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해보려고 했습니다. 아직 인생 중반도 되지 않았으니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초장에 감옥생활을 좀 하기는 했어도, 철들기 전의 경험이고 이제 새롭게 삶을 만들어가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미친 개 같은 청소년을 자식처럼 아끼며 보살펴준 ‘엄마’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출감하고는 그 엄마에게로 찾아갑니다. 달리 갈 곳도 없기는 합니다. 허름한 식당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 처녀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봅니다. 아마도 식사 때가 아니어서 그런가봅니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잠간 생각하다가 아 - 그 녀석, 그 오빠로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차창에 기대어 수첩을 꺼내봅니다. 참 허름한 수첩이지요. 첫 장에 3가지 목록이 보입니다. ‘술 마시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 울지 않는다.’ 엄마가 오래 전 적어준 목록입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했지요. 이전 시간의 못된 생활은 다 잊어버리고 교도소에서 나오면 새롭게 살아보라고 적어준 목록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으로 가면 자신의 ‘버킷 리스트’가 적혀 있습니다. ‘대중탕 가기’ ‘호두과자 먹기’ ‘선물하기’ ‘담배피우기’ ‘머리에 염색하기’ ‘소풍가기’...... 일단 기차를 타고 가면서 호두과자를 먹습니다. 그리고 목록에서 지웁니다. 뭐 그리 어렵지 않네. 엄마의 권고로 감옥에서 적어본 ‘태식’이가 해보고 싶은 일들입니다.
엄마의 극진한 환영을 받고 ‘희주’의 놀림을 싫지 않게 받고 새로운 삶을 그 집에서 시작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숙식이 해결되었으니 나름 일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옥중에서 배운 것으로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일합니다. 그 때에야 대학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새롭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참고서도 마련하여 일하고 돌아오면 공부도 합니다. 희주가 보니 세상에, 오빠가 공부를 해? 하늘이 뒤집어질 일이지요. 그런데 태식이는 진심입니다. 영어는 꽝이지만 수학은 그래도 좀 하거든. 호, 거 참! 별일이네. 조금은 멍청한 듯, 조금은 어리숙하지만 오빠를 놀려먹는 것이 재밌기도 합니다. 엄마의 식당 일도 도우며 낮에 일도 하고 공부도 합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태 못된 짓하던 생활을 버리고 새롭게 착하게 살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게 외딴 섬에서 혼자 사는 일이 아니기에 생깁니다. 여태 알던 사람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생각과 그 사람에 대한 선입관이나 이전에 가지고 있던 그의 습성을 기억하고 있기에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니 개과천선의 사실여부를 확인하려면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제 버릇 개 줘?’ 하는 고정의식입니다. 바꾸기 힘듭니다. 때로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돌발사태라도 일어나면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어렵지요. 사람이 바뀌는 것도 어렵고 생각이 바뀌는 것도 어렵습니다.
태식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이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문신이 몸을 뒤덮고 있지요. 모르고 있어 함부로 태식이를 대하다가도 문신을 발견하게 되면 움찔합니다. 누구나 하는 문신이 아니니 말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합니다. 가능한 숨기려 합니다. 그리고 많은 돈을 주고라도 지우려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어쩌면 할 때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 고통을 참고 어떻게든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희주가 걱정합니다. 아프지 않아? 이 희주를 좋아하는 건달이 있습니다. 태식이 함께 있는 것이 눈에 가시지요. 그래서 어느 날 패거리를 불러다 집단구타를 행합니다. 맞다가 옷이 찢어지고 무시무시한 문신이 드러납니다. 움찔하지요.
엄마의 ‘해바라기’ 식당의 그 자리가 어느 출마자의 눈에 들어있습니다. 어떻게든 달래서 빼앗으려 하는데 막무가내로 버팁니다. 그 자리에 자기 사업장을 옮기려 하는데 일이 진척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폭력배를 동원해서라도 빼앗으려 합니다. 예전에는 태식이에게 빌빌 기던 놈들이 이제는 권력을 등에 지고 대듭니다. 더구나 태식이 전혀 폭력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밥이지요. 게다가 희주까지 포함되어 큰 피해를 당합니다. 그 사이 엄마는 살해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엄마도 잃고 집도 잃고 희주도 병상에서 의식을 못 찾고, 갈 곳이 없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지경입니다.
아주 오래전 외국영화가 생각납니다. 물론 21세기에 새롭게 재생한 영화도 있습니다. ‘워킹 톨’이라는 영화입니다. 한 반 세기 전에 매우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지역 권세자가 지역 경찰까지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민의 보호자가 아니라 권력자의 보호자입니다. 그들에게 가족까지 해를 입고 나니 더 버틸 수도 없습니다. 속이 후련하게 복수를 해줍니다. 동기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영화는 조금 더 우리 정서에 맞도록 각색하였습니다. 영화 ‘해바라기’(Sunflower)를 보았습니다. 2006년 작품입니다.
첫댓글 식당 간판 해바라기
세번보네요
호 - 그러셨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