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방심하던 사이, 미니시리즈 한편이 조용하게 시작했다. ‘시한부생명, 소매치기, 결손가정, 삼각관계, 졸부집 딸과 가난한 청년’. 낡은 설정임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시작한 이 드라마는 그러나, 첫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복잡한 가족사들이 얽혀 있을지언정 질척거리지 않고 꼬여 있는 애정관계에서도 괜히 심각한 척 폼을 잡지 않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보란 듯이 그 낡음이 새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더니 급기야 “뜯어내면 심장마비로 죽어버릴 만큼 너무나 심장에 깊이 박혀”버렸다.
9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은 변했으나 드라마는 단순히 “짱냐, 캡숑, 열나” 등의 말투만을 옮겨오는 데 그쳤을 뿐, 변화된 청춘의 모습을 온전히 담아낸 적이 없다. 하지만 <네멋대로 해라>는 그들의 대화법,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의 세계관을 투명하게 드러내면서 어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도 소화되지 않고 있었던 새로운 시대의 청년문화를 시원하게 세상으로 방출시켰다. 하여 가족을 중심으로 한 특유의 화법으로 80년대 드라마를 평정했던 김수현 작가가 그러했고, 90년대 후반 문학적인 감수성이 묻어나는 직설적인 대사로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노희경 작가, 표민수 PD 콤비가 그러했듯이, 2002년 최강의 트리플을 이룬 감독, 작가, 배우가 합주한 <네멋대로 해라>는 한국 드라마사를 바꾼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미 이 ‘초강력 까스활명수’에 의해 뚫어져버린 이상 <네멋대로 해라> 이전의 드라마와 이후의 드라마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9월5일 20회 종영을 앞두고 밤샘촬영을 ‘전경 혼잣말 하듯’ 자주하는 <네멋대로 해라>의 촬영장을 찾아 박성수 PD와 세명의 매력적인 배우들을 만났고, 인정옥 작가의 포항행 집필여행에 동행하며 전경과 복수, 그리고 미래의 옛날이야기와 이후 이야기를 엿들었다.
<네 멋대로 해라>는 어떻게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나
우린 패배자,그런데 세상은 우리 삶을 혁명이라 하네
그래 죽여주지.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한다. 소매치기 전과 2범, 세상의 떨거지 고복수는 감방생활을 끝내고 나오자 뇌종양임을 선고받는다. 넌 패배자야, 죽어. 세상은 고복수에게 너무도 당연한 듯 죽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남자에게 새 연인을 선사하고, 오랜 연인을 배신하라 부추기며, 결국 아비를 죽음으로 내몬다. 비정한 드라마다. 설정은 눈씻고 찾아봐도 어느 하나 새로울 것이 없다. 불치병, 복잡한 가정환경, 장애를 극복하는 사랑, 삼각관계 애정구도 등 대중드라마라면 응당 지녀야 할 ‘미덕’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으로 쾌락을 삼는다.
방영 첫주부터 밝혀진 복수의 죽음은 드라마 전체를 무겁게 짓누를 거라 예상하지만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늘 이런 식이다. 잔뜩 긴장하고 들어야 할 사랑고백이나, 불치병 선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어버리고 만다. 복수 역시 세상에 흔한 방식으로 ‘복수’하지 않는다. 자신을 내팽개친 음험한 세상을 향한 ‘복수’ 따위엔 관심이 없다. 머리채 쥐어잡고 싸워야 할 라이벌 여자 사이에 우정이 싹트고, 지탄받아 마땅한 양다리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양부모 엄연히 살아 있는 전경의 집안이 ‘문제집안’이고 누가 봐도 결손가정인 복수의 집안이 ‘화목가정’이다. 전과자인 복수를 “에이! 전과자”라고 부르는 양찬석의 행동도, 보통 꽃미남 주인공들에 비해 못생긴 양동근을 ‘감자’나 ‘못생긴 놈’으로 지칭하는 것도, ‘은근히 느끼하다’라고 속으로만 생각해왔던 이세창에게 “딱 보면 느끼하게 생겼다”라는 대사를 일부러 집어넣는 것도 다 배신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을 통해 숨어 있던 것, 드러내기 꺼려했던 것이 사실 그리 심각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춘, 과도기가 아니다
<네 멋대로 해라>의 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 드라마 속 인간들은 여러 요소들이 찰흙처럼 뭉쳐져 성분검사를 해보기 전엔 좀처럼 행동을 예상할 수 없다. 하여 이들의 행위엔 쓰레기가 차 있을지언정 상투성이 숨어 있을 공간이 없다. 그저 상황에 가장 정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눈물이 나면 울고, 질투나면 질투하고, 화나면 때리고, 억울하면 맞받아친다. 그간 대부분의 드라마에서의 등장인물들이 ‘캐릭터의 일관성’이라는 강박 속에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인 선택을 해왔던 데 비해 <네 멋대로 해라>의 캐릭터들은 ‘case by case’로 행동한다. 오랫동안 지켜보지 않으면 뭐 저런 아이들이 있나, 오해하기도 쉽다. 그들은 누구와 대화하느냐,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일쑤다. 미래 앞에서는 ‘세상없이 답답하게 구는’ 전경이지만 형사 정달이 앞에서는 이빨을 꽉 깨문 채 거친말을 내뱉는다. 미래는 “내가 생각해도 멋진 언니”이기 때문이고 “정달이는 나쁜놈”이기 때문이다. 명료하고 단순하다. 이처럼 <네 멋대로 해라>의 다중적인 캐릭터 설정은 주인공 또래 새로운 세대의 특성들과 맞물려 묘한 시너지를 일으킨다.
전경과 복수, 미래로 대표되는 이십대 청춘. 그들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갈는지에 관심이 없다. 주류와 비주류, 그 어느 쪽에도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 이들에게 청년기는 기성과 권력에 순응하기 전 단계인 과도기가 아니다. 또한 기성에 대립하는 반항기도 아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도 전혀 없다. “세상을 바꾸는 건… 죽는 것보다 어려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먹을 밥값과 차비, 때론 마음맞는 이성친구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내가 한 기자님 애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내가 지금 음악을 하는 사람이란 건 알아요”라는 전경의 대사처럼 세상 어느 하나 명쾌한 건 없지만 ‘지금·내가·무엇을·원하고·있나’를 알고, 그것을 유일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건 다른 누구도 대신 알아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로 인한 모든 문제도 기꺼이 스스로 짊어지려 한다. 그들은 순정, 가족, 집단이데올로기 등에 의한 사회적 동기나 사명감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의리나 사랑으로, 혹은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움직인다. 부모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늦은 나이에 “이혼하겠다”고 집안을 풍비박산 만드는 못난 부모를 뒤로 하고 자기 방에 드러누워 새우깡을 씹으며 “아… 이 집 진짜 싫다”며 중얼거린다고 불효의 극치도 아니고, 복수가 아버지에게 상추쌈을 싸먹이고, 엄마의 맨발을 주무르는 것도 효도에 대한 강박이나 예의범절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가 아니면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이렇듯 이들은 사회적 동기는 없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내면적인 동기에 몸을 싣는다.
또한 중얼중얼 내뱉는 이들의 헛소리는 느슨해질 법한 드라마의 템포를 잡는 한편 모든 인물을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애인을 뺏긴 억울한 기분에서도, 못 만나서 괴로운 심정에서도, 애인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심각한 소식에도 이들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심지어 뇌종양을 판명받는 순간에도, “제가 잔머리를 많이 쓰거든요. 그래서 종양이 된 거 아니에요?”라고 묻질 않나, 출소한 아들을 뒤로 두고 떠나는 아버지에게 우산이 촌스럽다고 불러세우는 아들의 헛소리나 “남이사”라고 심드렁하게 돌아서는 아버지의 대꾸나 결코 어느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얄미운 장치들이다.
어떤 사랑, 악녀도 왕자도 없는
결국 삶의 태도는 사랑법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때때로 내가 살자고 남의 가슴에 대못 박는 짓을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한다. “마음이 잔인해지지 않고 어떻게 한 사람만 좋아합니까? 착한 마음으로는 세상 전부를 좋아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만 좋아하려면 착해선 안 돼요. 잔인하게 한 사람만 좋아할래요. 나중에… 후회해도 좋을 사람.” 이처럼 정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들은 흔히 ‘어른들의 것’으로 치부되던 심각한 사랑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전경과 복수의 연애장면은 유치원생보다 더 유치하지만 그 안에는 대부분 한때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성이 숨어 있다. “나 몰래 만나다 걸리면 죽어!” 하는 미래의 협박은 “부숴버릴 거야”라는 분노보다 더욱 간절하다. 이 사랑의 게임에 악녀도 천사도 왕자도 없다.
<네 멋대로 해라>는 결국 매우 이상한 드라마이며, 매우 ‘제 멋대로’ 만든 드라마다. 대사만 보면 현실적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현실에서 없는 ‘슈퍼울트라 쿨’한 인간들의 판타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네 멋’이 마음에 든다. 혁명을 꿈꾸지 않는 루저들에 의해 일어난 아이로니컬한 혁명이 반가운 것이다.
복수처럼 엉뚱한 한편 전경만큼 진지한 박성수 감독은 다수의 베스트극장을 거쳐 <햇빛속으로> <맛있는 청혼> 등을 연출했다. 수색의 폐공장터. 복수가 탄 오토바이가 유리창을 향해 날아가는 고난도의 액션신을 찍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날 인터뷰는 ‘컷’과 ‘스탠바이’를 신호음 삼아 끊이는 듯 이어졌다.
처음 아이디어는 감독으로부터 나온 걸로 안다. → 몇 가지 경험과 생각들이 섞여서 나온 거다. 한번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가 “혼자 있을 땐 웃는 연습을 한다”고 말하는 것을 봤다. 비슷한 때 스물몇살에 루게릭병을 통지받고 환갑이 넘도록 살아 있는 스티븐 호킹이 “시한부 통고를 받고도 그렇게 슬프거나 괴롭지 않았다. 그저 그간 인생을 낭비했다는 후회가 들었다”고 했다. 또 지난 2월에 베니스에 다녀왔는데 그 말로만 듣던 수상도시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여기도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은 참 불행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모든 기억들이 복합된 건지,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면서 막연히 ‘시한부 청년’을 떠올렸다. 하지만 흔한 투병 이야기가 아니라 병을 알게 되면서 연애도 하고 직업적인 성취도 이루는 그런 청년을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눈이 나쁘다거나, 왼발이 작다거나 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독과 작가가 한 맥박으로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작업이 아닌가. → 뻔한 드라마를 찍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작가도 새로워야 한다고 믿었다. 작가 리스트를 보는데 모르는 사람이 인정옥 작가 하나였다. 그냥 몰라서 만났다. 앞서 이야기한 정도만 말해줬는데 인 작가가 대뜸 재밌겠네요, 했다. 숙제가 아니라 재미로 생각해서 좋았다. 이후 써온 시놉시스와 1, 2회 대본을 보면서 시청률은 장담 못하겠지만 좋은 드라마 한편이 나올 것 같았다. 윗선에서는 ‘실패한다’, ‘어렵다’, ‘재미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몇명의 시청자가 보더라도 그 시청자를 존중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시청률 대강 나오고 금방 잊혀지는 드라마라면 왜 꼭 만들어야 하는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내 멋대로 해봤다.
모든 인물들이 보통의 드라마에서 지켜졌던 캐릭터의 일관성에서 벗어나는듯 보이지만 큰 줄기를 잃지 않는 것 같다. → 방금 전의 사건과 환경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에는 새롭게 반응한다, 는 대원칙을 가지고 디렉팅했다. 사람이란 게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지나가는 농담에 웃을 수도 있고 아무리 기분좋은 일이 있어도 어떤 일에는 갑자기 화가 날 수도 있지 않나? 그게 진짜다.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스스로에게 느꼈던 모습을 드라마에서 발견하길 바랐다.
빡빡한 일정일 텐데도 세트촬영이 거의 없다. 지하철, 버스가 유독 많이 나오고 → 돈없는 아이들이니까 공공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당연하고, 젊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드라마니까 그들을 쫓아가는 생생한 느낌이 들길 바랐다. 물론 동시녹음이나 통제문제가 어려운 편인데 활기찬 느낌이 들어서 좋다. 미래의 집을 중심으로 대부분 홍익대에서 촬영되었는데,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아이들이 이 근처에서 연애하고 있구나, 하는 리얼리티가 살았으면 했다.
복수의 직업이 스턴트맨이다보니 대규모 액션신이 많이 등장한다. 쉽지 않았겠다. → 어릴 때 교회 다니면서 들었던 찬송가 중에 ‘부담이 변하여 능력이 되네’라는 구절이 있었다. 꽤 좋아했던 말인데 스턴트신들은 그런 도전과 재미를 준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찍다보니 꽤 잘 찍게 되는 것 같다. (웃음) 정두홍 무술감독의 공이 크다. 그 어떤 때보다 많이 신뢰하고 조언을 구한다.
복수아버지의 자살은 의외였다. → 대본 나오기 일주일 전쯤 ‘복수아버지는 죽는 게 좋겠다’는 데 동의했다. 아들은 죽고 노인은 남는, 쓸쓸한 느낌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자살은 그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종영하는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면 했다. 생사관에 대한 작가와 연출의 의도가 같았기 때문일 거다.
복수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통과 눈물만이 남았나. → 전혀 반대다. 오히려 유쾌하게 갈 거다. 복수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더이상 잃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일 것이다. 현실 속의 판타지라고 봐도 좋을 신들만이 남았다.
고복수(양동근) · 전경(이나영) · 송미래(공효진) 캐릭터(배우) 열전
그 사람,끝까지 속으면서두,믿어버리고만 싶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 친구들, 오늘은 뭐하고 지냈나, 싸우진 않았나, 아프진 않았나, 궁금함에 오늘도 TV 앞에 앉는다. <네 멋대로 해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친구와 동생, 그리고 이웃이 있다. 복수와 전경과 미래의 안부가 궁금하고 한 기자, 전강, 복수 아버지, 꼬붕이, 양찬석, 우찬석 심지어 정달이의 근황까지 궁금한 것이다. 이는 생생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작가와 PD의 몫도 크겠지만 33%는 역할들을 완전히 체화시킨 배우들의 몫이다. 양동근과 복수가, 이나영과 전경이, 공효진과 미래가, 다른 독립된 인물이라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의 동물적이면서 본능에 가까운 메소드 연기는 드라마를 살린 1등 공신이다. 하여 이 세 배우와 드라마 속 캐릭터 그리고 그들의 잊을 수 없는 대사를 모았다.
백은하 lucie@hani.co.kr
“니가 뭐하러 소매치길 좋아하냐? 니가 나 같은 년도 아닌데, 뭐하러 걜 좋아하냐? 걔가 잘났냐? 너같이 이상한 것들 땜에 나같이 불쌍한 년들이 생기는 거다.…… 너 같은 년들은, 잡생각이 많아서,… 믿음이란 걸 모르지?… 믿는다는 게 뭔 줄 아냐? 그 사람이 날 속여두, 끝까지 속아넘어가면서두, 그냥 믿어버리는 거… 그게 믿음이다… 근데, 복수는 안 속여. 됐지?”
송미래
야구장 치어리더. 악착스럽게 돈도 잘 모으고 생활력도 강한 여자로 부모없이 동생 현지와 함께 살아간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현행범으로 잡은 고복수를 감방에 보낸 인연으로 “남자가 아니라, 가족” 같은 복수와 7년째 정을 쌓아간다. 간호사가 되어 복수와 함께 잘살아보겠다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미래는 세명의 인물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자 이름 그대로 미래지향적 인물이다. “넌 참 곱게 복수를 도왔는데… 나, 아주 드럽게 복수 도와야 했거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고운 쪽이랑, 드런 쪽이랑 나눠져 있나부다. 난, 늘, 드런 쪽에서 살아야 되는 년인가 부다. 그게 참… 눈물 나. 왜 이렇게 태어났냐, 난….” 늘 ‘명쾌함의 여왕’이었던 미래지만 자신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전경이 복수의 새 연인으로 나타나자 자신감을 잃는다. 그리고 미래는 “답답하지만 귀여운” 전경마저 좋아하고 만다.
VS 공효진
질펀한 욕지거리를 서슴없이 내뱉는 공효진의 연기는 상스럽지 않고 정답다. “날씬하고 예쁜”데다 삶의 통찰까지 갖춘 송미래를 연기해낼 80년생 배우가 어디 그리 많으랴. 늘 “세상 다 산 년”처럼 굴다가도 복수 앞에서만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이나, 전강의 호의에 양아치처럼 구는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는 그는 매회마다 가슴을 후벼파는 대사 한마디쯤을 박아넣고 떠난다. 최근 자매처럼 동고동락하던 코디네이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큰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씩씩하게 촬영에 임하면서 속깊은 직업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 걔 옆에서 얼마나 사는 맛이 나겠니? 알어. 나두. 나두 너 만나구 그랬으니까… 근데… 어뜩할라구? … 인제 소리까지 바락바락 지를 정도루 아플 텐데…. 그거 걔 앞에서 숨기려구, 기를 쓸 텐데…. 내가 그걸 모른 척하니? 너, 죽어. 걔나 나보다, 빨리 죽어.… 난, 니 드런 꼴 다 볼 수 있는 사람이야, 복수야. … 난 니가 내 옆에서 눈 감을 거까지, 다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근데, …갠, 너 죽으면 다쳐. 알겠냐? 너, 아파죽겠따구 맘대루 지랄지랄 할 수 있어야 돼.… 안 그러냐, 복수야?”
“울지마, 미래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 심장에 깊이 박혀서… 그걸 뜯어내면… 심장마비루 내가 죽어…. 살자구 하는 짓이니까… 니가 용서해. 응?”
고복수
아버지(신구)가 원로가수 고복수를 좋아해 붙여진 이름. 열살 때 어머니(윤여정)가 도망가자 복수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3년 뒤에 찾으러 올게”라는 아빠의 약속의 말에 “뻥까지 마…”라고 대답했지만 부자의 재회는 그로부터 15년 뒤, 그것도 소매치기로 형을 살고 출소하는 날 이루어진다. 그동안 옥바라지해준 ‘와이프 같은’ 미래와 연애하며, 소매치기로 돈벌며, 그 돈으로 어머니 가계자금 보태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던 복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지갑을 훔친 전경이란 여자에게 첫눈에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뇌종양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지금 같은 세상에 가장 큰 복수는 착한 일을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너의 착함을 가지고 세상에 대항해봐라는 뜻으로 붙였죠.” 전경이 술취해 벽에 “복수는 내꺼”라고 낙서하는 것은 복수의 작명이 <복수는 나의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VS 양동근
“머리가 심하게 까맣고 곱슬에… 말투가 심하게 졸리는 사람인데요….” 전경이 복수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다보면 어느새 복수는 양동근 그 자체다. 무심한 듯 힙합리듬에 몸을 싣던 그의 몸짓이나 씹지 않고 흘리는 듯한 양동근의 말투 역시 마치 고복수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멜로라서…” 선택했다는 <네멋대로 해라>는 양동근의 ‘사내다움’과 ‘섹시함’에 대한 발견인 동시에 아역부터 시작한 탄탄한 한 사람의 배우발견이다. 16회 마지막 신에서 죽은 아버지의 몸을 부둥켜안고 오열하던 그의 연기를 본다면 그가 얼마나 이 배역에 몰입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요즘요. 내 몸에 남아 있는 쓰레기 냄새가… 경이씨 몸에 닿는 것 같애서… 참 심란해…. 경이씬 그냥 음악 속에서만 살아요. 내 나쁜 냄새, 되도록 피해가면서… 난 경이씨가, 내 냄새나고 드런 기억 갖는 거 싫어요.”
“난 복수씨 쓰레기 냄새 같이 맡을래요…. 자기 안에 쓰레기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착하구 이쁜 것만 보고 싶은가봐요. 자기만의 쓰레기 안 볼려구… 그래서, 드런 거 보면 토하구….근데 난 내 쓰레기두 보구 복수씨 쓰레기도 볼래요… 난 비위가 강해서요. 토하고 그러지 않아요….”
전경
“난 원래 천박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졸부(전경환)의 딸로 태어난 전경은 인디밴드의 키보디스트다. 친구의 수술비로 가지고 있던 돈 500만원을 복수에게 소매치기 당한 뒤 친구가 죽게 되자 복수를 “영원히 미워할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마음은 결심을 배신한다. “…좋아해두 되나요?…” 닭집 앞에서 엉겹결에 내뱉은 고백과 함께 “그 험한 기억이 복수씨가 살아왔던 현실이라면 난 그것두 좋아할래요…”라며 그의 지난 삶마저 받아들인 전경. 하지만 문제는 복수의 옛 애인 미래다. 아무리 ‘질투의 화신’인 전경이지만 미래는 복수만큼 멋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을 좋아하는 한 기자(이동건)의 호의도 싫지가 않다. 전경은 세명의 주인공 중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변화가 크고 다중적인 캐릭터다. 마치 자라나는 아이처럼 1회부터 20회까지 전경의 캐릭터는 복수로, 미래로 때론 그들간의 관계에 인해 점점 바뀌어 나간다.
VS 이나영
대부분 CF로 기억하는 것과 달리 인정옥 작가가 처음 본 이나영은 ‘여자 드림팀’으로 참여해 열심히 뛰고 구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보니 수박 2통은 거뜬히 들고 누구라도 쓰러지면 업고 뛰는 씩씩한 전경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었다. “양동근 옆에 있는 제 모습이 왠지 어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하하. 전경은 계산하면 안 되는 아이예요. 머리로 이해하려는 순간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거든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전경이 부러워요….”
카페문을 열고 그가 성큼성큼 들어와 마른손을 내민다. 다문 입에 꾸벅 건네는 허리인사나 악수를 청하는 폼이 꼭 전경 같구나, 생각한다. 불쏘시개같이 가는 담배가 재떨이에 쌓여가고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자 이 사람, 미래 같군,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들이 똘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복수 같기도 하다. 아직 4회 분량이나 대본을 써야 하는 그는 처음에, 방송이 끝난 다음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했고, 몇 주간 전화 끝에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만 뺏을게요” 라는 속보이는 거짓말을 믿어주었다. 그때까지는 그 두 시간이 3일간의 동행으로 이어질지 미처 알지 못했다.
“감독과 작가가 같은 박동수로 호흡하는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와 정서, 둘 다 통했으니까요.”
인정옥 작가가 박성수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3월이었다. 박성수 감독이 스티븐 호킹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불치병에 걸린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했을 때 그의 머리속엔 이미 고복수가 내려앉았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려면 처음부터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고. 몇회 분량은 아닌 척하다가 나중에 알리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다행히 1, 2회 대본이 썩 마음에 들었던 감독은 “니 멋대로 하세요”라며 인 작가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대본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수나 미래는 알겠는데 전경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전경은 주변에 널려 있는 캐릭터예요. 맹하게 착하거나, 또순이 같은 역할이 아니라, 익숙하지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어차피 스탠더드한 연기에 익숙한 배우라면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대본이라는 데 동의한 두 사람은 구체적인 대본이 나온 뒤엔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캐스팅을 엎었다. 그리고 “순전히 이미지 위주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여전히 성장중인 양동근과 이나영, 공효진은 연기자로서의 불안감들이 증폭되어 오히려 불안한 세명의 캐릭터에 착착 감겨들어갔다. 초반엔 연기에 대한 주문을 하는 지문이 많았지만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 빠져들자 특별히 감정지시가 필요한 신 외에는 거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대본이 오갔다. “저 역시 처음엔 복수, 경이, 미래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글을 썼는데 요즘엔 양동근, 이나영, 공효진을 생각하면서 써요. 내 머릿속에 이미 복수도, 전경도, 미래도 없어요.”
“방송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나요?”
“전 영화 먼저 시작했는데요….”
인정옥 작가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뎠던 곳은 여의도가 아니라 충무로였다. 87학번이었던 그는 대학 졸업 뒤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는 후배의 “3개월이면 끝난다”는 꼬임에 빠져 장길수 감독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스크립터일을 시작으로 이후 여균동 감독의 <포르노맨> 역시 연출부로 참여했다. “여균동 감독이 그때 시퀀스 써내오는 걸 보고 시나리오 써보면 잘 쓰겠다”고 했고 이런저런 연이 닿아 오기민 PD를 만났다. 그리고 오 PD로부터 ‘여고괴담’이라는 제목 하나를 건네받았다. “기획적으로는 단순 호러를 원했던 건데 그렇게 외국영화들을 모방해봐야 정말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정말 현실적이어야만 가장 현실적이고 소름끼치게 공포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시나리오는 완성되었지만 쉽게 제작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일단 귀신이라 해도 학생이 선생을 죽인다는 설정부터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고 한번 궤도를 벗어난 시나리오는 3년간 ‘우주미아’ 신세로 충무로를 떠돌았다. “돈은 빨랑 벌어야겠고 일은 없고….” 어떤 이가 일주일 뒤면 MBC에서 코미디작가 공채가 있다고 말해주었고 급하게 원서를 내어 1차에 합격했다. 하지만 2차 시험에서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내면서 떨어졌다. 하지만 당시 <환상특급>이라는 드라마타이즈 오락프로그램을 준비하던 PD들은 “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군” 하며 그를 눈여겨보았고 인정옥은 <환상특급>으로 처음 작가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테마게임>을 쓰는 동안, <여고괴담>은 박기형 감독과 오기민 대표를 중심으로 제작에 들어갔다(지금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에 의해, 엔딩크레딧에 시나리오 작가 이름이 빠졌고 오기민 PD는 여전히 그 점에 정말 미안해하고 있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쓰게 되었다. “의학드라마, 아마도 죽음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삶의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병원은 죽음이 일상화되는 공간이고 그곳에서 의사들은 어떤 것을 느낄까가 궁금했어요.” 하지만 <해바라기> 이후 한참을 쉬었고 그러다가 “방송사에 미리 받은 돈이 있어서, 더이상 도망갈 데가 없어서” 시작한 것이 <네 멋대로 해라>였다.
“다 문제 있는 가정이네요.”
“화목한 중산층의 이야기를 내가 왜 해야 하죠?”
“이혼한 친구가 있는데, TV를 보던 아이가, 엄마 우리는 결손가정이야?, 라고 묻더래요. 그전까지 아무런 이상도 못 느끼던 아이였는데 말이죠. TV를 통해 보여지는 중산층의 화목함은 때론 부풀려져 있고 과장되어 있죠. 그런 건 죄악이라고 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복수네 집은 어머니가 없는 ‘결손가정’이지만 부자간의 정이 돈독하고, 자매 둘이 살아가는 미래의 집에는 훈풍이 도는 데 비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전경의 가정은 결손과정보다 훨씬 불행한 공기를 안고 산다. 또한 <네 멋대로 해라> 속 가정은 그 역할이 상당 부분 전복되어 있다. “복수아버지는 오히려 보통의 드라마에서 어머니에, 복수의 어머니는 아버지에 가까워요,” 또한 모든 아이들은 어른을 가르치고 품고 달랜다. “살아온 연륜이 있으면 그 연륜에 의해 누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하지만 전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세월 동안 얻은 게 과연 전수해야 할 진리들인가요? 그저 살아가면서 잠정적으로 얻은 결론일 뿐이죠. 그걸 정답이라 할 순 없다고 봐요.”
“연애를 많이 해본 분 같아요….”
“많이 해봤죠.” (웃음)
“사랑은 유치하잖아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닭살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연애하다보면 누구나 초등학생 같은 행동을 하지 않나요. 말도 안 되는데 삐치고 화내고 달래고 풀리고….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니까 뭔가 사랑을 늘 고귀하고 어렵고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경이와 복수가 노는 장면은 가장 초등학생답게 그렸죠.” 복수와 경이 버스정류장 유리에 붙여놓은 편지에 대해 “복수씨가 썼죠?” “아닌데요” “썼죠?” “아닌데요”… 하며 점점 멀어지는 장면은 초등학생이 아니라 유치원 수준에 가깝지만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뿌듯한 웃음을 짓게 된다. 게다가 라이벌 관계인 미래와 경의 관계도 마치 맘에 드는 짝을 뺏기 위한 초등학생의 질투어린 싸움 같다.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 사이에는 교감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봤어요. 다른 운명으로 만났으면 미래가, 너 참 귀여워해줬을 텐데, 하는 대사도 있고….” 양다리를 걸치는 데 꼭 악의만이 있겠냐고,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이지 이전의 사람이 싫어졌기 때문은 아닐 거라면서. “미래의 사랑은 규범적이고 안정적이에요. 사람들은 그런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믿죠. 복수에게는 그런 사랑이 맞다고 미래에게 돌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경의 사랑은 불안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사랑은 시작되었어요. 사랑이 영원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한때 마음을 울린 것들은 그 시기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요?”
“마니아도 벌써 생긴 것 같아요.”
“…신경 안 써요.”
<네 멋대로 해라>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드라마의 명장면, 명대사를 꼽아낸 글들이 빽빽이 올라와 있고 벌써부터 ‘이 작가가 궁금하다’ 식의 기사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인정옥 작가의 팬 카페도 있다. 하나하나 떨어뜨려 놓고보면 제법 싱거워지는, 배우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맛이 없는 인정옥의 대사는 문학적인 강박에서 벗어나 대본은 결국 배우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글임을 인지시킨다. 때론 비문과 상소리가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때론 해체된 문장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엔 그 어떤 시적인 대사보다 큰 감동을 선사한다. “누군가 내 드라마에 교감을 느끼고 즐거워한다는건 분명 신나는 일이지만 작가가 그것에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팬들은 작가가 자신들의 기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라치면 사정없이 매서워지거든요. 신경을 쓰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매이고 그런 것에 얽매이긴 싫어요. 전 언제라도 배신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걸요.”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닌데 배신이 기다려지는 이상한 심리, 갑자기 미래를 향한 고복수의 마음이 온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이상타. 좀체 이상타.
나란 사람은 말이다. 정말 TV드라마를 안 본다. 아니 정확히 TV를 잘 안 본다.
TV가 재미없다거나 뭐 그런 것도 있지만 가뜩이나 집안에서 비생산적 다소비적 인간으로 살고 있는지라 빈둥거리면서 TV 앞에 죽치고 있기가 영 화면이 안 잡히기 때문이다. 근데 요즘 일주일 내내 난 TV를 기다리면서 살고 있다. 거기다 수요일, 목요일에는 어떠한 저녁 약속도 잡지 않는다(뭐 사실 약속도 그리 많진 않지만…). 내가 그토록 TV 앞에서 움직이질 못하는 것. 그건 바로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 때문이다. 정말 우연히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본 첫회를 시작으로 지금의 16회까지 한회도 빼놓지 않고. 한회당 평균 3회 정도의 반복시청률을 기록하며 열심히 보고 있다. 수요일날 저녁에 본회를 보고나서 바로 다음달 아침이나 오후에 다시 케이블TV에서 하는 재방송 봐주고 나서 목요일 본회 보고 다시 다음날 케이블TV로 재방송 보고 토요일날 오후에 공중파로 2회 연속 재방송 봐주고 일요일 케이블TV 재방송까지 봐주면 정말 일주일 내내 <네멋대로 해라> 가득히 살 수 있다. 뭐 며칠 이렇게 살다가 이제는 아예 녹화해서 좋아하는 부분만 반복해서 보곤 하지만 아무튼 이건 내가 생각해도 광적이다. 미친 것이리라!!!
그렇다면 뭣이 이리도 나를 이 드라마에 미치게 하는 것일까? 역시 뭐니뭐니해도 대사발이다. 거기다, 마치 배우들이 자신들의 일상사를 꺼내놓듯이 편하게 연기해내는 연기발. <네멋대로 해라>의 배우들은 정말 너무나도 편하게 연기를 한다. 그 점이 난 너무너무 좋다. 억지스럽지 않게 멋져보이지 않게 그래서 더 멋진 연기를 보여주는 그들이 참 난 좋다. 아마 작가분은 어떤 배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그 배우에 맞게 캐릭터를 구성하여 대사를 만든 것 같다. 뭐 작가분을 만난 적도 없기에 100% 물증없는 심증이긴 하다만, 어찌 대사들이 그렇게 배우들 입에 쩍쩍 들러붙냔말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8회였던가? 공효진이 이세창보고 말하길 “아저씨 은근히 느끼하시다….” 그 말에 받아치는 이세창의 명대사! “은근히는 무슨 은근히냐? 나 본 사람마다 한방에 느끼하다던데.” 오호랏. 이런 커밍아웃을. 이제 드디어 이세창의 시대가 오는 것일까? 이세창의 평소 연기를 봐온 사람들은 다 안다. 그가 얼마나 느끼하며 썰렁한지. 그러나 이전의 드라마에선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채 지나가기 일쑤였지만 이제 그는 떳떳이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연기를 찾은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대담성. 이건 필시 작가가 배우들의 각 면들을 계산하여 만들어낸 대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양동근의 연기나 연기가 물올랐다는 이나영이나 일용엄니 이후 이런 구수한 대사 소화력은 첨이라고 일컬어지는 공효진까지 모두 정말 자신의 모습에서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는 연기와 대사들을 보여준다.
이제 어느덧 막바지에 치닫고 있는 <네멋대로 해라>!! 지난주까지만 해도 으레 어떤 식으로 끝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번주 15, 16회를 보니 작가분 공력이 예사롭지가 않은 듯싶다. 어찌 그렇게 죽는다는 말을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그리도 묘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놀랍다. 이 외계스러운 드라마 한편에 난 정말 뻑가고 말았다. 자! 앞으로 남은 4회 동안 난 또 얼마나 뻑가야 하는 것일까남? 정말 짜증나게 사랑스런 드라마다. 쿠쿡∼.
미운 짓 하는 귀여운 녀석들!
성기완/ 음악평론가
나는 엄밀히 따지자면 (비록 작은 일을 맡은 것이긴 하나) 이 드라마의 제작진의 일부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전경(이나영)이 키보드 주자로 있는 ‘미완성 밴드’가 인디밴드로 설정되어 있고, 그 밴드가 만들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음악이 사실은 내가 소속된 인디밴드인 ‘3호선버터플라이’의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분들처럼 편하게 드라마 ‘시청기’를 쓸 입장은 아니다. 그렇긴 해도 나 역시 이 드라마의 팬 중 한 사람이다. 제작진의 일부이며 ‘팬’인 나는 그 두 입장을 오가면서, 약간은 팔이 안으로 굽는 걸 감수하면서, 그동안 겪은 일들과 시청기를 내 멋대로 섞어서 써보겠다.
우선적으로 이 드라마의 힘은, 작가가 막 나간다는 데서 나온다. 내가 보기에 인정옥이라는 작가는 막 나가는 작가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물들은 하나같이 삐딱하게 설정되어 있고 그들의 집안은 다 콩가루다. 이년, 저년, 이 새끼, 저 새끼, 대사는 거칠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렇게 막 나가는 인물들을 밉지 않게 그리는 재주가 있다. 밉기는커녕 귀엽기까지 하다. 작가 자신이 좀 그렇기도 한 것 같다. 스턴트의 액션장면, 밴드의 공연장면 같은 설정이 따로 배치되어 있어 이야기가 일상성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계속 볼거리가 등장한다는 것도 재미난 대목이지만, 그거보다 더 재미난 것은 ‘미운 짓 하는 귀여운 아이들’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막 나가는 쪽이 작가라면, 거기에 따뜻함의 옷을 입히는 것은 감독쪽이다. 밑바닥 인생의 애환을 그리기는 어떤 의미로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인생에서 따뜻함을, 희망을 건져올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처음에 박성수 감독을 만난 것이 6월쯤이었던 것 같다. 그는 드라마에 ‘인디밴드’를 설정해놓고 어떤 밴드의 음악이 자신의 드라마에 적합한지 물색하고 있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이미 그런 소문을 들은 수많은 ‘유사 인디밴드’가, 아니 정확히는 그들의 매니저가 자기들 음악을 좀 써달라는 부탁을 해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성수 감독은 실제 인디밴드의 음악을 쓰고 싶어했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밴드 멤버들은 그렇게 드라마에 자기들 음악이 쓰이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잘 몰랐고 지금도 실은 그것이 어떤 상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드라마라는 것이 하나의 작품이기보다는 엄청난 이권의 결합체라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엄청난 영향력의 상품 전시관에 자기 물건을 들이민다. 드라마 감독 역시 그 관계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참 힘들다. 그런데 박성수 감독은 달랐다. 우리 밴드의 음악을 썼다는 것 자체가, 박성수 감독이 이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알게 모르게 이 드라마의 힘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그와 같은 ‘마음’에서부터 나온다고 본다. 화려한 물건들과 배우들, 한마디로 온갖 돈되는 것들, 시청률 높일 만한 것들로 개떡칠을 하는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가. <네멋대로 해라>는 비교적 그와 같은 ‘떡칠’을 애초부터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 태도로부터 사물을 보는 어떤 시각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리라는 점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그 잘난 물건들과 잘빠진 배우들과 번지르르한 음악이 아니라 비교적 ‘있는 그대로’를 보고 또 보여주려는 시각 말이다. 그와 같은 시각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 이 드라마의 제일 큰 매력이 아닌가 싶다.
최고의 삼각관계 드라마 아이가...
김정영/ 프로듀서, <우렁각시> 기획
셋이란 숫자는 참 절묘한 숫자다. 혼자인 것 같으면서도 여럿이다. 그리고 공존한다, 아니 공생한다. 두명씩 편먹고 헐뜯기도 하고 프라이버시 지키면서 놀 수도 있다. 이런 3인 구도가 독특하고도 멋지게 나오는 <네멋대로 해라> 덕분에 판에 박힌 트렌드 드라마와는 화해할 수 없었던 아웃사이더들이 수요일마다 소주병 끼고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우리집의 노총각 노처녀 삼남매는 주말이면 시골서 유학온 사촌 3남매(물론 20대)와 모여서 만화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TV를 보며 소리를 지르거나 술을 마시면서 논다. 가만히 보면 다들 왕따의 기질이 있으나 하나같이 “친구 만나기 귀찮아”라며 잘난 척이다. 요즘 이 왕따 형제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이 양동근 주연의 <네멋대로 해라>다. 지난 주말 한 장면을 보자.
TV 앞에 술상이 벌어져 있고 나의 남동생들은 둘 다 흰빛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러닝셔츠를 걸쳤다. 아우는 러닝을 바로 입었고 형은 뒤집어 입었다. (형: 30대 주성치를 좋아하는 백수/ 아우: 20대 공대 3학년/ 눈썹이: 못생겼다고 버려진 똥개)
아우: 형 러닝 뒤집어 입었다 아이가…. 바로 입어라.
형: 괘안타 이래야 스킨이제….
아우: 난 말이다, 여기서 신구 아저씨랑 윤여정 아줌마가 정말 연기 잘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진 몰랐는데 말이다. 정말 너무 잘하더라.
형: 그치그치, 이세창도 죽이잖아. 사실 속옷선전 같은 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선 너무 멋지지 않냐? 아예 “난 느끼하니깐” 그러고 말야.
아우: 이혜숙도 그 희한망측한 엄마를 천연덕스럽게 잘도 한다. 테레비에서 그런 엄마 본 적 있나?
형: 절대 없지. 남편, 호랑이 선생님도 좋잖아? 조경환인가, 경철인가? 속세에 때묻은 아버지지만 다들 아버지편일끼라. 오랜만에 보니 역시 호랑이 선생님이던데…캬….
(눈썹이: 컹!! 임마 조경철은 동물박사 김정만과 쌍벽을 이루던 천문학자 아저씨!)
아우: 난 말이다, 집에 왔는데 드라마가 시작하고 5분만 지났어도 안 본다아이가…. 다음날 인터넷서 다운받아서 본다아이가…. 그것도 당나귀에서 SDTV급 화질로만 다운받아서 감상한다.
형: 너네 학교에 너같이 이 드라마 열내는 사람 많나? 너 공대잖아….
아우: 없다. 드라마 안 보잖아. 나도 여기서 2화 안 봤으면 몰랐을 거다. 난 CD로 구울 거고 나중에 DVD 나오면 꼭 살 거다.
(눈썹이: 컹컹!! 이 동네 내 친구들은 다들 본다. 그거 안 보면 다음날 왕따된다.)
형: 내 주변에선 별로 안 보더라고. 찐한 재미도 없고, 주인공들도 못생겼다고….
아우: 왜 이 재밌는 드라마를 안 본단말이가? 우리가 이상한 건가?
(눈썹이: 것도 몰라? 이 러닝 브러더스야, 컹컹. 바로, 프로그레시브 드라마기 때문이지. 버뮤다 삼각지대, 황금의 트라이앵글, 불멸의 삼총사 같은 최고의 삼각관계가 나오잖아.)
형: 이거 재미없다는 사람들은 아마 사하라사막 한복판에서도 된장찌개 먹겠다며 고집 부릴거야. 서서히 적응하면 그 묘미를 알 수 있는 건데…. 드라마 시작에서 주인공, 복수가 죽을 거라는 걸 자신있게 깔 때부터 난 너무 좋았다.
첫댓글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마지막은 완전 우리집 이야기군요. 그때 녹화분 보면서(늦게 일이 끝나서..) 미리 동생이 얘기해주면 죽일려고 했었죠.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끔씩.. 저런 글 속에 드라마 해석이 들어있는 부분을보면 뭔가 뻥뚤리는 느낌을 받는적도 가끔..흠흠.. 네멋대로 해라 첨 봤을때...머리로는 몰라도 마음으로 정말 동감하는걸 느꼇는데.. 왜동감했는지 조금알것도 같네요..
좋은 글 감사해요.....but 그냥 느낀 그대로... 이런 머리 아픈 해석보단.... 첨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