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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만 장로의 일생
정규만 장로는, 일생을 오직 성전 건축에 대한 꿈과 소망을 가지고
한의원을 경영하는 틈틈이 직접 건축현장을 확인하고 하면서
마침내 화강암으로 만든, 동양 최대 단일 석조건물인 서현교회당을 건립,
하나님께 봉헌한 정규만 장로의 일생은 감동과 감격이 있는 은혜의 스토리다.
정규만 장로의 성전건축에 대한 이야기는
크리스토 교인이 아닌 사람에게까지 회자 된
대구시가 가진 감동의 역사이다.
대구 약전 골목의 ‘활신한의원’은 정규만 장로가
일생동안 크리스토교 신앙과 인간사랑 정신으로
터를 닦고 인술을 베풀었던 곳이었다.
1935년 한의사고시에 합격, 한의사가 된 정규만 장로는
최초 ‘정약국’에서 ‘활신한의원’으로 상호를 바꾼 것은 1950년대,
6,25 전후의 그 궁핍한 세태에서 의술로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의술을 통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한편,
전도와 인간구원의 의미로 활신,
즉 ‘믿으면 산다’라는 뜻의 <活信>을 상호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당시 활신한의원은 1952년 의료법 개정으로 한의사제도를 확립하는 과정에 있었는데
지난 37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한약시장으로
전국에 알려진 약전골목에서 손꼽히는 15개 한의원 가운데 하나였다.
대구 약전골목, 활신한의원 운영한 정규만 장로
1911년 6월, 경북 구미에서 부친 정인기 장로, 모친 한신석 권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정규만은 믿음의 가계라 할 수 있는
양아버지 정인백 영수의 정통 신앙심을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양부 정인백 영수는 1890년대 초 농민운동이 활발하던 당시,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젊은 동학도였다.
그는 농민전쟁이 패하면서 동학도들의 검거와 탄압이 시작되자
이에 고향인 경북 선산군 상모를 떠나 서울로 잠입, 은신하게 되었고 이때
서울 정동에서 사역하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예수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정인백은 1900년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당시 유교와 불교문화권 속에서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던 이웃 주민들은
정인백의 열정적인 전도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1901년 상모동의 정인백 사랑방에서 10여명의 신자가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구미상모교회의 탄생이었다.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상모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 대구선교지부의 브루언(H. M. Bruen) 선교사의 지도를 받았고
이어 1903년 초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이때 정인백은 영수로 임명되었다.
정규만은 1912년 브루언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았고
1926년 이희봉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1951년 대신대학(임마누엘대구신학교)을 졸업한 정규만은
젊을 때부터 신실한 믿음의 종이었다.
특히 물질의 축복을 받게 되자 마치 다윗처럼
“이 땅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꿈을 품기
시작했다.
6.25직후, 대구는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창궐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스러져갔고
약전골목 활신한의원의 정규만 장로가 조제한 약첩을 쓰기만하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문은 전국으로 퍼지면서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당시 열악한 의료환경에서 활신한의원에 대한 기대치와 믿음이 있어서였다.
외지에서 온 환자들은 인근 여관에서 일박한 다음 조제 받은 약첩을 받아가는 일도 잦았다. 정규만 장로의 지극한 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난한 환자의 경우는 나중에 돈이 생기면 갚으라하고 그냥 보냈다.
도움을 청하면, 거절없이 섬기는 아름다운 믿음
임마누엘 대구신학교 재학 당시의 정규만 장로
그리고 평생 주일성수를 했다.
어려운 성도나 목회자, 신학생이 도움을 청하면 현금을 ‘세어보지도 않고’ 건네주었다.
마침내 서현교회는 1956년 5월 성전부지봉헌예배,
1957년 1월 성전건축기성회 조직,
1957년 8월 부지 2,000여평인 성전건축기공예배를 드렸다.
당시 주위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왕복 10차선으로 대로가 있지만 건축시 언덕에는 초가집,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그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지나고 있었다.
합승과 트럭이 지날때는 먼지가 일어나는 비포장도로가 교회 앞에 있었다.
정규만 장로는 앞장서서 성전건축을 시작했다.
당시 생각하지 못할 웅장한 화강암 석조건물건축을 시작했다.
교통 환경도 어려웠던 당시,
이름난 전북 익산에서 채석한 화강암을 대구역까지 열차로 운반,
다시 트럭으로 남산동 현장까지 옮겨 열악한 여건을 무릅쓰고
석공의 손으로 하나하나 돌을 깎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그 정성과 믿음은 기적 그 자체였다. 정규만 장로는 마침내 초가 일색이던 남산동 언덕에 노아방주 같은 성전을 10년의 공사기간 끝인 1969년 1월 대구서현교회 성전을 준공했다.
노아 방주같은 성전, 1969년 1월 대구서현교회 준공
이후 전국에서 서현교회를 찾는 발길이 줄을 이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시간에 정규만 장로의 신앙을 간증하며 소개했다.
정규만 장로는 약방 머리맡 손닿는 곳에
‘십일조 궤짝’을 두고 재료비와 인건비를 제외한 수입 전액을 넣었다.
한달에 한번 그 궤짝의 자물쇠를 열고 교회로 가져와 건축지불금으로 계산했다.
그럼에도 정규만 장로는 몸에 지닌 피부가 짓무르는 병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끝내 하늘의 일을 마무리 했다.
그 얼마 후인 1969년 6월, 정규만 장로는 소천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문상객으로 가득찬 교회와 운구행렬이 지나가는 도로변에는
평소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걸인들이 엎드려 애곡했다.
그만큼 그는 참 사랑을 이웃에게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평소 정규만 장로는 3가지 욕심을 가졌다.
『첫째, 하나님을 잘 믿는 욕심,
둘째, 남을 잘 도와주고 싶어 하는 욕심,
셋째, 앞의 두 가지를 실천하기 위한 물질의 욕심』이었다.
그는 자녀들에게 “내가 살아온 시기는 한국교회사에서
개척과 성전건축의 시대였지만 너희들이 살아갈 시기는
교회성장과 세계선교의 시대가 될 것이다.
힘을 쏟아 더 많은 나라와 족속,
더 많은 생명을 주님께 인도하는데 앞장서라”는 유지를 남겼다.
이에 따라 많은 그의 후손들이 아프리카, 중국, 미주 등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뒤늦은 감이있지만 2021년 5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故 정규만 장로에게 ‘공로훈장’과 ‘훈장증’을 수여한 바 있다.
출처 : 기독교종합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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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현교회 정규만 장로의 간증
***교회신문 > 제 932호 세상을 보는 창. 대구 서현교회 정규만 장로의 간증
전국의 한약을 판매하는 대구의 약령시 약전골목
한쪽 구석 맨바닥에 앉아 풀을 파는 풀장수 정씨가 있었다.
그는 술주정뱅이다. 그런데 그 아내는 대구 제일교회를 잘 다녔다.
그때 대구 제일교회에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를 오셨다.
원래 김익두는 깡패에 술주정뱅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어 대구 제일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하는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다.
아내의 권유로 이 부흥회에 참석한 정씨는
김익두 목사님의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왕이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삽시다!
복을 받는 비결은 첫 번째, 주일을 잘 지키고, 둘째는 십일조 생활을 잘하고,
셋째는 새벽기도회 빠지지 말고, 넷째는 주의 종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지키세요.”
라는 말씀에 ‘나도 이렇게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 하나님의 복이라는 걸 받아보자.’고
결심하고는 그 다음 주일부터 꼭 주일을 지켰다.
풀 파는 통 옆에 조그마한 상자를 만들어놓고 십일조 함을 만들어서
10원어치 팔면 1원을 넣으며 십일조 생활을 했고,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목사님이 주일 말씀을 증거하면 생명 걸고 그 말씀을 지켰다.
약전골목 사람들은 술주정뱅이가 사람 되었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한약방을 하는 친구가 하루는 정씨를 불러
“야! 너 사람도 되었으니 이제 풀장사 그만하고, 약방을 한번 해봐라.”고 했다.
정씨가 “나는 돈도 없고, 약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냐?”
했더니 “내가 너를 도와줄 테니까 해봐라.” 했다.
정씨는 친구가 이것저것 챙겨준 약재료로 길바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친구가 공책에 써준 대로 감기 걸린 사람이 오면 이것 이것을 넣고,
열병이 있는 사람이 오면 이것저것 넣어 지어주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씨가 공책에 적힌 대로 하는데
그에게 약을 지어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거다.
또 정씨 집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때 장티푸스가 유행했는데 정씨가 지어준 약을 먹으면 나았다.
심지어 약방에 약이 떨어져 옆집에서 빌려와서 지어주었는데도 옆집에서는 안 나았는데 정씨 약국에서 지어먹으면 다 낫는 것이었다.
하루는 약국 주인들이 정씨 약국에 와서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약을 짓기에 당신 약을 먹으면 낫느냐?” 정씨 왈, “당신들이 쓰지 않는 재료가 우리 약에는 들어갑니다.
기도라는 재료가 들어갑니다.” 정씨는 약을 지을 때마다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가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새로 짓게 되었는데 이 때 건축위원장이 되었다.
그래서 돌로 교회를 짓자고 결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돌중에서 제일 좋은 돌로 짓자’ 해서 알아보니
전라북도 황등의 돌이 제일 좋단다.
정 장로는 황등에서 돌을 사 기차를 대절해서 대구까지 가지고와 교회를 지었다.
서현교회가 그렇게 지어졌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서현교회는 당시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제일 큰 교회로 세워졌다.
정 장로는 대구 주변의 어려운 50~60개 교회를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었다.
또 수십 년간 가난한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고,
그 중 목사가 된 사람만 수십 명이다. 또 대구의 수천 가정이 정 장로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할 때마다 정 장로를 위해서 기도했단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찌 정 장로가 잘 되게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 장로는 어려운 농촌교회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대구에 오면 꼭 약국에
들르라고 해서 갈 때 여비를 주는데 세어서 준적이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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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의 사람 정규만 장로 ⑥ [ 2020-04-29 09:32:30] | |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Ⅳ. 정규만의 선한 영향력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성취된다. 정규만의 향기가 바로 그것이다. 1. 하나님 곁으로 교회당 건축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정규만 장로의 가정에는 시련이 닥쳐왔다. 모친 한신석 권사가 소천한 후에 부친인 정인기 장로가 고령임에도 교회당 완공할 때까지 한의원 일을 멈출 수 없는 아들을 도와 근 십 년간 외부 출입을 하지 않고 한의원 안에 머물며 하루도 빠짐없이 한약재를 썰고 저울에 다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다가 노환에다가 하지가 약해지고 다리가 굽는 질환이 도져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다. 그리고 정규만 장로 자신도 몸을 아끼지 않는 과로 탓에 지병인 당뇨병이 더욱 악화되어 운신이 힘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루 두 차례씩 공사장을 드나들며 공사 진행을 살펴보던 정 장로의 교회당 출입도 차츰차츰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급기야 1967년 3월 25일 정규만 장로의 부친 정인기 장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유족은 물론이고 모든 성도의 슬픔 속에 장례는 교회장으로 교회 뜰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정규만 장로는 교회당 완공 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지병 악화로 교회 출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교회에서는 준공과 더불어 교회당 봉헌식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교회당 건축의 일등 공신이었던 정규만 장로가 1969년 6월 24일 오후 8시 동성로 자택에서 향년 59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임종을 여러 성도가 지켜보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오른손을 들고 천사들이 영접하러 왔고 주님이 자기 손을 잡았다고 말했으며 그 순간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고 빛나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고별식이 열리던 날. 서현교회당은 전국 각지에서 대거 참석한 조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평소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던 목회자들과 성도들과 일반인들이 모여 고인의 마지막을 추모했다. 장지인 구미 선산으로 가는 운구 행렬엔 성경 구절을 적은 수많은 만장과 운구를 따르는 승용차들과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대구가 생긴 이래로 가장 긴 장례행렬이었다고 한다. 지역 신문에서도 그 광경을 보도했을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평소 고인에게 많은 사랑을 입었던 걸인들이 행렬 속에 섞여 통곡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으면 정규만 장로처럼 살다가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 했다. 운구 행렬이 장지에 다가갈 때 부근에서 농사짓던 농민들도 그 행렬로 다가가 고인을 애도했고 어떤 농부는 땅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정 장로가 소천한 후에 김영숙 권사는 정 장로가 못다 한 사역을 채우느라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별세로 충격을 받고 한동안 본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이웃교회에 출석한 일이 있었다. 김 권사는 자녀들을 불러 호되게 꾸지람을 한 후 이렇게 선언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통해서 교회당 건축을 하게 하신 것은 물질을 장로님에게 빌려 주신 것에 불과한 것인데 전국의 수많은 교인들이 마치 아버지가 교회당을 건축한 것처럼 찬양하고 칭송을 하였고 하나님께 가야 할 영광을 아버지가 대신 받을까 하여 하나님이 가장 맞는 시간표에 따라 데려가신 것이니까 오히려 감사드려야 할 일이다.' 그녀는 미국에 유학 중이던 3남 우현이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위독한 지경에 있었을 때에도 의연한 믿음의 자세를 유지하며 미국에 있는 우현의 가족에게 연락하여 우현으로 하여금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고백을 하도록 당부하였으며 이어 장기간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결국, 아들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66세의 고령임에도 충격과 금식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주위에서는 가정에서 그냥 예배를 드려도 될 터인데 무리해서 교회로 가느냐고 하자 내 아들이 오늘 천국에 갔다는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집에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느냐.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교회당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녀는 교회 여전도회 회장으로, 전도의 용장으로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였고 그 흔한 잡담 한 마디 나누는 법 없이 늘 교회당 한쪽에 조용히 앉아 묵상과 기도에 전념했다. 40일 금식 기도를 세 번씩이나 한 사실이 자녀들에 의해 전해지기도 했다. 김 권사는 1990년 77세의 나이로 별세 할 때까지 부군 못지않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2. 정규만의 자녀들 생전에 정규만 장로 부부는 자녀들에게 믿음의 정신을 확고하게 교육하였다. 신본사상, 신전사상, 청지기 사상을 강조하였고 실천사항으로 하루 3장 이상의 성경말씀을 읽고 1년에 한번 통독할 것. 기상, 취침, 식사 때 등 하루 5번 이상 기도를 드릴 것. 매일 찬양을 드리되 찬송가 전곡을 외울 것.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모든 절기 헌금을 빠트리지 말 것. 어려운 사람을 돕고 외면하지 말 것.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전도에 힘쓸 것. 항상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낮추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의 단점보다 장점만을 볼 것.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히 주일 성수할 것 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정규만 장로가 별세하기 얼마 전 자녀들에게 특별히 남겨 둔 유지가 있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은 교회 개척과 교회당 건축의 시대였지만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갈 시대는 교회 성장과 세계 선교의 시기가 될 것이다. 너희들은 선교에 힘을 쏟아 더 많은 나라와 더 많은 생명을 주님께 인도하는 데 앞장서라.' 자녀들은 지금 모두 서현교회를 떠났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좇아 열방으로 나아가 큰 믿음의 역사를 행하고 있다. 2006년도 9월경 인도의 '하이드라바드' 주 현지 언론에 '고마운 한국인'이라는 기사가 특별히 게재되었다. 그 내용은 한국에서 온 두 명의 사업가가 인도에서 가장 빈민촌에 속하는 '비자야와드' 마을 사람들에게 주 정부와 함께 주택을 50채 지어 주었는데, 그 중 10채를 정씨 형제가 부담했으며 더불어 주민에게 경제적 보조는 물론 여러 가지 교육을 베풀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다섯 군데의 현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는데 멀리 미국에까지 전파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한국인은 주식회사 '천마'의 고문 정영현 원로 장로(서울승동교회)와 주식회사 '천마'의 회장 정두현 원로 장로(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였는데 바로 정규만 장로의 장남과 차남이었다. 장남 정연현 장로는 최근 하나님의 나라로 갔다. 사업차 자주 인도를 방문하는 두 사람은 일찍이 인도 선교에 관심을 두고 힌두교가 장악하고 있는 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종교와 사회적 관습의 제약 가운데서 힘겹게 살아가는 극빈민층에게 믿음의 씨앗을 뿌려주고 사랑으로 다가갔으며 교회도 두 곳이나 개척 건립하여 현지인 장로까지 세울 정도였다. '비자야와드' 마을에 집을 지어 줄 때도 마을에 교회당을 하나 건립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정부를 설득시켰다. 그들의 선행은 주민들에게 좋은 반향을 일으키며 전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천마' 주식회사는 각종 의류, 가방 등을 취급하는 무역 업체로 경기도 용인과 중국에 공장이 있고 미국에도 '천마 USA'라는 이름으로 지사를 두고 있는데 도금사업부와 무역사업부가 있는 그곳에서만도 매년 수천만 불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아버지의 신앙의 유산을 훌륭히 전승받은 그들은 사업을 통해 세계 각 지역에서 민간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1970년대에 미국 뉴저지 지역에 처음으로 한인 교회인 '뉴저지 제일한인교회'가 세워졌는데, 차남 정두현 장로는 여기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정두현 장로는 교회에서의 역할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여 초창기 '라이즈임 코리아'의 후원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세계성경번역센터 WBTC'의 한국 유일의 국제이사로 봉직하고 있다. WBTC는 매년 천만 부 이상의 성경책을 인쇄 보급하고 있는 단체다. 그 외에도 '한국 국가 조찬기도회' 집행위원과 '애국 국가 조찬기도회 초청 한국대표단'을 역임한 바 있다. 정규만 장로의 슬하에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다. 3남 정우현 집사는 미국 유학 중 갑작스러운 병으로 젊은 시절에 별세했으며 4남은 정주현 목사인데 현재 서울 성현교회 파송 선교사로 A국에서 사역하고 있다. 현지에서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현지인 목회자를 양성하는 한편 그 나라 곳곳을 누비면서 선교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접어 두고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아름답게 수행하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사역자들이 그곳에도 있어서 선교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며 현지인들도 정규만 장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감동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5남 정재현 집사는 현재 미국 로스엔젤레스 소재 '충현선교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천마 USA, INC.'의 사장이다. 천마 USA는 각종 가방류를 수입 판매하는 무역회사로 견실한 중견 사업체이다. 정재현 집사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선교 사업에 혼신을 다하는 민간 선교사이다. 사업보다 선교를 우선으로 생각하여 세계 20여 곳의 선교단체에 20년간 꾸준히 선교비를 헌금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 선교 단체인 'COME MISSION'에 참여하여 열방으로 신앙 간증을 겸한 선교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정재현 집사의 간증에는 정규만 장로의 삶과 더불어 교회당 건축에 관한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어 먼 외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현교회'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 'COME MISSION'의 대표 이재환 선교사는 아프리카의 '감비아'에서 사역했었는데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릴 정도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정재현 집사의 믿음 생활에 감동을 받은 그가 한국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서현교회를 둘러보고 간다고 한다. 딸 정명자 집사는 대구의 모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손자녀 중에서도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도 있는데 그중 정순영 선교사는 아프리카 '기니'에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정규만 장로의 자녀를 중심으로 8촌까지 백여 명의 가족이 있는데 모두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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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과 구미상모교회 이야기
박정희 대통령이
주일학교에서부터 대구사범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칠곡 선산지구교회연합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1등을 독차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자신이 출석했던 고향 마을 교회인
구미 상모교회의 건축 헌금으로 100만원의 거액을 헌금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구미상모교회 100년사중에서)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1918년 상모동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상모교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박 대통령과 함께 주일학교를 다녔던
한성도 장로는 박대통령과 죽마고우였으며
대구서현교회 정규만 장로와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정규선 목사
그리고 상모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하였던 김삼수 목사
등이
함께 주일학교를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한성도장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15-6세까지는
주일을 거르는 법이 없이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고 웅변과 동화 구연에 재능이 있어서
칠곡선산지구 교회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는 맡아 놓고 1등을 했다”고 증언했다.
한 장로는 또 “동화대회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하여서 입상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교회를 잘 나오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 동안 박 대통령이 고향인 선산(현재 구미시 상모동)에서 주일학교를 다녔다는 설은
있었으나
주일학교부터 시작해서 사범학교 전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는 뉴스파워가 처음이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인 1967년
구미상모교회 건축헌금으로 건축비 총 3,800,500원 중 100만원을
헌금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담임목사였던 안성택 목사가 건축헌금으로 8,500원을 냈고,
박인호 장로가 1만원을 내는 등 50원에서부터 1만원까지
교인들이 헌금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 특별헌금한 인사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100만원,
대구서현교회 정규만 장로가 20만원,
(구미에서 20 킬로 떨어진 1906년에 세워진 대양교회 출신으로 사업을 하면서 서현교회에 출석 하고 있었던)
신흥직물공장 김종필 장로가 1만원,
구미읍 김성현 장로가 5000원,
대구 달서교회 이종한 장로가 3,000원, 대구 성상교회 이종성 장로가 2000원,
서문교회 이명숙 권사가 1만원, 서울신흥물산주식회사 정영현 사장이 20만원을 기부했고, 정규만 장로가 대지 270평을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보면 당시 100만원의 화폐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구미상모교회 당회가
1966년 9월 5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서신을 송달키로 가결”했고,
1966년 6월 9일 열린 제 100회 당회에서 “박대통령께 서신을 송달키 위하여 서간을 인쇄하여 원본을 2통과 사본 30매를 구입키로 하다.
원본은 즉시 속달 우편으로 청와대에 송부하도록 하고
그 준비는 당회장 목사님이 책임지고 하도록 가결” 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미상모교회는 박 대통령의 도움을 기다릴 수만 없어서
안성택목사와 3명의 장로
그리고 130명의 교인들이 합심하여 특별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기도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1967년 5월 7일
박정희대통령이 육영수여사와 함께 고향의 선영을 방문차 왔다가 교회도 들렀다.
이 때 박대통령은 안성택목사와 악수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낡았습니까?” 라고 물었고,
안 목사는 “교회가 지난 6.25 전쟁시에 폭격을 맞아서 부서진 것을 수리한 것인데
이제 신축을 할 계획”이라고 말하였다.
이 때 박대통령은 “목사님 이제 나무로 짓지 말고 석조로 잘 지으십시오 도와드리지요”라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구미상모교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다녀간 구체적인 교회 건축 계획을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박 대통령은 교회 건축이 시작되자
대구에 주둔하는 육군 5관구 사령부 공병대에서 트럭1대와 기사1명을 1개월 간 파견으로 보내 주어서 동네와 교회 신축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한편 <기독신보> 1967년 5월 20일자는
“朴 大統領 鄕里에 紀念敎會”라는 제목으로
‘상모교회, 신축위한 10개월 기도 끝엷 ‘대통령 어린 꿈 키우던 향수의 교회’
‘목사님 석조로 단단하게 지으시지요“라는 부제로 기사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5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내한 당시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예수 믿을 것으로 권유 받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해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총격을 받고 서거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 하더라도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신앙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미 상모교회는 1901년 3월 13일에 상모동 211번지에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들은 정인백의 사랑방에서
정인기, 정인명, 한규석, 한몽교, 김현례, 한신석, 한화석, 여성희, 신양월 등이
모여 첫예배를 드리면서 태동되었다.
상모교회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와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1993년 지금의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1994년 완공했다.
상모교회는 인구 38만명의 구미시민 중 3만명의 영혼을 책임지는 교회로서의 비전과
500여 소그룹과 50명 선교사 파송을 목표로 3000여 성도가 온 힘을 쏟고 있다.
경북기독교총연합회장, 한국 교회 단군상 반대 특별대책위원장이기도 한
김승동 담임목사는 "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셨던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 마을에 세워진 교회이고,
박 대통령이 출석했던 역사적인 교회로서 구미의 복음화와
대한민국의 복음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들이나라사랑의 마음으로 열심히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다.
안성택목사가 상모교회에 부임하여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을 믿음으로
양육하여 안정적인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에
예배당의 협소함과 초라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사용하는 예배당은 1926년 기와집 18평의 작은 예배당으로
목조 건물에 흙벽돌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 말기에는 일제에 강제 압류를 당하여
동사무소와 야학 건물로 사용하였기에 더욱 낡아졌으며,
6.25전쟁시에 폭격으로 기둥이 기울어져 무너질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안성택 목사와 당회원 그리고 온 성도들이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농촌교회의 실정이라 헌금을 많이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건축하는 일은 대단한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고
마음으로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당회는 당시 상모교회 출신으로 국정을 책임진
박정희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 하기도 하였다.
당시 당회가 이런 사실을 결의한 내용을 보면
*제99회 당회(1966년 6월 5일)에서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서신을 송달키로 가결하다 .”
*제100회 당회(1966년 6월 9일)에서
“박대통령께 서신을 송달키 위하여 서간을 인쇄하여 원본을 2통과 사본 30매를 구입키로 하다. 원본은 즉시 속달 우편으로 청와대에 송부하도록 하고 그 준비는 당회장 목사님이 책임지고 하도록 가결하다.”
하지만 교회는 현 대통령의 도움을 기다릴 수만 없어서 안성택목사와 3명의 장로 그리고 130명의 교인들이 합심하여 특별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기도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1967년 5월 7일 박정희대통령이 육영수여사와 함께 고향의 선영을 방문차 온 것이다.
물론 교인들은 동네 주민들과 함께 대통령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행사를 하였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함께 선영에 성묘를 하고
동네를 둘려 보면서 교회도 들렀다.
이 때 박대통령은 안성택목사와 악수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낡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 때 안목사는 교회가 지난 6.25 전쟁시에 폭격을 맞아서 부서진 것을 수리한 것인데
이제 신축을 할 계획이라고 말하였다.
이 때 박대통령은 “목사님 이제 나무로 짓지 말고
석조로 잘 지으십시오 도와드리지요”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8년 상모동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상모교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녔다.
함께 주일학교를 다녔던 한성도 장로는 박대통령과 죽마고우였으며
대구 서현교회 정규만 장로와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정규선 목사
그리고 상모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하였던 김삼수 목사 등이 함께 주일학교를 다닌 것이다. 한성도 장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며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을 회상하는 말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15-6세까지는 주일을 거르는 법이 없이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고 웅변과 동화 구연에 재능이 있어서 칠곡선산지구 교회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는 맡아 놓고 1등을 하였으며 동화대회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하여서 입상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교회를 잘 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박정희대통령이 다녀간 후 상모교회 당회는 성전 신축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교회는 저축한 재정이나 건축 자금이 없었기에 대통령의 보조를 전적으로 의지하기로 하였다.
[출처] 박정희대통령과 구미상모교회 이야기|작성자 성경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