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권섭 | 날짜 : 15-11-28 17:19 조회 : 1205 |
| | | . 김 영 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님의 사망을 계기로 그 분의 일생을 생각해 봤다. 반대 세력들은 머리가 나쁘다, 실력이 없다, 사투리를 많이 쓴다, IMF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하고 헐뜯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과(過失) 보다는 공(功德)이 훨씬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IMF 위기는 전 정권에서부터 서서히 누적되어 온 것이지 김영삼 대통령이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는 세계 경제 추락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아시아 많은 나라 들이 IMF 금융 구조를 받았다.
임기 동안 금융 실명제를 단행하고 공직자 재산을 공개 하여 권력과 부의 흐름을 차단시켜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꿨다. 하나회라는 군의 사조직을 척결하고 5·18 특별법 제정으로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광역시 도지사 시장 군수를 직접 주민이 선출하는 지방자치제를 확대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중앙청을 헐고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국가의 품격을 높였다.
그는 야당 지도자로 여당과 합당한 소위 3당 합당을 비난하는데 당시의 정치 판도를 봐서는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여당인 노태우 총재가 있던 민주정의당이 다수당이고 제 이당은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이 있었다. 통일민주당을 이끈 김영삼은 제 삼당으로 제4당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의 정치 구도였다. 당시 정당구도는 여당은 경상도, 야당은 전라도 판세인데 김영삼은 부산을 정치기반으로 삼았으니 김영삼은 여당 지역에서 야당을 했으니 반의 반 정당이다. 그러니 정권획득은 요원하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을 들어가야 한다는 말처럼 정권획득을 위해서는 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미래의 대통령을 꿈꾸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여당도 야당이 될 수 있고 야당도 여당이 될 수 있다. 집권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얼마나 양심적으로 정치를 잘하느냐가 관건이 아닌가!
김영삼 사망 후 새정치민주연합 김성수대변인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한국민주주의 거목으로 한국정치사에 길이 남을 큰 지도자” 문재인 대표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별.” 또 어떤 촉망 받은 정치인은 “재임 중에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위대한 개혁업적을 만든 불세출 영웅” “우리 시대의 민주화를 실질적으로 이룩한 정치 지도자, 최초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대통령” 일생을 살펴 볼 때 매우 정직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자기 재산도 전부 국가사회에 환원하고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현직 당 총재로 있을 때도 부를 축적하지 않았으며 국회의원이 되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겠지만 아버지를 잘 만나 정치자금은 선친이 다 댔다고 한다. 소위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뜯어내지는 안했다. 사망 직전까지 살았던 상도동은 처음 이사 올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40여년을 살았지만 늘이지 않고 소박하게 살았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돈을 모아서는 안 되고 명예와 존경 받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부인 손명순 여사의 그림자 내조도 돋보인다. 매일 찾아오는 수 십 명의 정치인과 기자들에게 언제든 시래깃국과 갈치 한 토목을 주어 접대했다. 삼당이 합당했을 때 당시 야당의 선명성을 고수한 최형우는 절대 반대하였다. 손명순여사는 최형우님 집을 몰래 찾아가서 “당신이 좌동영에 우형우라고 하면서 그렇게 까지 김영삼의 마음을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간절히 말하니 그 뒤 생각을 바꿔 다시 종전과 같이 김영삼을 잘 보좌하여 정권획득에 밀알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손명순 여사와 젊은 데이트 시절에 불렀던 이름 맹순(명순의 경상도 사투리)이라 불렀는데, 아내가 좋아하는 것 같다 라며 손 여사의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 유머며 정이 많은 정치인이다.
부친 김홍조님은 "남에게 신세지지 말라"며 거제어장 멸치 수만 포씩을 보내 선물로 돌리게 했다. 동네 친구 분들과 얘기하면서, 번 돈 아들을 주지 안했다면 돈이 많이 쌓였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 유명한 'YS 멸치'다. 부친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청와대를 단 한 차례도 찾아간 적이 없다고 한다. 과묵하고 겉치레를 싫어하는 성품 탓이기도 하지만 아들에게 누가 될까봐 발길을 삼갔다는 주변 얘기다. 그는 “우리 역사상 대통령의 아버지가 계신 적이 없는데, 그동안 살아 계셔 언제나 아버지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살아생전 매일 전화로 안부를 물은 효자였다. 그는 또 “5대 국회의원 시절인 33살 때 어머니가 아버지 대신에 간첩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며 먼저 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선친과 아내의 도움이 컸으나 무엇보다도 본인의 민주화 투쟁의 산 결과다. 본인의 죽음을 무릅쓴 민주화투쟁과 선친과 아내의 절대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삼박자가 이루어낸 살신성인의 결과였다.
그는 살아생전 정치 후배들에게 “내가 9선 의원을 했는데 아마 7번 정도는 야당 생활을 했을 거야…. 아주 어려웠지. 참 고통스런 세월이 매우 길었지”라며 과거를 회고한 적이 있다. 고통은 길고 영광은 짧다고 했다. 운동도 상류층들이 즐기는 골프보다는 조깅과 배드민턴으로 건강을 지켰다. 대통령이 되고서는 칼국수로 손님들을 대접하여 국가 재정을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믿으며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유신 독재정치 시대에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 당시는 대학생들마저 두려워 데모를 못한 시대였다. 국민을 향한 민주주의 열망은 꺼지지 않은 투쟁으로 상상을 초월한 목숨을 건 삶이었다. 23일 단식, 초산테러, 국회의원 제명.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정직이 이긴다며 묻지 않고 큰 길을 간다는 대도무문(大道無問) 좌우명을 각인 시켰다. 1970년 신민당 대선 경선 패배 직후 “김대중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이다” 후련한 정치인이었다. 모진 고초를 당하고 우뚝 섰으니 우리민족 역사에도 보기 드문 정치인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정치인 후배 양성에도 탁월했다. 그가 추천하고 종용하여 정치한 분 중에는 이명박 노무현 대통령이 나왔고 앞으로 우리나라 지도자로 기대되는 많은 정치인들이 기라성같이 많다. 특히 여당에도 야당에도 두루 깔려있다. 촉망받은 정치인 중에 정치적 아들을 자임하는 정치인이 부지기수다. 김수한은 추도사에서 “시련과 극복, 도전과 성취의 대한민국 민주헌정사 그 자체” “상생과 통합, 화해와 통일의 그날을 반드시 실현해 낼 것”이라고 영면을 애도했다. 장례 국가장 5일 내내 상주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추모하는 국민들 아쉬워 하니 세월이 가면 김영삼의 공덕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
| 임병식 | 15-11-29 05:53 | | 명당중의 명당. 鳳凰胞卵形의 대 명당에 잠드셨으니 영혼이 편안하고 우리 백성들에게도 복이 내려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삼우제를 지내는 화면에 광중조성시 나온 두덩어리의 알석이 나란히 배치해놓은 것을 보니 신비로웠습니다. 잘 정리해놓으신것 같습니다. | |
| | 김권섭 | 15-11-29 08:39 | | 지금까지 김영삼대통령의 공덕을 너무 폄하하고 추락시키는 것이 아쉬었습니다. 그 분 만한 인물을 다시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신 치하에서 국민들을 위해 너무나도 시원하게 민주화를 외친 장면은 대리만족을 시켜 주었답니다. 저는 그분을 68년, 69, 70년 대 후반 해서 세번 뵈었는데 자신감과 용기에 감복을 받았습니다. | |
| | 윤행원 | 15-11-30 15:16 | | 김권섭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 선생님은...ys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를 손바닥에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정치감각으로 的確하게 분석을 하셨습니다. 대단합니다. 여하튼 ys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뚜렸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분위기상 過 보다는 功을 치켜세우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요즘엔 영상매체가 좀 심할 정도였지요. 그 공과는 세월이 한참 지나면 더욱 분명해 질 것입니다.
김권섭 선생님 같은 분이 내년 총선에 직접 나오시면 한국정치가 훨씬 나아질 것 같습니다 만....ㅎ..그리고 저를 선거사무장으로 일을 시켜주시면 멸사봉공 하겠습니다....ㅋㅋ.....^^ | |
| | 김권섭 | 15-12-01 14:54 | | 존경하는 석계윤행원선생님 반갑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분에 넘치는 과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군요. 황공무지로소이다. 훌륭하신 생각과 배려하는 마음은 늘 감동입니다. 윤선생님은 팔순을 내다 보고 저는 칠순인데 정치도 은퇴할 때가 아닌지요. 남은 세월 건강하게 살 다가 고종명하는 것이 복이 아니련지요. 늘 건강 잘 챙기시고 평안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 |
| | 이방주 | 15-11-30 21:46 | | 김권섭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기회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과를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하나회의 척결은 속리 후련했고, 노태우 전두환에 대한 응은 더욱 후련했습니다. 그는 역사관이 뚜렷하고 역사의 흐름을 볼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삼당합당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하는 긍정적 평가를 하기도 하고 민주주의는 과정이 중요한데 군부독재세력과 손잡아 독재를 완전히 척결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라면 그 과정은 잘못이고 군부의 정치 개입을 척결하기 위해 목숨 걸고 군사독재의 소굴로 들어갔다면 잘한일이 되겠지요.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라 봅니다.
덕을 쌓고 세상을 뜨면 지관이 찾아주지 않더라도 신이 명당을 점지한다는데 알석이 그의 광중 자리에서 나온 것은 참으로 신비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우리 역사를 보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후세에게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조선 시대 파당,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지도자들의 발전적 업적을 기려 민족적 자존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굳이 과만 까발려서 후세들에게 만족적 좌절감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
| | 김권섭 | 15-12-01 15:08 | | 존경하는 이방주선생님 감사합니다. 거산김영삼처럼 속이 시원하게 당시의 정권담당자를 향해 폭포수를 쏟아 놓은 것처럼 시원하게 질책하고 나무란 정치가는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68년, 1969년 당시 전국을 누비며 시국 강연을 할 때 들어 보면 정말로 통쾌해 했던 그 날이 그려집니다. 우리 역사에 이런 분이 어떻게 다시 나올 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삼당을 합당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고 해 볼 수가 없었으니 불가항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할 수 없는 지경에 비난을 받으면서, 다수당 총재가 되고 14대 대통령이 되어 군의 사조직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정치와 경제가 밀착하는 고리를 없게 하었으니 참으로 잘 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직하고 직선적인 성미는 휘하에 기라성같은 정치인들이 몰렸으니 인간미가 있었던 정치가라고 생각이 듭니다. 중학교 시절 부터 대통령이 되기를 염원하였으니 천지간 그 때부터 거산이 묻힐 명당 자리에 봉황석 알이 배태 되어 드디어 일곱개의 신비한 봉황석이 드러난 것이 아니련지요! 후세인들은 과보다는 공이 큰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의 공덕을 잘 받들어 역사의 귀감으로 삼아야 나라가 발전할 것입니다. 댓글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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