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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비밀 엿보기
고린도전서 2:1-1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주현 후 다섯째 주일이다. 어제는 입춘이었다. 오늘은 대보름이다. 어제 종일 라디오에서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반복해 호들갑을 떠는지, 어느새 봄이 온 줄 알았다.
여전히 겨울은 계속된다. 입춘은 24절기에서 맨 먼저 온다. 아직 봄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머지않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는 하늘 현상의 사인이다. 추운 겨울을 호되게 보낸 사람일수록 일찍 마음으로 봄을 맞고 있다.
어제 오곡밥을 드셨는가? 쌀, 보리, 콩, 팥, 조 등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밥을 짓는다. 요즘은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다. 아홉 가지 나물은 구경하기도 힘들 것이다. 풍속에 따르면 오곡밥을 먹되 세 사람 이상 타성바지 집에서 골고루 얻어먹으면 일 년 운이 좋다고 하였다. 마을 인정이 그만큼 살아 있었다.
실제 봄은 3월 초 경칩 무렵부터 실감할 수 있다. 봄은 가장 생기있는 절기이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는 ‘성령의 봄바람’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의 봄바람 불어오니 믿음의 새싹이 움터오고
성령의 단비로 흡족하니 메마른 영혼을 적셔주네...
성령의 지혜를 받은 자는 이웃과 한 형제 되었도다”(찬송가 193장 1-2절 중)
그런 생기있고 너그러운 새봄을 준비하길 바란다.
1)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전하는 말씀이다. 바울은 구원의 핵심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자신은 이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만큼 십자가의 진리가 전부라는 말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신비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인지 가르친다. 사실 십자가는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그것은 유대인에게 거리낌이고, 이방인이 보기에도 미련한 것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서로 갈라져 다툼이 많았다. 바울은 그런 교회 안에서 분파에 대해 쓴소리를 한다. 한마디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부추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자이다 라고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베드로파니, 바울파니,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니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세워졌고,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곤경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가오신다. 이 소식은 십자가를 깨달은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한다. 그 깊이와 능력에 대해 찬양한다.
본문은 이러한 십자가의 신비를 전하는 바울의 메시지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였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엿보려면 사람의 지혜가 아닌,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더 심오한 지식을 요구했다. 바울은 율법학자로 훈련된 사람이어서 말과 지혜 등 당시 수사학적 방법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도자 바울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는 참된 지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육신의 생각이나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혜와 세상의 권력이 지닌 지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사랑이 담겨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람의 지혜과 학문을 앞세워 참된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영적 지혜로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주님이시다. 십자가의 신비가 구원의 핵심이었다.
박희영 권사가 색동 까페에 쓴 행복 풀이를 흥미롭게 읽었다. ‘다행 행(幸)자’를 푸는 대목이 흥미롭다. 갑골문에 나오는 ‘다행 행’ 자에는 그 모양이 양손을 묶는 수갑과 벽에 고정하는 쇠사슬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쇠사슬과 수갑을 그린 글자가 ‘다행’이나 ‘행복’을 뜻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죄를 지은 사람을 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과 모습을 묵상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묶여 죄를 대속하는 모습이 겹쳐 보이고 그건 우리에게 행복이라고 느껴지는 건 내 상상력이 지나친 건가?” 생소한 해석이지만, 일견(一見) 십자가를 이해하는 비밀을 엿보게 한다.
십자가를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 비밀을 엿보는 일과 같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지혜나 심지어 왕들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비밀한 속을 엿보려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셔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세상의 통치자나,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2)
그럼에도 고린도인들은 더 심오한 종교적 지식(영지)을 요구하였다. 당시 고린도 항구는 국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유례없이 타락한 도시이지만, 또한 세계의 종교 역시 유입되고, 또 쓸려 갔다. 지식과 정보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귀가 커졌을 것이다. 온갖 새로움으로 가득한 만국 종교박람회 한 복판에서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어쩌면 너무 미련한 일과 같았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했다고 한다. 이전에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교회에서 겪은 박해 때문에 두려움이 커졌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바울은 자신의 전도가 인간적인 지혜가 아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 사람의 지혜가 행여 걸림돌이 될까 염려하였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
바로 영적 지혜이고, 성령의 감동을 의미한다. 바울은 인간의 지혜 중 가장 뛰어난 통치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만약 그랬다면 빌라도든, 헤롯이든, 가야바든 그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누군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겠는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그러므로 바울의 결론은 한 가지다. 하나님의 계시는 단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고전 2:13)할 줄 알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지혜를 말하면서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나눈다. 하나님의 일에 어리석은 육에 속한 사람과 그 일을 분별하는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한다. 십자가 사건은 너무 미련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령한 자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이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신앙에는 인간의 지식으로 논의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 신앙의 세계에는 십자가를 정점으로 하여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 있고 변화가 있고 치유가 있고 기도의 응답이 있고 체험이 있다. 이 신령한 세계의 신비를 무시하고는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와 자신의 미래와 희망을 말하면서 자주 형식(하드웨어)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 안에 내용(소프트 웨어) 곧 성령의 은혜가 없다면 결국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겉모습은 반듯하고, 질서있으나 그 안에 성령의 감동과 은혜가 없다면 내 삶은 빛좋은 개살구와 다름없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가득하였다. 믿는 자들은 세례와 더불어 성령을 받았다. 성령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새 세상에 참여하고 있다는 표이며 보증이었다.
그리고 성령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이를 통해 교회가 자라고 든든하게 하신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이 활동하신 결과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믿음은 우리가 이 성령에 의하여 사는 일이다. 진정한 용기도 성령으로 가능하다. 유명한 베드로가 행한 첫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이 바로 기독론 케리그마의 핵심이다.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자기들이 숨어 있던 장소에서 일어날 용기와 확신이 생겨났다.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그들의 체험은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체험(렘 20:9)과도 같았다. 나만의 의지로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우리가 내 의지로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이전의 제자들처럼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이끄심을 받을 때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그러기에 하나님의 비밀을 엿보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 사랑, 그 은혜, 그 깊이를 헤아릴 참된 지혜이다. 무엇보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성령의 사람에게 특징이 있다. 먼저 사람이 변해 새사람이 된다. 건강해진다. 몸, 마음, 정신이 두루 맑아진다. 균형된 시야,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사는 것이, 하는 일이 즐겁다. 쾌락을 쫓지 않아도 사는 맛이 난다. 헌신이 즐겁다. 꿈을 지닌 사람, 비전을 지닌 사람이 된다. 희망, 조화, 화평한 사람의 모습이다.
3)
지난 주 금요일에 향린교회 건축 현장에 다녀왔다. 명동에 있던 향린교회는 재개발로 광화문으로 이사하면서 5층 빌딩을 짓는 공사 중이다. 담임 목사에게 연락이 와서 예배실 십자가 만드는 일에 의견을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내가 십자가와 관련된 일에 불려 다닌다. 모모한 전문가 대접을 받는다. 대개 겸양을 떨지만, 어떤 자리에서는 나도 그런 척을 한다. 십자가는 누구나 다 아는데, 잘 모른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 대속의 은총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건축하면서 십자가를 만들 때 늘 흔들린다. 장식적 요구가 많고, 또 다른 시설물이나, 비용 문제로 우선순위에서 밀리기도 한다. 이번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음향, 조명, 액정 화면 등의 문제 때문에 애초의 컨셉이 흔들리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나는 가장 향린교회다운 십자가를 제안하였다. 단순하면서도 주님의 고난 이야기가 담겨 있어야 한다.
서양의 기자가 티베트의 한 현인에게 물었다. 바깥 세계는 행복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불행이 많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러자 그 현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 버려 당신들은 기도하고 명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당신들이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 당신들로부터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는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혼의 텃밭이 있다. 영혼의 텃밭은 가꾸지 않으면 황무지가 되어 퇴락하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서 그러기도 하지만 사회 환경이 영혼의 텃밭을 폐허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경건 생활을 위한 노력들, 이를테면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찬송하고, 선한 마음을 품고,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영적 성장과 부요함을 위한 노력들은 영혼의 텃밭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서다.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능력과 내부에서 준비된 갈망이 결합 되는 순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인 십자가를 참되게 이해하려면 인간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성령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흔히 하나님과 관계를 바다를 항해하는 배로 비유한다. 배는 ‘돛’과 ‘노’(櫓)로 움직인다. 돛이 바람을 잘 타면 ‘순풍에 돛 단 듯’ 인생이 순조롭고 행복하다. 그러나 바람을 등진다면 그 배는 아무리 쉴 새 없이 노를 진다고 한들 그 수고가 고달프다.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배의 ‘돛’이라면, 인간의 수고는 ‘노’라고 하였다. 은혜의 바람을 타되, 노 젖기 역시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 진실한 삶 속에서 하나님은 내 인생의 바다를 지켜주시고, 내 작은 노를 붙들어 주신다.
곧 새봄이 온다. 찬송가의 내용처럼 성령의 봄바람으로 내 삶이 화창해지기를 바란다. 그런 새봄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