속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의 코에 입김을 불어 넣어 숨을 쉬게 하신 생명의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겸손 옷을 입고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성 예로니모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겸손의 그림자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그 덕을 가진 사람은 적습니다.”(성 예로니모)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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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코 1,7-11)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더군다나 느지막하게 얻은 아들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하느님과 만남을 위해 광야로 나갑니다.
또한 광야에서도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지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로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따라서 조금만 메시아 흉내를 내어도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마치 하느님 모시듯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명성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것들 모두가 필요 없음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만이,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행동하는 지혜로움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욕심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행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용기와 지혜 그리고 겸손함이 주님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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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싸워야 한다. 싸우되……>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싸움의 고수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하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여기에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될까요?
예를 들어, 세상의 불의가 있는데 이 불의에 대해 우리 교회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우리 신앙생활만 충실히 하면 그것이 싸우지 않고도 세상을 이기는 고수의 방법일까요?
오늘 독서도 이와 비슷한 뜻으로 얘기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건가요? 이런 뜻이라면 일제 강점기 우리 한국 교회가 취한 태도와 비슷하고, 지금도 세상의 불의에 대해 침묵하라고 하는 많은 신자의 주장과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교회는 일제의 억압과 만행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동양 평화를 외치며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에게 성사조차 불허했는데 이것은 일제에 의해 교회가 폐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의에 침묵한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독재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고,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침묵할 것을 독재정권은 강요했고, 일부 신자도 같은 논리로 사회 문제나 불의에 교회가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하고 잘 알아야 할 것은, 교회가 사회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면 안 되는 것이지 복음적으로 증거하고 싸우는 것까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도 세상과 싸우지 않으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의 불의와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진정 사랑한다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싸웁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이요, 메시아라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둘입니다. 물의 방법과 피의 방법입니다.
박해시대 때 피를 흘려 신앙을 증거 하는 것과 복음적인 삶으로 신앙을 증거 하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었듯이 말과 행위로 그러니까 삶으로 불의를 고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물의 방법과, 어린 양처럼 피 흘리고 죽음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는 피의 방법 두 가지입니다.
간디가 불의와 싸우지 않은 것이 아니고, 다만 비폭력적으로 싸운 것뿐이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랑하셨기에 싸우셨고, 사랑으로 싸우셨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셨기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의 죄와 싸우셨습니다.
우리도 개인의 죄든 세상의 죄든, 비겁하게 못 본 척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싸우되 감정적 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폭력적으로 싸우지 말고, 이념적 정치적으로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면 됩니다.
사랑 때문에 싸우고 사랑으로 싸우는 것이 최고수의 싸움임을 한 수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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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 진리이신 예수님을 잘 증언하는 삶 -
-“바위를 굴리려면 있는 힘 힘껏 함께, ‘내 알 바 아니다’라는 말은 사회를 어둡고 차갑고 험난하게 한다. 누군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작은 손이나마 내미는 것으로도 세상은 변할 수 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50대 넘으면 마음 같은 것 좀 꺾여도 된다. 나이 들어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세상은 아집이나 꼰대짓이라고 한다. 괜한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가슴에 새기지 말고 마음은 꺾고, 허리는 세우는 새해 되시길 바란다.”-
어제 컬럼을 읽던 중 마음에 와닿은 글입니다. 이 또한 넓게 보면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겠습니다. 요즘 가톨릭교회는 어제 장례미사를 치른 교황 베네딕도 16세 일화로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한평생 주님을 증언했던 삶에 대한 찬사들입니다.
-“위대한 인간에 위대한 신학자”
“탁월한 겸손의 증거”
“끝까지 주님을 사랑했던, 예수님 얼굴을 찾았던 분”
“우리 시대의 예언자”
“참으로 놀라운 사람”
“복음 안에 푹 젖어 살았던 신학자”
“교리에 있어 위대한 거장”
“베네딕도, 이제 당신의 기쁨이 완성되었습니다!”-
어제 미구에 출간될 신선했던 책 제목 “God is Always New(하느님은 언제나 새롭다)”를 순간 ‘New’를 ‘Now’로 착각하여, “God is Always Now(하느님은 언제나 지금이시다)’ 오역했던 것이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 하느님은 언제나 ‘새로움’의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 역시,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겠습니다.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베네딕도 16세 교황을 도와드렸던 겐스바인 비서 대주교와의 인터뷰 중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베네딕도 교황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진리의 협력자’가 그분의 모토다. 진리는 생각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의 인격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자렛의 예수 안에서 육화되셨다. 이것이 그분의 메시지다. 그러니 진리는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것이 그분의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짐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의 모든 짐을 날라다 주는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기쁨을 준다.”
참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이신 주님을 증언하는데 전생애를 바친, 평생 예수님의 얼굴을 찾은 베네딕도 교황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히 주님을 증언하고 예수님도 이에 화답하듯 겸손히 하느님을 증언하며, 하느님도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한 세례자의 주님을 증언하는,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어 친히 자신을 낮추시고 겸손히 요한에게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증언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에 감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친히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을 증언하고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은 어떻게 주님을 증언해야 할까요? 예닮의 여정을 살면서 진리이신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가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을 믿는 사람입니다. 물과 피로써 오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은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 바로 물과 성령의 ‘세례성사’로, 피의 ‘성체성사’로 당신 아드님을 증언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은 증언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신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세례성사와 매일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지니게 된 우리들이요 바로 이것이 주님을 증언하는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참으로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예닮의 여정’중에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일 때, 발광체發光體 주님을 날로 환하게 잘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로서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겸손히, 항구히, 사랑이자 진리이신 주님을 잘 증언하는 삶을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을 믿는 저희를 인자로이 비추시고, 주님 영광의 찬란한 빛으로 저희를 밝히시어, 저희가 구세주를 올바로 알아보고 충실히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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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오늘 복음(마르 1,7-11)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 1,7)
이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받으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분께서 씻김의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를 위한 세례입니다. 우리도 씻김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고, 씻김의 세례인 죽음을 통해 부활에로 나아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은 씻김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위해 애쓰는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우리를 부활로 초대하고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인데, 이 결정적인 계획이 당신 아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죽어야 살 수 있다. 죽는 자, 내려놓는 자만이 진정한 부활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핵심 가르침입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의 겸손 안에서,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내가 죽는, 나의 것을 내려놓는, 그래서 부활하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가 됩시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네. 하느님이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네."(1요한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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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sl6W-xPO1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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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11)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찾으십니다.
사람을 찾는 방식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사랑은
먼저 다가가
기쁨으로
빛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는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입니다.
세례의 핵심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세례를 통해
울려퍼집니다.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게됩니다.
세례는
하늘에서 시작된
구원의 길입니다.
잃어버린 자녀들을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하늘을 여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임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마음의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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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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