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 죽음과 해방
루카 복음에 따르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예수님 하신 첫 설교는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 레위 25,8-13), 즉 희년 선포이다. 희년이 지닌 의미는 한마디로 해방이다. 그것은 채무, 노역, 죄책 등에서 해방돼서 자유롭게 됨이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에 있는 그 부분을 찾아 읽으신 후 선포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을 믿고 따름은 희년과 해방, 곧 자유로워짐이다. 그런데 모든 이가 바라는 해방하는 그 소식, 복음은 어느 지역에서나 폭력적으로 외면당했다. 박해 역사가 그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 박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태동부터 그랬다. 내가 믿는 이 신앙은 사도들의 땀과 피로 전해져 내려왔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설교를 듣고 모두 그분을 좋게 말했다가 나중에는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이 그들이 잘 아는 요셉 목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들의 선입견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바라면서 해방하는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입견이 예수님을 거부하게 했던 거처럼, 우리가 익숙한 삶의 방식, 사회 제도 등이 새로운 삶인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성경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역사책 같기도 하고, 과학이나 도덕책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와 생활을 소재로 하느님을 알린다. 예수님도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마태 13,34)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4-5) 우리 신앙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그 분, 하느님과 연결돼 있다.
우리는 십자고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 만난다. 부처님은 금빛으로 득도한 모습으로 평화롭게 앉아 계시고, 공자님은 인자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서 계신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죄인으로 사형돼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매달려 계신다. 하느님이 저렇게 되시다니, 이보다 더 낮아질 수 없다. 십자가의 신비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냐 만은, 분명한 건 진리에 이르는 길, 해방돼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고 그분을 따른 많은 성인 순교자가 이를 한결같이 증언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말한 “필사즉생 필생즉사”에서 그 생(生)은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하게 싸워 적군을 물리쳐 살아남는 것이었겠지만, 우리 순교자들은 다 죽었다. 예수님도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셨다. 기존 사회질서를 불평하면서도 복종하고, 아닌 줄 알면서 그렇게 하고야 마는 우리는 정말이지 해방돼야 한다. 그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죽지 않으면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자유는 없다. 그러지 않으면 늘 불평하고 탓하고 욕하며 후회와 괴로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다.
예수님, 주님은 폭풍우 속에서 풍랑을 밟고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버려야 할 때에, 죽어야 할 때에 바로 그렇게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풍랑을 밟고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보다 소중한 이 신앙을 잘 지키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