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공덕총림의 세계 덕림회 원문보기 글쓴이: 자양
우리들은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글-홍사성 선생님
귀의(歸依)라는 것
우리들은, 인간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일까. 그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붓다가 매우 정밀한 인간음미(吟味)의 발자취와 인간해석의 모습을 엿보아 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변화하여 가는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 그 인간은 자칫하면, 악(惡)으로 기울어지며 악을 좋아하게 된다.
선(善)을 서둘러라.
마음을 악에서부터 멀리하라.
선을 행하는데 게으른 자는
그 마음 악을 좋아하게 된다.1)
《법구경(法句經)》의 이 한 구절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에 의해서 능히 마음을 악에서부터 멀리하며 선에 다가 가도록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불교인으로서 그 믿음의 표현을 언제나 ‘삼보귀의(三寶歸依)’로 행한다. 그것의 가장 오랜 모습은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쓰여있는 ‘삼귀의 삼창(三歸依三唱)’이다.
붓다(佛)에 귀의하옵니다.
법(法)에 귀의하옵니다.
승(僧)에 귀의하옵니다.
거듭 붓다에 귀의하옵니다.
거듭 법에 귀의하옵니다.
거듭 승에 귀의하옵니다.
다시 한 번 붓다에 귀의하옵니다.
다시 한 번 법에 귀의하옵니다.
다시 한 번 승에 귀의하옵니다.2)
붓다는 전도(傳道)를 시작한지 얼마 후에, 이 형식을 제자들을 위해서 정하였다. 그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소 표현의 변화는 있었다고 하지만, 불교인은 언제나 이 ‘삼보귀의’로써, 믿음을 표명하는 전형(典型)으로 보전하여 왔다.
그러면 여기서 귀의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그것을 살펴 들어가 보면 거기에 우리들은 당연히 사람은 무엇에 의지하여야 하느냐는 하는 문제에 관해서 가르치신 붓다의 진리에 다다르게 된다. 사람은 무엇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재물을 모아서 그 나머지 인생을 안락하게 지내려고 한다. 그때 그 사람은 재물에 의지하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자녀(子女)를 양육하여 그 노후(老後)를 거기에 맡기려고 소원한다. 그 때 그 사람은 자녀를 의지처(依支處)로 삼는 것이다. 혹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소위 절대빙의(絶對憑依)의 감정을 털어놓으며 신(神)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때 그 사람은 신을 의지처로 삼는 것이다.
아함부(阿含部)의 한 경(經)에 의하면 부처님은 정각(正覺)을 성취한 후 얼마인가 지나서 여전히 보리수 나무 밑에 혼자 앉아 생각을 하면서 이런 생각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존경하는 것이 없으며 공경하는 것이 없는 생활은 괴롭다. 내 이제 어떤 사문(沙門), 혹은 바라문(婆羅門)을 공경하며 존경하며 가까이 가서 살 수 있을 것인가.”3)
그 때 붓다도 역시 의지처 없는 인간 생활의 괴로움을 생각하며 그렇다면 무엇에 의지하여야 하는가에 관해서 심려(心慮)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붓다는 이 문제에 관해서 결국 어떠한 결론을 얻었을까.
인간 의지처(依支處)의 문제
숫타니파아타(經集) 가운데의 《타니야경(陀尼耶經)》이라는 경은 악마와 붓다의 문답을 다음과 같은 두개의 게(偈)로써 나란히 보여 주고 있다.
악마가 말하기를
‘자식 있는 자는 자식에 의해서 즐거워하며
소(牛)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즐거워한다.
진실로 의(依)(의지하는 곳)는 사람들의 즐거움이다,
의지 없는 자는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이르시기를
‘자식 있는 자는 자식에 의해서 근심하며
소 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근심한다.
진실로 의지함은 사람의 근심이다.
의(依) 없는 자는 근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4)
여기에서 ‘의(依)’라고 번역한 그 원어는 우파디(upadhi)이며,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의 대상을 뜻하는 말이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에 의해서 즐거워 한다’그것은 자손 번영의 소원을 뜻하고 있다. ‘소 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즐거워 한다’소는 그 당시에는 재산의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거기에는 재산 축적의 소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손의 번영을 소망하며, 재산의 축적에 힘을 쓰며, 그것을 의지처로 삼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의지처를 인간 생활의 구극(究極)이라고 생각하는 사고(思考)방식을 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이다. 재산을 의지하는 사람은 재산의 무상에 의해서 배반당할 것이며, 자식에 의지하는 사람은 자식에 의해서 눈물 흘리지 않는 날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옛 경전 가운데의 한 구(句)는 간명하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의(依)가운데의
견실(堅實)을 보지 못하도다.5)
지금 이 악마와의 대화에서 붓다는 ‘자식 있는 자는 자식에 의해서 근심하며, 소 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근심하며 이러한 의(依)는 인간 고민의 시초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붓다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인간구극의 의지처로 하라는 것일까. 그것은 사물도 아니며 사람도 아니다. 인각구극의 의지처는 법(法)이라는 것이 붓다의 결론이었다.
불교 경전을 살펴보면 붓다는, 의(依)에 관해서 의소(依所)에 관해서, 귀의처(歸依處)에 관해서 혹은 ‘존경하며 공경하며 가까이 가서 살 수 있는 것’에 관해서 말하며 가르친 장구(章句)는 무수히 있다. 그런 것들 중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몇 가지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본다. 그 하나는 《법구경》의 게송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뿐이로다.
다른 곳 어디에 곳이 있을 것인가.
작가 잘 조어(調御)되었을 때 사람들은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는 것이니라.6)
여기에서 ‘의지하는 곳’이라고 번역한 말의 원어는 나아타(nάtha)이며 그 뜻하는 바는‘머물다’또는 ‘수호자(守護者)’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주(主)이다’라고 표현하는 신앙고백과 대조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다. 또 남전(南殿)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입멸(入滅)을 앞에 두고 붓다가 그 제자들을 가르치며 남긴 중요한 교훈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여기에 스스로를 주(州)로 하며 스스로를 의소(依所)로 하여 다른 사람을 의소로 하지 말며 법(法)을 주(州)로 하며 법을 의소로 하여 다른 이를 의소로 하지 말며 머물라.”7)
여기서 ‘주(州)’라고 번역한 말의 원어는 다파(dipa=섬)이다.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는 세상에서 마치 강(江)속의 주(州=島)처
럼, 이것만은 정말 인생의 발판으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러한 의지처를 이 ‘주(州)’라는 글자로써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한역(漢譯)에 있어서는, 이것을 ‘등명(燈明)’이라고 번역한 곳도 있으며 거기에서 이 교훈의 구절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부르는 일이 예부터 있었다.
‘등명’이란 번역은 아름다운 역어(譯語)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거기에 인생의 방도(方途)를 맡기며 다만 한결같이 의지하며 믿는 것을 이 ‘등명’이란 말은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붓다의 교훈은 또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의 가르침이라고 익히 불려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구절 안에 있는 ‘스스로를 의소로 하여’와 또 ‘법을 의소로 하여’라는 ‘의소(依所)’의 원어는 사라나(sarana)이며, 또 ‘귀의처(歸依所)’라고 번역하여도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여기에는 우리 인생구극(究極)의 의지할 곳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정법(正法)이 열거되고 있다.
자귀의(自歸依)라는 것
붓다는 사람이 의지할 곳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하며 가르치셨다. 설명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어느 때는 사람은 의(依, 우파티)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였다. 어느 때는, 자기만이 자기의 의소(나아타)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 어느 때는 붓다와 법과 승(僧)이 최상의 귀의처(사라나)라고도 말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설명 방법은 결코, 그 사색(思索)의 혼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우리들의 귀의처에 관해서 여러 면으로 정밀한 언급(言及)이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의 언급 속에서 어떠한 설명과 결론을 찾아낼 수 있을까
.
그 첫 번째는 붓다는 세상의 상식적인 의지처(依支處)를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물, 자손, 그런 것은 의(우파티)로서는 적합지 않다. 그런 것을 의지처로 하는 것은 결국 일체무상(一切無常)의 이치에 의해서 배반당하며 고(苦)로 되돌아가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두 번째는 어떠한 인격적인 존재도 구극의 의지처로서는 긍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떠한 사문(沙門)도, 또 바라문(琶羅門)도 그런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신(神)이라 할지라도 또한 궁극의 의지처로서는 취급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붓다 그분까지도 단순한 우리들을 인도하는 스승이며 궁극의 의지처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때문에 불교인은 ‘그대의 궁극의 의지처는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우리들은 의(依)없이 존재한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어떤 경의 구절은, 비구의 이상적(理想的)인 모습을 말하면서 ‘집착(執着)하지 않으며 무엇에도 의지(依止)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어떤 곳에는 ‘그는 무의(無依)하며 다른 것에 인도(引渡)되지 않는다’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지귀의(自歸依)’가 되며 또한 ‘자등명(自燈明)’이라 해도 무방하다. 더 일반적인 표현을 말한다면 ‘자주(自主)’이다. 이것을 《법구경》에서는 ‘자기의 의소(依所=나아타=洲)’는 자기뿐이다. 다른 곳에 어떤 의소가 또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또 어떤 구절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진실로 자기는 자가의 주(主)이며
자기는 자기의 의소(依所)이다.
그런고로 자기를 제어(制御)하라.
마치 상인(商人)이 양마(良馬)를 길들이듯이8)
법귀의(法歸依)라는 것
그러나 이 구절의 후반(後半)의 말이 벌써 암시하고 있듯이, 자기를 의지처로 한다는 것은 멋대로의 자기에 의지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멋대로의 마음대로의 자기는 그 무서움이 원수와 같다는 것이 부처님의 의견이었다. 또다시 《법구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원수는 원수에 대해서
원한은 원한에 대해서
악한 업(業)을 행한다.
그러나 사악(邪惡)에 머물며
거기에 사는 마음은
더욱 악한 업을
그 사람에 대해서 행한다.9)
인간의 마음속에 물결치는 격정(激情)의 폭풍, 그것은 번뇌에 틀림이 없는 것이지만 이 격정의 폭풍의 무서움을 붓다는 누구보다도 강조한 사람이란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자귀의(自歸依)’의 가르침이 되며‘자주(自主)’의 길로서의 붓다는 가르침은 그대로 ‘의법(依法)’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의지할 가치 있는 자기란 어떠한 자기일까. 그것은 이미 말하였듯이 잘 조어(調御)된 자기이며 마치 상인이 좋은 말(馬)을 조련하듯이 잘 조련된 자기이다. 그리고 그 조어의 방법은 결국 ‘의법(依法)’ 즉 진리에 의해서 자기를 정돈한다는 듯이 된다.
그것을 붓다는 먼저 ‘자귀의, 법귀의’라고 설명하며 가르치신 것이다, 또 옛날의 논사(論師)들은 이것을 ‘의법(依法) 불의인(不依人)=법에 의하며, 사람에게 의하지 않는다)’이라고 단적으로 갈파(喝破)한 일도 있었다.
삼보귀의(三寶歸依)라는 것
이와 같이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불조선덕(佛祖先德)은 ‘그대들이 의지할 곳은 사물이 아니며 사람이 아니라 다만 진리(法)뿐이다’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다시 붓다는 이 ‘법(법=진리)을 불교인의 생활실천에 맞도록 세웠다.
불(佛)과 법(法)과 승(僧)의 삼보(三寶)에 대해서 진신으로 귀의(歸依)의 마음을 표시할 것을 불교인의 가장 중요한 행사(行事)로써 확정하신 것이다.
생각하건대 법 그 자체는 전혀 추상적인 것이며 쉽게 우리들의 생활실천에 결부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먼저 이 ‘법’의 구현자(具現者)로서의 붓다를, 나의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으로서 내세우며, 그에 대해서 진심으로 귀의하며 받든다. 다음으로 이‘법’을 보며, 그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귀의하며 받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법’을 믿고 따르며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화합하며 도우고 그 실천에 힘쓰는
장소로서의 승(僧=공동체)에 대해서 역시 진심으로 귀의하며 받든다. 그것이 ‘삼보귀의’이다.
즉 불교인들의 의지할 곳은 이것을 요약하면 ‘의법’넓게 펼치면 ‘삼보귀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공덕총림의 세계 덕림회 http://cafe.daum.net/cnub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