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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 성씨(姓氏) 탄생(誕生)의 비밀(펌글)>
<이 글은 2011년 07월에 펌 한 글인데, 한자(漢字)를 추가(追加)했으며, 중간(中間) 부분(部分) 한곳에 주석(釋)을 달은 것 외는 ‘펌 글’ 그대로입니다. 혹시나 “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께서 이의(異意)가 있으시다면 그 즉시(卽時) 삭제(削除)토록 하겠습니다. >
<펌 글> 본문(本文)
조선(朝鮮) 초(初) 만해도 성씨(姓氏)있는 양반(兩班)은 10%뿐이 안 되었는데, 조선(朝鮮)중기 양반(兩班)계급이 족보(族譜)를 가지게 되면서부터, 평민(平民)들도 각 씨족(氏族) 별로 구전 해오던 자료(資料)에 의하여 족보(族譜)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土着民)들은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同一) 씨족(氏族)으로 족보(族譜)를 가지게 되었다.
집성촌을 이루지 못하고 생활한 유랑민(流浪民)이거나 원래 천민(賤民)은 성씨(姓氏)없이 돌쇠, 떡쇠, 개똥이, 삼돌이 등 이름으로만 불리웠는데, 조선(朝鮮)후기에는 양반(兩班)들의 도움으로, 성(姓) 하나 만은 가지게 되었고. 1909년 일제가 민적법(民籍法) 시행 시 성씨(姓氏)가 없던 천민(賤民)들에게 다시 원하는 성씨(姓氏)의 호적(戶籍)을 일제가 주었는데, 그 때 가장 인기 있던 성씨(姓氏)가, 흔하면서도 유명한 "김(金), 이(李), 박(朴) 등등"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성(姓)이 더욱 흔해지게 된 것이다. 일제(日帝)가 성(姓)이 없던 밑바닥 천민(노비)계층에게 이들에게 신청(申請)하는 대로 유명(有名)성씨(姓氏)의 호적(戶籍)을 준 것은 조선(朝鮮)의 양반(兩班) 성씨(姓氏)들이 씨족(氏族)별로 단결(團結)하는 것을 방해(妨害)하기 위해 나온 것이고, 노비(奴婢)를 양민(良民)화시켜서 수탈(收奪)의 대상(對象)을 늘이기 위한 식민(植民)통치(統治)정책(政策)의 일환(一環)이었다.
일례(一例)로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 댁 노비(奴婢) 100명도 안동(安東) 김씨 호적(戶籍)을 만들어 가졌다고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양반(兩班)집 법도(法道)는 엄격(嚴格)한 유교(儒敎)의 윤리(倫理)로 교육(敎育)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兩班)으로 행세하기는 행동거지가 참으로 어렵고 엄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민(賤民)은 흉내 낼 수도, 낼 필요성(必要性)도 느끼지 못하는 사회(社會)였다. 현재 품성(品性)과 관계없이 성씨(姓氏)로 양반(兩班)입네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兩班)집의 돌쇠이었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確率)이 높은 것은 아닌지?
양반(兩班)은 항상 따르는 권속(眷屬)들에 대한 책임감(責任感)과 가문(家門)의 명예(名譽)를 위해 중압감(重壓感)을 느끼며 생활(生活)하였으며, 자신(自身)의 행동(行動)이 가문(家門)과 직결(直結)되었기 때문에, 오늘 같은 막된 행동(行動)이나, 막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지역사회(地域社會)에서 한번 쌍놈의 가문(家門)으로 찍혀지면, 자녀(子女)들의 출가 문제(問題)로 직결(直結)되기 때문에 성씨(姓氏)가 그 사람의 품행(品行)을 구속(拘束)했다고 한다.
법도(法道)와 예(禮)를 생명(生命)같이 여기고 살아간 이유(理由)도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양반(兩班)사회(社會)는 순기능(順機能) 역할(役割)도 했다고 판단(判斷)된다. 성씨(姓氏)에 대한 이해(理解)를 돕기 위하여 아래의 자료(資料)를 첨부(添附)해 본다.
2000년에 조사한 우리나라의 성씨(姓氏)별 인구(人口)가 통계청 홈페이지에 떴는데, 1985년 발표 당시보다 성씨(姓氏)의 숫자가 12 개 늘었다. 그 때는 274개였는데, 이번은 286개가 되었다. 우리나라 10대 성씨의 순위는 변화가 없었다.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임(林)
“김(金)” 씨는 우리나라 인구의 21.6%인 992만 여 명으로 여전히 제일 많았다.
“이(李)” 씨는 그보다 훨씬 적은 14.8%로 679만 여 명으로 조사되었다.
“박(朴)” 씨는 또 그보다 훨씬 적은 8.5%로 389만 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뒤를 잇는“최(崔),정(鄭)”씨는 4% 대이고,
“강(姜), 조(趙), 윤(尹), 장(張)”씨는 2% 대,
그리고 “임(林)”씨부터 21위“전(全)”씨까지 1%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씨(姓氏)별 인구수(人口數)가 거의 일정(一定)한 차이를 유지(維持)하며 계속 나열(羅列)되는 특징(特徵)을 보이고 있다.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의 성씨(姓氏)는 1위부터 2, 3위의 분포(分布)가 비교적(比較的) 고르게 나타나 특정(特定) 성씨(姓氏)로 지나치게 몰리는 경우가 없다는데.........우리나라의 경우만 1, 2위가 이상할 정도로 특별히 많아진 것은, 1900년대 초에 처음 호적(戶籍)법이 시행(施行)될 때 “양반(兩班)이 되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런 기형적(畸形的)인 분포(分布)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무슨 이야기 인고 하니........일본(日本)이 메이지 유신(維新) 때에 “전 국민(國民)의 성씨(姓氏) 가지기” 정책(政策)을 시행하여 전 국민(國民)으로 하여금 성씨(姓氏)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大部分)의 국민(國民)들은 각자 자기 집의 위치(位置)나 동네의 특징(特徵)을 살린 성씨(姓氏)를 만들어서 가졌다고 한다.
“田中, 中村, 松下........” 등 다양하게 창씨(創氏)된 성씨(姓氏)의 숫자가 순식간에 8만 개나 되었는데.........일본(日本)은 이러한 특징(特徵) 때문에 특정(特定) 성씨(姓氏)가 지나치게 많은 경우(境遇)는 없다고 하며, 또한 성씨(姓氏)만 가지고는 가문(家門)의 역사(歷史) 같은 것은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를 논할 때 성씨(姓氏)가 무언가 하는 것은 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인(日本人)들은 당연히 성씨(姓氏)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이나 애착(愛着) 같은 것이 거의 없다. 중국(中國)이나 한국(韓國)과는 여기에서 엄청난 차이(差異)를 보인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일본(日本)이 우리나라, 즉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와서도 계급(階級)을 타파(打破)한다면서 “신분(身分) 표시(標示)가 없는 호적(戶籍)법”을 시행하였고, 여기에서도“ 전 국민(國民)의 성씨(姓氏) 가지기” 운동(運動)을 전개(展開)하여 전 국민(國民)으로 하여금 성씨(姓氏)를 만들어 가지도록 하였는데, 결과(結果)는 일본(日本)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국민(國民)의 절반(折半) 정도를 차지하던 “돌쇠, 밤쇠, 삼월이, 오월이” 들은, 일본(日本)처럼 새로이 성씨(姓氏)를 만드는 경우(境遇)는 거의 없었고, 이들 대부분(大部分)이 그 동네 지주(地主)나 양반(兩班)들에게 부탁(付託)하여 그 “양반님”들의 성씨(姓氏)를 얻어 와서는 관청(官廳)에 신고(申告)하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때에 김(金) 씨나, 이(李) 씨가 갑자기 늘어나는 기현상(奇現象)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世界) 어느 나라에서도 특정(特定) 성씨(姓氏)가 총 인구(人口)의 20%를 넘어 가는 경우는 없는데, “양반(兩班) 대우(待遇)를 받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난, 대단히 특이(特異)한 현상(現象)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여튼 우리나라는 결과적(結果的)으로 “전 국민(國民)의 양반(兩班)화”가 자연(自然)스럽게 이루어졌고, 옛날 이야기에 그 많던 “방자, 향단이, 마당쇠, 구월이”의 자손(子孫)은 순식간(瞬息間)에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슨, 무슨 정승(政丞), 판서(判書)의 몇 대 손(孫)”이 되어 버렸고, 오로지 양반(兩班)의 후손(後孫)만이 존재(存在)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世界)에서 가장 양반(兩班)이 많은 나라가 되었고, 또한 제사(祭祀)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어 버렸다. 불과 100 여 년 전만 해도 “성씨(姓氏)도 없는 쌍놈들”은 제사(祭祀)고 차례고 지낼 수가 없었는데, 요즈음은 집집마다 장손(長孫)이면 모두 명절날 차례를 지낸다.
참고(參考)로 5,000년 전부터 성씨(姓氏)를 사용해 온 중국(中國)의 경우를 보면, 성씨(姓氏)별 인구(人口) 1, 2, 3위의 비율은 각각 7.4%, 7.2%, 6.8%로 되어 있어서, 특정(特定) 성씨(姓氏)로 몰리는 현상(現象)은 없다. 중국(中國)은 인구 0.1% 이상(以上)을 차지하는 성씨(姓氏)가 모두 129개로 나타났는데, 이 129개 성씨(姓氏)의 인구(人口) 합계(合計)는 중국(中國) 인구(人口)의 87%라고 한다.
이는 2006년 1월 10일 중국(中國)과학원에서 중국(中國)역사상 가장 정밀(精密)한 자료(資料)조사(調査)를 거쳐 발표(發表)했다는 “100대 성씨(姓氏)”에 근거한 것이다. 이번 발표(發表)에서 “인구기준 성씨순위”가 1987년의 발표(發表) 자료(資料)와는 약간의 차이(差異)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표본(標本) 조사(調査)한 기초(基礎)자료(資料)의 차이(差異) 때문이라고 한다.
1987년 조사(調査)는 겨우 57만 명 정도를 표본(標本) 조사(調査)하여 순위(順位)를 매긴 것이고, 이번 조사(調査)는 그 때에 비하여 500배도 넘는 약 3억 명을 표본(標本) 조사(調査)하여 순위(順位)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그 정밀도(精密度)가 엄청나게 향상(向上)되었다고 한다.
이번 조사(調査)에서 중국(中國) 10대 성씨(姓氏)는, “이(李), 왕(王), 장(張), 유(劉), 진(陳), 양(楊), 황(黃), 조(趙), 주(周), 오(吳)” 로 판명(判明)되었다.
이 순위(順位)는 자동적(自動的)으로 전 세계(世界)의 10대 성씨(姓氏)가 되기도 한다. 이 중 “李”는 중국(中國) 인구(人口)의 7.4%인 9천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발표(發表)하였는데, 우리나라의 679만여 명을 합치면 “李”씨는 1억 명을 넘어 가는 세계(世界) 유일(唯一)의 성씨(姓氏)가 된다.
약 900년 전인 서기(西紀) 1,100년대에 북송(北宋)에서 발표한 『백가 성(百家 姓)』이란 책자가 최초(最初)의 성씨(姓氏) 조사(調査) 기록(記錄)이었고, 명(明)나라의 『천가 성(千家 姓)』, 청(淸)나라의 『백가 성(百家 姓)』 등이 뒤를 이었으나 이 책들은 모두 성씨(姓氏)별 인구수(人口數)를 기준(基準)으로 서열(序列)을 매긴 것은 아니었다. 900년 전 『백가 성(百家姓)』에서의 성씨 순위는 “趙錢孫李周吳鄭王...”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인구수(人口數) 순위(順位)가 아니었다.
“조(趙)”는 북송(北宋)을 건국(建國)한 황제(皇帝)의 성이었고, “전(錢)”은 당시 가장 힘이 강했던 오월국(吳越國)의 국왕(國王) 성씨(姓氏)였고, “정(鄭)”은 그 왕후(王后)의 성씨(姓氏)였으며, “이(李)”는 그 다음 강국(强國)인 “남당(南唐)”의 국왕(國王) 성씨(姓氏)였던 것인데, 중국(中國)의 1,100년대는 송(宋)나라가 약간 힘이 강한 정도였고, 고만고만한 나라들로 나누어져서 도토리 키 재기로 아슬아슬한 균형(均衡)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900년 전 『백가성(百家姓)』에서의 성씨(姓氏) 순위(順位)는 인구(人口) 순이 아니라 예우(?)를 받아야 할 성씨(姓氏)의 순위(順位)였고, 최근(最近) 중국(中國) 일부 신문(新聞)에서 보도한 “900년 만에 조(趙)가 1위에서 8위로 밀렸다”는 내용(內容)은 옛날 기록(記錄)의 특징(特徵)을 잘못 이해(理解)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나라 성씨(姓氏)의 순위(順位)를 기준(基準)으로 하여 중국(中國) 성씨(姓氏) 순위(順位)를 설명(說明)하면 다음과 같다.
金 : 21.59%, 한국 1위 (중국 64위)한국 발음이 현재는 “김”이지만 옛날에는 “금”으로 읽었다는 주장도 있음. 현재 중국 배우 중에도 이 성씨를 가진 배우가 있는데 “금 성무”라고 보도되고 있음. 이 글자의 현대식 중국 표준발음은 “찐”임
李 : 14.78%, 한국 2위(중국 1위 7.4%). 한국(韓國), 중국(中國) 합하면 1억이 넘어 가는 전 세계(世界) 단 하나의 성씨(姓氏)임. 중국(中國), 북한(北韓)에서는 “리”라고 하는데, 남한(南韓)에서만 “이”라고 읽고 있음. 그런데, 남한(南韓) 사람들도 영어(英語)로 쓸 때에는 대부분 “Lee(리)”라고 하는 버릇이 있음
박 : 8.47%, 한국(韓國) 3위(중국 100위 내에서는 안 보임). 한자(漢字)로 “朴”을 쓰기도 하지만, 원래 “바가지”란 뜻의 순우리말 토종 성씨(姓氏)임. “박혁거세”의 “박”은 “박만큼이나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은 말임. 영어(英語)로 "Park" "Pak" 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으나 "Paak" 이라고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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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本人) 주(注) : 자치통감(資治通鑑) 후한(後漢)편에서는 : 이미 박(朴)이란 성씨(姓氏)가 사천(四川)과 그 서(西)쪽과 서남(西南)일대에 분포(分布)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반란(反亂)을 일으켜 토벌(討伐)한 기록(記錄)이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효령제 / 광화 5 년 (182년) ; 《秋,七月,板楯蠻寇亂巴郡,連年討之,不能克.:板楯七姓,自秦世立功,復其租賦,其人勇猛善戰. : 가을 7월, 板楯(판순)의 만족(蠻族)이 파(巴)군(郡)을 노략질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몇 년을 계속해서 토벌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고 하였는데, : 판순(板楯)의 7 성(姓)은 ; 진(秦)나라 때 공(功)을 세워, 조세(租稅)와 부역(赴役)을 면(免)받은 7 성(姓)들을 말하는데, 그들은 용맹(勇猛)스럽고 전투(戰鬪)를 잘 한다》고 하였다.
➠ 이들 7 성(姓)은 「羅. 朴. 督. 鄂. 度. 夕. 龔」 씨(氏)등을 말한다. 여기에 “박(朴)”성(姓)이 보인다. 이것은 진한(秦韓)=진한(辰韓)의 이야기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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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崔) : 4.72%, 한국 4위(중국 58위)
정(鄭) : 4.37%, 한국 5위(중국 21위)
강(姜) : 2.27%, 한국 6위(중국 50위)
조(趙) : 2.14%, 한국 7위(중국 8위)
윤(尹) : 2.06%, 한국 8위(중국 95위)
장(張) : 2.00%, 한국 9위(중국 3위)
임(林) : 1.66%, 한국 10위(중국 17위/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오(吳) : 1.54%, 한국 11위(중국 10위)
한(韓) : 1.53%, 한국 12위(중국 26위)
신(申) : 1.52%, 한국 13위 (고려태조가 하사한 성씨, 일본으로 넘어가 정착한 일족이 있음)
서(徐) : 1.51%, 한국 14위(중국 11위)
권(權) : 1.42%, 한국 15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황(黃) : 1.40%, 한국 16위(중국 7위)
안(安) : 1.39%, 한국 17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송(宋) : 1.38%, 한국 18위(중국 23위)
유(柳) : 1.31%, 한국 19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 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
홍(洪) : 1.13%, 한국 20위(중국 99위)
전(全) : 1.07%, 한국 21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 고려 왕씨 유래설이 있음)
고(高) : 0.95%, 한국 22위(중국 19위)
문(文) : 0.93%, 한국 23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손(孫) : 0.90%, 한국 24위(중국 12위)
양(梁) : 0.85%, 한국 25위(중국 20위)
배(裵) : 0.81%, 한국 26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
조(曺) : 0.79%, 한국 27위(중국 27위)
백(白) : 0.76%, 한국 28위(중국 79위)
허(許) : 0.65%, 한국 29위(중국 28위)
남(南) : 0.56%, 한국 30위(중국 100위 이내 없음/일본에 정착한 일족이 있음)
우리나라 31위 이후의 성씨는 다음과 같음.
31-40 심(沈) 유(劉) 노(盧) 하(河) 전(田) 정(丁) 성(成) 곽(郭) 차(車) 유(兪)
41-50 구(具) 우(禹) 주(朱) 임(任) 나(羅) 신(辛) 민(閔) 진(陳) 지(池) 엄(嚴)
51-60 원(元) 채(蔡) 강(康) 천(千) 양(楊) 공(孔) 현(玄) 방(方) 변(卞) 함(咸)
61-70 노(魯) 염(廉) 여(呂) 추(秋) 변(邊) 도(都) 석(石) 신(愼) 소(蘇) 선(宣)
71-80 주(周) 설(薛) 방(房) 마(馬) 정(程) 길(吉) 위(魏) 연(延) 표(表) 명(明)
81-90 기(奇) 금(琴) 왕(王) 반(潘) 옥(玉) 육(陸) 진(秦) 인(印) 맹(孟) 제(諸)
91-100 탁(卓) 모(牟) 남궁(南宮) 여(余) 장(蔣) 어(魚) 유(庾) 국(鞠) 은(殷) 편(片)
101-110 용(龍) 강(疆) 구(丘) 예(芮) 봉(奉) 한(漢) 경(慶) 소(邵) 사(史) 석(昔)
111-120 부(夫) 황보(皇甫) 가(賈) 복(卜) 천(天) 목(睦) 태(太) 지(智) 형(邢) 피(皮)
121-130 계(桂) 전(錢) 감(甘) 음(陰) 두(杜) 진(晋) 동(董) 장(章) 온(溫) 송(松)
131-140 경(景) 제갈(諸葛) 사공(司空) 호(扈) 하(夏) 빈(賓) 선우(鮮于) 연(燕) 채(菜) 우(于)
141-150 범(范) 설(?) 양(樑) 갈(葛) 좌(左) 노(路) 반(班) 팽(彭) 승(承) 공(公)
151-160 간(簡) 상(尙) 기(箕) 국(國) 시(施) 서문(西門) 위(韋) 도(陶) 시(柴) 이(異)
161-170 호(胡) 채(采) 강(强) 진(眞) 빈(彬) 방(邦) 단(段) 서(西) 견(甄) 원(袁)
171-180 방(龐) 창(昌) 당(唐) 순(荀) 마(麻) 화(化) 구(邱) 모(毛) 이(伊) 양(襄)
181-190 종(鍾) 승(昇) 성(星) 독고(獨孤) 옹(邕) 빙(?) 장(莊) 추(鄒) 편(扁) 아(阿)
191-200 도(道) 평(平) 대(大) 풍(馮) 궁(弓) 강(剛) 연(連) 견(堅) 점(占) 흥(興)
201-210 섭(葉) 국(菊) 내(乃) 제(齊) 여(汝) 낭(浪) 봉(鳳) 해(海) 판(判) 초(楚)
211-220 필(弼) 궉(?) 근(斤) 사(舍) 매(梅) 동방(東方) 호(鎬) 두(頭) 미(米) 요(姚)
221-230 옹(雍) 야(夜) 묵(墨) 자(慈) 만(萬) 운(雲) 범(凡) 환(桓) 곡(曲) 탄(彈)
231-240 종(宗) 창(倉) 사(謝) 영(永) 포(包) 엽(葉) 수(水) 애(艾) 단(單) 부(傅)
241-250 순(淳) 순(舜) 돈(頓) 학(?) 비(丕) 영(榮) 개(介) 후(侯) 십(?) 뇌(雷)
251-260 난(欒) 춘(椿) 수(洙) 준(俊) 초(肖) 운(芸) 내(奈) 묘(苗) 담(譚) 장곡(長谷)
261-270 어금(魚金) 강전(岡田) 삼(森) 저(邸) 군(君) 초(初) 영(影) 교(橋) 순(順) 단(端)
271-280 후(后) 누(樓) 돈(敦) 소봉(小峰) 뇌(賴) 망절(網切) 원(苑) 즙(?) 증(增) 증(曾)
281 삼(杉) : <남자 2명>
282 우(宇): <남자 1명> 소(肖)예(乂) 빙(氷) 경(京) : <여자 각 1명>
(이상 총 286개 성씨)
이 중 최근에 새로 생긴 성씨 중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잘못 기재하여 그리 된 것도 있고, 국제결혼으로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남아 또는 중국 사람들의 성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 중국의 주요 성씨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李 : 중국 7.4%, 중국 1위(한국 2위)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개국공신들에게 “李”를 하사했고, 나중에 후위(後魏)의 선비족(鮮卑族)에서도 “李”씨로 바꾸어 사용한 사람들이 많음. 중국인들은 영어로 표기할 때 "Li"를 주로 사용하며, 미국 "Lee"와의 관계는 불명확함
王 : 중국 7.2%, 중국 2위(한국 83위)중국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사이의 신(新)나라 때 황제 왕망(王莽)의 성씨임. 중국 사람이라 하면 “비단장사 왕 서방”이라 할 정도로 중국에 왕 씨가 많았음.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왕족이 “왕건(王建)”의 왕씨였으나 고려 멸망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춤.
張 : 중국 6.8%, 중국 3위(한국 9위) 장삼이사(張三李四 : 중국인들은 대개 張씨네 셋째 아들 아니면 李씨네 넷째 아들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張씨가 많았음.
지금도 “장가계(張家界)”는 관광지로 유명함.“왕삼이사(王三李四)”란 말이 생기지 않은 것은 “왕이 셋이면..”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됨.
劉(유) : 중국 4위(한국 32위)
陳(진) : 중국 5위(한국 48위)
楊(양) : 중국 6위(한국 55위)
黃(황) : 중국 7위(한국 16위)
趙(조) : 중국 8위(한국 7위)
周(주) : 중국 9위(한국 71위)
吳(오) : 중국 10위(한국 11위)
徐(서) : 중국 11위(한국 14위)
孫(손) : 중국 12위(한국 24위)
朱(주) : 중국 13위(한국 43위)
馬(마) : 중국 14위(한국 74위)
胡(호) : 중국 15위(한국 161위)
郭(곽) : 중국 16위(한국 38위)
林(임) : 중국 17위(한국 10위)
何(하) : 중국 18위(한국에는 없음)
高(고) : 중국 19위(한국 22위)
梁(양) : 중국 20위(한국 25위)
鄭(정) : 중국 21위(한국 5위)
羅(나) : 중국 22위(한국 45위)
宋(송) : 중국 23위(한국 18위)
謝(사) : 중국 24위(한국 233위)
唐(당) : 중국 25위(한국 173위)
韓(한) : 중국 26위(한국 12위)
曹(조) : 중국 27위(한국 27위) / 한국에서는 “曺(조)”란 글자를 주로 사용함
許(허) : 중국 28위(한국 29위)
鄧(등) : 중국 29위(한국에는 없음)
蕭(소) : 중국 30위(한국에는 없음)
중국 31위부터 100위까지는 다음과 같음
31-40 馮(풍),曾(증),程(정),蔡(채),彭(팽),潘(반),袁(원),于(우),董(동),余(여),
41-50 蘇(소),?(협),?(여),魏(위),?(장),田(전),杜(두),丁(정),沈(심),姜(강)
51-60 范(범),江(강),傅(부),?(종),?(노),汪(왕),戴(대),崔(최),任(임),?(육)
61-70 廖(료),姚(요),方(방),金(금),邱(구),夏(하),?(담),?(위),?(가),?(추)
71-80 石(석),熊(웅),孟(맹),秦(진),?(염),薛(설),侯(후),雷(뢰),白(백),?(용)
81-90 段(단),?(학),孔(공),邵(소),史(사),毛(모),常(상),万(만),?(고),?(뢰)
91-100 武(무),康(강),?(하),?(엄),尹(윤),?(전),施(시),牛(우),洪(홍),?(공)
중국 측 발표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약 12,000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13억 인구 전부를 조사 못해서 이런 추정치라는 것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신판 『중국성씨대사전(中國姓氏大辭典)』에는 무려 23,000개의 성씨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중국, 한국,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나 인식들에 대하여 약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우선 중국(中國)의 성씨관
중국은 예로부터 성(姓)과 씨(氏)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원래 성(姓)이라 함은 모계제 사회의 흔적으로 “어머니의 출신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씨(氏)는 “출생한 뒤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곳”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이 모두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黃帝)”의 경우 성(姓)은 “희(姬)”이고 씨(氏)는 “헌원(軒轅)”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성격이 조금 바뀌어 황제(皇帝), 즉 천자(天子)가 내려 주는 것은 성(姓)이라 했고, 제후(諸侯) 또는 국왕(國王) 정도가 내려 주는 것은 씨(氏)라 했다.
언제나 성(姓)이 한 단계 위의 개념이었는데, 보통 성(姓)은 한 글자였고 씨(氏)는 두 글자가 많았다.
그리고 한(漢) 나라 때에 족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천자가 각 제후나 공신들의 자제들에 대한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천자가 만든 족보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권력의 유무를 판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성씨는 남자들만의 혈통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생물학적으로 특정한 Y염색체의 유전 상황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중국의 성씨는 역사가 5000년이 되었고, 성씨는 문화의 전승과 남성 혈통의 흐름을 연구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성씨이면 무조건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습이 자연스러운 형성되었고, 이러한 혈연관계는 인간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의 성씨관
원래 우리나라의 토착민들은 성씨가 없었다고 한다. 계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일부 고위 관리들에게서 성씨를 가진 자들이 간간이 나타났고, 삼국시대 말기 신라에서는 국력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왕족을 중심으로 성씨를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그래서 왕족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죽고 없는 먼 조상님들(혁거세, 알지 등등)에게도 소급해서 성씨를 만들어 붙이고 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말까지도 우리나라는 양반(兩班)보다 쌍놈들이 더 많았고, 성씨(姓氏)를 갖고 있는 사람들 숫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 일본(日本)의 압력(壓力) 덕분에 호적(戶籍)에 성씨(姓氏)란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올린 사람들도 많았지만, “만들어 올렸다”는 그 사실은 언제까지나 “가문의 비밀”로 숨겨 두어야 했다.
성씨의 유무와 관련한 성씨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우리 백성들은 양반제도가 비록 법적으로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어렵게 얻은 “양반의 성씨”만큼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1940년대에 일본이 “이제 조선과 일본은 명실상부한 한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식으로 창씨하는 것을 허용한다고 발표하고, 앞으로 성씨로 인한 조선인, 일본인 간의 차별대우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성씨 자체를 “가문의 역사”로 생각하는 많은 우리 백성들은 당연히 반대하였고, 성씨의 역사가 불과 50년밖에 안 되어 성씨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없었던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반대를 보고 “거참, 이상하다. 그깟 성씨 가지고 왜들 저러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성씨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일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성씨를 만들어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신청 첫날 아침에 맨 먼저 신고하였는데, 이광수가 만든 성씨는 “일본 천황 고향의 뒷산인 향구산(香久山)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향산(香山)이었다. 이광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성씨란 건 별 것 아니야”라는 자기네들의 전통적 인식을 한국식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어쨌든, 지금의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씨를 그대로 유지하는” 나라가 되어 있다. 전 세계의 남자들이 한국인들에게 깜짝 놀라는 것이 두 가지라 하는데, 한 가지는 부인의 성씨 문제이고 또 한 가지는 “부인이 남편 통장을 관리” 하는 것이라 한다. “자다가 벌떡 깨어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는 한국은 거의 구제불능성 선천적 여성천국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성씨관
일본(日本)은 우리 한반도(韓半島)의 영향을 받아 백제와 교류할 때부터 성씨의 필요성을 크게느끼지 못했고, 오랜 기간 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 가물에 콩 나듯 중국과의 교류도 크게 활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씨의 위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19세기말 미국이 군함을 밀고 들어오고, 일본 청년들이 세계일주도 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패밀리 네임”이란 것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을 보니 자기네들의 직업을 가지고 만든 성씨도 있고, 자기네 마을의 특징을 살려서 만든 성씨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도 성씨란 걸 만들어서 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자들에게 물어 보니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姓)이라는 것도 있고 씨(氏)라는 것도 있는데, 성(姓)이란 것은 황제가 직접 만들어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백성이 한두 명도 아닌데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준단 말인가... 그냥 일본은 씨(氏)를 만들어서 쓰기로 하고 창씨(創氏)하는 업무는 각 사무라이들에게 그냥 맡기기로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순식간에 수만 개의 씨(氏)가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일본은 어떤 장부이든지 “성명(姓名)”이란 칸은 없고 어디든지 모두 “씨명(氏名)”이란 칸만 있다. 19세기 말 갑자기 시행된 창씨(創氏)였기 때문에 각자의 씨(氏)에 대한 커다란 자부심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청일 전쟁 승리 이후 조선에게도 성씨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호적법을 만들어 창씨(創氏)의 기회를 주었으나, 조선인들은 이상하게도 창씨(創氏)는 않고 기존 양반들의 성(姓)을 빌려 와서 관청에 신고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글자의 성(姓)을 사용하는 사람은 중국(中國) 또는 조선인(朝鮮人)이고, 두 글 자리 씨(氏)를 쓰는 사람은 일본인(日本人).... 어찌 되었든 간에 국적(國籍) 구별(區別)이 쉬워서 좋기는 했다.
조선을 삼키고 난 뒤에 조선인들로부터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 놓고는 차별대우가 너무 심하다”는 등 불만사항이 많이 접수가 되었지만, 우선 이름에서부터 출신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니 일본 정부로서도 별로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냥 대충 세월만 보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들이 매일매일 죽어 나가고... 조선인들이라도 군인으로 뽑아서 내보내야겠는데 차별대우 해소를 위한 근본대책을 세우라고 매일 투덜대는 저 조선인들을 그냥 일본군으로 들여보냈다가는 전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질 것 같고... 일본정부는 착잡해졌다.
누군가 묘안을 냈다. 일본식으로 창씨(創氏)할 기회를 한 번 더 줄 터이니 이참에 일본식으로 제대로 창씨를 해라... 어차피 얼굴 생긴 것도 똑같고.. 조선 출신을 차별대우하고 싶어도 조선 출신이란 표시가 없으니 못할 것 아니냐. 그러나 그 대신 조선 청년들 군대에 좀 가 줘야 되겠다. 이렇게 하여 1940년대에 창씨(創氏)할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어떻게 그 동안 써 오던 성(姓)을 버리고 그보다 격이 낮은 씨(氏)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법적으로 양반이란 것도 없어졌고 문벌이란 것도 이제 큰 의미가 없어졌는데 허울만 남은 성(姓)을 가지고 왜 그리 집착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차별대우 철폐란 것이 어차피 민간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문제이고 정책 차원에서 조선출신이라는 표시가 안 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불만에 대해 잘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강제 창씨를 계속 밀고 나갔다. (이 때 林, 柳, 南씨 일부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라 하여 새로 창씨를 하지 않았다고 함). 그리고 조선인들을 일본군으로 받아 들여 전쟁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선 사람들만 일본군복을 입은 채로 애매하게 죽은 셈이 되어 버렸고 몇 년 후 일본은 전쟁에서 졌다.
1945년에 전쟁도 끝이 나고 살림살이도 일본(日本) 내부로 축소되었으니, 일거리도 줄어들고 오히려 편해졌다. 일본인(日本人)들도 이제 성씨(姓氏)를 사용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 간다. 100년 동안 의 짧은 역사가 일본인(日本人)들에게 성씨(姓氏)에 대한 관념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성씨(姓氏)에 대한 뚜렷한 자부심(自負心) 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인은 성씨(姓氏)의 종류는 8만여 가지로 무지하게 많지만 성씨(姓氏)별 인구수에 대해서는 아직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양반(兩班)의 자손(子孫)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일본인(日本人)은 "근본도 모르는 쌍놈들"일 뿐이다.
○ 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
첫댓글 글쓴 분(당시)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님께서, 이의가 있으시다면, 즉시 글을 삭제하겠습니다. 다만 조선사 공부와 연구를 하는 공간에서 회원님들게 성씨에 관한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여 게재한 것일 뿐, 상업적인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카페지기 문무 배상
세월이 지나면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1,김 2,이 3,박 4,정 5,최 한국 5대 성씨입니다. 4위랑 5위가 역전이 되었네요.
저는 성씨를 연구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까운 점들이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신분을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서 그 기준으로 성씨를 연구 했다고 합니다. 이는 성씨의 연구 자체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는 연구기준이죠.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의 기준은 몰락했어도 농업으로 끼니를 자급하는 경우는 양반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벼슬을 해야 양반이 아니며, 재산이 많아야 양반이 아니라는 거죠.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 상공업을 하게 되면 양반에서 제외 됩니
예로 봅시다. 영의정의 아들 3명이 3대 후에 큰아들은 몰락해서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을 하고 작은 아들은 죄를 지어서 좌천 되어서 관아에 노비가 되었고, 막네 아들의 자녀들은 먹거 살기 힘들어서 상공업을 했다고 한다면 이들 중 양반은 큰아들입니다. 그렇다고 성씨가 없어집니까? 10대를 흘러서 보면 3재 아들은 영원히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영원히 쌍놈이 되어 있을 것이고 좋게는 양인이 되어 있겠지요. 그러나 큰아들의 후손들은 과거를 봐서 급제를 하게 되어 벼슬을 하게 된다면 이들 3명의 후손들 족보에 영의정이었던 중간시조의 후손이라고 하는 게 잘 못 된 겁니까? 이런 것들이 비일 비제한 경우인데도
@마포대사 속칭 족보를 연구한다는 사람치고 정확한 개념 파악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아직 못 봤네요. 이게 사칭인가요? 있지도 않은 양반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거냐고요? 답답합니다. 저는 제일 답답했던 기억이 어느 저명한 사학하시는 교수님이 조선시대 양반은 5%였다. 그런데 오늘날 다들 양반이다. 라고 비아냥 거리는 분을 보았습니다. 참 한심해 보이더군요.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5%였을 겁니다. 그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아치로 내려옵니다. 그건 생각 못 하는 것 같더군요. 조선 이전에 벼슬아치들의 후손들은 쌍놈의 후손이 되는 겁니까? 지금 신분은 노비일 망정 과거에는 양반이었던 경우가 허다합니다. 조금만 족보 보면 답 나옵니다.
@마포대사 조선시대 특정 시기의 5%의 벼슬아치가 문반 무반 양반의 후손들이 계속 그 비율로 양반을 한다고 하면 새로운 벼슬아치가 또 3-4% 늘어납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죽은 후에 대타가 필요하죠. 벼슬아치가 대대로 물려 받는 경우는 조선 중엽에 사라졌습니다. 그 후로는 과거를 통해서 올라옵니다. 그럼 또 비율이 늘어나죠? 이 비율이 늘어나는 것을 왜 생각 못하고 그리 멍청한 소리나 하는지 모르겠어요. 벼슬아치가 봉작받은 곳으로 낙향하면 대대로 향반이 됩니다. 역모 한번 뒤집어 쓰면 졸지에 노비가 되죠. 그럼 과거에 조상이 벼슬한 게 사라지나요?
@마포대사 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대륙조선 같은 개념으로 볼 때 조선 양반들이 반도로 넘어와 한국이 되었다면 지금처럼 양반 성씨가 많은게 오히려 말이 됩니다
@Chosen People 맞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야 이주했다는 증거가 되지 조선 후기에 다 개명했다고 하면 이곳에서 계속 조선이 있었다라는 반증이 되어 버리는 거죠. 제가 20년 전에 신라후손들이 지금쯤 어느정도 규모가 되나 궁금하여 족보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황당한 결론이 나와버리더군요. 제일 많은 것은 당근 김씨와 가장 작은 어쩌면 없어진 경주설씨 엄청난 차이를 보이더군요. 이 경주 설씨는 위그르 계열의 설씨도 포함이 되어 있어서 순수 경주 설씨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이주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합니까? 경주설씨들만 다 죽였다고 쳐도 그렇죠. 역사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 이런 씨족상의 비정상적인 비율이 가능한 것이죠.
@마포대사 당시 20년 전만 해도 삼국은 대륙에 있었다라는 식의 사서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그때 더 공부를 해서 고려, 조선시대 때 성씨 규모를 알아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을 게재한 목적도 바로 위와 같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었죠. 똑같은 성씨를 가지고도 대륙조선과 반도조선일 경우를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위의 논문저자께서 말씀하신 내용중에서도 상당부분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대륙조선이었으나? 반도조선이냐? 하는 것의 차이에서 오는 오류라고 봅니다. 제가 지금 기억하기로 50년-60년의 농촌풍경을 보면, 많은 당시의 사람들이 "성씨"를 주변의 도움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분들은 바로 고향 친구들의 아버지들이었습니다. 다만 쉬쉬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인정에 끌려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 농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볼 때, 당시 반도 전체를 생각한다면 상당수의 국민들이 성씨를 만들고, 본관을 취득했다고 보면 됩니다. 성씨만 있어 가지고는 행세를 할 수 없가든요. 본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족보에 기재가 되어야 어디가서 말 빨이 서게끔 되어있었거든요. 지금이야 누가 이것 가지고 왈가불가할 것은 없을 테지만 당시만 해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씨를 대륙조선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많은 부분이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특히 반도에만 있다고 하던 성씨들이 이미 대륙에는 상당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 이게 바로 대륙조선과 반도조선의 차이가 아닐까합니다.
저희 종친회에 1920년대 제작한 족보가 있습니다...이정도면 대한민국에서 꽤 오래된 것이라 하더군요..
거기엔 생전 듣도보지못한 동네 이름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